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연구논문: 해원 정규오 목사의 공적 연구

발제자: 김호욱 교수

김순정 | 기사입력 2021/04/22 [12:12]

공적연구논문: 해원 정규오 목사의 공적 연구

발제자: 김호욱 교수

김순정 | 입력 : 2021/04/22 [12:12]

  

▲ 정규오 목사와 소재열 목사와 대담(2003. 10. 25)     ©리폼드뉴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와 제105회 총회기념사업특별위원회(총회 훈장 상훈위원회), 총회역사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교단 발전과 위상을 세운 지도자들에 대한 공적연구발표 세미나가 2021.4.16.()에 새에덴교회당에서 열렸다. 공적연구발표 세미나에서 발제한 논문들을 요약하여 소개해 본다.

  

. 서론

 

해원 정규오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를 위해 여러 공적을 남겼다. 해원은 언제나 공공적 차원, 대승적 차원에서 총회를 섬긴 인물이다. 그가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명분 있는 뚜렷한 기준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개혁주의 신학의 수호였다. 해원은 개혁주의 신학을 사수하기 위하여 신학적인 투쟁을 했고, 교회정치와 행정의 방향을 선정하였고, 교육 분야에 헌신했으며, 바른 신앙을 한국사회에 정착시키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그래서 해원의 공적을 살피려면 크게 네 분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신학분야; 둘째는 교회정치 분야; 셋째는 교회행정 분야; 넷째는 교육 분야이다. 이 네 분야에서 해원이 남긴 공적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 해원의 신학과 신앙 분야 공적

 

1. 해원의 51인 신앙동지회 결성과 자유주의신학 퇴치 운동

 

해원은 19459월 조선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조선신학교는 평양신학교가 일제의 신사참배에 항거하면서 자진 폐교하자 채필근의 제안으로 설립되었고, 자유주의 신학자 김재준이 교수로 임용되어 있었다. 해원은 김재준이 성경유오설을 가르치자 51인이 동참하는 신앙동지회(51인 신앙동지회)를 결성하여 자유신학과 투쟁하였다.

 

2.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반대와 NAE 결성

 

해원은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하여 교단 분열을 각오하면서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신안동지회를 중심으로 19537월 한국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를 결성하여 박형룡과 함께 WCC에 대항하였다. 신앙동지회가 한국 NAE를 조직한 것은 6.25 동란 때인 19518월 미국 NAE가 구제위원회를 통해 구호물자를 보내오면서 이들과 접촉하였기 때문이다. 신앙동지회는 NAE의 신앙이 자신들과 동일함이 확인되자 한국 NAE를 조직한 것이다. 이렇게 한국 NAE가 해원 등 신앙동지회 및 장로회를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나 미국 NAE가 본래의 신앙에서 이탈하자 한국장로회는 NAE와의 관계를 금지시켰다. 개혁주의 정통보수신학을 가장 성경적인 신학으로 믿으며, 사랑하며 수호하기를 원한다며, 이 일을 위한 해원의 헌신적 공로를 기억해야 한다.

 

3. 단군신전 건립 반대 운동 주동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66131일 서울 남산공원에 정부 재원 1억 원을 투입하여 단군동상을 건립한다는 보고가 중앙방송국과 주요 일간지에 일제히 보도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합동총회 총회장이었던 해원은 매우 중대한 사안으로 인식하고 순교적 정신과 각오로 합동총회뿐만 아니라 타교단과 함께 전국 교계를 총동원하여 저지하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 해원은 1966221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충현교회당에서 개최된 3회 전국 목사 장로 기도회개회예배를 마친 후 간 노회장과 증경총회장단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단군상 건립 반대운동을 펼치기로 가결했다. 그리고 목사 장로 기도회 전체회의 이 안을 상정하여 통과시킨 후 실천위원 9인을 선출하였다. 실천위회는 단군상 건립 반대 건의서를 작성하여 정부에 전달했다. 이처럼 해원은 교계를 연합하여 반대운동을 전개하여 단군신전 건립을 좌절시켰다.

 

4. 만원권 불상화폐 반대 운동 적극 참여

 

해원과 합동총회가 주축이 되어 남산공원 단군신전 건립 계획이 무산된 지 6년 후 정부는 만원권 지폐에 석굴암의 석가여래 불상과 불국사찰을 삽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19723월 동아일보 등 주요 일간지에 보도되었다. 이에 전국 개신교계는 일제히 일어나 반대운동에 돌입하여 결국 저지시켰다. 이 일에 해원은 전국 차원의 반대운동 추진의 핵심 멤버는 아니었지만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러면서 광주권의 불상화폐 발행 반대를 위한 광주시내 교회연합 신도대회위원장직을 맡아 197261일부터 석가여래좌상이 삽입 된 만원권 화폐를 발행하려는 정부의 시도를 중단시키는 운동을 맨 앞에서 이끌었다.

 

. 해원의 교회 정치 행정 분야 공적

 

1. 군목제도 추진 주역

 

지금까지 실시되고 있는 군목제도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결의하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함으로서 성사된 제도이다. 총회 지도자들은 19506.25동란 발발로 부산으로 피난하여 부산중앙교회와 초량교회당에 모여 기도하던 중 군목제도를 실시하기로 합의하고 위원장 최연호, 서기 정규오로 구성된 추진위원을 조직하였다. 이에 위원장 최연호와 서기 정규오는 전쟁 중이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에게 군목제도 실시에 대한 건의서를 제출하여 성사되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군목제도 정착에 해원의 공헌이 크다고 보아야 한다.

 

2. 십일조 상납제도 도입하여 재정난 극복

 

해원은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하면서 대부분의 교단 재산이 통합 측에 속하게 되자 십일조 상납제도를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추진하였다. 합동총회는 교단 분열로 재정적으로 매우 열악하여 선교사들의 선교비 지원 등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에 합동총회는 해원이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던 광주중앙교회 당회의 건의로 전남노회가 결의하여 19659월 제50회 총회(총회장 정규오)에 상정한 십일조 상납제도를 1년 간 연구하여 19669월에 개최된 제51회 총회(총회장 박찬목)에서 채택하였다. 이리하여 해원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십일조 상납제도는 196711일부터 실시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합동총회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더욱 힘차게 복음사역을 펼치게 되었으니 해원의 공로가 크다 하겠다.

 

3. 합동총회와 개혁총회의 재합동 중심 역할

 

해원은 개혁총회가 합동총회로부터 분리하여 나온 26년 후 합동총회와 재합동하는 역사를 이루었다. 이것이 해원의 생전에 한국교회와 세계교계에 귀감이 되는 마지막 공헌이다. 합동총회와 개혁총회가 재합동 할 수 있었던 것은 분열된 지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성경관을 비롯한 두 교단의 신학적 입장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해원이 교단을 분열했다면, 그 이유는 개혁주의 신학을 수호하기 위함이었고, 교단 합동의 선두에 서 있다면, 그 역시 개혁주의 신학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원에게는 지방색, 교권주의, 인간의 감정 등이 교단 분열의 명분이 아니었으며, 교단 합동의 명분도 아니었다.

 

. 해원의 교육 분야 공적

 

1. 장로회신학교 설립에 공헌

 

해원은 조선신학교가 자유주의 신학의 산실로 변하자 해원과 51인 신앙동지회 회원들은 자퇴하여 노량진에 있는 일본인 주택이었던 빈집을 빌려 임시 거처로 삼았다. 그들은 보수신학과 신앙을 파수한다는 긍지와 믿음으로서 날마다 기도와 신학연구에힘쓰던 중 고려신학교 송상석이 만주 봉천에 있는 박형룡을 귀국케 하여 교장으로 추대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51인 신앙동지회는 자신들의 명의로 박 박사에게 보내는 귀국탄원서를 작성하여 송 목사에게 주었고, 박형룡은 1947920일 서울로 귀국하였다. 장로회신학교가 개교하는데 주축이 된 인물들은 학우회장 해원을 중심으로 하는 학우들과 51인 신앙동지회 회원들이었다. 이처럼, 해원은 개혁주의 성경관 수호를 중심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보수하기 위하여 조선신학교의 신학적 좌경화와 투쟁하였고, 신학적으로 좌경화 된 조선신학교를 버리고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는데 자신의 삶을 헌신하였다.

 

2. 광신대학교 설립하여 지역특성에 맞는 인재양성

 

해원은 광주신학교설립의 의의와 그 전망에서 광신대학교를 설립하는 이유 3가지를 밝혔다. 첫째, 이단사설의 횡행; 둘째, 교직자의 자질 향상; 셋째, 지방교회의 발전이다. 이중 이단사설의 횡행에서 해원의 신학교 설립 목적의 핵심이 개혁주의 신학 수호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구역공과책 발간

 

해원은 한국교회에 사용하고 있는 구역공과책의 원조이다. 구역공과 책은 합동총회 호남대회에서 처음 발간하였는데, 그 발원지가 해원이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던 시절의 광주중앙교회였기 때문이다. 구역예배는 이름 그대로 예배형태를 갖추지만 구역별 성경공부 성격이 강하다는 점으로 볼 때, 해원의 개혁주의 신학이 구역예배 공과책 발행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아야 한다.

 

. 결론

 

본 논문은 해원의 생애는 개혁주의 신학을 중심으로 하는 헌신된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 신학자였고, 교회 정치 행정가였으며, 교육가였음을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 과정에서 그가 합동총회와 한국교계와 신학계를 위해 만들었던 공적이 무엇이었는지 그 사례를 사료에 근거하여 정리하였다. 그가 신학교를 설립했다면 개혁주의 신학을 사수하기 위함이었고, 그가 신학적 신앙적 투쟁을 했다면 그것 역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보호하고 유지하고 전파하기 위함이었다. 해원은 자신의 위세와 기득권을 확고히 하고 어떤 명예를 얻기 위해 정치하지 않았다. 그는 경제적 이득이나 사리사욕을 목적으로 신학교를 설립하지 않았다.

 

해원은 해방 후 최초로 설립된 장로회신학교 설립에 공헌하였고, 해방 후 최초로 자유주의 신학과 투쟁했으며, 한국에 최초로 군목제도를 실시하는 일에 공헌하였고, 최초로 십일조 상납제도를 만드는 일을 추진 성사시켰으며, 최초로 구역공과용 책을 만들어 한국교회에 보급하는 등의 공적을 쌓았다. 어떤 일을 최초로 시도하려면 실력과 확신과 리더십과 청렴과 자기 헌신이 필요하다. 해원은 이런 조건을 갖춘 시대의 거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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