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연구논문: 이영수 목사와 예장총회

발제자: 김병희(대신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김순정 | 기사입력 2021/05/12 [11:51]

공적연구논문: 이영수 목사와 예장총회

발제자: 김병희(대신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김순정 | 입력 : 2021/05/12 [11:51]

 

 

 이영수 목사 © 리폼드뉴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와 제105회 총회기념사업특별위원회(총회 훈장 상훈위원회), 총회역사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교단 발전과 위상을 세운 지도자들에 대한 공적연구발표 세미나가 2021.4.16.()에 새에덴교회당에서 열렸다. 공적연구발표 세미나에서 발제한 논문들을 요약하여 소개해 본다.

 

들어가는 말

 

1950년대 한국장로교는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 가운데서도 크게 부흥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한국장로교회는 신사참배처리문제, 자유주의 신학과의 대립,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한 입장 차이로 세 차례나 분열되었다. 1951년에는 고신교단이, 1953년에는 기장교단이, 그리고 1959년에는 통합교단이 분열되었다. 특히 통합교단과의 분열은 1959924,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에서 교회연합운동을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의 문제가 원인이 되어 통합측합동측으로 분열되었다. 이 분열은 한국장로교 총회 역사상 가장 큰 상처로 남았으며 지도자들의 신학적인 입장 차이로 교회와 성도들은 지체가 나눠지는 큰 아픔을 경험하였고, 그 동안 섬겨온 교회가 나뉘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이후 합동교단의 정치적 상황은 황해 출신 박찬목 목사를 지지하는 세력과 호남 출신 정규오 목사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영남 출신 젊은 이영수 목사와 평안 출신 노장 김윤찬 목사가 총신이사회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소위 이영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영수는 총회 3대 목표를 세우고 총회신학교 교사, 총회회관, 일만교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영수는 14년 동안 각종 임원으로 활동했으며, 총회 공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19년 동안 여러 직책을 맡아 총회 발전에 적지 않는 기여를 했다.

 

1. 성장환경과 기독교 수용

 

이영수(李榮壽) 목사는 1928720,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363번지에서 목재상인 이운성 집사와 장성금 권사 사이에서 3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영수의 가정이 기독교를 접하게 된 계기는 모친 장성금 권사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시작되었다. 장성금 권사는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자녀들과 함께 봉화 춘양교회에 출석하였으며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하였다.

 

2. 신학수업과 목회사역

 

8·15해방이 기독교인에게는 신앙의 자유를 안겨준 감격의 날이었다. 불과 한 달 전인 719일 조선총독부는 장로교, 감리교, 구세군 등 각 교파의 교단을 통합하여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통폐합하였다.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출범으로 인해 조선의 기독교는 각 교단들이 교회사를 통해 일구어 온 전통을 버리고 완전히 일본 기독교에 종속되고 말았고 더 이상 한국 장로교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제는 사실상 1() 1교회의 정책을 실시하여 문을 닫는 교회는 부지를 매각하여 애국 헌납하게 하였다. 이 시기 이영수(18)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던 중, 사경회를 인도하며 경북 북부지역의 교회를 복구하고 있는 이원영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원영의 권유로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준비하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한국장로교회의 시급한 과제는 신사참배에 가담한 목회자와 성도들의 치리문제와 신학교를 통하여 목회자를 양성해야 하는 문제였다. 조선신학교가 당시 유일한 장로교 총회 직영 신학교였으나 조선신학교의 학풍인 자유주의 신학의 확산을 경계하는 여러 노회들과 목사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신학교 건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19485,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 하여 남산에 새로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49419,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제35회 총회는 장로회신학교의 총회 직영을 결의하여 총회는 두 개의 직영 신학교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525, 부산중앙교회에서 열린 제36회 총회 속회에서 총회 직영 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와 조선신학교를 모두 인준 취소하고, 1951918, 대구서문교회당에서 총회신학교가 시작되었다.

  

이영수는 1950(22)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 설립한 남산신학교즉 장로회신학교 예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장로회신학교는 휴교하게 되었고, 대구에서 개교한 총회 직영 신학교인 총회신학교에서 예과와 본과를 졸업했다. 이영수는 1954년 총회신학교를 제4회로 졸업하고 19552월 군목으로 입대하였다. 1956831, 경안노회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았으며 그해 1129일 경안노회 제60회 정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경산 화양에 있는 경리학교에서 군목으로 교회를 시무하였고, 부모님이 다니는 이웃에 있는 상림교회를 설교로 섬겼다.

  

이영수는 1959WCC 문제로 교단이 분열하고 교회가 어수선할 즈음에 31세의 젊은 나이에 대구봉산교회에 청빙을 받고 담임목사로 시무하게 되었다. 이영수는 대구봉산교회에 부임한 지 2년 만에 반ICCC의 중심에 섰다. 당시 ICCC를 지지했던 박병훈 목사는 현직 노회장이었는데 이영수는 ICCC의 문제로 박병훈과 논쟁이 있은 후 경북노회 서기와 총회 총대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대전중앙교회 양화석 목사의 건강 악화로 청빙을 받아 19691114일까지 8년 동안 경북노회 서기 7회와 부서기 2회를 역임하였으며, 총회 총대에 8회 참석했다.

 

3. 대전중앙교회 목회와 총회 활동

 

이영수는 19693주 동안 과거의 대구봉산교회, 현재의 대구봉산교회, 미래의 대구봉산교회를 주제로 설교한 후 대구봉산교회를 사임하고 그해 1114일 대전중앙교회로 임지를 옮기게 되었다. 그가 부임하고 교회가 점점 성장하자 1980115, 성전건축 기공예배를 드리고 1981912일 성전건축(건평 2,456)을 완공하였다. 이와 같은 교회 성장추세는 이영수의 총회 활동을 뒷받침하였다.

  

이영수는 대전중앙교회를 시무하면서 본격적으로 총회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19년 동안 총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1980, 이영수를 비롯한 교단의 지도자 15명이 유성관광호텔에 모여 예배를 드린 후 교단 발전을 위해 기도하였다. 첫째, 총회센터를 건축한다. 둘째, 선교사를 100명 이상 파송한다. 셋째, 10,000교회 운동을 전개한다. 그가 가장 중요한 실천 방안으로 생각하는 것은 총회센터 건립 총신대학교 일만교회운동 해외선교 보수신앙의 전통 고수 등 크게 다섯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4. 좌절

 

목회자의 소명을 품고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 이영수의 꿈은 가난한 청소년들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경북 경산군 하양에 사두었던 과수원을 매매하여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산2-2513만의 교지를 구입하고 기독교실업대학을 설립했다. 19859월 총회에서 이영수와 지지 세력의 몰락이 시작되었고, 정치권에서 배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거대상이 되었다. 1984821일에 열린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 결의에 따라 총회회관대지와 황 목사의 신창교회 교육관을 공동 담보로 하여 고려투자금융에서 7억 원을 대출받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대출금 7억 원 중 4억 원은 신성건설 공사비로 지불하고, 공동 담보자인 황 목사가 1억 원을 쓰고, 이영수가 중부대학교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2억 원을 쓴 것이었다. 이것이 이영수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실수였으며, 반대파에게는 공금횡령이라는 빌미를 제공했다. 결국 이영수는 모든 총회의 공직에서 해임되었고, 목사직까지 면직되었다.

 

이후 이영수를 따르는 48명의 성도들이 1987518일 대성산 기도원에 예배처소를 준비하고 1987525일 첫 예배를 드리면서 대전중앙교회에서 대일교회로 분립했다. 1987922-25, 72회 총회에서는 총회 전권위원회에서 공직 정지한 인사들에 대한 사면복권을 신중히 검토하게 되었다. 그해 1111, 총회 전권위원회는 총회의 화합 정신과 이영수 목사가 민·형사 항소 건을 정식으로 취하하였고 또한 원금을 상환했으며, 이미 중병 중임을 참작하여 목사직 면직을 사면함으로써 이영수는 복직되었다. 그러나 이영수는 건강이 점점 악화되었고, 1987122, 김갑덕 사모가 지켜보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나가는 말 

 

1980, 이영수는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혁신적인 목표를 세우고 의욕적으로 사업을 추진하였다. 첫째는 총회회관 건립을 추진하였다. 둘째는 양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건립을 추진하였다. 셋째는 일만교회운동을 추진하였다. 넷째는 해외선교를 위한 사업을 추진하였다. 다섯째는 총회 평신도 훈련원 및 한국 찬송가 공회 위원장과 공동회장으로 평신도 훈련원을 개원하였으며, ‘하나의 찬송가즉 통일찬송가를 출간하여 총회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