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연구논문: 승동교회의 장로회 정통성 계승 고찰

발제자: 소재열 목사(한국교회법연구소장)

김순정 | 기사입력 2021/05/29 [14:38]

공적연구논문: 승동교회의 장로회 정통성 계승 고찰

발제자: 소재열 목사(한국교회법연구소장)

김순정 | 입력 : 2021/05/29 [14:38]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와 제105회 총회기념사업특별위원회(총회 훈장 상훈위원회), 총회역사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교단 발전과 위상을 세운 지도자들에 대한 공적연구발표 세미나가 2021.4.16.()에 새에덴교회당에서 열렸다. 공적연구발표 세미나에서 발제한 논문들을 요약하여 소개해 본다.

 

1. 서론

 

경성에는 새문안교회에 이어 두 번째로 1893년 승동교회의 전신인 곤당골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로써 승동교회는 금년(2021)으로 128주년이 된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사무엘 포먼 무어(Samuel F. Moore, 1846-1906)의 선교 열정과 당시 인간취급을 받지 못했던 백정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 백정들도 양반과 다를 바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음 안에 하나됨을 실현하며, 승동교회의 초석을 놓았다. 그 해가 바로 1893년이었다. 승동교회는 곤당골에 곤당골교회, 홍문섯골(현 홍문동)에 홍문섯골교회, 구리개교회(동현, 제중원교회)의 정통성을 그대로 유지하며 계승하였다.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이눌서(W.D. Reynolds) 선교사, 목회학을 가르치며,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을 제정할 때 위원장으로 초안을 작성했던 곽안련(Charles A. Clark) 선교사 등이 승동교회 초기 목회를 이끌어 한국에 세워진 교회의 정체성을 굳건히 했다. 특히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신학적인 문제인 W.C.C.의 에큐메니칼 문제로 분열시 장로회 정체성과 정통보수신학을 따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측)에 소속하며, 일명 승동측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본고는 승동교회 역사를 통해 어떻게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역사적 정통성과 신학적 정체성을 지켜왔는지를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또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가 역사적 정통성과 신학적 정체성을 지켜나가기 위한 요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확인해 보고자 한다.

 

2. 무어 선교사와 초기 승동교회 전래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무어 선교사는 그의 아내 로즈 엘리(Rose Ely Moore)와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와 함께 189292132세의 나이로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무어 선교사는 다른 외국인 선교사들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는 한국어를 빨리 익히기 위해 외국인들이 사는 지역을 벗어나 한국인들만 사는 지역에 정착하며 일체의 외국인을 만나지 않고 살았다. 6개월이 지난 후에는 현지인 신자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였으며, 한국어로 기도까지 할 수 있었다. 18936월에 곤당골(현재 소공동 롯데호텔 일대)에 사택을 마련하여 예배를 드리며, 전도하기 시작했다. 또한 소학교를 운영하면서 어린이들에게 전도와 신앙교육을 통해 복음을 전했다. 무어 선교사는 곤당골에서 주일 오전 11시와 오후 2시에 정기예배와 매일 기도회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또한 그는 매일 아침 20-30명의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성경을 가르치며 전도에 힘썼다. 무어 선교사의 목회 철학은 승동교회의 초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895년에는 백정 6명이 교회에 출석했다. 백정인 박성춘 집에서 매일같이 성경을 공부했다. 백정의 수가 계속 늘어나고 이들이 교회 일에 참여하게 되자 양반 교인들은 이를 참을 수 없었다. 양반 교인들은 선교사들이 이 사태를 수습하려는 태도에 실망을 하여 교회를 떠났다. 1898617일에 곤당골교회에 화재가 발생하여 1899년 가을 곤당골교회가 홍문섯골교회로 들어감으로써 두 교회가 합병하여 홍문섯골교회가 되었다. 18954월에 나뉘어진 교회가 서로 재연합하여 중앙교회(Central Church)를 이룩했다. 곤당골에 교인들이 홍문섯골에 있는 홍문섯골교회로 하나가 되었다. 홍문섯골교회는 곤당골교회와 재연합한 이후 전체 세례교인은 89명이었으며, 원입교인은 150명이었다. 이렇게 성장해 가고 있을 때에 무어 선교사의 아내 로즈 엘리가 폐결핵으로 병이 악화되어 190112월 초순경 미국으로 일시 귀향하게 되었다. 선교부는 무어 선교사가 아내의 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귀국하여 공석이 된 때를 이용하여 일부 교인들을 제명하고 홍문섯골교회를 해산시키고 말았다.

 

무어 선교사가 1902920일에 귀국하여 목회현장에 돌아왔다. 그가 돌아와 보니 목회현장인 홍문섯골교회는 해산되었고 교인들은 다 흩어졌다. 무어 선교사는 선교부의 결정에 반기를 들 수가 없었다. 그는 묵묵히 모든 것을 참고 오로지 순회전도를 계속하였다. 무어 선교사(목사)190611월 중순경 신병으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5주 동안 투병하다가 190612224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1907년 부인 로즈 여사는 31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결국 폐결핵으로 1923529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했다.

 

홍문섯골교회가 폐쇄되므로 흩어진 교인들은 선교병원이 제중원(구리개, 동현) 내의 예배처소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구리개 제중원 병원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전하자 제중원 병원에서 예배를 드리던 일부 교인들은 남문밖에 준공된 세브란스병원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떠났다. 이 교인들은 이미 홍문섯골교회 교인들이 구리개 병원으로 오기 이전에 이미 구리개 제중원 병원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던 신자들이었다. 남문밖에 위치하는 세브란스병원 안에서 남문밖교회가 이어졌다. 그러나 대부분 구리개 병원에서 예배드린 옛 홍문섯골교회 교인들은 구리개를 떠나 옮겨간 지역에서 그 동리의 이름을 딴 승동교회로 계속 존속하게 되었다.

 

3. 승동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홍문섯골교회 교인들

 

곤당골에서 시작한 교회가 홍문섯골(현 홍문동)을 거쳐 구리개로, 구리개에서 승동으로 와서 승동교회라는 이름으로 정착하였다. 선교사 공의회는 곤당골교회와 홍문섯골교회와 분리, 그리고 합병 등에 대해 선교사 공의회의 지도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홍문섯골교회가 폐쇄되었다. 승동교회의 자체 역사기록에서는 1904년이 아닌 무어 선교사가 18936월에 곤당골에서 시작한 예배를 승동교회 시발점으로 삼고 있다. 곤당골교회를 승동교회 전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승동교회는 1993100주년 기념행사와 2003년에는 교회 설립 110주년 및 110년사를 출간하였다. 모두 1904년을 설립일로 보지 않고 1893년 무어 선교사의 곤당골에서 복음을 전하는 시점을 승동교회 설립일로 기록하면서 기념하고 있다.

 

4. 승동교회 초기 담임목사와 동사목사

 

무어 선교사가 아내의 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난 190112월 이후에 제2회 선교사 공의회가 1902913일 동현제중원에서 회집되어 이눌서 선교사를 회장으로, 서기에는 서경조 장로가 선임되었다. 폐쇄된 홍문섯골교회 이후 승동교회 이름으로 복구되는 19062월까지 제2회 선교사 공의회 회장인 이눌서 선교사가 시무목사로 사역하게 되었다. 190210월에 연합공의회 경성소위원회에서 이눌서 선교사를 동현교회 임시당회장으로 청빙하였으며, 19039월에 사면을 청원하였으나 보류되어 19062월까지 동사목사와 함께 승동교회를 섬겼다. 이눌서 선교사는 성경번역위원회 책임자였으므로 동사목사로 곽안련, 오월번(Arthur G. Welbon) 선교사가 사역했고, 이후에 서상륜, 이여한이 조사로 활동했다.

 

승동교회의 역사기록에 의하면 곽안련 선교사와 위임동사목사로 191572일 부임한 이여한 목사는 1916920일까지 시무했다. 이어 곽안련 선교사와 동사목사로 1917619일 차상진 목사가 부임하여 19221월까지 사역했다. 192299일 김영구 목사는 목사로 장립을 받아 19241228일 이재형 목사와 위임동사목사로 부임했다. 곽안련 선교사는 19246월까지 시무했고, 이재영 목사는 김영구 목사와 위임동사목사로 사역했다(1924. 12. 28.-1928. 7. 8.). 이재영 목사는 1942523일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박용희 목사부터는 동사목사 제도가 아닌 단일 위임목사로 사역하였다(1928. 8. 19.-1935. 4. 4.). 김익두 목사는 193578일 승동교회 제9대 목사로 부임했다(1935. 7. 8.-1938. 7. 10.) .

 

5. 본류인 장로회 정체성을 유지한 승동교회

 

해방을 전후하여 조선신학교는 남한에 유일한 신학교였다. 그러나 조선신학교와 깊이 관련된 자들은 1951년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로 분열될 때 모두 종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를 떠났다. 그러나 승동교회는 기장측으로 떠나지 않고 여전히 종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소속 교회가 되었다.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임원선거도 하지 못한 채 합동측과 통합측이 분열되었다. 임원선거는 다음과 같은 중대한 사안들이 임원진의 구성에 따라 좌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용공단체로 지목된 W.C.C. 탈퇴 문제, 둘째, 총회신학교장 박형룡 박사가 3천만 환 부정 지출한 사건으로 물러앉은 관계로 제44회 총회를 통해 새로운 교장을 자파 인사로 세우기 위한 문제, 셋째, 미 연합장로회 주한 선교부가 해체되면서 그 권한과 실권이 총회 산하로 들어옴에 따라 협동사업부 신설을 위한 각 지역 조선위원 선출 문제, 넷째, 봄 노회 때 갈라진 경기노회 정기회파와 임시회파가 각기 선출한 총대 선별 문제 등이었다.

 

이런 이유로 1959년 대전중앙교회에서 소집된 제44회 총회 개회 벽두부터 양 진영은 치열한 분쟁으로 임원선거도 하지 못한 가운데 회무를 계속 진행할 수 없었다. 의장(총회장)인 노진현 목사는 더 이상 회무를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증경총회장단의 자문에 따라 회원들의 동의를 받고 1123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총회를 속회하기로 하고 정회했다. 그러나 노진현 총회장이 정회 시 속회일로 예고된 1123일에 새문안교회에서 속회하려고 하였으나 새문안교회가 장소 제공을 거부했다. 그러자 승동교회 당회의 허락으로 승동교회에서 제44회 총회를 속회했다. W.C.C.를 반대하여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속회하였으므로 일명 승동측이라고 한다. 반면 W.C.C.를 지지한 속회 총회를 연동교회에서 모였다고 하여 연동측이라고 한다. 승동측은 19609월에 제45회 본 총회가 서울승동교회 예배당에서 회집하여 논의하여 고신측 총회와는 신학사상과 신앙노선이 동일하니 양측 총회는 합동하자는 의견접근으로 하고 정회한 후 동년 1213일에 서울승동교회에서 제45회 계속총회로 회집하여 총회를 합동했다. 이렇게 하여 합동측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6. 결론

 

승동교회는 설립 이후 128년 동안 오로지 교회 본래의 전통신앙에서 떠나지 않고 오늘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에 소속된 교회로서 역사의 한 중앙에 서서 사명을 감당해 왔다. 승동교회의 역동성은 설립 초기부터 굳건한 터전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승동교회 설립에 기여한 제1대 담임목사인 무어 선교사는 마치 링컨 대통령이 미국의 흑인노예 해방을 선언한 것처럼 당시 그 어느 누구도, 어느 선교사도 혁파할 수 없었던 백정에게 세례를 베풀고 교회 회원으로 받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승동교회는 칼빈의 종교개혁에서 내세웠던 신조(신앙고백)와 교회운영을 위한 교회법이라는 두 기둥을 제시했다. 이렇듯 승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평양장로회신학교 조직신학교 교수였던 남장로회 소속 이눌서 선교사, 교회법과 목회학 교수였던 북장로회 소속 제3대 곽안련 선교사 등이 두 기둥의 초석을 놓았다.

 

1950625 전쟁으로 195114일 수도 수복의 기쁨도 잠시 승동교회 40여 명이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부산 동광교회 은린유치원을 빌려 1948년 남대문교회에서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한 김치선 박사를 모시고 재부산 승동교회로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1953년 휴전이 되자 서울로 돌아오자 부산 승동교회는 폐쇄되었다. 1959년 제44회 총회 분열 이후 역사적인 정통성과 총회를 위한 속회 총회와 고신측과 합동하는 총회가 다 승동교회에 회집됨으로 승동교회는 장로회 정통성을 이어가는 과도기에 커다란 역할을 감당한 교단총회의 한 중앙에 서 있었던 교회였다. 승동교회 김인득 장로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5회 총회(합동)에 장로 부총회장으로 피선되었으며, 201725일 승동교회 한국기독교 역사사적지 1호로 지정(총회 역사위원회)되었다.
 
승동교회 초대 원로목사는 1942523일에 원로목사가 추대되었으며, 1991225일 제2대 박일웅 목사가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15대 박상훈 목사에 이어 제16대 최영대 목사가 2018128일에 부임하여 20191019일에 위임목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933일 소속 경기노회 주관으로 31운동 100주년 기념예배를 승동교회에 드렸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승동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의 한 중앙에 서 있는 교회 중에 하나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승동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가 자랑하는 교회 중에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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