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룡 박사의 정통신학은 교권의 뒷받침이 있었다

소재열 | 기사입력 2021/05/04 [09:43]

박형룡 박사의 정통신학은 교권의 뒷받침이 있었다

소재열 | 입력 : 2021/05/04 [09:43]

▲ 왼쪽부터 박형룡, 김재준, 남궁혁, 채필근 박사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대한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1938)는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신사참배 결의가 회의법상 적법한 결의방법에 의해 결의되었는가? 특별한 어떤 안건을 결의하려고 할 때 첨예한 대립이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충분한 논의를 통해 토론한 후 표결에 붙인다. 무기명 비밀투표로 표결해야 한다는 특별한 규정이 없는 경우, 거수투표 등 다양한 방법으로 결정한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할 때 의장은 신사참배를 찬성하는 자와 반대하는 자에 대한 정확한 의사 표현을 물어야 한다. 그런데 당시 반대의사를 확인하지 않고 찬성하는 의사만 묻고 곧바로 고퇴를 치고 말았다. 선교사들은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절차적 하자를 주장하며 무효를 주장했지만 이는 당시 잘못된 교권에 의해 거부되고 말았다. 이 교권은 일제 강점기 시대 조선 총독부의 권력이 지배되고 있는 교권이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창립 총회(1912)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를 총회장으로 세운 이유도 일본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시 모든 회계는 한국인 목사와 장로가 아니라 선교사들이었다. 이는 재정문제 때문이었다. 총회의 모든 재정권이 선교사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교권은 선교사들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교권을 돈주고 사려는 사람이 잘못된 교권을 가지려는 자들이 있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선교사들의 교권보다 조선 총독부의 권력이 더 우위에 있었다. 그 권력에 의해 한국교회는 주도되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집고 넘어가 보자. 당시 총회규칙이나 교단헌법이 없어서 불법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했는가? 교권의 권력 앞에 총회규칙이나 교단헌법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때로는 그 교권은 돈과 연결된다. 돈이 있는 곳에 교권이 형성된다. , 금권에 의한 교권이기 때문에 그 교권은 올바른 성경적인 교권이 될 수 없다.

 

교권은 쓰레기통에 집어 넣어버려야 하는 대상이 이니다. 언제나 교권이 무너지면 신학도 무너진다. 문제는 그 교권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지배권을 가지려는 인간의 망상과 욕망이 문제 될 뿐이다. 이 교권은 신학을 지키는 교권이 아니라 신학을 무너지게 하는 교권이다. 겉으로 보기는 신학을 지키는 교권으로 포장하지만 내면적으로 볼 때에 그것은 교권장익을 의한 수단이 될 뿐이다.

 

일제 강점기 말에 모든 선교사들이 강제 출국당했다. 그것이 바로 1941년이었다. 일제는 선교사들을 다 강제 출국시킨 다음 1942년을 끝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폐쇄시켜 버렸다. 종교까지라도 식민지화 하려는 의도에서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안에 모든 교회를 편입시켜 버렸다.

 

총회가 폐쇄되고 각 지역의 노회도 폐쇄되어 교구제도로 운영되었다. 당시 각 지역의 교구 회의록은 적나라한 그 시대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치 남쪽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되어 신앙이 무너질 때와 같은 형국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일제가 폐망되어 해방을 맞이했다. 마치 고레스 칙령으로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해방을 맞이한 것처럼 한국교회는 해방을 맞이했다. 1945815일 해방이 되자 전국의 각 노회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일제에 소속된 교구를 폐쇄하고 원래의 노회로 복구하기 시작했다. 해방받은 다음해인 1946611일에 남한만의 총회인 남부대회를 개최했다. 이때 가장 먼저 제27회 총회에서 행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며 공적으로 회개했다. 이제 교권과 권력이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인 기초를 놓았던 모든 선교사들이 출국한 상태였으므로 한국장로교회는 이제 한국인들에 의해 주도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주도권을 누가 갖느냐, 교권을 누가 갖느냐가 쟁점으로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호랑이 없는 굴에 누가 주도하느냐가 문제이듯이 이제 한국장로교회를 어떤 교권이 주도해 가야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이때 주도권을 쥐기 위해 가장 먼저 포문을 연 사람은 김재준 박사였다. 그는 1946611일에 개최된 남부대회가 마친 6개월만인 194612새사람지에 발표한 진리와 신앙-정통의 도취란 글에서 그동안 선교사 중심의 한국장로교회의 정통보수신학에 대해 포문을 열었다.

 

그는 이 글에서 정통주의자들은 교리의 척도로 남을 재어보는 쾌감에서 스스로 부풀어 오른다. 자기를 심판하는 것보다 남을 심판하기에 약기(躍起)되어 있다. 나는 이것도 믿고 저것도 믿으니 나는 의로운 사람이외다 하고 성전(聖殿)에서 자랑하던 바리새인처럼 되어 버린다. 이것을 정통적 이단(Herecy of Orthodox)이라 부른다라고 하여 노골적으로 정통보수신학을 정면 공격을 하였다.

 

그리고 틈을 타서 사탄은 사이비한 이단을 정통으로 위장시켜 정통의 권위로 신도를 미혹하며 교회의 화평을 교란하려 한다고 주장했다(김재준, “진리와 신앙-정통의 도취,”새사람, 김재준 전집1(194612), 275.).

 

그는 소위 신신학이란 것은 기독교의 탈을 쓴 인본주의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불신앙을 돌이키고자 힘쓴다. ‘정통신학은 이보다도 더 교묘하게 위장한 실제적 인본주의가 아닐까라고 하여 정통보수신학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했다.

 

정통보수신학을 정통적 이단’, ‘교묘하게 위장한 실제적 인본주의’, ‘정통신학을 사탄의 위장술리고까지 하였다. 이같은 김재준 박사의 정통보수신학에 대한 전면전은 그가 같은 해인 1946331일 조선신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1946612일 남부총회에서 조선신학교가 총회직영신학교로 결의된 6개월 만에 이루어진 것으로 일련에 이러한 행동은 교권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선교사들이 전원 출국한 상황에서 이제 한국인에 의해 주도한 한국장로교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그는 정통신학을 사탄의 위장술이라며 한국장로교회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가 재건되는 과정에서 먼저 자신들이 한국장로교회의 교권을 장악하기 위해 전면전으로 공격에 나선 것이다.

 

이때 가장 먼저 일어선 자들이 바로 조선신학교 김재준 교수 밑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었던 정통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51인 신앙동지회). 이들은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교수 중심의 파괴적인 성경관, 자유주의 신학, 정통 이단이라는 주장들에 대해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 진정서는 정통신학에 의해 주도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위기의식을 느꼈다. 반면에 김재준 교수의 주장에 동조한 사람들이 함께 총회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재준 교수 중심의 자유주의 신학과 맞서고 일찍이 선교사를 통해 전수된 정통보수 복음적인 신학과 신앙을 보수할 신학자가 필요했다. 그 신학자가 바로 만주 동북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었던 박형룡 박사의 귀환(歸還)이었다. 김재준 교수가 정통은 이단이라는 논문을 발표한지 10개월만의 귀국이었다(1947920).

 

이때로부터 박형룡 박사와 김재준 박사 사이의 신학논쟁은 대결국면이 되었다. 두 사람 사이의 대결국면은 한국장로교회의 대리전이 되어 버렸다. 한국장로교회가 김재준 박사 중심이냐, 아니면 박형룡 박사 중심이냐에 대한 갈림길에 서 있었다. 누구 중심으로 한국장로교회가 주도되느냐에 따라 한국장로교회의 존폐가 결정될 것은 뻔한 이치였다.

 

박형룡 박사가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가지고 나온 것은 성경관이었다. 김재준 교수와 자유주의신학자들은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므로 정통신학의 교리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는 성경의 무오를 주장하며 정통교리를 확립하며 변증했다. 정통신학은 언제나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성경관에 근거하며, 이같은 성경관이 무너지면 정통신학의 교리는 무너진다. 박형룡 박사는 성경의 무오성에 근거한 정통신학을 보수하고 계승하는 데 공헌했다.

 

박형룡 박사의 이러한 성경 무오성에 근거한 정통신학을 보수하고 본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으로 보존되고 계승되는 일은 그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교권과 뜻을 같이하였기 때문이다. 박형룡 박사의 성경 무오교리와 함께하여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교회를 지켰다다. 또한 칼바르트의 신학과 그 성경관으로부터 본 교단을 신정통주의신학으로부터 지키는 데 앞장섰으며, 이러한 교리적인 문제로 기장과 통합측이 분열되었다.

 

자유주의 신학과의 투쟁에서 박형룡 박사와 뜻을 함께한 사람들이 신정통주의와의 투쟁에서 뜻을 달리하여 통합측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있었다. 1946년 정통을 사랑하는 51인 신앙동지회 회원들 중에 나중에 통합측 분열 때 박형룡 박사와 헤어진 박창환, 엄두섭, 한완석 등이 있다.

 

특히 51인 신앙동지회 진정서로 조사위원장으로 나섰던 제33(1947) 총회장이었던 이자익 목사는 김재준 교수를 단죄하여 자유주의신학을 막는데 공헌하였지만 신정통주의자로 통합측으로 넘어갔다. 모두가 다 성경관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영어에 능통하여 신학교 강의를 했던 박창환은 박형룡 박사 집에서 기거할 정도로 함께 했지만 결국은 박형룡 박사의 정통신학을 비판하며 통합측으로 갔다. 이 역시 성경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한 자유주의신학의 관점, 신통주의신학에 대한 관점은 정통신학의 관점과 함께 할 수 없으며, 언제나 투쟁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경관, 역사관, 학문의 방법론 등은 일정한 교권이 형성되며, 교단(종교단체)과 학자들의 그룹을 형성한다. 각 교단은 분명한 성경관에 근거한 일정한 선을 긋고 있다. 그 성경관에 따라 교권이 형성된다. 그러나 학자들의 모임과 교단연합은 그러한 성경관으로 형성된 교권은 아니다.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과 성경관과 다른 교단과의 연합, 다른 학자들의 모임에 참여 문제는 오늘날 본 교단의 딜레마이다.

 

본 교단(예장합동)이 한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에 가입하고 있다. 가입할 때 구성원 교단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논하지 않는다. 논할 경우, 본 교단과 전혀 함께 할 수 없는 교단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적인 교리에 의한 연합이 아니기 때문에 연합이 가능하고 가입이 가능했다.

 

WEA(세계복음주의연맹) 역시 교류할 수 있는지 여부를 질의했는데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문제로 접근하면 해결이 되지 않는다. 마치 한교총에 가입여부를 결정할 때에 신학적인 교리문제를 논하지 않고 결정한 것과 같다. 총회 신학부가 이번 제106회 총회에 이 부분에 관해 연구 결과를 보고할 것으로 보여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역사관은 신학적인 입장과 성경관이 전제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성경관에 따라 각종 사건과 역사를 판단하고 비판하며 편집한다. 그 비판의 다양성은 결국 비판자의 성경관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의 사관은 결국 교회 역사에 대한 해석자의 성경관이 사관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이런 원리라면 각자의 역사 사관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나의 역사관, 우리 교단의 역사관과 다르다고 정죄할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성경관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성경관, 역사관이 다르다고 교류할 수 없다면 한기총과 한교총도 가입할 수 없다. 본 교단 소속 교수들이 세계복음주의연맹(WEA)에 가입한 학자들과 함께 학회를 구성하여 학문활동을 할 때 신학적인 문제를 거론하며 가입여부를 결정하지 않는다. 다양한 성경관에 의해 조직된 교단에 소속된 교수들이 학회의 연구 대상과 연구 방법론에 의해 자신들의 성경관과 연구방법론에 의해 연구활동을 한다.

 

총회신학부는 이러한 모든 문제를 아우르며 이번 제106회 총회에 보고하여야 한다. 정통신학을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정치교권을 지탱하는 수단으로 삼지 말라. 본 교단 총대들은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이심전심으로 다 인지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정통신학을 지킬 수 있는 올바른 교권을 갖고 있는가? 이 질문의 답변이 본 교단의 진정성이 담보될 것이다.

 

(계속)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