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 역사를 통해 본 제105회 총회장 정체성

소재열 | 기사입력 2020/08/28 [23:15]

총회 역사를 통해 본 제105회 총회장 정체성

소재열 | 입력 : 2020/08/28 [23:15]

 

 

【(리폼드뉴스)알렌 선교사가 본국에 보고한 자료에 의하면 당시 한국 인구는 1,500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 중에 경성(서울) 인구는 30만 명으로 추산한다. 외국의 선교사들은 인구가 가장 많은 서울에 근거지를 두고 선교활동을 하였다. 미국 북장로교선교회는 서울지부를 개설하고 이어 이북에는 평양지부, 남쪽으로는 부산지부를 개설했다. 부산지부가 개설될 당시인 1892년에는 장차 호남을 선교지로 활동할 미국남장로회 7인 선발대가 입국하였다.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선교활동으로 평안도와 황해도는 장로교회의 중심지역이 되었다. 이 지역을 소위 ‘서북지역’이라 한다. 특히 평양은 ‘서북지역’의 중심지로서 한국교회와 장로교회 전체를 지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북장로교선교회의 평양지부에는 1940년에 28명의 가장 많은 선교사들이 상주하며 활동하였다.

 

평양에는 남자 교역자를 양성하는 평양신학교가 있었으며, 여성 교역자를 양성하는 1923년에 설립된 신학교를 대신하는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가 있었다. 또한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외국인 학교가 1900년에 시작하였다. 이 외에도 숭실전문학교가 있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도 주로 평안도 지역에 이루어졌다.

 

총회에 출석한 총대들의 철도비를 비롯한 모든 경비를 총회가 부담하였으므로 총회 장소는 총회 재정부의 소관이었다. 총회는 재정문제를 이유로 여러 지역의 총회 유치를 거절하고 주로 평안도 지역을 총회 장소로 결정하였다. 제31회 총회(1942) 때까지 평안도에서 18회, 경성 5회, 전라도 2회, 경북 2회, 황해도 1회 개최하는 등으로 미루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의 모든 활동이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자 비서북지역의 경계와 반발은 더욱 심해져갔다. 비서북인 미국 남장로교선교회의 선교지역인 호남, 호주 장로교회의 선교지역인 경상남도, 캐나다장로교회 선교지역인 함경도, 서북지역의 미국 장로교선교회 선교지역인 경충과 경북지역은 서북지역과 갈등 관계에 있었다.

 

호남지역은 미국 남장로교선교회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보수적이었다. 미국 북장로교선교회 선교사들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었다. 예컨대, 미국 남장로교선교부가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하자 교육사업을 전면 철수에 비해 미국 북장로교선교부는 경성과 평양 선교사들의 대립으로 다소 애매한 태도를 보인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호남세력은 서북세력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서북세력보다는 경충세력과 연합하여 반서북 입장을 취해왔다. 서북세력에 대한 반격 총회라 할 수 있는 1936년 제25회 총회(총회장 이승길 목사)가 전남 광주(양림교회)에서 개최되었다. 광주총회 직후에 남부지역의 노회들이 총회 분립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결의까지 하게 될 정도였다(『基督敎報』, 1936. 11. 17.자).

 

호남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던 경충지역은 서북지역과 가장 심하게 대립되었다. 경충지역은 교세 면에서 평양이나 서북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세였지만 그 위치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수도와 수도권이라는 위치 때문에 교세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많은 선교사들이 서울에 주제하고 있었으므로 이런 배경으로 경충세력이 서북세력을 대항할 수 있었다.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서북지역의 영광스러운 선교역사와 일제강점기의 암흑의 터널을 거쳐 오면서 교회는 혹독한 환난과 훈련을 받았다. 1945년 해방이후 1946년 6월 11일 남부총회(이 총회를 제32회 총회로 한다)에서 1940년 4월 11일에 개교한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가했다. 제34회 총회(1948년 4월 20일)에서 자유주의 신학으로 흐르는 조선신학교를 개혁하려고 시도했으나 완강한 반대로 거부되었다.

 

그러자 ‘신학교 문제 대책위원회’의 주도하에 1948년 5월 20일에 대안으로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가결하고 이사장에 이정로 목사, 교장에 박형룡 박사를 임명했다. 드디어 1948년 6월 9일에 남산에 장로회신학교(교장 박형룡 박사)가 개교되었다. 전국의 각 노회에서는 개교 다음해인 제35회 총회(1949년)에 장로회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준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총회는 표결로 51:37로 직영하기로 가결했다.
 

1912년 총회조직  © 리폼드뉴스


이제 총회 내에는 직영신학교가 조선신학교, 장로회신학교 두 개가 되었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총회는 두 신학교를 동시에 운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두 신학교를 합병하기 위해 ‘신학교 합동위원회’를 조직하여 합동하려 했으나 신학적인 문제, 이사회의 문제 등으로 합병에 실패했다. 합동이 좌절되자 총회는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제36회 총회(총회장 권연호 목사, 1950. 4. 21)가 대구제일교회에서 회집되었다. 총회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신학교 문제였다. 양 신학교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립의 연속이었다. 결국 총회는 무장경찰관까지 동원되는 난투극의 상황 속에서 총회를 계속 진행할 수 없었다. 결국 비상정회 되고 말았다.

 

그해 전쟁으로 속회하지 못하고 다음해인 제36회 속회 총회(1951. 5. 25)를 부산중앙교회에서 회집하여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는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총회 직영신학교를 신설하기 위하여 과도 이사를 총회에서 선정하되 과도 이사는 각 노회 대표 2인과 각 선교회 대표로 한 신학위원으로 하기로” 가결하였다.

 

해방 이후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는데 5년의 세월이 지난 시점에서 6.25 전쟁을 맞이하였다. 집과 교회를 공산당에게 빼앗기고 월남한 목회자들이 개신교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제37회 총회(1952)가 대구서문교회에서 회집되었다. 이 총회에서 월남한 목회자들 중심의 이북의 10개 노회(평양, 평북, 안주, 평동, 용천, 황해, 황동, 평서, 함남, 함북)를 받았다.

 

 박형룡 박사와 김재준 박사 © 리폼드뉴스

이북의 10개 노회가 이남에 무지역노회(서북지역노회)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무지역노회가 탄생하였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서북세력과 비서북 세력의 치열한 지역갈등은 1940년에도 계속되었다. 40년대 초반에는 서북지역인 평안도와 황해도 세력이 서로 갈라지는 양상이었다. 해방이후 만주 봉천신학교에 있던 박형룡 박사가 돌아오고, 부산에 사설 고려신학교가 설립된 이후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인 미래는 박형룡 박사 중심으로 70년대까지 이어졌다.

 

월남한 서북지역인 평안세력과 황해세력 중에 박형룡 박사와 호남의 정규오 목사 중심은 황해세력과 연대했고 이영수 목사 중심의 영남세력은 평안세력과 연대하여 총회는 언제나 두 세력간의 우위의 다툼과 갈등이 해방 이후 제64회 총회(1979)까지 이어졌다. 적어도 실권세력인 호남과 황해세력은 1960년 후반까지 교단총회의 교권을 장악했다. 이를 우리는 주류측이라고 한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주류측은 영남과 평안도 세력 중심의 이영수 세력들에게 침식당하였다. 일명 비류측이 주류측을 극복하고 교단총회의 전면에 등장한 실권세력들이 되었다. 이같은 세력에 의해 박형룡 박사는 1972년에 총신대학교의 교장직에서 의원 면직되고 이영수 목사의 김희보 학장 체제가 들어섰다.

 

 

1978. 10. 25.에 박형룡 박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동안 교권을 지탱해 온 호남과 황해세력들은 정신적인 지도자를 잃었다. 박형룡 박사가 세상을 떠난지 1개월 20일 만인 12월 15일에 정규오 목사는 총신대학은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직영하는 신학교로서는 완전히 이탈하여 신학적으로나 행정적으로나 운영적인 면에서 사실상 관계가 없게 되었음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를 복구하여 명실상부하게 총회가 직영하는 총신을 복구하였다.

 

총회 내에서 비주류가 된 정규오 목사 측은 총회 상황에서는 도저히 개혁이나 정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정통보수신학을 회복할 필요가 생긴 것으로 보았다. 정 목사는 백년 전통과 정통보수신학을 계승하는 평양신학교, 장로회신학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을 이어받는 총회신학교를 복구한 것이다. 그는 결코 별개의 총회를 자진해서 조직하지 않는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주류측의 여론은 싸늘했다. 신학교가 가지는 철저한 전통의 보수신앙을 사수하며 신학사상의 변질을 절대 용납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소위 총회복구 신학교를 인정할 수 없다며 본 총회를 끝까지 지킬 것이라는 성명서가 이어졌다. 그러나 정규오 목사 중심의 호남과 황해세력을 중심으로 한 교권은 1979년 제64회 총회에서 분열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 분열을 합동 내 주류와 비주류의 분열, 혹은 합동과 합동보수의 분열로 기록하고 있다.

 

▲ 51인 신앙동지회 <불기둥> 잡지  © 리폼드뉴스


초기 선교사들로부터 전해진 복음의 정통성과 정체성에 의해 운영된 두 세력들이 1979년 분열되어 무려 26년 동안 헤어져 있다가 2005년 제90회 총회에서 극적으로 합동하였다. 합동한 이후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1953년에 고신측과 분열한 이후 1960년에 고신 측과 합동할 때에는 합동측이 눈물로 호소하여 고신측에 합동을 제의한 관계로 그해 총회장 자리를 고신측에 넘겼다.

 

그러나 2005년 개혁측과 합동할 때에는 합동이냐 영입이냐에 문제도 쉽게 해결되지 못했고 내부적으로는 영입이지만 외부적으로 합동이라는 이원론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특이한 것은 합병총회에서 개혁측의 총회장 몫이 거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헤어져 있는 26년 동안의 역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마치 이 역사를 버리고 합동한 것처럼 보였다. 합동 교단총회의 역사 기록 그 어디에도 26년 동안의 역사는 흔적도 없다. 본 교단총회 역사 기록에 26년 동안의 기록이 전무하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라 볼 수 있다.

 

합동한지 15년 만에 소강석 목사가 제105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취임한다. 소강석 목사 이후에 또다른 총회장이 나올 것인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소강석 목사는 총회장으로 취임하는 제일성으로 총회 100년 역사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총회 앞에 내놓을 모양이다. 총회 역사 다큐이지만 개인 사비로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본 교단총회 내 역사학자들과 의논 없이 총회 역사 다큐를 개인적으로 제작하여 총회 앞에 내놓은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소강석 목사 입장에서는 합동한 교단총회의 총회장으로 역사에 무엇인가를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의 발로일 수 있다. 특히 개혁측 교단총회를 이끌었던 과거 정규오 목사의 신학적 정체성을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으로 가지고 오면서 자신의 정체성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거룩한 열정이 있을 수 있다.

 

▲ 개혁측 마지막 총회(제90회)  © 리폼드뉴스

 

정규오 목사의 정체성 중에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51인 신앙동지회일 것이다. 51인 신앙동지회란 1946년 조선신학교 내에서 정통을 사랑하는 학생들이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한 신앙동지들의 모임을 만들어 그 부당성을 총회에 진정서로 제출하는데 중심 인물들이다. 그 진정서에 서명한 학생들이 51명이었다. 그래서 ‘51인 신앙동지회’라고 한다.

 

그 51인 신앙동지회가 해방후 10년 동안은 어수선한 신학적인 혼란기에 철저한 정통보수적인 성경관를 중심 축으로 하는 신학과 신앙을 보수하였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물론 박형룡 박사와 같이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그러나 그 51인 신앙동지회는 해방 10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세 갈래 내지 네 갈래로 나누어졌다. 정규오 목사와 같이 끝까지 뜻을 같이한 박요한 목사, 김일남 목사, 전상성 목사 등이 있었다. 그러나 정규오 목사와 뜻을 달리하는 복음주의적인 성향인 김준곤 목사와 조동진 목사 등이 있었다. 그리고 영성으로 이어진 엄도섭 목사 등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WCC로 가버린 통합측에 속한 신앙동지들이 있었다.

 

소강석 목사가 정규오 목사 중심의 51인 신앙동지회 정체성을 가지고 올 때에 초기 사역의 정체성인 성경관이라고 한다면 구태여 이제 와서 정규오 목사 중심이 아닌 100년 동안 대한예수교장로회를 지탱해 온 성경적 복음의 정체성을 가지고 올 필요가 있다. 이 정체성은 예배를 비롯한 설교, 그리고 신앙 등 일반에 대한 개혁신학적 정체성이다. 이제 100년 역사를 아우르면서 기록으로만 남아 후대에 전해진 평양의 부흥과 전도, 그리고 기도 등이 오늘 우리들의 현장 상황에 적용되도록 하는데 그 정체성을 찾을 필요가 있다.

 

 

성령을 통해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오늘 우리들의 현장에 역사하고 있는가? 목회자가 아부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는 그 능력이 우리들에게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설교 원고를 가지고 강당에 올라가 읽어줄 사람이 없어서 우리들을 목사로 불러주었을까를 묵상하자.

 

이제 제105회 총회가 착실히 준비되고 있다. 제105회 총회장에 취임할 소강석 목사는 총회장인 재임 기간인 1년 동안 많은 일을 하려고 하는 것보다 그동안의 교단총회의 정체성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이 훨씬 큰 일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컨대 그동안 여러 차례 총회본부 구조조정을 했는데 또 총회본부 구조조정을 하겠다는 것과 같다. 소속 노회를 통해 이같은 헌의한 내용을 주시하고 있다. 총회장만 되면 총회본부 구조조정을 하려고 한다. 총회 본부가 마치 동네 북과 같다. 제발 총회 본부를 그대로 두자.

 

▲ 소재열 목사

 그동안 100년 넘게 지탱해 온 본 교단이 어떻게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늘 묵상하고 ‘많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많은 일을 하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총회장이 된 이후 총회장이라는 무거운 이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장차 한국교회 연합활동을 통해 한국교회를 이끌어갈 차세대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는 소강석 목사가 총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총회장의 직무수행 평가에 문제가 있다면 모든 공적인 이익을 잃을 수도 있다는 점도 참조되어야 한다.   

 

소재열 목사(리폼드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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