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산책(3) 2:1-11/ 대언자

김순정 | 기사입력 2013/07/08 [13:38]

요한일서 산책(3) 2:1-11/ 대언자

김순정 | 입력 : 2013/07/08 [13:38]

 

1절에 보면 요한은 이 성경을 성도에게 쓰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죄를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1:3-4절에서 본서의 목적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그 기록 목적을 밝힙니다. 성도로 하여금 이 성경을 집중해서 읽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1절을 계속해서 보면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는 빛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둠의 삶 즉 죄를 범하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는 영화의 상태가 아니라 성화의 상태로 여전히 죄악의 습관이 남아 있어 죄를 즐겨 행합니다. 만약 그렇더라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는 죄를 마음 놓고 지으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실수로 죄를 범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대언자가 있다는 차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대언자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대언자 paravklhto"는 ‘중보자, 위로자, 변호사, 대변자, 중재자, 돕는 자’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가 되어 주시고 대변자가 되어 주신다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는데 실수로 죄를 지었습니다. 습관을 따라 죄를 지었습니다. 그럴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지옥에 가야 합니까? 그것이 아니라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니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2절에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십니다. 우리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시는 것입니다. 화목제물 iJlasmov"은 ‘달램, 속죄물, 달래는 수단’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원래 이 화목제물은 레 7:11-34절에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은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막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입니다. 그 화목제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가 있어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온 세상은 모든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 모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화목제물의 범위와 효과를 가지고 신학에서는 보편속죄, 가설적 보편속죄, 제한속죄등의 주장이 있습니다. 보편속죄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고 그 효과도 모든 인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다 구원받는다는 주장입니다. 가설적 보편속죄는 아미랄드주의로 불립니다. 범위는 전체 모든 인류이지만 효과는 택자들만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 택자들은 그들의 신앙과 회심의 조건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의 조건 위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제한 속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 모두를 위해 죽으시고 그 효과는 이들에게 주어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의 계명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들을 지키는 것은 성도의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를 안다고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4). 이들은 그 속에 진리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를 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치 않는 거짓말쟁이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그 안에 없기 때문에 진리가 그 안에 거할 수 없습니다(요 14:23). 이는 영지주의 이단의 사상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5절에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남녀노소, 인종, 언어를 떠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되었다는 증거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6절에 하나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와 신실과 사랑으로 행하십니다. 그 백성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태도입니다.

어떤 교회에 목사님이 예배 때마다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사랑합시다. 예수님을 따라 기도합시다. 성령님을 따라 전도합시다.’ 그런데 그렇게 외칠 때마다 속으로 ‘너나 잘하세요’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그분이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성도에게 그렇게 살라고 강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7절에 요한은 새 계명이 아니라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을 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8절에 다시 요한은 새 계명을 쓴다고 합니다. 이는 7절에 옛 계명을 다시 새 계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언제나 옛 계명은 동시에 새 계명인 것입니다. 그렇게 쓴 이유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으로 어둠이 사라지고 죄악된 세상에 사랑의 빛이 비추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으로 오신 것입니다. 성도는 그 하나님이 주신 계명의 의미를 알아야 하고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계명의 완성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는 그 계명을 생활의 규범으로 삼고 지켜 행해야 합니다.

9절에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찌된 것인가?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입니다. 입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신앙인의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은 거짓된 신앙입니다. 10절에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고 사랑치 않는 것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 참으로 구원받은 자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당시 많은 이단들이 이러한 주장을 폈습니다. 구원받았다면 생활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무시하고 미워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삶을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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