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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신학지남」 100년의 역사와 신학 2
김길성(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명예교수,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8/11/14 [15:22]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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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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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총신대 명예교수이신 김길성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신학지남의 100년을 돌아보고 시대를 구분하고 그 역사를 열거한다. 그리고 신학지남에 나타난 총신의 신학 전통을 제시하고 있다.

(2)제2기(1954년-1971)

제2기는 「신학지남」이 복간된 1954년부터 박형룡 박사가 총신 신대원을 떠나게 된 1971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 박형룡 박사는 66건의 논문을 「신학지남」에 더 기고하고 있다. 박 박사가 그의 평양신학교 시절 기고한 논문이 70편이었으니, 복간 후 논문까지 합치면 모두 136편이 된다.

특히, 제2기가 시작되는 1954년 2월에 발간한 「신학지남」 제23권 1호[통권 제114호]의 “속간사”에서 박형룡 박사는 “신학의 지남침은 다시 움직인다”라는 제목으로 「신학지남」 복간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 장로회신학교는 36년의 긴 세월동안 “칼빈”주의 정통신학의 교훈에 종사하여 7백여 명의 신실한 목사를 이 나라 교계에 내어 보내고 일정말기 험악한 핍박 아래 진리를 고수하다가 1938년 진리에 殉[순, 목숨을 바치다]하여 폐문하였다. 동교의 남은 사업을 완수할 뜻을 품고 그 폐허에 평양 신학교가 일어나 다년간 교역자 양성에 종사하였으며 해방 후 동교의 전통을 남한에서 계승하고자 서울 장로회신학교가 일어나 수년간 “칼빈”주의 정통신학의 교육에 진력하였다. 그리고 1950년 苛烈한[가열한, 맵고 세찬] 전쟁 중에 38선이 暫開하고[잠개하고, 잠시 열려] 전국의 교역자 신학생이 남한에서 회합한 뒤를 이어 1951년 추 9월 대구에서 본 장로회 총회신학교가 전 평양장로회 신학교의 후신으로 설립되었다. 본교는 신학교육 각방면에 전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신학적 전통은[을] 襲踏[습답, 계승]하기에 노력하고 있다. 그 노력의 일부로서 지금은 동교의 기관지였던 「신학지남」의 속간을 단행한다.” 라고 말한다. 또한 박 박사는 「신학지남」 복간의 감격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각오를 밝히고 있다.

“신학의 지남침은 다시 움직인다. ... 이 신학의 지남침도 세속의 風塵[풍진, 바람과 티끌]과 시국의 雲霧[운무, 구름과 안개] 때문에 얼마 동안 수난하였으나 마침내 재기하여 움직인다. 신학의 정로를 찾고자 하는 자 곤란을 덜할 것이요 부끄러움을 면할 것이다. 이 땅에 신앙의 동지들은 다 일어나서 신학의 정로를 가리키는 이 聖力[성역]에 합력하여 매진하세.” 라고 말한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지남」의 복간의 의미를 단지 다시 시작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에 하던 일을 계속하는 의미로 “속간”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하여 정성구 박사는 말하기를, “평신과 총신의 동질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평신의 교수와 학생들이 다시 남한에서 개교한 것이지만 역시 교수회가 편집하던 「신학지남」이 속간되어 오늘에 이름으로써 두 학교의 동질성을 연결하는 끈이 된 것”이라고 바르게 평가하고 있다.

이 시기에 박형룡 박사의 제자요 동료로서 평양신학교 시절에서부터 함께 활동한 박윤선 박사의 역할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박윤선 목사는 박형룡 박사가 1930년부터 가르치기 시작한 이래 1934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때문에 스승과 제자 사이이다. 총신 조직신학의 기초를 놓은 죽산 박형룡 박사(1897-1978)와 더불어 정암 박윤선 박사(1905-1988)는 총신 성경신학의 기초를 놓은 분이다. 박윤선 박사는 평양 숭실대학 4년제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34년에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 당시 박형룡 박사는 1930년부터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1933년 1월에 박사학위를 받은 때였다.

1934년 박윤선 박사가 유학길에 오를 때, 박형룡 박사가 유학(1923년-1926년)한 프린스턴 신학교를 택하지 않고, 이미 자유주의 신학과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여 구 프린스턴 신학(Old Princeton Theology, 1812년-1929년) 전통을 포기한 프린스턴 신학교 대신에, 1929년에 구 프린스턴 신학전통을 계승하여 설립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유학(1934년-1936년)하여 신학석사 학위(Th. M.)를 받고 돌아와, 모교인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성경원어 강사(1936년-1938년)로 재직하고, 또한 총회의 위임을 받아 박형룡 박사가 편집위원장으로 있던 『표준성경주석』 편집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프린스턴 신학교가 구프린스턴 신학전통을 포기하기 전에 프린스턴 신학교에 유학(1923년-1926년)하여 Th. B., Th. M. 학위를 취득한 박형룡 박사와, 이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설립 후 이 학교에 유학(1934년-1936년)하여 Th. M. 학위를 취득한 박윤선 박사, 두 분 모두의 스승은 당시 신약신학의 대가로서 기독교의 변증에 앞장 선잔 그레샘 메이천(John Gresham Machen, 1881년-1937년) 박사였다.

1937년에는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유학(1934-35년)하고 돌아온 박윤선 목사의 논문은 처음으로 제19권 5호(1937년)에 실리고 있다.55 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말미암아, 그는 고국을 떠나 다시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변증학과 성경원어(1938년-1939년)를 연구하고, 이듬해 봄에는 만주 봉천(현재 심양) 오가황 교회에서 목회하였고, 1941년에서 1943년에는 박형룡 박사가 교장으로 재직하던 봉천 만주신학교에서 교수하였고, 1944년부터는 만주 안산에서 성경주석에 전념하였다. 1945년 해방 후 고향 철산에 거주하다가, 1946년 월남하여 부산 고려신학교 교장서리에 취임하고, 이듬해 박형룡 박사가 귀국하였을 때 박형룡 박사가 교장으로 있다가 서울로 가자, 1948년 고려신학교 2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후학들을 가르쳤다.

1953년-1954년에는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신약학을 연구하고, 1960년에는 고려신학교를 사임하고, 서울에서 동산교회 목회를 하였고, 1963년부터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당시 총회신학교) 교수로,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부산 성산교회, 서울 한성교회 등을 개척 시무하였고, 1974년에 퇴임하였으나 다시 1979년에 총신대학교 대학원장에 취임하여 후학들을 가르쳤고, 같은 해 10월에는 총신대학교 강당에서 성경주석 완간 감사예배를 드렸다. 1980년 11월에는 그동안 정든 총신대학교를 떠나 합동신학원(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초대원장이 되었고, 1988년 6월 30일 주님의 품에 안겼다. 박윤선 박사의 논문은 1980년 그가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로 가기 전까지 「신학지남」에 53편(평신에서 4편, 장로회 총회신학교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49편)이 남아있다.

박윤선 박사는 1966년에 발표한 “성경해석방법론”에서 성경해석의 필요성과 실제에 대하여 목회적 가이드를 제시한다. 그는 먼저 성경해석의 필요성과 동시에, 해석시 만나게 되는 주관적, 객관적 난제들이 있음을 말하고, 성경해석의 불변의 원리로서 “성경은 성경으로야 해석함”을 제시한다. 그리고 성경해석 방법의 역사적 변천을 시대적으로 설명하고, 특히, 근대인의 모든 그릇된 해석원리들을 하나씩 소개 한다: 1) 소기노 주의 2) 재세례파 3) 레몬스트란 파[항론파] 4) 합리주의 5) 편해주의 6) 심리적해석 학파 7) 양식사 학파등을 소개한다. 이어서 그는 개혁주의 성경 해석의 원칙으로 다음과 같이 14가지를 제시 한다:

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 칼빈은 말하되 성경의 권위는 하늘에서 바로 내리는 하나님의 음성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② 성경은 독자적 신임성을 가졌음으로 타자의 증명이나 인허를 요하지 않고, 자성립 또는 자증하는 진리이다(Calvin, Inst. I.vii.5).

③ 우리가 성경을 진정으로 알려면 성령의 내증에 의하여 눈이 열려야 한다.

④ 가경은 성경이 아니다.

⑤ 성경은 그 원어에 의하여 해석되어야 완전하다.

⑥ 유전에 예종하고 의존하는 해석 주의를 배척한다.

⑦ 성경 해석에 대한 최후 심판자는 성경 자체이다.

⑧ 개혁주의는 성경 계시의 필연성, 성경의 완전성, 성경의 충족성, 성경의 명백성을 믿는다.

⑨ 성경을 인간의 자의대로 억해하지 말 것이다.

⑩ 문리적 해석의 필요성을 인정하다.

⑪ 역사적 해석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⑫ 성경에서 취하는 정당한 추론의 교훈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긴다.

⑬ 성경 해석에 있어서 역사적 교리를 중요히 참조한다.

⑭ 의미가 불분명한 구절은 분명한 성구의 의미에 비추어 해명한다.

이상 14 가지 개혁주의 성경해석의 원칙을 제시하고, 성경해석자로서 예비지식을 가져야할 것으로, 언어문제, 신약의 특수성, 신약 성경의 해석자가 의지할 규범, 신약 해석상 특수고려건, 신약 해석상 중요한 지식 등을 말하고, 개혁주의 해석 방법으로, 문법적, 역사적 해석(Grammatico-Historical Exegesis)과 종합적 해석을 제시한다. 그리고 성경 해석의 실제적 진행에 필요한 10 가지를 목회자들에게 제시 한다:

1) 성경 본문을 앞에 두고 “이 부분이 나에게 지금 무엇을 계시해 주는가?”라고 질문해야 한다.

2) 또한 “이 부분에 주요 사상이 무엇이며 또 제2차적인 중요성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해야 한다.

3) 성경말씀을 죽은 것으로 생각지 말고 생명의 말씀으로 알되, 주요한 부분만이 아니라, 부속적인 재료들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4) 어떤 본문을 연구할 때에 추론적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5) 해석자는 그 본문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어떻게 관계된 것을 찾도록 힘써야 한다.

6)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종종 보편적 교훈을 포함하고 있다.

7) 깊은 뜻을 찾기 위하여 해석자는 문맥을 잘 살펴야 한다.

8) 해석자는 본문의 의미를 찾기 위하여 혹시 “주의 깊이” 추측할 수도 있다.

9) 서신부에 나타나는 말씀은 비교적 권면과 의논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우리와 직접 관련 있는 뜻을 발견할 수 있다.

10) 예언은 역사와 달라서 시간적으로는 산재한 여러 가지 사건들을 한 몫 한 건으로 말하는 수가 있다. 그러므로 한 예언은 종종 여러 번 성취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박윤선 박사는 개혁주의 성경 해석의 원리와 방법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일반 목회자들의 성경연구와 설교준비를 위한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1934-1936년 사이 미국 필라델피아 소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유학 시절 배운 대로, 그의 스승이었던 존 머리(John Murray) 교수의 신학방법에 따라, 성경신학에 기초한 조직신학의 길을 열어 놓은 학자이다.

또한 그는 미합중국 연합장로교회(UPCUSA, 북장로교회)가 새 신앙고백으로 발표한 ‘1967년 신앙고백’에 대해서도 조직신학적으로 논의를 전개하여 그 실상을 파헤치고 있다. 그가 1967년에 발표한 “1967년 신앙고백은 어떤 것인가?”에 의하면, 미합중국 연합장로교회에서 발표한 ‘1967년 신앙고백’에 대하여, 성경관, 기독론, 화해관, 이교관, 종말관, 혼잡주의 등, 조직신학적인 주제에 따라 ‘1967년 신앙고백’을 분석하고, 이를 역사적 개혁주의 관점에서 차례로 비판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67년 신앙고백’의 성경관에 대하여, 제1부 제3장 제2절을 인용하고, ‘1967 신앙고백’의 성경관이 바르트의 성경관과 유사(Kirchliche Dogmatik, 1/2, 511, 585, 512, 592에서 독일어 원문 인용)하다는 것을 세 가지 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1) 새 신앙고백의 성경관은 예수 그리스도를 단 한 가지 충분한 계시라고 하면서 성경의 권위를 보다 낮추어 평가했다고 말한다.

(2) 새 신앙고백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라고 하였지만, 말씀이라는 글자를 소[문]자(word)로 썼다. 그것은,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재래의 교리를 그대로 받지 않은 표시라고 말했다.

(3) 새 신앙고백은 성경을 계시에 대한 증거라고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1967년 신앙고백’의 성경관은 “틀림없이 바르트(K. Barth)의 성경관과 유사한 것이다. 교회가 이와 같은 교리를 가지고 있으면, 성경에 그릇됨이 있다는 교역자들도 용납될 것이다.”라고 그는 말하고, 이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는 인본주의로 흘러가고 말 것이다.”라고 경고한다. 그는 이미 1937년 발표한 그의 논문에서 칼 바르트의 계시관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또한, ‘1967년 신앙고백’의 기독론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제8장 12절과 비교하고, 새 신앙고백(‘1967년 신앙고백’)은 개혁파 장로교회가 전통적으로 고백해온 교리를 그대로 주장하고 있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새 신앙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더불어 계신 하나님이시다.”(Jesus Christ is God with man.)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새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의 두 성품을 만족히 내세워 말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새 신앙고백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많은 말로 강조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 강조의 이유가, “그의 주체이신 신성보다 도리어 인성을 더 중요시함이 아닌가?”하고 문제점을 제시한다.

박 박사는 ‘1967년 신앙고백’이 전체적으로 바르트의 성경관(p. 17), 사회복음주의 화해관(p. 23), 바르트의 초절주의 내세관(p. 28), W.C.C.적 혼잡주의(p. 30)의 산물이라고 비판하고, 이 새 신앙고백은 전통적인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의 성경교리를 수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박윤선 박사는 성경신학자이면서도 조직신학 교육에도 능한 학지였다. 이제 이 시기에 활동한 조직신학 교수들의 논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학지남」에 기고한 순서대로 살펴보면, 1950년대에는 명신홍 박사가 1954년에 기고하기 시작하여 1971년까지 21건을 기고했고, 이상근 박사는 1958년에 첫 기고를 시작하여 1974년까지 6건을 기고했다.

명신홍 박사의 첫 기고논문은 1954년에 발표된 “칼빈주의의 근본정신”이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명 박사는 칼빈주의라는 말이 서로 다른 세 가지 의미로 다음과 같이 사용되고 있다고 지적 한다:

제1로 칼빈주의란 칼빈 자신의 교훈을 의미한다. 이것은 가장 협의의 용법일 것이다. 제2는 더 넓은 의미로 ‘푸로테스탄트’ 중에도 특히 개혁주의 신앙의 교리체계를 의미한다. 제3은 가장 넓은 의미로 과학적인 의미 이외에 역사적 철학적 사회학적 정치학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니 즉 칼빈의 영향을 받아 교회나 신학에 뿐만 아니라 인류역사와 사상 사회의 질서와 국가의 정치제도 등에 미친바 관념의 전체를 말한다.

명 박사는 이 중에서도 특히 제2와 제3의 의의로 국한하여 논하려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칼빈주의의 근본정신에 대하여, ‘하나님의 주권’이 곧 그것이다.
 
칼빈주의의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여 이 사상을 중심으로 기타의 모든 문제를 취급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이란 무엇인가? ‘미국장로교회법규편람요’의 1절을 인용하면 ‘하나님의 주권이란 유일의 영원불변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신만이 충분히 아시는 바 완전히 지혜로우시고 거룩하시며 사랑하시는 목적을 위하여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지금 있는 것이나 장차 있을 것이나의 그 전체를 포함한 전 우주를 절대로 친히 지배하시고 통치하심을 의미 한다’ (Manual of Presbyterian Law for Church Officers and Members, 1924, p.32). 이같은 의미에서 칼빈주의의 근본정신인 ‘하나님의 주권은 칼빈주의의 교리’ 또는 ‘신학의 전체 뿐 아니라 그의 교훈을 계승하고 활용하는 정치 예술 철학 기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하는바 근본적 원리다’

이어서 명 박사는 칼빈주의의 근본정신으로 칼빈주의 5개조를 차례대로, 1.하나님의 주권과 무조건적 예정, 2.하나님의 주권과 제한적 속죄, 3.하나님의 주권과 전적 타락, 4. 하나님의 주권과 유효적 은혜, 5. 하나님의 주권과 견인의 은혜 등의 순서로 해설하고, “칼빈주의의 근본정신은 곧 성경의 근본정신이요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근본정신”이라고 명 박사는 결론짓고 있다.

또한 통합측의 분열(1959년)과 이후 고신과의 합동(1960-1962년), 그리고 다시 고신이 여운만 남기고 환원하자, 명 박사는 교단과 신학교를 추스르며, 미래를 향한 교단과 신학교의 신학적 방향을 지로하는 글을 실리게 된다.

1963년에 발표한 “신학지남의 임무”라는 제목의 권두언에서 명 박사는 「신학지남」의 창간호부터 폐간까지를 개관하고, 다시 1954년에 복간하여 당시(1963년)까지 개관하고, 「신학지남」의 임무를, 1) 올바른 신학의 수호, 2) 올바른 신학의 보급, 3) 교회를 위한 봉사라는 소제목으로 논술하고 있다. 명 박사는 이 글에서 올바른 신학의 수호라는 소제목으로 설명하면서, 당시 3종류의 신학적 주류를, 1) 정통주의 신학과 2) 신신학과 3) 새 신신학으로 말하고, 먼저 신신학을 정의하여, 신신학은 약 150년전 슐아이엘막허로부터 시작된 것이 점차적으로 전 세계에 퍼진 비기독교 혹은 반기독교적인 신학이다. 이것은 고등비평으로 성경을 파괴하여 올바른 신앙의 기초를 무너뜨리려 한다. 이적을 위시하여 주의 처녀탄생 신성 대속의 사[죽음] 부활 승천 재림 심판 천당 지옥 등을 다 부인하니 신신학의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가 아니다.

새 신신학에 대하여는, 새 신신학은 빨트와 뿌룬너 등으로 인하여 제1차대전 후부터 점차로 머리를 들게 될 것인데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의 일치를 거부하고 고등비평을 채용하여 성경을 오류의 서[책]로 단정하며 이적 또는 희랍철학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내재성을 경시하고 초월신관을 가르치며 진화론을 믿고 창세기의 창조교리와 시조의 범죄사실을 부정할 뿐 나니라 소위 을게쉬히테(Urgeschichte) 죽 초월사 혹은 계시시의 관념에 의하여 하나님의 직접계시를 부인함으로 그리스도의 처녀탄생 사[죽음]와 부활 재림 등의 직접계시성을 부정하고 이 모든 교리를 성경대로 믿고 가르치는 정통신학을 신신학보다 더 가혹하게 비평하는 것이다. 신신학이 아니라 신정통이라 자칭하나 실은 새로 난 신신학일 뿐이다.

그리고 정통신학에 대하여는, 정통신학은 바울 어그스틴 칼빈 핟찌 월필드 카이퍼 빠빙크 뻘코흐프 등을 통하여 금일까지 전하여 온 성경에 기초한 하나님 본위의 목음적인 신학이다. 우리는 신신학 새신신학 기타 모든 이훈[거짓교훈]을 다 불리치고 어디까지나 이 올바른 신학을 수호해야 할지니 이것이 신학의 지침이 된 신학지남의 제1차적인 임무이다

명 박사는 “신학지남은 이상과 같이 교회가 여러 가지 방면으로 필요로 하는 신학적 지식을 제공함으로 직접 또는 간접으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을 그 임무로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신학지남」이 올바른 신학을 수호하고 보급하는 외에, 교회를 위한 신학적 봉사인 것을 「신학지남」에 기고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명 박사는 이후 1971년까지 총 21건을 기고하고 있다.

한편, 1950년대부터 기고한 이상근 박사의 첫 논문은 1958년에 발표한 “요한복음에 나타난 부성[아버지 되심]”이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이 논문은 성경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부성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 박사는 그의 논문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치신 것은 “확실히 그의 설교 중에서 가장 공적이 큰 것”이라고 말하고, 요한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은 “그의 설교 중 ‘하나님’이란 말은 37회 사용함에 반하여 ‘아버지’의 말은 161회나 나타나 있다”고 지적한다.

이 박사는 “구약의 신관이 신약에 있어서 풍성해지고 광대해지고 강조되어 있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부성론도 그러하다고 한다. 그리고 쇼 박사(J. H. Shaw)의 말을 인용하여 “구약성경에 강조되어 있는 신관은 하나님의 통치권(Sovereignty)이나 주권(Lordship)에 있다”고 인정하지만, 동시에 이런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인격성이 나타나 있음을 지적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이야기 하셨고 모세와 대면하셨고 야곱과 씨름하시었다.” 특히 구약에 있어서 “아버지”란 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전 민족과의 관계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지적한다. 이 하나님의 부성관이 선지서에서 약간 발전하였다고 말하고,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개인의 아버지” 개념은 “유대교의 현저한 공로”라고 말한다. 그리고 셀비 박사(W. B. Selbie)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유대인]의 정치적 운동은 전체적으로 나아가는 반면 그들의 종교운동은 개인적으로 되었다”고 말한다.

신약에서 특히 4복음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부성은 공통으로 강조되어 있다고 말하고, “공관복음에는 제4복음보다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이 표시되어 있음에 반하여 요한복음에는 신자와 불신자의 간격을 더욱 명료히 끌고 있다”고 지적한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부성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났고,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속죄제물로 드리신 때문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기 현현의 참 대리자시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참 중보자시다”고 말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부성론은 “아버지의 보내신 독생자에 그 근거를 둔다”고 말하고, 1)우리에게는 인격신이 있다는 것이며, 2)그 인격신은 신자와 인격적 교제를 원하신다는 것이며, 3)이 교제는 부자지간의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이상근 박사는 이후 1974년까지 총 6건을 기고했다. 명신홍 박사는 칼빈주의에 기초한 신학과 사상의 교육에 주력한 반면, 이상근 박사는 성경신학에 기초한 조직신학의 전개를 시도하고 있다.

1960년대에 들면서 조직신학 분야에 박형룡 박사, 명신홍 박사, 이상근 박사 외에도, 신복윤 박사, 박아론 박사가 함께 하게 된 사실을 알게 된다. 박형룡 박사(136편 기고)와 명신홍 박사(21편 기고), 이상근 박사(6편 기고)가 모두 은퇴한 1976년 이후에는, 신복윤 박사(25편 기고), 박아론 박사(83편 기고) 외에 차영배 교수(33편 기고)가 1976년부터 1995년까지 약 20년 동안 함께 하게 되었다. 1959년 통합측이 분열한 후, 고신측과의 합동(1960년-1962년)으로 고려신학교에서 교수하던 오병세 박사, 홍반식 박사, 이근삼 박사가 총신 신대원에서 가르치게 되었으나, 다시 고려신학교로 환원했기 때문에 이근삼 박사의 1편(“기독교와 문화와의 관계,”(제39권 1호, 1972년 3월)만 남아 있다.

이 시기에 한철하 박사는 총신에서 역사신학을 강의하면서 1960년에 첫 기고를 시작하여 1963년까지 12편을 기고하고, 신학교를 떠난 후 박형룡 박사 출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제1회 죽산신학강좌(1997년)에 강사로 초빙 받아 발표한 논문이 같은 해 「신학지남」에 1편 실리게 되었다. 학교를 떠나게 된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필요한 시기에 총신에서 교리사와 역사신학에 능통한 학자 한 명을 잃어버린 아쉬움이 있다. 이 외에 1960년부터 1976년 사이에, 구약신학을 강의한 최의원 박사는 「신학지남」에 4편을 기고하고, 김희보 박사는 41편을 기고하고 있으며, 신약신학을 강의한 박윤선 박사는 53편을 기고하고 있으며, 역사신학을 강의한 김의환 박사는 62편을 기고하고 있고, 대학에서 강의한 홍치모 교수는 90편을 기고하고 있다. 1961년부터 실천신학을 강의한 차남진 박사는 11편을 기고하고, 김득룡 박사는 6편, 조천일 목사는 20편을 기고하고 있다. 차남진 박사는 해방(1945년)과 더불어 조선신학교 재학 중 소위 김재준, 송창근 교수의 신학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당시 정규오, 박요한, 신복윤, 김준곤, 김일남 조사[전도사] 등과 더불어 “51인 진정서”에 참여하고 “신앙동지회”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1947년 조선신학교를 떠나 고려신학교에 편입하고, 다시 1948년에는 박형룡 박사가 가르치는 장로회신학교로 편입하여 장로회신학교 제1회로 졸업한 25명 중 1명이 되었다. 미국 유학동안 박사학위(Ph. D.)를 받고, 1961년부터 1967년까지 짧은 기간 동안 총신에서 강의하였으나 그의 열정적인 강의와 설교는 당시 많은 학생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특히, 「신학지남」의 복간(1954년) 시 박형룡 박사의 “속간사”와 더불어 명신홍 박사의 “칼빈주의 근본정신”이라는 제목의 글(제23권 1호)은 「신학지남」복간의 의미를 더욱 빛내고 있다. 명 박사는 이 글에서, 칼빈주의의 근본정신은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주권은 칼빈주의의 교리’ 또는 ‘신학의 전체 뿐 아니라 그의 교훈을 계승하고 활용하는 정치 예술 철학 기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하는바 근본적 원리다.’”라고 말하고 있다. 명 박사가「신학지남」의 복간에 즈음하여 “칼빈주의의 근본정신”을 논하는 것은, 평신에 이어 당시 장로회 총회신학교에서도 여전히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 칼빈주의 신학이 가르쳐지고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1967년에는 미합중국 연합장로교회(북장로교회 또는 미합중국 장로교회, PCUSA가 UPCUSA로 됨)가 1903년에 채택한 수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따라서 새 신앙고백서를 채택한 것에 대하여 즉시 특집호 발간하고, 이를 역사적 개혁주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비판하는 논문들을 실리게 되었다. 우리 교회는 1905년 공의회와 1907년 독노회와 1912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성경 소요리문답으로 정식으로 채택하고, 다시 1963년 제48회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했다.

이 특집호(제34권 3호, 1967년 9월)에는 박형룡 박사의 “권두언” 외에, 박형룡 박사, 박윤선 박사, 박아론 박사, 김의환 박사, 김희보 박사, 간하배 선교사, 신내리 선교사, 그리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인 에드먼드 클라우니 교수가 기고한 8편의 논문이 실려 있다. 이 중 간하배 선교사는 ‘1967년 신앙고백’이 잘못된 성경관에 기초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김의환 박사는 미합중국 연합장로교회(북장로교회)가 설립(1706년 노회, 1716년 대회, 1789년 총회) 초기부터 전통적으로 고백해 오던 신앙고백서(1729년 채택)를 1903년에 결정적으로 수정하고, 이 수정된 신앙고백서의 정신에 맞추어 새 신앙고백서인 ‘1967년 신앙고백’을 만들게 된 배경을 기술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편이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클라우니 교수는 ‘1967년 신앙고백’이 성경에 기초한 정통 칼빈주의 신학이 아닌 다른 기초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박형룡 박사는 “권두언”인 “너희도 가려느냐!”라는 글에서, “소위 1967년 신앙고백을 새로히[이] 작성하여 채용함으로 세계교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고 지적하고, 이어서 “교회의 신경을 고치는 운동이 십년 남아 계속하다가 이제 마침내 성경진리를 떠난 새 신경을 만들어냈다.”고 탄식한다. 또한 “저 새신앙고백은 사회복음과 교훈에 주력하면서 교회의 사회적 의무라고 생각하는 잡다한 세속적 사건들을 교리적 근거 위에 세우려고 많은 중요한 교리들에 접촉하여 개조 혹은 삭제를 감행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당시 미국의 북장로교회를 비롯한 미국교계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그 신학적 좌경화를 효과적으로 지적하여 한국교계에 경종을 울리는 지남의 역할을 바르게 하고 있다.

(3) 제3기(1972년-2000년)

제3기는 박형룡 박사가 은퇴(1972년)한 후부터 그 다음 세대에 해당하는 총신 신학의 2세대인 박아론 박사가 은퇴(2000년)한 시기까지를 말한다. 박윤선 박사는 1974년에 퇴임하였으나 다시 1979년에 총신대학교 대학원장에 취임하여 후학들을 가르쳤고, 같은 해 10월에는 총신대학교 강당에서 성경주석완간 감사예배를 드렸으며, 1980년 11월에는 그동안 정든 총신대학교를 떠나 합동신학원(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초대 원장이 되었다. 이 시기의 초기에는 김의환 박사가 1968년부터 1975년 사이에 편집인을 맡고 있었다. 신학대학원에서 역사신학을 강의한 김의환 박사는 「신학지남」에 62편을 기고하고 있다.

한편, 구약신학 분야에서 최의원 박사, 김희보 박사 외에, 윤영탁 교수는 8편을 기고하고 있으며, 신약신학 분야에서 박영희 박사는 15편, 신성종 박사는 19편, 박형용 박사는 19편, 최낙재 교수는 1편, 대학에서 강의한 신성자 교수는 5편을 기고하고 있다. 역사신학 분야에서 손두환 박사는 15편을 기고하고, 김명혁 박사는 23편을 기고하고, 김영재 박사는 8편을 기고하고, 박영관 박사는 9편을 기고하고, 대학에서 강의한 이석우 박사는 8편을 기고하고 있다. 그리고 실천신학을 강의한 정성구 박사는 83편을 기고하고, 김성환 목사는 10편, 이성헌 목사는 6편, 장차남 목사는 5편, 정문호 목사는 1편, 옥한흠 목사는 9편을 기고하고, 대학에서 강의한 정정숙 박사는 57편을 기고하고 있으며, 선교신학을 강의한 손영준 박사는 6편을 기고하고, 채은수 박사는 48편을 기고하고, 선교대학원에서 강의한 강승삼 박사가 9편을 기고하고 있다. 또한 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한 최종수 박사는 9편을 기고하고, 유성덕 박사는 13편을 기고하고 있다.

이 시기에 하도례(3편)/하도예(1편)(Theodore Hard) 선교사는 4편을 기고 하고, 신내리(Alvin Roy Sneller) 선교사는 9편을 기고하고 있다. 또한 선교사 간하배(Harvie M. Conn, 하비 칸) 교수는 총신 신대원에서 신학의 전 분야를 가르치면서 52편(간하배 51편/H, M. Conn 1편)을 기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간하배 교수가 1966년 9월부터 1968년에 걸쳐서 “한국 장로교 신학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5편의 논문을 기고하고 있는데, 간하배 교수의 논문에 현대식 각주가 붙기 시작한 것이, 이후 타 교수들의 논문에도 자연스럽게 각주가 등장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특히 앞에서 잠시 지적했듯이, 조직신학 분야에서는 1960년에 이르러 1950년대에 활동하던 박형룡 박사, 명신홍 박사, 이상근 박사 외에, 신복윤 박사(1960년), 박아론 박사(1965년)가 함께 하고, 박형룡 박사, 명신홍 박사, 이상근 박사가 모두 은퇴한 1976년 이후에는, 신복윤 박사, 박아론 박사 외에, 차영배 교수가 1976년부터 1995년까지 함께 하게 되었다. 이 후에 1979년 개혁총회가 분리되고, 1980년 개혁합신총회가 분리된 이후에는 박아론 박사, 차영배 교수가 어려운 시기 신학교를 지키게 되었다. 그리고 유학 전에 이미 「신학지남」에 기고하고 총신 신대원에 강사로 있던 서철원 박사는 1969년에 첫 기고를 시작하여 1972년까지 유학 전에 이미 6건을 「신학지남」에 기고하고 있으며, 개혁신학연구원에서 1982년부터 1991년까지 교수하고, 총신 신대원에 돌아온 후, 1991년부터 2007년 은퇴까지 21건의 논문을 기고하고, 이 외에 편집인이 된 2002년부터 권두언 12건, 모두 39건을 실리고 있다. 김길성 박사는 1979년과 1980년에 총신 신대원에서 강사로 있다가 유학 후 돌아와 1993년부터 기고하고 있으며, 2010년 봄호(제77권 1집[통권 제302호])부터 2011년 겨울호(제78권 4집[통권 제 309호])까지 편집인이 되었다. 최홍석 교수는 1986년부터 기고하고 있으며, 이상원 박사는 1998년부터 기고하고 있고, 문병호 박사는 2004년부터 기고하고 있으며, 강웅산 박사는 2011년부터 기고하고 있고, 이상웅 박사는 2011년부터 기고하고 있다. 한편, 서철원 박사는 지난 2007년에 은퇴하였고, 김길성 박사는 2014년에 은퇴하였으며, 최홍석 교수는 2016년에 은퇴하였다. 이후에 남은 조직신학 교수들로는 이상원 박사, 문병호 박사, 강웅산 박사, 이상웅 박사 등과 대학에서 가르쳐오다가 현재는 신학대학원에서 강의하고 있는 김광열 박사, 정승원 박사 등이 남아 조직신학 교수로 총신대학교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및 총회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4) 제4기(2001년-2017년)

제4기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1965년부터 2000년까지 가르치고, 총신 신학의 2세대에 해당하는 박아론 박사의 은퇴 이후부터 3세대 학자들을 중심으로 현재까지 이르는 시기이다. 2000년을 넘어가면서 총신은 매우 숨 가픈 시기였다. 2000년 봄호의 편집인은 은퇴를 앞둔 박아론 박사였고, 여름호, 가을호의 편집인은 정성구 박사였으며, 겨울호의 편집인은 김의원 박사였다. 그리고 2001년 봄호, 여름호, 가을호, 겨울호의 편집인은 김정우 박사였고, 이후 서철원 박사가 2002년 봄호부터 은퇴(2007년)를 앞둔 2006년 겨울호까지 편집인을 맡았다.

이 시기는 1980년대 후반기부터 1990년대 초반에 걸쳐 주로 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교수들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이 채워지게 되어 명실상부 한국 교계와 신학계에 그 존재를 드러내게 된 시기일 뿐만 아니라, 총신 신대원과 대학 졸업생들이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신학계를 주도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구약신학 분야에서 40편 이상 기고한 교수로는 김정우 박사가 있고, 10편 이상 기고한 교수로 유재원 박사, 김의원 박사, 김지찬 박사, 김희석 박사가 있다. 신약신학 분야에서 40편 이상 기고한 교수로는 이한수 박사가 있고, 10편 이상 기고한 교수로 권성수 박사, 정훈택 박사, 심상법 박사, 김상훈 박사, 한천설 박사, 신현우 박사가 있다. 조직신학 분야에서 40편 이상 기고한 교수로는 김길성 박사, 최홍석 교수가 있고, 10편 이상 기고한 교수로 이상원 박사, 문병호 박사, 이상웅 박사, 문석호 박사, 김광열 박사가 있다. 역사신학 분야에서 40편 이상 기고한 교수로는 박용규 박사가 있고, 10편 이상 기고한 교수로 심창섭 박사, 박건택 박사, 안인섭 박사, 김요섭 박사, 박희석 박사가 있다. 실천신학 분야에서 40편 이상 기고한 교수는 정일웅 박사가 있고, 10편 이상 기고한 교수로 황성철 박사, 이관직 박사, 김창훈 박사, 류응렬 박사, 박태현 박사, 한춘기 박사가 있다. 그리고 선교신학 분야에서 10편 이상 기고한 교수로 김성태 박사, 김성욱 박사가 있다.

한편, 이 시기의 출발점에는 “총신대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호”(제68권 2집[통권 제267호], 2001년 6월)가 발간되어 총신 신학의 3세대 신학자들의 글들이 발표되었다.

두 개의 특집으로 서, “특집 I/총신 신학의 역사와 정체성(1)”에는 김정우 박사, 박용규 박사, 정성구 박사, 김길성 박사, 김성태 박사의 논문이 차례대로 실렸고, “특집 II/구 프린스턴 신학과 총신 신학”에는 김의환 박사/논평 홍치모 교수, 박희석 박사/논평 김길성 박사, 오덕교 박사/논평 김광열 박사의 논문이 논평과 함께 실렸다. 이 논문들은 총신 신학을 확인하고 새 시대를 열어가는 3세대 학자들의 신학과 신앙의 입장의 표명이었다. 이에 대한 평가는 지금은 현직에서 은퇴를 하였거나 현재에도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후대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III. 나가는 글

「신학지남」 백주년을 기념하는 본 논고에서 「신학지남」의 시대구분을 따라서 필자는 다음의 몇 가지를 지적했다.

(1) 「신학지남」이 창간된 1918년부터 신사참배 문제로 폐간된 1940년까지의 제1기는 한국교회 신학과 신앙의 기초를 다지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신학지남」의 발간에 있어서 평신에서 교수 사역을 한 선교사들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하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조직신학 분야는 주로 레이놀즈(이눌서) 박사와 박형룡 박사가 주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학지남」 창간호부터 1927년까지 첫 10년간은 거의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된 독무대였다고 한다면, 1924년에는 라부열(Stacy L. Roberts) 선교사가 평신의 2대 교장으로 취임하고, 1927년 남궁혁 박사가 평양신학교 첫 한국인 교수로 참여하고, 1928년에 「신학지남」 편집인이 되고, 그해에 이성휘 박사가 참여하고, 이어서 박형룡 박사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첫 기고(1928년)를 한 후, 1930년부터 평양신학교에서 교수사역을 시작하면서 신약신학자 남궁혁 박사, 구약신학자 이성휘 박사와 더불어 조직신학자 박형룡 박사의 논문이 다수 발표되어, 남궁혁 박사가 편집인이 된 이후로 폐간(1940년)까지 10여 년 동안은 한국인 교수들인 남궁혁, 이성휘, 박형룡 박사가 오히려 「신학지남」의 신학의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또한 이 사실은 남궁혁 박사, 이성휘 박사, 박형룡 박사, 박윤선 교수(1937년부터 교수) 등이 가르친 “구프린스턴 신학(Old Princeton Theology)” 전통이 평양신학교와 장로회 총회신학교, 그리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과 총신대학교의 신학 전통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2) 그리고 1954년에 「신학지남」의 복간은 단순히 「신학지남」을 다시 발간하는 정도가 아니라, 평양신학교에서 시작한 신학저널을, 당시에 평신에서 가르치고 편집위원의 한 사람이었던 교수와 당시의 학생들이 남하하여 남쪽에서 계속하여 동일한 신학과 사상으로 발간한다고 하는 “속간”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 이 시기는 전쟁과 혼란의 시기였다. 6.25. 전쟁(1950-1953년) 중에 고신(1952년)과 기장(1953년)이 분열하였고, 6.25 전쟁 이후 W.C.C. 신학문제로 통합(1959년)이 분열하였다. 「신학지남」이 복간된 1954년부터는 조직신학 분야에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 명신홍 박사와 이상근 박사가 50년대를 주도하게 되었다. 1960년대에 들면서 성경신학 분야에 박윤선 박사가 함께 하고, 실천신학 분야에 차남진 박사가 함께 하며, 조직신학 분야에 박형룡 박사, 명신홍 박사, 이상근 박사 외에도, 신복윤 박사, 박아론 박사가 함께 하게 된 사실을 알게 된다.

(3) 박형룡 박사가 소천(1978년)한 후 개혁총회(1979년)와 개혁합신총회(1980년)가 분열하는 아픔의 시기가 있을 때에도 「신학지남」은 자기 자리를 지켰다. 박형룡 박사와 명신홍 박사, 이상근 박사가 모두 은퇴한 1976년 이후에는, 신복윤 박사, 박아론 박사 외에도 차영배 교수가 1976년부터 1995년까지 약 20년 동안 함께 하게 되었다. 이 후에 1979년 개혁총회가 분리되고, 1980년 개혁합신총회가 분리된 이후, 유학 전에 이미 「신학지남」에 기고하고 총신신대원에 강사로 있던 서철원 박사는 1991년 이후부터 총신 신대원에서 다시 후학들을 만나게 되었다. 김길성 박사는 1979년과 1980년에 총신 신대원에서 강사로 있다가 유학 후 돌아와 1993년부터 기고하고 있으며, 최홍석 교수는 1986년부터 기고하고 있으며, 이상원 박사는 1998년부터 기고하고 있다.

(4) 서철원 박사는 지난 2007년에 은퇴하였고, 김길성 박사는 2014년에 은퇴하였으며, 최홍석 교수는 2016년에 은퇴하였다. 이후에 남은 교수들로는 이상원 박사, 문병호 박사, 강웅산 박사, 이상웅 박사 등과, 대학에서 주로 가르쳐왔으나 현재는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는 김광열 박사, 정승원 박사 등이 남아 조직신학 교수로 총신대학교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및 총회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역사적으로, 1901년 평양에서 시작한 평양 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이어받아 필자가 속한 총신대학교는 올해로 개교 117주년을 기념하게 되었고, 「신학지남」 발간 100주년을 기념하게 되었다.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나라 잃은 슬픔을 맛보았고, 다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이를 거부하여 폐교한 1938년까지 평양신학교는 칼빈주의 보수정통신학을 가르쳤고, 평양신학교가 폐교한 후 일제의 허락을 받아 설립된 조선신학교(1940년)의 신학적 노선에 반대하여, 1946년에 시작된 고려신학교(1946년)가 독자노선을 취한 것(1952년)은 총회적인 아픔으로 남게 되었으나, 장로회신학교의 설립(1948년)으로 폐교 전 평양신학교의 신학 전통을 이어가게 되었고, 다시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가 해체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가 정식으로 총회직영신학교로 출범(1951년)하게 되었으며, 조선신학교는 끝내 신학적 자유주의 노선을 고집하여 기장을 세우기에 이르렀다(1953년).

그 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한 범교단적인 입장의 차이로 말미암아 W.C.C.에 찬동하는 통합측이 분열(1959년)하는 아픔을 맛보았고, 이 분열로 합동측 교단은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교세도 통합에 비해 매우 열악했고, 교회도 매우 미약하게 출발했으며, 남산에 위치한 신학교(소위 ‘남산신학교’)는 용산으로 옮겨 사당동 캠퍼스로 이전(1965년)까지 소위 ‘용산신학교’(1960-1964년)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시기에 고신측과의 합동(1960년-1962년)과 고신측의 환원으로 교회와 성도들의 아픔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남쪽 영남지방의 교회들은 사정이 매우 열악했다.

필자 자신이 어린 시절, 장로회 총회신학교(현 총신의 전신)가 남산에 있던 시기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평생을 경남노회 목사로 통영을 중심으로 당시 경남노회 산하의 작고 약한 교회(통영, 거제, 남해 지역)에서 목회하신 부친(김용기 목사, 1927년생)의 슬하에서 목사의 아들로 몸소 겪으면서 자랐다. 이후의 분열에서는 신학적, 교리적 문제보다는 오히려 행정적, 교권적 문제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후학들에게 남겨진 커다란 짐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이런 중에도 다행한 것은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측)은 2005년에 그동안 26년 동안 헤어져 있었던 구 개혁 측 가족들을 다시 맞아들여 하나가 되었고, 한국의 기독교 역사상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좋은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측)은 해외선교사 파송에 있어서도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만 이천 교회가 넘는 교회를 가진 교단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의 선배들이 한결같이 어렵고 힘든 여건 속에서도,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 칼빈주의, 청교도 장로교 신학의 전통을 붙잡고, 오직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목회를 지향해온 결과라고 생각 된다. 올해로 개교 117주년과 「신학지남」 발간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우리 선배들의 발자취와 피와 땀과 눈물을 기억하고 오늘을 사는 우리의 자세와 각오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뿐이다.

지난 1948년 6월 9일에 신설 장로회신학교 특별기도회 때 박형룡 박사가 열왕기상 6장 1-7절의 본문을 중심으로, “선지학교의 중건”이란 제목 하에 행해진 설교에서 비롯되어 필자가 속한 총신의 교훈으로 남아 있는 다섯 가지 교훈의 내용이, 현대의 잡다한 비성경적이고 혼합주의적인 신학의 도전 앞에서, 진리에 근거한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을 열망하여 미래를 열어가는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과 함께, 우리의 가슴 속에 다시 한 번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다가 왔으면 좋겠다:

교 훈

1. 신자가 되라.
1. 학자가 되라.
1. 성자가 되라.
1. 전도자가 되라.
1. 목자가 되라.

지금까지 「신학지남」에 발표된 논고들을 통해 평양신학교와 장로회 총회신학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친 교수들의 신학과 사상을 검토하는 작업을 하였다. 「신학지남」이 창간된 평양신학교와, 복간 후 장로회 총회신학교에서, 그리고 이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과 총신대학교에서 한결같이 역사적 개혁신학, 정통 칼빈주의 신학이 주류를 이루며 가르쳐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학지남」이 한국교계 전체와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고 하는 점은 매우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후학들에게 주는 책임도 그만큼 무겁다고 생각한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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