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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신학대학에서 합신으로 분열(1980)
(리폼드뉴스) 한국의 장로교회는 미국의 북장로회와 남장로회를 비롯하여 호주 장로교회와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부가 파송한 한국 주재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성장하게 되었다.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복음이 증거된 초기부터 각 지역에 복음이 증거되고 아직 교회가 설립되어 성립되기 이전에 한국인 중심의 믿음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공동체에 선교사들이 직접 관리하고 설교를 할 수 없었다. 이런 경우, 북장로교 선교부가 마련한 피선교지 한국에서의 선교와 관련한 규범이 1891년에 마련되었다. 선교사를 도와 함께 사역했던 한국인 중심의 직분을 열거했다.
그리고 당시 유교적 윤리의식 의해 여성에게 접근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여성 선교사들로는 한계가 있었다. 선교사들을 도와 여성에게 접근하여 전도하기 위해 전도부인이 있었다. 이들 역시 철저히 선교사 들로부터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조사들이 있었다. 선교사들로만 감당하기 힘들었다.
선교사들의 일꾼 양성
그래서 선교사들을 돕고 교회들을 돌보는 조사들이 있었다. 조사 제도가 도입된 것은 1891년이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편에 의하면 최초의 조사는 백홍준이었다. 조사는 유급으로 사역하였다. 그러나 선교사와 조사가 미치지 못한 지역과 교회를 위해 무보수인 영수(領袖)직을 두었다. 이는 북장로교 선교부가 제정한 선교규범에 의한 직분들이었다.
1890년 초가을 언더우드는 자신의 사랑방에서 신학반(Theological Class)으로 모임을 갖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경회였지만 피선교지인 한국에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시작하였다. 각 지역 사경회에서 우수한 사람을 서울의 언더우드의 신학반에서 훈련을 했다. 이곳 교육을 통해 성경, 교회, 치리 등의 교육이 이루어졌다.
1901년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설립하고 초대 교장이었던 마포삼열(S. A. Moffett) 선교사는 1916년 신학교 약사에서 신학교가 신학반의 발전으로 성립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마포삼열, “장로회신학교약사,” 『神學世界』 제1호(1916), 164.).
장로회 합동 공의회에서 신학교 설립을 결의(1901)
교회 성장에 따른 지도자의 필요성과 네비우스 선교방식에 따라 1901년 장로회 합동 공의회에서 신학교 설립을 결의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편, 82). 학교 장소를 두고 경성(서울)과 평양이 거론되었지만 평양으로 결정되었다. 학교 이름은 ‘대한야소교장로회신학교(大韓耶蘇敎長老會神學校)’라고 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한 강제 병탄 후에 ‘대한’이 ‘조선’으로 변경되었다. 이렇게 하여 평양에 장로회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이 학교는 1938년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로 스스로 문을 닫았다. 1940년에 일제 의해 선교사들에 대한 강제 출국으로 이어졌으며, 문을 닫은 신학교는 결국 문을 다시 열지 못하였다.
이러한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남산에서 장로회신학교가 개교(1948. 6. 3.)되었다. 이 신학교는 총회신학교, 총회총신대학과 총신대학교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총신대학교는 총회가 설립한 신학교로 총회의 지도자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1980년에 와서 총회총신대학(총신대학교)에서 학생 소요사태로 인해 일부 학생들과 교수들이 이탈하여 합동신학교(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전신)를 설립했다.
방배동 총회신학교로 분열(복구)
복구신학교의 이사장은 정규오 목사였고 초대학장 서리로 박영환 목사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박아론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렇게 하여 1979년 1월에 총회신학교가 복구되었다. 총회총신대학 뿐만 아니라 총회는 지각변경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1979년 2월 6일과 7일에 긴급 총회총신대학 법인 이사회와 정체이사회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박아론 교수는 소위 복구신학교에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므로 파면하는 결의를 하였다. 그해 전국 춘계노회에서는 복구신학교에 학생들을 추천하지 않기로 하고 불법성을 규탄하며 불법신학교로 규정했다.
총회 정치교권 세력이 신학교로 몰려오다
역사적으로 언제나 총회와 신학교의 교권이 서로 연계되어 있었으며, 총회와 신학교의 교권을 장악하려는 보이지 않는 정치적인 암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만큼 신학교의 교권은 총회의 교권을 장악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반대로 총회의 교권은 신학교의 교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총회와 신학교의 교권에서 중심에서 벗어난 세력이 새로운 중심교권 장악에 실패하자 명분론으로 총회총신대학의 좌경화를 주장하며 별도로 총회신학교를 복구하였다는 평가가 있었다. 이런 형식이 아니면 복구신학교를 설립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총회총신대학의 좌경화 논리는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총회총신대학 개혁안’ - 운영주체 개편
대학원은 이미 1978년 2월 15일에 문교부로부터 인가 받은 상태였다. 신학석사 과정(Th.M.)과 기독교 교육 석사과정(M.A.)을 인가받아 운영해 왔다. 이 과정의 입학자격은 4년제 정규대학을 졸업한 자라야 했다. 대학은 문교인가를 받은 과정으로 신학과 종교교육학과, 종교음악과 등 3학과였다.
다음은 신학연구원이다. 이 과정은 대학 졸업자가 입학할 수 있으며 3년 6학기 과정이었다. 마지막으로 교역자연수원은 고등학교 졸업한 자로서 만 27세 이상된 자로서 목회경험이나 시무장로 경력 3년 이상 된 자가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또한 지방신학교 졸업자는 만 30세 이상으로 목회 경험이나 시무장로 경력 5년이었다. 여교역자 연수원도 있었다.
방배동 총회신학교 분열 후에도 계속된 소요
방배동 총신으로 떠날 학생들은 다 떠난 후에 계속하여 총회총신대학 운영 문제에 비리가 있다는 학생들의 성명서가 나돌기 시작했고 결국 수업거부사태가 일어났다. 1979년 9월 총회가 파회된 후 그해 10월 26일 10ㆍ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되어 전국이 계엄령 하에서 학교는 정상수업을 할 수 없었다.
학생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기숙사 시비에 대하여, 조경사업에 대하여, 학교 운영 경상비에 대한 4억 5천 만 원에 대한 정치자금 설에 대해 감사결과 전혀 사실무근임이 밝혀졌다(김요나, 「총신대학교 100년사」, 490.).
교수회는 다시 3일 후 신학원 3명의 학생들에 무기정학을 처분하여 이 역시 공고했다. 이러한 교수회의 강경 대응은 학생들의 강경한 시위로 연결되었다. 이때 내건 구호는 “이영수 물러가라”, “학장 김희보는 사퇴하라”였다. 이들은 호남과 황해도 세력으로서 교권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으나 1960년 대 말부터 1970년에 이르러 교권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했으나 분열 전후하여 중심에서 주변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는 1979년 합동보수의 분열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학생 소요 사태를 위한 박윤선 박사 학장 서리 임명
학내 시위는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교수 이사들의 차량 5대가 파손되는 폭력 시위는 계속되었다. 사태의 책임을 지고 김희보 교수가 사표를 제출했으며, 이사회는 1980년 4월 11일에 이사회를 소집하여 사표를 수리하고 박윤선 박사를 학장 대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사직서를 낸 신복윤, 김명혁, 윤영탁, 정성구, 차영배, 박형용 등 6명의 교수에 대해 사직서를 반려했다. 박윤선 박사는 7월 8일 소집된 이사회에 학장 직무대행직을 사임할 의사를 보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9월 신학기 개강에 맞추어 귀국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미국으로 출국하고 말았다.
학생들의 경리 부정 고발 사건, 무혐의 - 사라진 명분
개혁신학교(가칭) 개교
위와 같은 공고문은 이미 일부 교수들과 내통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내용이다. 학생들만으로 새로운 신설학교가 설립될 수는 없다. 이미 총회총신대학 일부 교수들이 신설 학교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980년 10월 23일(목) 경건회 시간이 끝나자 주동 학생들은 광고를 통해 ‘합동신학교’의 개교를 알렸다.
총신의 부패와 개혁을 주장하면서 신설학교에 합력할 것을 선동했다. 이렇게 하여 700여 명의 학생 중에 400여 명이 신설학교로 떠나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1980년 9월에 문교부에 제출한 신학대학원 인가가 11월 3일에 승인되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떠났던 학생 중에 300여 명이 다시 돌아왔다. 신설 신학교로 떠난 학생은 겨우 150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
신학대학원 인가
방배동 총신은 신학 좌경화 합신분열은 총신 부패 주장
<설립취지>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에 소재한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연혁에 의하면 “1980. 11. 11.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을 이념으로 하여 참신한 혁주의적 신앙운동과 생활운동을 펴 나아갈 것을 염원 하면서 서울시 강남구 반포동 271-45 소재 남서울교회에서 합동신학원을 개교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박윤선 박사가 1980. 11. 18.에 합동신학원 초대원장에 취임한 것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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