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연구논문: 정암 박윤선 박사와 총신

발제자: 정성구 원장

김순정 | 기사입력 2021/05/01 [09:11]

공적연구논문: 정암 박윤선 박사와 총신

발제자: 정성구 원장

김순정 | 입력 : 2021/05/01 [09:11]

 

 박윤선 박사 © 리폼드뉴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와 제105회 총회기념사업특별위원회(총회 훈장 상훈위원회), 총회역사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교단 발전과 위상을 세운 지도자들에 대한 공적연구발표 세미나가 2021.4.16.()에 새에덴교회당에서 열렸다. 공적연구발표 세미나에서 발제한 논문들을 요약하여 소개해 본다.

 

1.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正岩 朴允善 博는 한국교회가 세계에 내어 놓을 수 있는 위대한 칼빈주의 성경주석가이다. 그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과 신앙을 그대로 모방하고 실천하고,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뜨거운 기도로 영혼을 사랑하고 말씀을 외치고 성경을 주해하던 어른이었다. 198010월 총신의 학원 소요를 견디지 못하고, 박윤선 박사는 총신을 떠나 몇 몇 교수들과 함께 합동신학교를 세우게 된다.

 

필자는 2019년에 <나의 스승 박윤선 박사>라는 500여 페이지 저서를 통해서 박윤선 박사와 관련된 120종의 문건과 자료사진을 제시하면서 기도의 사람, 말씀의 사람, 박윤선 박사의 진면목을 자세히 기술한 바 있다. 나의 저작에 실린 자료들은 1960년에서 1988년까지 사진, 서한, 문건들 모두를 망라했다.

 

2. 정암 박윤선 박사의 사상과 삶

 

사람을 평가할 때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가? 필자는 1960년대 초에서 1988년 그의 임종까지 박윤선 박사를 26년 동안, 가장 지근 거리에서 그의 연구 생활을 보았고, 그의 기도 생활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불꽃같은 메시지를 들을 때, 나는 그의 설교를 노트에 필기하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그의 설교와 강의 약 100편을 녹음으로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필자는 박윤선 박사가 나의 신학과 신앙의 멘토일 뿐 아니라 나의 영적 삶의 모델이었다. 그래서 나는 부족하고 미천하나 그의 사상과 삶을 흉내 내려고 평생 몸부림 쳤다. 그래서 나는 그의 뒤를 따라 화란 뿌라야 대학교로 유학을 갔었고, 박윤선 박사가 걸어갔던 칼빈주의자로 생을 걸었다.

 

3. 박윤선 박사의 사상적 기원과 교회 정치

 

박윤선 박사의 칼빈주의적 사상체계는 어디서 기원하는 것일까? 박윤선 박사는 숭실 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박윤선이 평양 신학을 공부하던 시기는 1932~1934년이었다. 이때가 평양 신학교의 최고 전성기였다고 한다. 1901년부터 1930년까지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가 미국 선교사 중심의 교수들이었으나, 박윤선이 공부하던 시기에는 남궁혁 박사와 박형룡 박사가 새로 교수로 취임했다. 특히 박윤선의 졸업장에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공부한 자로 명기되어있다. 박윤선 박사의 친구들인 김진홍, 방지일 목사의 말을 빌리면, 그는 어학의 천재라고 입을 모은다. 특히 그는 히브리어, 헬라어를 비롯 독일어, 화란어도 읽을 수 있었고, 영어는 최고의 수준이었다고 한다.

 

박윤선이 사실 숭실대학교와 평양신학교에서 배운 것으로는 아직 철저한 칼빈주의자로서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박사에게 배우면서, 그는 철저한 칼빈주의자로 변했다. 그는 또한 신약학의 스톤 하우스(N.B. Stonhause)박사 아래서 공부하면서, 화란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에 넓게 눈을 뜨게 된다. 여기서 박윤선은 아브라함 카이퍼, 헬만 바빙크, 스킬더와 헤르만 도예베르트를 알게 되었다. 박윤선 박사가 두 번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연구를 끝내고, 1950년에 카이퍼가 세운 화란 암스텔담 뿌라야 대학(Vrije Universiteit)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던 중에, 갑자기 사모의 비보를 듣고 귀국한다. 사실 1948년부터 그는 고려신학교 교장이었다. 박윤선 박사는 고려 신학교의 전부였다. 고려신학교에서 박윤선 교장은 사실 성경해석 뿐이 아니고, 거의 전 과목을 교수하다 싶이 했다. 그러므로 박윤선 박사는 흔히 박 교장으로 알려졌다. 그의 신학 활동은 주로 고려신학교 신학잡지인 <파숫꾼>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파숫꾼지에 헨리 미터의 칼빈주의를 1년간 개요 했고, 카이퍼, 바빙크, 스킬더 등의 개혁주의 사상을 소개했다.

 

4. 박윤선의 신학교 순례(평신, 만신, 고신, 총신, 합신)

 

박윤선 박사의 신학교 순례는 다섯 개의 신학교에 이른다. 그것은 모두 박윤선 박사의 자의가 아니었다. 박윤선은 박형룡 박사의 추천으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했고, 귀국후는 박형룡 박사의 배려로 평양신학교 신학잡지 <신학지남>을 편집하면서 평양신학교와 평양여자신학교에서 계시록 강의를 했었다. 그러나 1938년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되자 박윤선은 만주로 망명했고, 만주 신경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만주 봉천신학교에서 교수 하면서 요한 계시록을 탈고 했다. 만주 봉천 신학교는 정상인 목사가 교장으로 세워져 있었고, 거기서 박윤선은 신약교수로서 활동했다. 당시 박형룡 박사는 함께 교수로 있었으나 직책상 공식적으로 정식교수는 아니었다. 그 이유는 신학교가 일제로부터 박형룡 박사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해방이 되고 해외에서 망명했던 인사들과 독립투사들이 속속 귀국했으나, 해방정국은 불안정하고 소용돌이를 치고 있었다. 교계는 신사참배 했던 목사들과 출옥성도들 사이에 엄청난 갈등이 있었고, 그 둘은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출옥 성도인 한상동 목사를 비롯한 이인재 목사 등은 신사 참배한 기성 교회 목사들과는 함께 할 수 없음을 선포하고, 새로운 신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박형룡 박사를 중국에서 모셔와 고려 신학교 교장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박형룡 박사의 관심은 역시 총회에 있었기에 6개월 만에 서울 총신으로 옮기고, 박윤선 박사가 고려 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그리하여 박윤선 박사는 약 11년간 고려 신학교를 위해서 혼신의 힘을 쏟으며 가르치고, 뜨겁게 외치고, 주석을 집필하고, 논문들을 쏟아 내었다. 아마도 박윤선 박사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힘 있게 열정을 쏟은 곳은 고려 신학교라고 할 수 있고, 당시 박윤선 박사는 바로 고려 신학교와 동일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은 스푼너 선교사의 주일 예배 인도를 기회로 박 교장을 퇴출시켰던 것이다.

 

박윤선 박사는 이 일로 마음에 형언할 수 없는 고독과 아픔을 가지고, 부산 금정산기도원에서 기도하면서 홀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다가 동산교회의 초청을 받고, 196111일 동산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당시 동산교회의 창립멤버로는 새문안교회가 W.C.C 에큐메니칼로 넘어가자, 이에 반대하고 보수신앙을 지키려는 고응진, 김익보, 김지호 장로 등 70여명의 성도들이었다. 박윤선 박사는 동산교회의 담임 목회자가 되었지만, 박윤선 박사가 가는 곳마다 배우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칼빈성경연구원>이라는 신학교가 생기게 되었다. 그 연구원에는 박윤선 박사를 주축으로 <김진홍>, <전칠홍>, <김홍전> 등이 합세해서 교수했다. 1963년에 총신의 주경신학 교수로 임명되자, <칼빈성경연구원>은 발전적으로 합류하거나 해체되었다. 이때부터 박윤선 박사는 총신의 교수로서 198010월까지 일했다. 물론 그사이에 박윤선 박사는 미국에서 주석 집필 관계로 몇 년 동안 가있었으나, 총신의 교수 자리는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박윤선 박사는 1964년에는 총신의 교장으로 시무했다. 그 후 박윤선 박사는 부산 고려신학교에 대항해서 총신 부산 분교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93월부터 198011월까지 총신의 신대원 원장 겸 대학원장으로 봉사했다.

 

19801031일 종교개혁기념일에 당시 신대원장 겸 대학원장이었던 박윤선 박사는, 자신을 포함한 네 분 교수들의 사임서를 함께 제출하였다. 이사회의 독단적 결정에 학교를 떠나게 된 것이다. 198011월에 드디어 합동신학교를 세우게 되고 박윤선 박사는 초대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박윤선 박사는 합신에서 3년간 원장으로 보직을 받고, 그 후에는 명예원장이라 해서 뒤로 물러서 있었다. 다만 박윤선 박사는 노구에도 설교와 가르치는 일들 돕고 있었다.

 

5. 박형룡, 박윤선은 총신의 두 기둥이다.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는 총신의 두 기둥이다. 한 분은 교의신학을 칼빈주의 시각에서 완성했고, 또 한 분은 주경신학을 칼빈주의 시각에서 신·구약 66권을 완성했다. 두 분의 뿌리는 다함께 개혁자 칼빈이었고, 화란 개혁주의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와 헬만 바빙크였다. 박형룡 박사는 프린스톤신학교에서 그레샴 메이첸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박윤선 박사는 새로 출범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메이첸을 만났다.

 

물론 박윤선 박사는 평양신학교 재학시절에 박형룡 박사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박윤선 박사는 미국서 귀국한 후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쳤고, 신학지남 편집을 도왔으며, 총회 표준주석편찬의원으로서 고린도 전·후서를 박형룡 박사와 공동 집필을 했었다. 앞서 말한 대로 두 분은 만주 봉천 신학교에서 함께 교수로 일했고, 두 분 다 고려 신학교에서 교수했다. 그리고 다시 총신에서 두 분 모두 학장으로, 대학원장으로 일했었다. 두 분 모두가 신학적 배경과 삶의 족적이 비슷했다. 한 분은 교의신학을 가지고 정통 기독교를 변증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면, 다른 한 분은 주경신학으로 칼빈주의 사상을 체계화 시키며 지켜왔다.

 

6. 결론

 

박윤선 박사는 한국교회의 어른이시고 특히 한국 장로교의 신학과 신앙을 지켜 오신 분이다. 어느덧 박윤선 박사가 떠난 지 33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측)는 박윤선 박사가 총신과 우리 교단에 끼친, 아니 한국 장로교에 끼친 업적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그 신학과 그 신앙의 유산을 잘 간수하고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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