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연구논문: 김윤찬 목사와 교단의 발전

발제자: 신종철(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김순정 | 기사입력 2021/05/10 [19:36]

공적연구논문: 김윤찬 목사와 교단의 발전

발제자: 신종철(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김순정 | 입력 : 2021/05/10 [19:36]

  

 김윤찬 목사 © 리폼드뉴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와 제105회 총회기념사업특별위원회(총회 훈장 상훈위원회), 총회역사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교단 발전과 위상을 세운 지도자들에 대한 공적연구발표 세미나가 2021.4.16.()에 새에덴교회당에서 열렸다. 공적연구발표 세미나에서 발제한 논문들을 요약하여 소개해 본다.

  

I. 들어가는 말

 

김윤찬은 주기철이나 손양원처럼 널리 알려지지는 않은 분이다.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현재의 칼빈대학교와 관련하여 김윤찬을 언급할 뿐이다. 하지만 김윤찬은 한국교회에 있어서 특히 한국장로교회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김윤찬은 소위 을사늑약(19051117)’이 체결되기 석 달 전 평안남도 대동군 청룡면 산사리에서 부친 김락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7년 여름, 김윤찬의 부친이었던 김락환은 마포삼열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마포삼열의 기도와 인도로 김락환은 점차 하나님을 믿고 신앙이 성숙해졌다.

 

독실한 신자가 된 김락환은 결혼하였고 21년 중 막내로 김윤찬을 낳았다. 김윤찬은 나이 7살이 되자 유교적 전통이 강했던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신식교육을 받지 못하고 구학문을 배우게 되는데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떼고, 사서삼경을 다 마쳤을 때는 소년 시절이 다 지나고 18세가 되었다. 그는 삼성중학교(三聖中學校)18세의 청년의 나이로 1학년에 입학하였다.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영어, 일본어, 산수, 국어, 역사, 지리 등의 신학문을 배웠다. 22세의 나이가 되자 아버지의 권유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배필은 중화군 내 상원 내동교회 영수였던 한두협의 딸 한부흥 양을 맞이하였다. 이들은 1927312일 중화군 내동교회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결혼 이후 3남매(재옥, 재성, 재진, 21)를 낳았던 아내는 1934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김윤찬은 1936년 평양 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하였고 그해 1018일에 이은팔 장로와 서은혜씨의 장녀 이봉각씨와 결혼을 하였다. 27세 때 산사리 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은 김윤찬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1936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393월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34회로 졸업하고 1938년부터 평남 강동군 청룡면 소재한 청룡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였는데 193910월에 그 교회에서 평양노회 소속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숭호흡 중부교회, 청룡교회, 연화동교회, 평양 장대현교회를 시무했다. 그후 1·4 후퇴 당시 월남하여 피난민들과 함께 19516월 부산 평양교회를 세우고 그 곳에서 사역했다. 이후에 전쟁 피난민들은 서울이 수복된 이후 서울에 평양교회를 세우고자 마음을 모으고, 서울 시내 중구 충무로 3가에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교세 확장에 힘쓰게 되었다.

  

19529월에 김윤찬은 총회신학교 재단 이사가 되었다. 이듬해 6월 서울의 평안교회 담임목사로 청빙 받아 상경하였다. 1956년 평양교회가 서울 시내 서대문구 서소문동 서문교회와 통합하여 교회 이름을 평안교회로 부르기로 하였다. 김윤찬은 1976년까지 평안교회를 담임했다. 그는 961년에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페이스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로부터 명예 신학 박사(D. D)학위를 수여 받았고, 같은 해(1961)에 교단지인 기독신보사장에 취임하였다. 19622월 칼빈신학교(현 용인시 칼빈대학교 전신) 교장에 취임, 후학 양성에도 힘을 기울이며 교육 사업에 매진하기도 하였다. 김윤찬은 19649월 제49회 총회에서 본 합동 교단 총회장에 피선되었고 1966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그는 1967년 제52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재선되었다. 1967년부터 1970년까지 대한기독교연합회장을 역임했고, 19687월 아시아 복음연맹 연합회장에 선출되었고, 1970년 대한기독교 국민정화회장에 피선되었다. 그해 9월 총신대학 부이사장, 그리고 729월 총회신학교 이사장에 각각 선임되었다. 그 밖에도 평화모자원이사장, 바울학사 이사장, 세계기독교반공연합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6년 김윤찬은 미국으로 건너간 후 나성 영생교회와 밸리 한인장로교회를 설립했다. 또한 1976년부터 1980년까지 미국 나성교회 신학교 교장으로 활동하다가 88세의 노환으로 소천했다.

 

. 김윤찬 목사의 신학과 신앙 및 목회 사역

  

독실한 신자가 된 김락환은 결혼하였고 그의 아내 정씨도 믿음의 반석이 되었다. 이와같이 김윤찬의 신앙에 부모가 얼마나 많은 미친 영향을 끼쳤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둘째로 선교사 마포삼열을 통해 가르쳐진 보수주의 신앙이다. 1938년 김윤찬이 평양신학교 졸업반이었을 때 그 당시 기독교계나 조선에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신사참배였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무조건적인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기독교계에서는 신사참배가 성경에 위배 된다며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김윤찬은 평양신학교 경건회 시간에 주기철의 설교를 듣고 신사참배가 죄라는 것을 확신했다. 1939413일 김윤찬은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34회로 졸업했다.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읍 중부교회를 시무하고 있었던 그는 신앙의 비밀 결사조직을 만들어 신사참배를 반대했다. 김윤찬은 19444월에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 경찰을 피해 황해도 곡산의 깊은 언진산 동굴에 피신해 들어와 13개월을 숨어 지냈다. 이처럼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킨 영적 거장이었다.

  

19457월 평양 연화동교회로 옮겨 시무하던 중 8·15 해방이 왔으나 반쪽 해방이 와서 북쪽은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었다. 이때 김윤찬은 북한 공산당이 그를 초청하는 일제의 행사에 참석하거나 협력하지 않았다. 194632일 김윤찬은 북한 전역의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의 하나로 체포되었고 평양경찰서로 호송되었다. 김윤찬은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 나온다는 관 같은 소련 감옥에서 29일간 갇혀 있다가 살아 나왔다. 김윤찬은 1948년 평양노회에서 공산당을 돕는 북한의 기독교도 연맹에 거절한다는 이유로 목사 면직을 당했던 것이다. 그는 1948년 북한 김일성 정권이 세워진 후에 여러 차례 감옥에 투옥되었다. 1949년 또다시 끌려가 고문을 받고 19503월 병 때문에 가석방되었다. 김윤찬은 1950825일 이후 평양이 국군에게 복구되자 장대현교회에서 청빙하여 갔으나 3개월 만에 후퇴하여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는 공산 치하 5년 동안 2년간의 옥고를 치루었다.

  

이북에서 피난 온 김윤찬은 함께 온 피난민을 모아 1951610일 오전 11, 보수동 언덕(보수산)에 모여 첫 예배를 드림으로 평양교회를 설립했다. 평안교회 초대 목사로 목회한 김윤찬은 서울 종로구 순화동 6번 우뚝 솟은 곳에 교회 대지 500평을 매수하고 19658월에 650평의 성전건축 기공을 하고 1966년 만 1년 만에 성전건축을 완공하여 입당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평안교회는 김윤찬의 목회 사역을 통해 보수주의 신학과 신앙을 파수하는 심볼이었다.

 

. 본 교단 발전을 위해 노력한 김윤찬의 삶

 

1930년대 당시 김재준은 성경은 구원에 관해서는 무오하나, 과학적 역사적 측면에서는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며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였다. 김윤찬은 성경의 무오성을 파괴하는 김재준을 파면시키기로 결의한 제38회 총회에서 총회가 내린 김재준 목사의 목사 면직 결정을 대표하여 총회 석상에서 기도를 담당하였다. 김윤찬은 1959년 합동과 통합의 분리된 후 한국교회에 W.C.C의 정체를 알리고 보수 교단을 강화하는데 주역을 담당하였다. 1959W.C.C를 찬동하여 분리하여 나갔던 연동측(현재 통합교단)에 모든 선교사가 동조하였기에 선교사들이 건립을 주도한 학교, 병원, 사회 사업기관까지 다 통합쪽으로 속하게 되었다. 결국 정통 보수 신앙을 고수하여 W.C.C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합동총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상황속에서 교단을 시작하게 되었다. 김윤찬은 외국의 유명한 4명 강사를 초청해 W.C.C의 문제를 전하게 했다.

  

1959년 당시 통합측으로 학교 및 건물들이 다 넘어간 상태에서 본 교단은 건물 한동 남아 있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당시 부총회장이었던 김윤찬은 미국 페이스 신학교의 총장이자 I.C.C.C 총재 맥킨 타이어 박사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맥킨타이어는 한국교회를 위한 성탄 헌금으로 대략 12만 달러를 모았다. 그 다음해인 19604월 당시 80세였던 홀드 크로프트(1902-1944년 평양에서 선교사, 한국명 허대전) 박사가 10만 달러를 가지고 한국에 다시 왔다. 이때 김윤찬은 이 지원금을 본 교단 신학교인 총회신학교의 건물을 용산에 구입하였다. 하지만 김윤찬 목사는 총회의 허락을 받지도 않은 채 I.C.C.C 총재에게 모금운동 편지를 보냈다고 비난과 공격을 받았다. 이 일로 김윤찬 목사는 총회 앞에 정중하게 사과를 하게 되었다. 신학교는 1960822일 용산구 한강로 2319번지 소재의 4층 건물인 용산 교사로 옮겼다. 용산 신학교는 오늘날 총신의 전신이 되었다. 또한 김윤찬은 교단 신문이 없던 시절 기독신문을 발행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총회 산하 평신도 및 기독교지도자 양성을 위해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 선생의 이름을 딴 칼빈대학교의 모체인 칼빈신학교를 당국에 허락받아 설립하였다.

  

1959년 제44회 총회를 기점으로 통합 측이 분리되어 나간 후 우리 교단 총회는 교회의 영적 부흥과 영적 회복에 전심하게 되는데 김윤찬이 앞장서 갔다. 1960년 제45회 총회에서는 고신측과 합동을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합동추진위원을 10명 선정하였는데 그중에 김윤찬이 있었다. 교회 연합에 관련하여 또 한가지 주목할 사건은 김윤찬이 제52회기 총회장으로 재선되었을 때 통합측과 합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는 것이다.

 

. 나가는 말

 

김윤찬은 선교사들이 전해 준 복음, 곧 한국교회에 평양장로회 신학교부터 내려온 장로교 정통의 칼빈주의 신앙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킨다는 가장 중요한 이념에 매우 충실하였다. 김윤찬은 W.C.C 신학 사상을 배격하였고, 1959년 통합 측의 이탈로 인해 정통보수 신학과 신앙 이외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던 상황에서 용산에 신학교 건물을 구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현재의 총신대학교가 발전될 수 있도록 기틀을 제공하였다. 또한 칼빈대학교가 발전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김윤찬은 본 교단의 발전을 위해 열정을 다했으며, 두 번의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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