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연구논문: 백남조 장로와 총신의 발전

발제자: 박성규(부전교회 담임목사)

김순정 | 기사입력 2021/05/15 [09:33]

공적연구논문: 백남조 장로와 총신의 발전

발제자: 박성규(부전교회 담임목사)

김순정 | 입력 : 2021/05/15 [09:33]

  

 백남조 장로 © 리폼드뉴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와 제105회 총회기념사업특별위원회(총회 훈장 상훈위원회), 총회역사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교단 발전과 위상을 세운 지도자들에 대한 공적연구발표 세미나가 2021.4.16.()에 새에덴교회당에서 열렸다. 공적연구발표 세미나에서 발제한 논문들을 요약하여 소개해 본다.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는 지나온 100여 년간 우리 교단에 많은 은총을 부어주셨다. 가장 큰 은총은 개혁신학을 지키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단에 주신 또 하나의 은혜는 좋은 믿음의 선진들을 주셨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쳐졌던 그분들의 진정성 있는 헌신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눈물겨운 헌신을 통하여 우리 교단에 커다란 은총을 부어주신 것이다. 그 몇 분 중에 바로 명신홍 박사님, 백남조 장로님 같은 분들이 있다. 백남조 장로의 헌신은 칼빈주의 직업소명관과 청교도적인 나눔의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백남조 장로의 생애를 연구하면서 그의 생애는 칼빈주의적이고 청교도적인 기업활동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효암 백남조 장로의 생애와 헌신에 대해 살펴보고, 오늘 우리의 삶과 총회와 총신을 섬기는 일에 거울을 삼고자 한다.

 

1. 출생, 성장, 그리고 결혼

 

백남조(南朝)1913111일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죽전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백남조에게 도시에서의 신식 교육의 꿈을 심어 준 사람은 외삼촌이었다. 누님 집을 방문한 백남조의 외삼촌은 총명한 어린 조카가 서당 교육만 받는 것이 안타까워 조카를 데리고 보통학교로 가서 교장을 만났다. 그리고 서당 교육의 연한을 감안하여 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백남조는 열 살이 되자 자신의 앞날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도저히 이대로 있을 수는 없으며, 도시에 나가 공부하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드디어 백남조는 부모님 몰래 고향 마을을 떠나 성주읍을 거쳐 대구의 고모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일본 시모노세키를 거쳐 일본 중부 지역 고지대인 나가노현에 도착했다. 거기서 도로 공사 등 토목 도급의 일을 돕다가 숙소를 빠져나와 동경으로 갔다.

 

17세에 직업소개소의 소개로 어느 식당에 요리서 보조로 지냈다. 그는 식당을 그만두고 운전 학원에 들어가 운전 기술을 배웠다. 그 학원에서는 운전뿐만 아니라 정비 기술도 동시에 가르쳤다. 그는 점차 자동차 정비업에 매력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기초적인 기술을 터득한 후 자동차 수리 공장에 조수로 취직했다. 10세에 가출한 소년이 12년 만에 의젓한 청년이 되어 고향 곰짓골로 돌아왔다. 결혼 후 백남조는 서울에 있는 자동차 수리 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이내 고심에 잠겼다. 수고는 같은데 월급이 일본보다 못하니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고향에 들러 일본에 갈 계획을 세웠다. 19376월 서울에서 내려온 백남조는 고향에 들러 머물다가 일본으로 가기 위해 부산으로 갔다. 그는 사돈 어른의 설득으로 일본을 포기하고 조선금속회사에 취직하기로 했다. 이 회사도 자동차를 취급하는 곳으로 그는 도장부에 들어갔다. 그의 기술은 일류로서 어디를 가나 대환영을 받으며 월급도 많았다.

 

2. 예수님을 만난 회심

 

19382월 서면으로 이사 온 백남조는 성실한 직장인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감당하며 틈나는 대로 다른 사란 사람들을 돌보아주기까지 했다. 백남조의 아내 김영준은 남편이 출근한 후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집 주인인 강 집사 내외의 전도를 받았다. 강 집사는 목수 일을 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여기에다 백남조의 숙모까지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서 그들이 김영준을 전도하는 기회가 많았다. 숙모의 강권에 따라 백남조의 아내 김영준은 처음으로 교회에 나갔다. 백남조는 아이를 낳은 아내와 자신의 가정을 보살펴준 교인들의 사랑에 감동했다. 그래서 그는 19388월 하순경에 예수님을 믿고 회심하게 된다.

 

3. 부전교회를 위한 헌신

 

이렇게 부전교회에 등록한 백남조는 첫딸을 잃은 후 19391225일 새벽 성탄 찬양대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며 태어난 아들을 하나님께 받았다. 예수님의 생신과도 태어난 날이 같으니 더욱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려드렸다. 아이의 이름은 거룩한 기초라는 뜻에서 성기(聖基)라 지었다. 우리 교단과 총신대를 위해 헌신한 백성기 장로가 태어난 것이었다. 백남조의 나이가 26세가 되었다. 1945815일 수요 예배에 감동을 받은 백남조는 무엇보다 누구의 간섭도 없는 신앙생활의 자유가 주어짐에 대해 감격했다. 백남조는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하지 않기 위해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장사를 하다가 건강을 잃어버렸다. 그러던 중 부흥회에 참석하여 기도를 받게 되었다.

 

백남조의 건강은 신유 부흥회 이후 많이 나아져 누워있지 않을 정도로 회복되어 갔다. 그리고 1940년 서리 집사가 된 이래 12년 만에 직분을 받았다. 이때도 건강은 여전히 나빠 생업에는 종사하지 못하고 회복될 날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1952년 한국전쟁 중인 그때 백남조 가정은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빨래를 하면서 생활을 유지했다. 백남조는 그 무렵 건강이 아직 회복된 단계는 아니었고 겨우 바깥 출입이 가능한 정도였다. 백남조는 친한 집사에게 300만원을 빌려 표백시설을 인수했다. 1953년 장로 장립을 받게 되고 표백회사를 백흥화학공업사라 하였으며, 상표는 특히 그리스도의 표식을 나타내는 십자표를 채택했는데 이는 불신자들에게 무언의 전도 효과를 얻기 위해서였다. 사업은 주님의 복으로 날로 성장했다.

 

4. 부전교회를 넘어 이웃 교회와 이웃을 위한 헌신

 

부전교회는 당시 개척 의지를 펴 부산 시내에 10여 곳에 연차적으로 교회를 세웠는데, 팔송정교회, 부곡교회, 산하교회(, 서면중앙교회), 광무교회(, 영광교회), 당감교회(, 남도교회), 전포교회, 가야교회(, 가야제일교회, 오정현 목사 부친 오상진 목사 개척), 성지교회, 동부교회 등이 그것이었다. 백 장로가 구제 사업을 잘 한다니까 도움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연말이 되면 주위 환경 정리를 꼭 하였다. 그해에 받은 각서 등은 불태우고, 문서는 등기로 부치고, 빚은 탕감해주었다. 또 철도 너머 빈민굴 사람들에게 쌀 한 가마씩을 돌려주어 훈훈한 세모의 정을 나누기도 했다. 그는 평생을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5. 부전교회를 넘어 부산 교계를 위한 헌신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당시 YMCA 회관 화재 사건으로 회관을 부산 중앙동으로 옮겨 세울 무렵, 양성봉 장로(초량교회, 전 경남도지사)가 위원장이 되고, 백 장로는 부위원장으로 위촉되어 회관 건립에 헌신하였다. 재단법인 신망애양로원의 이사로 많은 재정적 헌신을 했고, 부전교회 내에 복음학원이 세워져서 배움의 기회를 놓친 젊은 청소년들, 구두닦이, 신문팔이, 행상 등을 모아 교육하는 일에도 헌신했으며, 금성중고등학교와 평화중고등학교의 이사로 헌신했다.

 

6. 부전교회를 넘어 총회와 총신을 위한 헌신

 

당시에 합동으로 남는가, 통합으로 나가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군() 안에 제일 큰 교회가 어느 쪽으로 가느냐에 따라 면 소재지 교회, 동 소재지 교회들의 향방이 좌우되는 성향이 있었다. 부전교회 담임목사인 한병기 목사가 제주노회 복구위원장으로서 헌신했고, 오늘의 우리 교단 제주노회가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백 장로의 수고가 컸다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이 처음으로 발간될 때 백 장로의 헌신이 매우 컸다. 그전까지 강의록 형태의 교재가 이제 정식 책으로 발간된 것이다. 우리 교단의 신학의 토대를 놓는 박형룡 박사 교의신학 전집 출간에 백 장로는 줄기차게 헌신해 왔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총신 사당동 캠퍼스 부지 헌납만을 헌신한 것이 아니라, 개혁신학을 토대 위에 올려놓는 박형룡 박사의 사역에도 아주 중요한 헌신을 한 것이다.

 

사당동 캠퍼스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백남조 장로의 공헌이 매우 컸다. 신학교 건축 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르던 1964년 제49회 총회를 마친 어느 날 그는 부산 대청동 노진현 목사(43회 총회장) 댁에서 모인 이사회에 중 이사장 노진현 목사에게 학교에 건축헌금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제대로 된 집도 없어 공장 안 판잣집에서 노모를 모시고 생활하고 있었는데 200만 원의 거금을 신학교 건축헌금으로 내놓았다. 그 후 이사회가 구성되어 초대 이사장에는 백남조 장로가 선출되었다. 그는 1988910일 하나님의 품에 안김으로 지상에서 염원하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것이었다.

 

나가는 말

 

한 사람의 생애가 이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했던 한 사람, 경천애인(敬天愛)의 한 사람 그가 바로 백남조 장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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