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연구논문: 죽산 박형룡과 예장총회(2)

발제자: 이상웅 교수

김순정 | 기사입력 2021/04/20 [13:17]

공적연구논문: 죽산 박형룡과 예장총회(2)

발제자: 이상웅 교수

김순정 | 입력 : 2021/04/20 [13:17]

  

박윤선 박사(왼쪽)과 박형룡 박사(오른쪽)  © 리폼드뉴스


한예수교장로회총회와 제105회 총회기념사업특별위원회(총회 훈장 상훈위원회), 총회역사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교단 발전과 위상을 세운 지도자들에 대한 공적연구발표 세미나가 2021.4.16.()에 새에덴교회당에서 열렸다공적연구발표 세미나에서 이상웅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가 발제한 논문들을 요약하여 소개해 본다.

  

한편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10일이 지난 195386일 대구에서 모인 신학교 이사회는 한국인 교장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선임하기에 이른다. 죽산은 한국교회 신학수립의 기초확립이라는 교장연설을 통해 사도적 전통의 바른 신앙의 전통에 굳게 설것을 다짐하면서도, “영적이고 도덕적인 교육에 치중하며, “전도와 목회에 대한 열정을 겸비한 신학생들을 길러낼 것을 천명했다. 아울러 교장으로서 죽산은 외국인들의 원조보다는 전국교회가 신학교에 대한 의무를 이행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박형룡 박사가 교장으로 취임한 1953년은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되는 시점이어서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다. 학교를 서울로 다시 복교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고, 1954년에는 신학지남(191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 기관지로 창간되었으나 1940년에 휴간)을 복간함으로 총신의 역사적 정통성을 천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계간지는 1959년 통합과 교단 분열할 때에도 총신이 지켜내었고 오늘날까지도 본 신학교의 기관지로 남아있다. 1954-1955년 어간에는 북장로교회 선교부의 주선으로 세계 각국의 신학교를 탐방하고 견문록을 남겨주기도 했다.

 

죽산은 1948년 남산에 신학교를 설립할 때부터 이미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유일한 신학 교수였고, 1972년 퇴임하기까지 이 소임을 다했다. 이로서 그에게서 배운 수많은 교단 목회자들의 신학적인 근간을 세워주는데 크게 기여를 했다. 장신의 이종성교수가 신학교수이면서 통합 총회장을 역임한 것에 비해, 박형룡 박사는 직접적으로 교단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길러낸 수많은 제자 목회자들을 통해 교단이 신학적으로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지도했다.

 

일찍이 박형룡 박사의 신학 강의를 통해 우리 교단은 영미 개혁주의와 화란개혁주의 신학을 조화롭게 종합한 아름다운 신학 전통을 가지게 되었고, 바른 신학과 바른 삶의 실천의 균형을 강조하고 실천하는 전통을 수립하게 되었다. 선교사 시대에는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 학생 자원운동(SVM)의 영향을 받은 관계로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무분별하게 전파하는 사례가 많았으나, 박형룡 박사의 지로 덕분에 역사적 전천년설로 방향을 잡을 수가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또 다시 역사적인 교단 분열과 신학교 분열이라는 뼈아픈 시기를 주목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195944회 총회와 더불어 일어난 합동과 통합의 분열의 원인을 박형룡 교장의 행정적인 실책(3천만환 사건)에 그 원인을 돌리려고 하는 이들이 있어 왔다. 남산에서 사용하던 부지를 내어주고, 새로운 신학교 부지를 구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박호근이라는 거간군을 믿고 이사회 결정 없이 학교 공금을 거간비로 지불한 일로 인해 결국 박형룡 교장은 책임을 지고 교장직을 사임하게 되는 일이 발생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교단분열의 심층적인 원인은 오히려 신학적인 문제에 있었다. 이는 WCC에 가입하자고 하는 이들과 이에 반대하는 NAE 계열의 교단 중진들 간의 갈등이 마침내는 교단 분열에 이르고 말았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총회내에 지역별, 계파간 분열도 크게 한몫했다는 점도 부수적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어려운 시기에 박형룡 박사는 일찍부터 W.C.C.의 실체와 동향을 잘 살펴서 통일 교회 수립이라는 목표에 대하여 비판을 함으로 교단 목회자들이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바른 판단을 할 수가 있도록 신학적인 지로를 하였다. 다시 강조해서 말하자면 1959년 교단 분열의 근본 원인은 에큐메니컬 운동을 둘러싼 입장 차이가 주된 것이었고, 기타 여러 가지 문제들이 얽혀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이 속한 진영에 따라 강조점의 차이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문제이지만, 이제는 역사적 거리 두기(historical distancing)가 가능한 때이기 때문에 보다 더 공정하고 객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3.2. 후기 박형룡 박사의 활동(1959-1972)

 

195944회 총회시에 에큐메니컬 문제를 둘러싸고 통합과 합동이 교단 분열한 후인 1960924일에 박형룡 박사는 다시금 총신의 교장으로 복직하였다. 박용규의 평가대로 박형룡 박사의 리더십은 신학교 발전에 매우 중요하였던 시기에 총신은 처해 있었다. 교명도 장로회총회신학교에서 총회신학교가 되었고, 문교부 인가는 장로회신학교 측이 가져가서 총회신학교는 무인가 신학교였다. 교사도 갖추지 못하여 용산의 한 건물에서 몇 년간 강의를 해야 했다. 어려운 시기에 죽산은 신학교 행정 책임자로 수고를 했고, 고신과의 합동 그리고 환원이라는 교단적인 변화의 중심에도 서게 되었다.

 

한편 학교 교사를 마련하기 위한 교단적인 노력이 경주되어 1966년 백남조 장로가 사당동 부지를 제공하고, 1967년에는 재단인가를 받고, 1969년에는 대학 인가를 받기에 이른다. 사당동 부지에 1965년 여름부터 시작한 신학교 건축은 196712월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도약의 시기인 1969년 죽산은 7대 교장으로 추대되었고, 그 해 문교부로부터 총회신학대학 인가를 받게 됨으로 초대 학장이 되어 19722월까지 재임하게 된다. 이 시기는 경제적으로도 많이 힘든 시절이라 교수 급여가 몇 달씩 체불되기도 하던 시절이었으나, 박형룡 교수와 다른 교수들은 인고하며 기도로 버텨내고 자신의 소임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학교 재정 악화를 감당하지 못한 이사회는 사당동 부지 매각 계획을 세우고 비밀리에 추진하다가 학내사태가 발생하였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초대학장이던 박형룡 박사는 학장직을 사임하기에 이른다. 1948년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우고 교수와 행정 책임자로 총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죽산의 공적 활동은 이렇게 쓸쓸하게 끝이 나게 된 것이다. 많은 이들은 죽산이 신학 교육자로서나 교단 신학의 정초자로서 독보적으로 기여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교육행정가로서의 그의 부족함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3.3. 은퇴후의 활동(1972-1978)

 

죽산은 75세가 되던 1972년 초 총신에서 은퇴하고, 봉천동 자택에 머물면서 저술 출간 준비에 진력했다. 1964년에 시작한 교의신학 전집 간행을 1973년에 완성했고, 1975년에는 40년 전에 출간했던 근대신학 난제선평을 개정하여 현대신학 난제선평으로 출간하였다. 그리고 197512월에는 서울노회 공로목사로 추대되기도 했다. 죽산은 1976년 가을 신학지남에 마지막 글을 기고하였는데, 제목은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라는 제하의 글이었다.

 

이 짧은 기고문을 통해 죽산은 선교사들이 전해주었고, 자신이 반세기 동안 가르쳤던 한국 장로교 신학 전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간략하게 정리해 주었다. 죽산은 영미장로교회 신학에 유럽 개혁주의 신학을 보완시킨 한국형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 장로교회 정체성이라고 역설했다. 세부적으로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구현된 칼빈주의 신학과 경건한 삶과 실천의 균형을 강조했다. 죽산은 일찍이 청소년기부터 시작해서 소천하기전 노년에 이르기까지 개인적 경건 생활과 가정적 경건 생활에 일관되게 힘쓴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한편 죽산이 소천하기 직전에 죽산을 존경하는 교계의 여러 목회자들이 힘을 모아 죽산 전집을 간행하기로 결정하고 재원을 마련해 주었고, 죽산은 저작 전집 간행을 준비하는 일에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7권은 1977년에 간행되기 시작하여, 1983년에 20권 저작전집이 완성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죽산 박형룡은 저작 전집이 간행되기 시작한 후인 19781025일 이른 아침 봉천동 자택에서 소천했다. 81세의 노령이었으나 큰 지병없이 전날까지 건강하게 원고 작업하다가 잠들고 이른 아침 시간에 심장마비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은퇴후에 거리가 멀지도 않으나 스스로 방문하지 않았던 총신대학교 교정에서 19781027일 총회장으로 장례예배가 드려졌다.

 

그러나 죽산의 은퇴후부터 사반세기 어간 예장합동 내부에서는 죽산 신학에 대한 평가나 공인 작업이 부진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1970-1980년대 교단 상황이 그러했고, 총신의 상황도 그러했다. 오히려 죽산이 소천한 후 처음으로 그의 신학에 대한 평가 작업을 해준 곳은 예장합동이나 총신이 아니라 한신대학교의 신학사상의 지면을 통해서였다. 죽산의 신학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들(이종성, 주재용)과 긍정적인 평가들(박아론, 신복윤)이 지면상에 수록되었다. 그러다가 죽산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박용규교수의 편집하에 수 십명이 참여하여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단행본이 출간되기에 이른다.

 

1997년에는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양지캠퍼스에서 제1회 죽산기념강좌가 개최되었고, 1998년에는 총신 출신인 장동민박사가 박형룡의 신학적 전기를 연구하여 박사논문을 썼고, 2019년에는 양지 도서관이 박형룡 박사 기념 도서관으로 명칭 변경되기에 이른다. 또한 난해하고 어려운 문체로 되어 있는 죽산의 교의신학 전집 개정판 작업도 김길성 교수와 제자들의 수고에 의하여 2017년에 출간됨으로 한자나 고어체에 약한 세대들이 읽을 만하게 편의를 도모해 주었다.

 

죽산 박형룡 신학에 대한 연구 작업은 현재 신학계에서도 논의중일 뿐 아니라, 한국 장로교회사와 관련해서도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논자는 판단한다. 특히 1979년 주류와 비주류의 분열 때에도 죽산 신학은 초점에 놓여있었고, 2005년에 다시금 예장합동과 예장개혁이 교단합동을 한 이후 현금에 이르기까지 죽산 박형룡의 신학은 교단 연합의 주요한 명분내지 초석중 하나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예장합동과 총신은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도 죽산 신학을 더욱 더 연구하고 계승해야 할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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