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연구논문: 죽산 박형룡과 예장총회(1)

발제자: 이상웅 교수

김순정 | 기사입력 2021/04/17 [18:45]

공적연구논문: 죽산 박형룡과 예장총회(1)

발제자: 이상웅 교수

김순정 | 입력 : 2021/04/17 [18:45]

   

▲ 1947년 10월 14일 박형룡 박사가 부산 교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고 있다. 취임사를 낭독하고 있는 박박사 좌측에 박윤선 박사의 모습이 보인다. ©리폼드뉴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와 제105회 총회기념사업특별위원회(총회 훈장 상훈위원회), 총회역사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교단 발전과 위상을 세운 지도자들에 대한 공적연구발표 세미나가 2021.4.16.()에 새에덴교회당에서 열렸다. 공적연구발표 세미나에서 이상웅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가 발제한 논문들을 요약하여 소개해 본다.

 

1. 들어가는 말

 

예장 합동 교단은 신학적 정체성에 대한 관심과 WEA나 로마교회 등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등의 문제가 뜨거운 화두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예장 합동은 1959년 예장 통합과 분열하면서 생겨난 교단명이지만, 그 시작은 1912년 조직된 대한예수교장로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단 신학교는 1901515일 마포삼열 선교사의 자택에서 시작된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기원으로 삼아, 현재도 총신대학교는 졸업 기수를 산정하고 있다.

 

따라서 예장 합동의 신학적 정체성을 따져묻는

일은 이러한 역사적인 연속성의 맥락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일반적으로 그렇게 진행되어 왔다. 특히 예장합동의 신학적 정체성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는 죽산 박형룡(1897-1978)의 신학을 중요한 참조점(reference point)으로 삼지 않을 수가 없다.

 

매년 강도사 고시 조직신학 과목은 여전히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전집에 제시된 신학적 내용들이 여전히 근간을 이루고 있고, 신학적인 문제와 관련된 토론이나 논쟁에는 항상 죽산은 무엇이라고 말하였는가를 묻곤 한다. 또한 신학교(seminary)의 어원(seminarium)이 모판을 의미하듯이, 신학 교육은 그 교단의 미래를 결정지을 수밖에 없다. 죽산은 직접적으로 교단 정치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오랜 세월 동안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교육에 전념하면서 교단 지도자들을 길러내었기 때문에 그가 교단에 차지하는 기여에 대해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죽산 박형룡과 예장합동의 관계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앞서 밝힌대로 예장합동은 한국 최초의 장로교 총회와 연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단 8.15 광복이후의 시기만 아니라 일제 시대하의 한국 장로교 시기도 포함하여야 한다.

 

죽산은 선교사들이 세운 한국 장로교회의 일원으로 신앙 교육을 받고, 선교사들의 후원에 힘입어 유학을 했고, 귀국한 후에는 장로회신학교 교수직에 취임하여 중요한 기여들을 했기 때문에 먼저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로서 죽산과 한국 장로교회의 관계를 규명해야 한다고 본다(2).

 

그러고 나서는 해방 이후 죽산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시기에 대해서 논구해 보게 될 것이다(3).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죽산 박형룡과 한국장로교회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라는 점이고, 점점 그의 기여와 역할을 잊어가고 있는 세대들에게 역사적 정체성을 잘 가르쳐야 할 필요성을 재각성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한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은 여기서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13:7).

 

2. 죽산 박형룡과 해방 이전의 한국장로교회

 

죽산 박형룡이 한국 장로교회와 연관을 맺게 된 것은 어린 시절 서당 선생의 인솔하에 서양식 웅변을 듣기 위해 나가기 시작한 벽동읍 교회 출석때 부터이다. 가세가 빈한하여 선천 신성학교 시절에는 고학을 해야 했는데, 이 시기부터 선교사들의 영향과 지원을 힘입는다. 1916년에 경제적 지원을 얻어 평양 숭실전문에 입학하게 된 죽산은 서양식 대학 교육과 성경 교육을 받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마포삼열 선교사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죽산의 초기 형성 과정을 살펴 보면, 그는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신앙의 골격을 세워가게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심지어는 그의 노년에 쓴 글속에서 조차도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가 있다.

 

죽산은 숭실전문 졸업 후 10개월간의 옥고를 치루고 만기 출소한 후에 중국 남경 금릉대학교에 편입하여 문학사학위를 받음으로 미국 유학 요건을 갖춘다. 선교사들의 권면에 따라 죽산은 프린스턴신학교에 진학하여 3년 만에 신학사(B.D.)와 신학석사(Th.M.) 과정을 다 이수하였고, 졸업후에는 남침례교신학교에 등록하여 변증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시작해 1년 만에 과정 이수를 마치게 된다.

 

도합 4년이라는 짧은 미국 유학 기간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한 죽산은 평양 산정현교회 교역자로 사역하면서 정착 과정을 밟게 되고, 1931년 봄학기에 장로회신학교 변증학교수로 임용이 되었고, 변증학, 현대신학, 기독교윤리 뿐 아니라 성경과목들도 가르치게 된다. 그의 앞서 1925년에 남궁혁이 교수로 임용되고, 1929년에 이성휘가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이 세 사람의 임용으로 말미암아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학적으로 든든히 세워져가는 계기가 된다.

 

죽산 박형룡이 평양에서 교수한 만 7년 기간 동안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었고, 신학지남을 통해 60여 편에 달하는 논문들을 기고하였다. 이 시기의 그의 주저는 193511월에 출간한 기독교근대 신학난제선평: 학파편이라는데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한국장로교선교사에 있어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작품인 이 저술을 통하여 죽산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 20세기 초반 현대신학의 동향과 문제점들을 낱낱이 밝히고 개혁주의 신학과 무엇이 다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을 장로교 목회자들에게 제공했다. 이러한 대작에 힘입어 해방 이후 조선신학교에 재학중이던 정규오, 차남진, 신복윤 등 51인 학생들은 김재준의 성경관에 문제가 있음을 밝히 깨닫고 저항의 목소리를 낼 수가 있었다.

 

죽산은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직시절이던 1935년에 개최된 총회에 창세기 저자 문제와 여권 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에 기여하였다. 위원장은 라부열이었으나, 보고서는 박형룡 목사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193524회 총회 결정에 따라 표준성경 주석 편집 책임을 맡음으로 교단 신학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근거한 정통 칼빈주의를 확고히 할 수있도록 크게 기여했다. 그래서 일찍이 김양선목사는 한국기독교해방10년사에서 초대 선교사들의 보수 신앙에 기초하여 확립된 한국교회는 제일 희년에 이르러서는 한인 보수주의 신학자에 의하여 지도되고 있음이 역연하게 되었다.”고 평가한 것은 과언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신학교와 한국 장로교회에 신학적인 리더로서 우뚝 세운바 되었지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인하여 난항에 부닥치고 만다. 죽산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다가 후일을 기약하기 위하여 동경으로 건너가 표준 주석을 편집하는 일에만 전념하면서 은거 생활을 하기에 이른다(1938-1942).

 

그러다가 19429월에 만주 봉천신학원(후에 동북신학교로 개명)의 교수로 초빙되어 대동아 전쟁 기간이라 혼란스러운 시기였지만 소수의 정통주의 목회자들을 양성하기에 진력했다. 이 시기에 죽산은 처음으로 조직신학 전 분야를 홀로 가르쳐야 했는데, 그는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의 조직신학(1932, 1941)을 교본으로 삼아 강의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가 전수받은 영미 장로교 신학에 벌코프를 통한 카이퍼와 바빙크의 화란 개혁주의 신학을 조화롭게 종합함으로 그 자신이 명명한 한국형 청교도 개혁신학의 틀을 만들어 내었다. 해방 이후에도 이러한 방향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강의안을 십 수년간 증보한 끝에 교의신학전집(7; 1964-1973)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3. 죽산 박형룡과 해방 이후 한국장로교회

 

1945815일 한국은 일제의 마수에서 독립을 했지만, 남북 교회 상황은 어지러웠다. 북한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기에 위험해졌고, 남한에는 김재준 등이 주도하고 가르치는 조선신학교만 존재했기에 해방이 되어도 죽산은 쉽사리 귀국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귀국을 결심하게 된 것은 부산 고려신학교의 초청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죽산은 남은 생애는 서북지방이 아니라, 남한 지역을 주 무대로 하여 활동하게 된다. 이 시기를 몇 개의 시기로 나누어서 고찰해 보려고 한다.

 

3.1. 귀국후 초기 박형룡 박사의 활동(1947-1959)

 

앞서 말한대로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초대를 받아 죽산의 가정은 인천항을 통해 입국해서 부산에 내려가서 교장으로 취임하여 남한에서의 사역을 시작하게 되는데, 한상동 목사와 여러 가지 면에서 의견 차이가 생겨나 7개월 만에 죽산은 부산을 떠나 상경하기에 이른다.

 

귀국을 결심할 때의 죽산의 마음에는 오로지 정통 개혁신학으로 무장된 교역자를 양성하여 자유주의 물결에 대항하고, 후대 교회를 만세반석 위에 세우고자 하는 데있었고, 그렇게 하려면 미국 장로교선교부와 장로교 총회의 지지를 받는 신학교를 세워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고신이 전체 교단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고립에 빠지게 되자, 총회가 인정하는 전국적인 신학교를 세우기 위하여 1948년에 상경하여 총회 여러 원로들과 협력하여 6월에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박형룡 박사는 이 학교가 1938년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던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계승한다고 역설했고, 69일에 열린 신학교 특별기도회 시간을 통해 오늘날 총신의 교훈이 되는 5()을 처음으로 공표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신학교(김재준 목사)와 신학적인 갈등 속에 있던 남한의 장로교회로서는 박형룡 목사의 이러한 용단에 힘입어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교단 신학교를 비로소 가지게 된다. 1949년에 열린 장로회 총회는 장로회신학교를 총회직영신학교로 인준해 줌으로 총회내에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라는 두 개의 신학교가 생겨나게 되었고,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총회적인 노력을 기울였지만 조선신학교측의 반발로 인해 성공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951년 총회는 두 신학교의 인준을 취하하고, 새로운 인준 신학교를 대구에 설립하기로 가결하고, 1951918일에 정식 개교를 하기에 이른다. 교장은 감부열선교사가 맡고, 박형룡 박사는 교수진에 합류하게 되었다. 김요나의 평가대로 이러한 시작은 보수 계열의 승리를 의하는 것이며, 해방후 5년 동안 빼앗겼던 교계의 신학적 헤게모니를 탈환했다는 큰 의미를 가지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해방이후 5년간은 조선신학교와 김재준의 신학 노선 문제로 남한 장로교회 총회는 끊임없는 진통을 겪어왔기 때문에, 장로회총회신학교의 설립은 총회내에서 보수적인 신학 노선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간의 박형룡 박사의 신학적 지로가 맺은 결실이라고 평가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죽산은 전 장로교회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신학교 교육에 있어 정통 개혁주의 노선을 확립하는 것이 자신의 천명이라고 생각해서 일로 매진했고, 그의 소망은 당시 총회 주류 인사들의 협력에 힘입어 제도적으로 성취될 수가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6.25민족 상쟁의 시기(1950-1953)와도 겹쳐있음을 잘 알고 있는데, 전쟁 기간 동안 죽산 박형룡의 활동은 신학 교육에만 제한되지 않았다는 점을 잠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 전쟁 기간 동안 박형룡 박사는 부산초량교회에서 열린 교역자 수련회에서 11번이나 설교를 하면서, 회개와 화합의 메시지를 외쳤다.

 

1945년 해방 후에 신사참배에 참여한 교역자들의 자숙과 자정을 요구했으나 관철할 수 없었는데, 이렇게 전쟁이라는 시련과 회개의 집회를 통해서 그러한 자정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고 죽산은 판단하고, 양자간에 서로 정죄하지 말고 화합할 것을 권면했다. 물론 박형룡 박사와 가족들도 동족상쟁의 전쟁으로 인한 피난 생활과 궁핍한 삶의 어려움을 감내하면서도 신학교 교육과 집회 설교들을 감당해낸 것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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