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연구논문: 이대영(李⼤榮) 목사의 생애와 복음 사역

발제자: 장영학(한국교회 역사자료박물관 관장)

김순정 | 기사입력 2021/05/04 [12:28]

공적연구논문: 이대영(李⼤榮) 목사의 생애와 복음 사역

발제자: 장영학(한국교회 역사자료박물관 관장)

김순정 | 입력 : 2021/05/04 [12:28]

  

(리폼드뉴스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와 제105회 총회기념사업특별위원회(총회 훈장 상훈위원회), 총회역사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교단 발전과 위상을 세운 지도자들에 대한 공적연구발표 세미나가 2021.4.16.()에 새에덴교회당에서 열렸다. 공적연구발표 세미나에서 발제한 논문들을 요약하여 소개해 본다.

 

들어가는 말

 

이대영 목사는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로서 중국 산동성 선교사로 파송되어 26년 동안 선교사로서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수많은 교회를 세웠다. 가족을 중국 땅에 두고 1948년 일시 귀국하였다가 중국의 사정으로 돌아갈 길이 막히자 선교사로서의 사역을 중단하고 목회자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1952년 승동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았으며 3년 후 위임목사가 되었다. 이듬해 1956년 제41회 총회장으로 당선되어 장로교 총회를 섬기는 한국교회의 주요 인물로 부각 되었다.

 

1. 성장과 신앙

 

이대영은 1887423일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이유성(李裕成)과 김도혜(道徯)3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대영은 1907년 믿기 시작할 전후에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으며 이듬해인 1908년 장남 이규원 출생하였다.

 

하지만 부모님의 박해로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믿음 생활한 지 3년 만인 1910년에 가족을 데리고 멀리 연일군 흥해면(포항)으로 가서 흥해교회를 출석한다. 이때부터 이대영은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선교사로부터 신앙훈련과 지도를 받게 되고 경상 노회 전도인으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고향인 예천 지역을 두 달 동안 순회하며 전도하였다.

 

2. 신학 수업과 교회 사역

 

이대영의 교회 사역은 흥해 교회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친과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천 금당실(금곡)에서 3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였고 연일군 흥해면으로 이사 가서 본격적으로 목회의 길을 가기 위하여 선교사로부터 많은 훈련과 노회가 실시하는 성경공부를 열심히 참석하여 신학 훈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신학 입학을 허락받은 1917년 이대영은 처음으로 시무교역자로 부임한 것은 경주군 외동면 말방리에 있는 장산(⾧⼭)교회이다. 1917년 이대영은 드디어 평양에 소재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이후 평양신학교로 호칭)에 입학하였다. 평양신학교는 5년제 수업을 하고 있었다.

 

원래 신학교 학제가 1년에 3개월 한 학기 수업하고 9개월은 현장에서 사역하는 55학기제였으나 1919년부터 학제가 36학기제로 변경되었기에 이대영은 19201년 동안 4학기와 5학기 공부를 한 후 그해 12204년 만에 졸업하였다.

 

이대영은 신학 공부 4년 동안 한 학기도 중단없이 5학기를 마치고 졸업하였다. 이대영은 신학을 공부하는 중에 1917년 장산교회를 사임하였다가 1918년에 재부임 하였으며 1920년에는 남성정교회(대구제일교회) 조사로 부임하였다. 1920122일 신학교 교정에서 열린 제14회 졸업식에서 17명의 동료들과 함께 졸업하였다.

 

1921112일 저녁 7시부터 14일까지 대구 동산성경학원에서 개회된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서 한국장로교회의 인물로서 첫발을 내딛기 시작하였다. 이대영은 목사 안수를 받고 안동읍 교회의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믿음을 가진 지 14년 만이며 고향을 떠난 지 11년 만에 고향 인근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1921615일 열린 제10회 경북노회에서 정식 노회원으로 참석하여 노회원 선교사 5명과 한국인 목사 17명 장로 총대 53명과 함께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대영은 안동교회에서 1921년 부임하여 19224월까지 사역을 마무리하였다.

 

3. 산동성 선교 사역

 

이대영 목사는 19211월 경북노회에서 안수받고 안동교회 담임목사로 청빙 허락을 받은 후 2월에 부임하였으며 6월에 열린 경북노회 제10(1921615~18)에서 총회 총대로 선출되었다.

 

1922118-19일까지 안동 법상동 예배당에서 제1회 경안노회가 모여서 이대영 목사를 서기로 선출하여 노회 행정사무를 보게 하였고 안동읍교회는 후임 목사를 청빙하였는데 경북노회 내의 정재순목사를 청빙하면서 이대영목사는 그해 5월까지 시무하기로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이대영목사는 선교사로 파송 임명을 받고 잠시 가족을 두고 혼자서 고국을 떠나 1922613일 중국 산동성 래양(萊陽)에 도착하여 선교지 답사 및 업무를 시작하였다.

 

총회는 이대영 선교사를 1922년 다시 파송해 사역하였으며 이듬해부터 심각한 재정 압박과 선교지의 어려움이 겹쳐 선교사들을 소환하자는 안이 총회에 상정되기도 하였다. 1928114일에 산동성 즉묵예배당에서 열린 노회에서 이대영을 노회장 선출되었다.

 

이는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6년간 열심히 활동하였기에 중국기독교회 교동 노회의 인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1941년 제30회 총회에서 15년 근속자로 표창도 받으면서 총회의 지원과 지도를 받아야 했던 이대영 목사는 불가피하게 친일 총회의 노선을 따르게 되었다.

 

19487월 이대영 선교사는 분단된 조국 남한을 방문하여 10개월간 각 교회를 순회하며 선교 보고 부흥회를 인도하였으며 1949419일부터 새문안교회에서 회집한 제35회 남부총회에 참석하였으며 다음날부터 새벽기도회를 비롯한 공식예배를 인도하였다. 이대영 목사는 총회의 허락으로 총회 소속 목사가 되어 국내 목회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한국 장로교회의 모교회라고 할 수 있는 승동교회 담임목사로 19545월에 부임하였다.

 

4. 총회장 이대영 목사와 그의 마지막 사역

 

이대영 목사는 선교사로서의 33년동안 사역하고서 고령인 67세의 나이에 귀국하여 승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68세에 위임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해인 1955422~26일에 열린 제40회 총회에 경기노회 총대로 참석하여 활동하였으며 1956920~25일까지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제41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일 년 동안 총회의 모든 교회들을 돌아보는 일을 하였다. 이때 이대영 목사는 69세로 승동교회 부임한 지 3년에 총회장인 된 것이다. 그러나 이대영 목사의 승동교회 목회는 1959년 교단 분열의 여파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교단 가입을 놓고 교인들과의 분쟁이 4년 동안 지루하게 진행되는 동안 70세가 지난 이대영 목사는 많이 노쇠하였고 엄청난 마음의 상처를 가졌지만 굳건히 교회를 시무하였기에 승동교회를 현재의 위치에서 다수의 성도들과 함께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963년 말 이대영 목사의 갑작스러운 은퇴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후 이를 번복하는 문제로 의견 충돌이 일어나서 19641년 동안 교회를 떠났다가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총회 분열과 교회의 분쟁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고 안정을 찾은 이대영 목사는 196811281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에 입성하셨다.

  

맺는말

 

이대영 목사의 생애와 사역은 그가 20세에 부르심을 받고 60년 동안 믿음의 여정을 변함없이 걸어갔으며 처음에 부모님과 집안의 박해를 무릅쓰고 멀리 타향인 흥해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목회자의 꿈을 꾸었고 선교사를 돕는 유급전도인의 활동을 1915년부터 시작하여 53년 동안 성역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중에 33년은 중국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 일대에서 복음을 전하며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돌보며 부흥 운동을 주도하였다. 한국에서의 20년 목회 생활은 대구제일교회 조사와 안동교회 담임목사 그리고 승동교회 담임목사로서 사역을 감당하면서 총회를 열심히 섬겼다. 19569월 부총회장으로 이하지 않고 한경직 목사에 이어 제41회 총회장으로 당선되어 총회를 안정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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