공적연구논문: 박찬목 목사의 생애와 총회 사역

발제자: 김남식(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

김순정 | 기사입력 2021/05/08 [09:39]

공적연구논문: 박찬목 목사의 생애와 총회 사역

발제자: 김남식(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

김순정 | 입력 : 2021/05/08 [09:39]

 

 

▲박찬목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와 제105회 총회기념사업특별위원회(총회 훈장 상훈위원회), 총회역사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교단 발전과 위상을 세운 지도자들에 대한 공적연구발표 세미나가 2021.4.16.()에 새에덴교회당에서 열렸다. 공적연구발표 세미나에서 발제한 논문들을 요약하여 소개해 본다.

  

서론

 

박찬목은 1915114일 황해도 안악군 안악읍에서 출생하였다일제강점기에 안악군은 신앙운동과 민족운동의 산실이었다. 신앙적 측면에서는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신앙운동과 민족운동이 혼합된 사건으로는 안악사건과 105인 사건이다.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안중근의 사촌이 되는 안명근 의사가 자기의 고향인 황해도 안악 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안악, 해주의 부호들에게 돈을 염출해 내는 일을 진행하다가 중도에 발각된 사건을 안악사건 또는 안명근 사건이라고 한다. 안악사건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 사건이 105인 사건에 배경이 된다는 사실이다.

 

19083월에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슨 암살 사건과 19091026일에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피격사건, 그리고 190912월에 이재영 의사에 의한 이완용 피격사건, 이렇게 연달아 세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모두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한 이들은 모두 서북인들이었다. 이러한 연유에서 일제는 서북지방과 기독교인들이 앞으로 조선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가장 거침돌이 될 세력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일제는 어떻게 하든지 이들을 한 번에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마침 19119월 초에 강도사건에 연루되었던 이재윤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허위자백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날조되고 조작된 105인 사건이 터지게 된 것이다.

 

. 박찬목의 생애

 

박찬목은 1915114일 황해도 안악군 안악읍에서 출생하여 197928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박찬목은 1932년 안악읍에 있는 안신학교를 졸업한다. 젊은 나이에 교회 영수로 임명되어 시골교회를 돌아보다가 그는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1941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한다. 이 평양신학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1938년에 폐교하자 목회자 양성을 위해 새로 세워진 학교인데 보통 후평양신학교라고 불리운다. 당시 서울에서는 김재준을 중심으로 조선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여기에 대항하여 19399월의 제28회 총회에서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설립을 결정한다. 19402월에 채필근 목사는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조선총독부의 정식 허가를 얻어 신학교를 시작하고 당시의 교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래서 후 평양신학교를 일명 채필근 신학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박찬목은 19416월에 안악군 대원면 대금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여 38년의 목회사역의 첫발을 딛게 된다.

  

박찬목의 이력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일제 강점말기와 공산치하에서 두 차례 구금된 일이다. 19419, 그는 황해도 사리원 경찰서에 구금된다. 그가 목회를 시작한지 3개월만이다. 일본에 대한 비판적 내용의 설교가 원인이었다. 박찬목은 1945, 9월 평양신학교 본과를 졸업한다. 총신의 전체 기수로는 40회가 되고 후평신으로는 제6회인데 모두 22명이 졸업하였다. 194511월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안악군 대금교회 목사로 시무하게 된다. 그는 19472월에 해주보안서에 구금되어 모진 어려움을 겪는다. 월남한 그는 전남 광주로 간다. 19479월 전남 광산군 송정읍교회 목사로 시무하게 된다. 이곳에서 19499월까지 사역하다가 19491030일 광주중앙교회로 목회지를 옮긴다. 당시 광주중앙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의 침투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박찬목은 이것을 수습하는 중요한 사명을 감당해야만 했다. 박찬목은 19559월 서울 염광교회로 옮기고, 19595월에 서울 혜성교회로 옮겨 19792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헌신한다.

 

. 박찬목의 사역

 

박찬목은 1941년부터 1979년까지 38년간 목회자로 헌신하였다. 박찬목은 황해도 안악에서 교회 영수로 교회를 이끌다가 1941년 평양신학교 입학과 함께 안악군 대원면 대금교회 전도사로 목회사역을 시작하였다. 이 교회에서 194511월에 목사가 되었고, 1947년 월남할 때까지 시무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일본과 북한 통치자에게서 구금되어 고초를 겪은 일이 있었다박찬목은 1947년 여름, 고향을 떠나 월남한다. 19479월 전남 광산군 송정읍에 소재한 송정읍교회 목사로 부임한다. 여기에서 그의 제2기 목회사역이 시작된다. 박찬목은 1953년에 전남노회장으로 피선되었고, 같은 해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8회 총회 회록 서기가 되는 등 교단 정치에 깊이 참여하게 된다.

 

광주에서 사역하던 박찬목은 19539월에 서울로 목회지를 옮긴다. 보다 효율적인 보수신앙운동을 위해 박찬목은 서울로 이임하고 고흥읍교회에서 시무하던 정규오 목사가 광주중앙교회에 부임하여 호남지역의 보수 신앙 운동을 이끌기로 하였다. 6.25 한국전쟁의 잔해가 걷히기도 전에 한국장로교회는 신학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는 서울의 염광교회(오늘의 신반포교회) 2대 목사로 19559월에 부임한다. 염광교회에서 195859일에 위임받고 사역하다가 1959413일에 혜성교회 제4대 목사로 부임한다

  

박찬목은 한 평생 보수신앙수호자로서 헌신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전도사 시절의 구금이나 공산치하에서의 구금에서 나타나듯이 민족주의적 색채보다 신앙적 원칙 파수를 우선하였다. 그는 월남하여 목회자로 헌신하면서 보수신앙운동을 전개하였다. 1959WCC 문제로 통합 측이 이탈할 즈음에 총회 서기 등의 직책을 맡아 교단을 지키고 보수신앙을 파수하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 이러한 일에 동지적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는데 서울의 이환수, 박찬목, 부산의 노진현, 광주의 정규오 등이 정치적 또는 사상적 동지였고, 그 뒤에는 박형룡 박사가 신학적 지도를 하였다1953년에 전남노회장이 되었고 그해 9월의 제38회 총회에서 회록서기로 피선되었다. 그 후 1966년 제51회 총회장이 되기까지 교정의 핵심에 있었다. 그는 총회 서기와 회록서기를 여러 해 반복하였다.

 

. 박찬목의 공헌

 

박찬목의 공헌 중 중요한 것은 바른 신앙의 파수이다. 일제하나 공산 치하에서 바른 신앙을 파수하다가 구금되는 고난을 겪기도 하였고, 광주에서의 목회중 자유주의 신학의 침투를 막기 위해 동지들과 힘을 규합하여 WCC 반대운동을 전개할 것이 이러한 차원이다. 이것은 보수 신앙 운동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목회 현장에서 구현되는 신앙의 표현이었다박찬목은 국내외에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위해 헌신하였다. 1966년에 대한경목전국연합회 자문위원이 되었고, 1970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모인 한일복음주의교회지도자협의회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1971년에는 총회 선교부장을, 1975년에는 이기풍 목사 선교 7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으로 봉사하였다.

 

혜성교회 65년사에 수록된 박찬목 목사 성역 38이란 기록에서 박찬목을 혼란한 한 시대에 복음 진리에 순()한 목회라고 평가하였다. 또 그를 가리켜 양을 알고 양을 위해 헌신한 목자라고 했다. 박찬목은 목회지에서 성전을 건축하거나 증축하는 역사를 이루었다. 광주중앙교회에서의 증축, 서울 염광교회, 혜성교회에서의 신축 사역이다. 박찬목은 목회사역에서 여러 가지 직책을 감당하였는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명예를 누렸다. 그는 교계의 존경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현세에서의 명예와 상급을 받은 목회자였다. 박찬목 목사는 광주중앙교회에 재임하는 중에 1953년 전남노회 노회장을 역임하고 광주 숭일중고등학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박 목사는 1960년 합동총회(서울 승동)의 서기, 1966년 제51회 총회(광주 중앙)의 회장, 1972년 제 100회 경기노회(서울 승동)의 회장을 역임하셨다. 1969년 총회신학교 이사, 1975년 한성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야에서 헌신하여 교계의 존경을 받았다.

 

결론

 

박찬목 목사가 전심전력을 다하여 목회를 하고 진리 수호와 총회 정치에 헌신하던 중 1977114일에 심근경색(筋梗塞)으로 운신이 어렵게 되었다.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의 만년 성역 활동이 크게 불편하였다. 이때 성도들의 눈물 어린 간절한 철야 기도와 경향 각 지의 동역자들의 간곡한 기도와 가족의 정성스러운 간호에 힘입어 1978년 초에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목회에 헌신하였다. 박찬목 목사는 27() 삼일 기도회에서 설교를 마치고 온 성도들의 평안함과 특히 병환 중에 있는 성도들과 동역 교역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리고 대학 입시를 치르는 학생들과 어린 학생들의 앞날을 위하여 간절히 축원하였다. 삼일기도회는 통상 주기도문으로 마쳤으나 이 밤 기도회에서는 이례적으로 간절히 축도를 하셨다. 삼일 기도회를 마치고 자정을 넘어 잠에 드신 후 이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박찬목 목사는 정통신앙을 파수하며 총회를 지키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래서 박형룡 박사는 당시 교계 지도자들이 박찬목 목사를 보수교회 국방장관이라고 하는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칭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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