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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개혁신학의 성찬론의 특징과 그 구원론적 함의 1
김광열(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8/12/05 [12:29]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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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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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김광열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개혁신학의 성찬론의 회복을 위하여 그 의미와 영적 임재설,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성찬을 제시하고 있다.

서론: 개혁신학 성찬론의 회복을 위하여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시행되어온 성찬예식은 개혁신학의 가르침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어쩌면, 중세 카톨릭 교회가 가르친 화체설에 대한 반작용으로 성찬의 진정한 중요성조차도 배제한 채, 그것을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정도로만 생각하며 시행해왔는지도 모른다.

물론, 개혁신학의 성찬이해는 성찬식에서 제공되는 떡과 포도주가 본질적으로 주님의 살과 피로 변화된다고 간주하는 가르침은 비성경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성찬에서 제공되는 떡과 포도주는 무의미한 표가 아니라, 실체되신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표와 상징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 실제적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칼빈의 가르침을 따라, 개혁신학의 구원이해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주어지는 영적 축복이라는 관점을 고려해볼 때, 성찬에서의 실체되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먹는 의미는 단순한 기념 정도의 의미를 넘어 구원론적 중요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성경에서 제시되는 성찬의 의미, 특히 종교개혁과 그 이후에 개혁자들에 의해서 제시된 성찬론들을 비교, 분석해봄으로서, 칼빈에 의해서 제시된 개혁신학의 성찬이해가 어떠한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어떠한 신학적 중요성을 지니는지를 확인해보려 한다.

그러한 연구를 통해서 성찬예식의 참 의미와 중요성을 확인하고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시행되는 성찬예식이 좀 더 성경적 바른 이해 속에서 성도들과 교회에 실제적인 영적 유익을 얻는 예식으로 회복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보려 한다. 개혁신학의 기본 자료들로서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웨스트민스터대교리문답의 내용을 중심으로 논의해보려 한다.

I. 성찬 혹은 주의 만찬 (Lord’ Supper)이란 무엇인가?

1) 성찬을 통해, 신자는 주님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자신을 위해 살을 찢고 피를 쏟으신 그 분의 죽음을 기억하게 되고, 그 죽음과 부활을 거쳐 승귀하신 주님과의 연합과 교제를 누리며 영적 성장을 위한 양식을 공급받는다. 또한 그 거룩한 교제로 함께 부름을 받은 다른 신자들과의 연합을 향유하게 되는 예식이 되는 것이다.

2) 구속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성찬의 이미지들

성경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주의 만찬 (하나님 앞에서의 식사)”을 예표하는 사건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구약에서의 옛 언약의 행정 안에서 몇 가지 사건들을 거쳐서 신약에서 새 언약 행정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찬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역사의 마지막에 주어지게 될 종말론적 축제의 만찬에로 향하고 있다.

a)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의 풍성한 열매들을 먹으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향유하게 하셨다. 범죄하기 전까지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기쁜 식사의 교제(만찬)를 향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b)구약에서의 옛 언약 속에서

그런데, 하나님은 범죄한 이후에도 인간들과의 식탁의 교제를 허락해 주셨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오셔서 죄의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시기 전까지는 에덴에서 범죄 전에 누렸던 것과 같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기쁨의 교제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ㄱ. 모세의 율법 중 매년 드리는 농작물의 십일조 규례 내용 중에서, 하나님과의 만찬의 교제를 볼 수 있다: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신 14:23-26)

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이 주어진 후, 하나님은 지도자들을 시내산 위로 부르셨다. 언약을 맺으면서 그들과 식탁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출 24:9-11)

출애굽기 24장의 시내산 언약을 맺는 이 장면에서, 모세는 제물의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리고,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했는데, 이는 신약에서 예수님이 성찬식을 제정하시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라는 말씀이 뜻하는 바,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사에서 제시된 “새 언약의 피”를 예표해주고 있는 것이다.

c) 새 언약 아래서 주어진 주의 만찬

옛 언약에서의 “식탁의 교제”는 아직까지도 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서의 교제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사를 통해서 죄의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 누리게 되는 새 언약에서 주의 만찬의 교제는 옛 언약의 만찬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의 식탁의 교제가 될 수 있었다.

d)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의 만찬

그러나, 성경에서 제시되는 하나님과의 만찬의 교제는, 범죄하기 전에 에덴에서의 교제에로의 회복을 넘어선다. 성경은 그 이상의 더 놀라운 축복의 교제가 주어질 것을 알려준다.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제시되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는 앞으로 먼 장래에 신자들에게 주어질 놀라운 식사의 교제를 보여주고 있다. 신랑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가 종말론적 축제의 식탁에서 만나 교제하며 하나로 연합되는 기쁨의 식탁을 예고해준다.

이 종말론적 축제의 식탁에 대해서는 주님도 한 번 언급하신 바 있다: “나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 26:29)

II.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 : 영적, 실제적(real) 임재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개혁자들, 특히 칼빈의 가르침은 로마 카톨릭의 이해와는 달랐다. 또한 칼빈은 당시에 다른 여러 개혁자들의 관점들과도 다소 다른 점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성령의 신비한 역사를 통하여 주어지는 영적, 실제적 (참된) 임재”임을 강조한 점에서 우리는 칼빈의 성찬론의 특징을 말할 수 있다.

1) 로마카톨릭의 화체설의 문제점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들이 “성체성사(Eucharist)”라고 부르는 카톨릭의 성찬식 미사에서 떡과 포도주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된다고 본다(화체설, transubstantiation) 사제가 축사를 드리는 순간부터 그러한 본질상의 변화가 주어지며, 따라서 미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찢겨지고 피가 흘려지는 희생제사가 반복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한 미사예식을 통해서 은혜가 주어지는 방식은 “(미사 속에서) 시행되는 그 일에 의해서 (ex opere operato)”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례에 참여하는 신자의 믿음과는 별도로, 그 예식의 자체적 가치에 의해서 은혜의 효능이 자동적으로 주어진다고 보는 것이다(사제주의, Sacerdotalism) 이러한 점에서 카톨릭의 이해는 예식 참여자의 믿음의 중요성이나, 성령의 역사 없이 그 효능을 확보하려는 “마술적 성찬이해”라고 평가될 수 있다.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서 칼빈은 주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또 그러한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단순히 그 예식 속에서 “시행된 일”을 통해서 주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이해는, 바로 중세 카톨릭의 가르침에 대해서 개혁자들이 지적한 핵심적인 문제들 중의 하나인 “Sola Fide(오직 믿음)”의 원리와 충돌되는 것이었다.

카톨릭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이 지니는 문제점들 중의 하나는 “이것이 내 몸이요” 또 “이것은 내 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이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성경에서 자신에 대해 설명하실 때 상징적인 방법으로 표현하셨다. 요15:1에서는 “나는 참 포도나무라”, 요10:9에서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요 6:41에서는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와 같은 표현들은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상징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설명해주신 것이라고 봐야 한다.

주님이 손에 떡을 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 떡은 주님의 몸과는 분리되어 있었으며, 그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주어졌던 주님의 말씀은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되었었다고 해야 한다. 누가복음 22:20에서도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그 잔이 실제로 새 언약이라는 말이 아니고 새 언약을 상징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카톨릭의 관점이 지니고 있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는 화체설의 관점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완전성과 종결성을 거부하게 한다는 점이다. 히브리서의 요점들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의 속죄제사는 단번에 드려진 (히9:11-22) 완전한 제사였다(히9:23-28)는 것이다: 주님은 “(구약의)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5-26)

십자가에서의 주님의 속죄 제사가 드려진 후에도 또 다시 희생제사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라는 화체설의 관점은 인류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이미 끝나고 완성되었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상충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화체설이 제시하는 주의 임재에 대한 관점은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주님의 살과 피가 됨으로서 주님이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신도들에게 임재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말씀에 주어진 약속에 대한 신자의 믿음과 그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역사로 주님의 임재가 주어진다고 가르쳤다.

2) 루터파의 공재설의 문제점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카톨릭의 화체설은 반대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이 나의 몸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는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화체설과 같이 떡이나 포도주의 본질이 주의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물질적 몸과 피가 떡과 포도주 “안에, 함께, 그리고 아래에 (in, with, under)” 임재한다고 본 것이다. 소위 공재설(Consubstantiation)이라고 불리우는 가르침이다.

루터파의 공재설에 기초가 되는 개념이 루터파의 신적 속성 교류(Communicatio Idiomatum) 이해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과 연합함으로 인성이 신성의 편재성에 참여하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위격이 머무는 곳에 그의 신성, 영혼, 신체가 모두 함께 존재한다는 이해에 기초해서 루터파의 공재설을 주장하는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루터가 화체설을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구체적인 임재가 있게 되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서,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물질적 몸과 피의 장소적 임재를 말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루터파 관점의 문제를 이렇게 지적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육적〉 내용 밖에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가두어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것은 〈영적〉 양식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숨은 힘이 우리와 그리스도를 맺어주는 유대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루터파는 공재설의 관점에서 신자는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입으로 받는다는 (manducatio oralis) “육적 먹음”을 가르쳤고, 칼빈은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믿음으로 받는다는 “영적 먹음”을 가르친 것이다.

이처럼, 칼빈이 “영적” 양식의 의미로 성찬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이유는 부활과 승천 후에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있다고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들 때문이었다. 기독교 강요 제4권 17장 26절에서 칼빈은 바로 그 주제를 취급하는데, 그 절의 제목이 바로 “The body of Christ is in heaven”이다. 그 절에서 칼빈은 여러 구절들로 성경적인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먼저 행3:21을 언급한다. 예수님의 몸은 부활하신 후에도 유한하게 존재하시며 최후의 날이 오기까지는 하늘에 들어가 계시는 것으로 성령님께서 가르치신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떠나서 세상 밖으로 가신다고 말씀하시는 요 14:12, 28; 16:7 등을 지적하면서, 그들은 주님이 “세상을 떠난다”는 의미를 “죽어야할 상태로부터의 변화” 정도로만 생각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러한 말씀들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몸이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 세상에 계시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가리킨다고 하면서, 또 다른 구절들로서 마 26:11과 요 12:8을 추가로 제시했다. 그 구절들 속에서 나오는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에게 불편하게 생각했던 제자들을 향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은 바로 그 사실을 분명히 해준다고 보았다. 거기에서 주님은 “자신이 그와 같은 (그 여인이 행한 것과 같은) 존경을 받으시며 예배 받도록 항상 함께 계시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주님의 존엄하신 임재가 이 땅에서도 계속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육체적인 임재 (그리스도의 인성의 차원에서의 몸)는 하늘에 계시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칼빈은 어거스틴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준다:

그는 (부활한 후에) 육체를 가지시고 40일 간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시고, 그 후 제자 들이 모두 보고 있는 가운데서, 제자들이 함께 따라갈 수 없는 하늘에 올라가셨기 때 문이다. (행 1:3, 9) 그는 땅위에 계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셨기 때문이다. (막 16:19) 그러나, 한 편 그는 땅에도 계신다. 왜냐하면 그는 그 존엄을 나타내셔서 함께 계심을 그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히1:3) 존엄하신 임재에 대해서는,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육체적인 임재에 대해서는, 〈그러나 너희는 항상 나를 소유할 수 없다〉(마26:11)고 하신 말씀이 옳은 것이 다. 즉 육체적인 임재에 대해서는, 교회는 그를 얼마 안되는 날 동안 밖에는 소유하지 못하였다. 교회는 지금 그를 믿음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눈으로 보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결국, 칼빈은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가르침도 거부했으나, 동시에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를 포함한다는 공재설도 거부한 것이다. 성찬에서 주님은 떡과 포도주라는 물질적 객체에 묶여져서- 본질적으로 변화해서든지 아니면 그것들에 포함해서이든지-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상징해주는 표시(symbol and sign)이라고 보았다.

즉,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해주는 가시적인 표시이므로, 그 상징의 표시를 받을 때 성령의 특별한 역사에 의해서 주님이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 본 것이다. 성찬에 참여하는 신자는 떡과 포도주를 받으면서, 구원의 주되신 그리스도를 만나 그 분과의 연합과 교제를 나누고 그 분의 모든 영적 은총의 열매들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했기 때문도 아니고, 그 안에 포함되었기 때문도 아니며, 오히려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들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승귀하신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해주기 때문이다.

기독교강요 제4권 17장 31절에서 칼빈은 루터파를 “그리스도의 몸이 떡 속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면,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현림은 결코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은 크게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떡의 겉모양 속에 숨어 계시는 것이 아니라면, 성찬에서 그리스도는 제거되고 만다고 말하는 억지 주장만큼은 제발 그만두라고 호소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두지만, 우리는 〈그를 하늘로부터 끌어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결론내렸다.

3) 쯔빙글리의 기념설에 대하여

그런데, 성찬에서의 성령의 비밀한 역사에 대한 이와같은 칼빈의 강조점은 또 다른 쪽의 오해를 지적할 수 있는 신학적 원리도 되었다. 그 또 다른 오해란 바로 쯔빙글리 (Ulrich Zwingli, 1484-1531)에 의해서 제안된 기념설이다. 쯔빙글리도 칼빈과 같이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을 추진했지만, 성찬에 있어서는 다소 이견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상징적인 임재에 대해서는 수용했지만,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에 대해서는 분명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찬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대한 상징과 표가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면서, 단순히 기념적인 예식일 뿐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성찬의 교리에서 어떠한 신비주의적 요소들은 수용하기를 꺼려했고, 그래서 성찬을 단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표와 상징으로만 말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칼빈이 볼 때, 그와 같은 성례이해는 성찬에서의 영적 확증과 그 효능을 가져오는 성령의 역사를 간과한 오해였던 것이다. 쯔빙글리의 이해는 단순히 인간이 기념하는 차원에서의 사건으로만 간주하는 “공허한 예식”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찬에서의 “성령의 비밀한 역사”에 대한 칼빈의 강조는 떡과 포도주의 물질적 표징만을 강조했던 루터파의 관점의 문제를 지적하는 근거도 되지만, 동시에 성찬을 단지 인간의 기념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려 했던 쯔빙글리의 “공허한 예식”의 오해에 대해서도 지적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찬이란 공허한 예식이 아니고, 성령의 신비한 역사가 주어지는 사건인 것이다. 칼빈이 말하는 영적 임재란 바로 성령의 역사가 실제로 임하는 성찬임을 말하기 때문이다. 구원자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주어지는 영적 축복들의 근거를 물질적인 떡과 포도주에서 찾는 것도 (카톨릭이나 루터파) 문제이지만, 쯔빙글리와 같이 성찬을 성령의 신비한 역사까지 배제한 채 인간적인 기념행사로만 간주하는 것도 문제라고 본 것이다.

칼빈은 카톨릭의 화체설이나 루터파의 공재설을 거부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며,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전제한다. 즉, 그것은 “성령께서 공간적으로 떨어져있는 일들을 정말 하나로 결합시키심”으로서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라고 부르지 않는 한, 그는 “헛된 표적을 주셨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떡을 떼는 것은 일종의 상징이며 사실 자체는 아니지만, 그것은 공허하고 무익한 표나 상징이 아니라, 주께서 약속하신 영의 효력을 거기서 나타내주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과거사역,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사건을 기념하는 것에만 관련되지 않고, 그 분의 현재적 사역 즉 승귀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그리스도께서 현재적으로 베푸시는 영적 사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주님의 몸이 성찬에서의 떡과 포도주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승천하셔서 영광 중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베푸시는 영적 은혜가 성찬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임하게 되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170문에서도 “성찬의 성례에 합당하게 참여하는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나 육으로가 아니라 영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공급받는 것입니다”라고 가르친다. 성찬에서 신자들은 “성령님의 신비한 역사”를 통해서 떡과 포도주가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게 되고,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과 영생의 은혜와 구원의 영적 축복들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성령님의 신비한 역사”에 대해서 칼빈은 설명하되 그것은 논리적으로 접근할 내용이 아니라, 주의 말씀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체험해야하는 문제라고 설명한다:

만일 누군가가 또 이 방식에 대해서 나에게 묻는다면 이것은 나의 정신으로 이해하며, 혹은 말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도 숭고한 신비이다라고 고백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좀 더 분명히 말한다면 나에게는 이것이 이해의 문제라기보다도 오히려 사실의 체험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에 있는 전혀 확실하게 의뢰해야 할 하나님의 진실을 다른 주장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살이야 말로 참된 영혼의 양식, 자신의 피야 말로 참된 음료이다 라고 언명하신다 (요 6:55).... 그는 거룩한 만찬을 통하여 자신의 살과 피를 〈떡〉과 〈포도주〉의 표적으로 받으라고 나에게 명령하신다. 나는 그가 진실로 약속하신 것을 주시며, 내가 그것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전혀 의심치 않는다.

이와같은 칼빈의 가르침은 쯔빙글리의 기념설이 말하는 “공허한 예식”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이해인 것이다. 신자는 성찬식에 참여함으로서 떡과 포도주가 상징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참으로 받는 것이다. 물론, 그 말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육적으로” 받아 먹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독교 강요 제4권 17장 31절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참된 임재를 설명하면서,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육이 우리의 혼으로의 혼입(混入) 혹은 주입(注入)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됨”을 칼빈은 지적했다. 그리스도께서 –비록 자신의 육체를 우리 속에 들여보내시지 않더라도- 자신의 본체로부터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 넣으신다고 하는 사실만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칼빈이 가르친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영적, 실제적 (spiritual, real)” 임재인 것이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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