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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신학지남」 100년의 역사와 신학 1
김길성(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명예교수,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8/11/07 [11:51]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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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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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총신대 명예교수이신 김길성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신학지남의 100년을 돌아보고 시대를 구분하고 그 역사를 열거한다. 그리고 신학지남에 나타난 총신의 신학 전통을 제시하고 있다.

I. 들어가는 글

신학지남 100주년 기념호(2018.3)
「신학지남」 백주년을 허락하신 성삼위 하나님께 감사를 돌립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이하 평양신학교)에서 1918년 3월에 창간한 「신학지남」은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지금까지 발행해오고 있으며,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한다. 1901년 4개 장로회 선교부에 의해 평양신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신학교를 대표하는 기관지인 「신학지남」이 발간된 것은 1918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일본제국주의 치하에 평양에 있던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저널인 「신학지남」을 간행하였다. 평양신학교 교수들의 연구논문을 출판하기 위해 호주 장로회 선교부 왕길지 선교사(또는 엥겔, Gelson Engel, 1868-1954)가 편집인이 되어 그해 3월에 창간호를 출판하였다.

1901년에 설립된 평양신학교의 초대 교장은 사무엘 마펫 선교사였다. 마펫선교사의 집에서 시작한 첫 학생은 김종섭, 방기창 두 장로였고, 첫 교수로는 마펫 선교사와 그레이엄 리 선교사였다. 그리고 초기 평신 교수들로는 교장인 사무엘 마펫(Samuel A. Moffet, 마포삼열) 외에, 그레이엄 리(Grahamh Lee, 이길함), 호러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원두우), 윌리엄 스왈른(William C Swallen, 소안론),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 찰스 클라크(Charles Allen Clark, 곽안련), 윌리엄 레이놀즈(William David Reynolds, 이눌서), 윌리엄 헌트(William B. Hunt), 찰스 번하이설(Charles F. Bernheisel, 편하설), 겔슨 엥겔(Gelson Engel, 왕길지) 선교사 등이 있었다.

1924년에는 제2대 교장으로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인 스테이시 로버츠(Stacy L. Roberts, 라부열)박사가 취임했다. 초창기 평신에서의 교육과정은 5년 과정이었고, 1년에 3개월 집중 수업하는 방식이었으며, 나머지 9개월은 각기 교회에서 현장목회 실습을 하는 것이었다. 1905년에 재학생 22명, 1906년에 50명, 1907년에 75명, 1909년에 138명으로 증가했다. 1907년 9월에 조선(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개최되고, 평신의 첫 졸업생들인 방기창(58세), 서경조(58세), 한석진(41세), 길선주(40세), 송인서(40세), 이기풍(40세), 양전백(39세) 등 7명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6년에는 230명의 목사후보생이 재학하였고, 6명의 전임교수 외에 7명의 협동교수가 가르치고 있었다. 이때까지 졸업생 누계는 171명에 달했다.

1885년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원두우) 선교사와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 선교사에 의한 본격적인 조선선교의 시작으로부터 광복(1945년 8월 15일) 이전까지 발간된 신문과 잡지로는, 영문으로 된 「The Korean Repository」(1891. 1. 1), 한국 기독교 신문의 효시로 볼 수 있는 「죠선크리스도인회보」(1897. 2. 2 –1897. 12. 29), 감리교 신학교에서 계간으로 발행한 「신학세계」(1916. 2), 성결교회의 잡지인 「활천」(1922) 등 약 88종이 있다고 소개된다.

그러나 「죠선크리스도인회보」는 한국 기독교 신문의 효시로 여겨지기는 하지만 1년 정도 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그리고 「신학지남」보다 2년 먼저 감리교 신학교에서 발행한 「신학세계」도 계간으로 시작하였으나 여러 차례 정간을 거쳤으며, 1953년 이후에는 1년에 1회 정도 발행되고 있다. 또한 1922년에 성결교회에서 발행한 신학월간잡지인 「활천」도 여러 번의 정간을 거쳐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는 정도이다.

또한 「조선일보」(1920. 3. 5), 「동아일보」(1920. 4. 1), 「중앙일보」(1965. 9. 22)등이 창간된 시기를 살펴보면, 「신학지남」의 창간(1918. 3)은 그 당시 일본제국주의 치하의 우리 민족의 개화와 한국 교계의 신학을 지로하는 신학저널로서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역할을 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1918년에 창간한 「신학지남」은 창간 후 100년 동안 계간지로서 1년에 4회 발행하려는 처음 계획을 꾸준히 잘 지켜오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 교단과 총신대학교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의 자부심이요 자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1901년 평양에서 4개 장로회선교부(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미국 남장로회선교부, 호주장로회 선교부, 캐나나장로회 선교부)에 의해 설립된 평양신학교(평양 장로회신학교)는, 신학교가 설립된 지 17년 후인 1918년에야 신학교 기관지인 「신학지남」을 발간하게 된 것이다. 평양신학교에서 교수한 왕길지 선교사는 창간호의 발간사에서 “우리 장로교회의 목사와 신학생들에게 신학의 광해[廣海, 넓은 바다]에 향방[向方, 방향]을 지남[指南]하려는 데 있다.”고 밝히고 있듯이, 장로교회의 신학 이해와 방향을 제시해 주기 위해 발간하였다.

또한,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하는 목사들에게 계속해서 신학을 연구하여 신학적 지식을 풍부하게 하는 동시에 목회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료를 제공하고, 특히 설교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설교 모형과 자료를 게재하여, 뛰어난 설교자가 되도록 하는 데도 발간의 목적이 있다고 하였다.

「신학지남」은 신학관계 서적이 부족하던 당시에 목회자와 신학생들에게 신학 지식을 전달하는 데 큰 공헌을 했으나, 당시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써 평양신학교가 폐쇄(1938년)되자 함께 폐간(1940년 가을)되었다.

조국의 광복(1945년) 후 1954년 2월에 복간되었고, 1959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통합측이 분열되면서 통합측 장로회신학대학은 새로운 저널을 출간하게 되었다. 장로회신학대학은 1960년이후 「신학지남」을 발간해오다가, 1965년에 제호를 「교회와 신학」으로 바꾸어 현재까지 출판해 온 반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은 평양신학교 이래로 제호를 그대로 고수하여, 1964년 문화공보부 등록번호 제 바-38호(1964년 8월 22일)로 다시 등록되어 「신학지남」은 현재까지 발간을 계속하고 있다.

「신학지남」은 1918년 창간호를 시작으로 2017년 겨울호까지 지난 100년 동안 통권 제333호[제84권 4집]을 발간하고 있으며, 「신학지남」에 실린 논문의 편수만 4604편에 달한다.7 이리하여 「신학지남」 발간 100주년을 맞이하는 2018년 3월호로 통권 제334호[제85권 1집]을 발간하고 있다.

II. 「신학지남」 100년

1. 「신학지남」의 시대구분

평양신학교에서부터 교수 사역을 시작한 박형룡 박사는 그가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교수를 은퇴한 후, 1975년에 기고한 논문인 “신학지남의 한국 신학사적 의의”라는 제목의 글에서 「신학지남」의 시대구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 초창기의 정통신학 (2) 발전기의 갱신과 혼란 (3) 정간기의 자유주의의 전성 (4) 속간후기로 구분하여 「신학지남」의 시대를 구분했다. 박형룡 박사는 이보다 먼저 「신학지남」 발간 50주년을 맞이하는 1968년 봄호에 “신학지남 50년”이라는 글을 실리고, 「신학지남」의 시대를 셋으로 구분한바 있다. (1) 초창기 (2) 발전기 (3) 속간후기로 구분했다. 이를 1975년의 논문인 “신학지남의 한국 신학사적 의의”에서 (2) 발전기와 (3) 속간후기 사이에 “정간기”를 추가하여, 새롭게 (1) 초창기 (2) 발전기 (3) 정간기 (4) 속간후기로 4구분하고 있다.

이중 (1) 초창기는 평양신학교가 개교(1901년)된 지 17년 후인 1918년 3월 20일 창간으로부터 1927년까지, 호주장로회 왕길지 선교사(Gelson Engel, 1918년-1920년)와 미국 북장로회 배위량 선교사(William Martyn Baird, 1921년-1927년)가 편집인으로 활동하던 시기이다. 그리고 (2) 발전기는 1927년 남궁혁 박사가 평양신학교 신약학 교수로 취임하고, 이듬해인 1928년부터 한국인 교수가 편집인이 된 때부터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하고 「신학지남」이 폐간된 1940년 10월 25일(제22권 5호, 통권 제113호)까지이다. 그리고 (3) 정간기는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된 이후, 일본제국주의 치하인 1940년 4월에 서울에서 조선신학교가 개교한 때부터 광복(1945년 8월 15일)을 지나 「신학지남」이 복간된 1954년 이전까지를 말한다. (4) 속간후기는 장로회 총회신학교에서 「신학지남」이 속간된 1954년부터 박형룡 박사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를 은퇴한 1972년까지이다.

이상에서 살펴보듯이, 박형룡 박사의 시대구분은 매우 유익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의 글은 이미 40여 년 전에 쓴 글로 그 때 이후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 적어도 박형룡 박사가 은퇴한 1972년 이후부터 100주년을 맞는 2018년 3월호인 제85권 1집[통권 제334호] 이전까지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또한 박형룡 박사의 아들인 박아론 박사는 1965년부터 2000년까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교수했는데, 그가 은퇴하기 전 1998년에 맞은 「신학지남」 80년을 기념하는 논문인 “신학지남과 한국교회의 신학”이라는 글에서, 「신학지남」 80년의 시대를 구분하여 (1) 초창기(1918-1940) (2) 중간기(1954-1971) (3) 현대기(1972-1998 현재)로 나누고 있다. 이중 (1) 초창기는 “성장과 좌절의 시기”로, (2) 중간기는 “고난과 시련의 시기”로, (3) 발전기는 “괄목할 만한 발전의 시기”로 기술하고 있다. 박아론 박사의 경우에는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선교사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하던 시기, 그리고 복간 후 평양신학교부터 교수한 박형룡 박사의 은퇴까지, 그리고 그 후 시기를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1998년부터 100주년을 맞는 2018년까지 시기에 대한 고려가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한편, 신학대학원에서 구약신학을 가르쳐온 김정우 교수는 총신대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호(2001년)에 실린 “신학지남에 나타난 총신 신학의 회고와 전망”에서 「신학지남」의 시대를 셋으로 구분하고 있다. (1) 제1기(1918-1940)로 창간호에서 정간까지로 하고, (2) 제2기(1954-1979)로 복간한 해로부터 1979년 말까지로 하고, (3) 제3기(1980-2000)로 1980년 이후부터 2000년까지를 구분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참고하여, 1918년 창간호부터 100주년을 기념하는 2018년 봄호(제85권 1집, 통권 제334호) 이전인 2017년 겨울호(제84권 4집, 통권 제333호)까지 100년 동안의 「신학지남」을 시대구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1) 제1기는 1918년-1940년, 「신학지남」 창간호부터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폐교와 이어진 폐간까지, 일본제국주의 시대 평양신학교를 중심한 선교사들이 주도한 시기, (2) 제2기는 1954년-1971년, 광복과 6.25 전쟁을 지나 복간된 해로부터 평양신학교에서부터 교수한 총신 신학의 1세대 교수인 박형룡 박사가 은퇴한 시기까지, (3) 제3기는 1972년-2000년, 박형룡박사가 은퇴한 후부터 그 다음 세대에 해당하는 총신 신학의 2세대인 박아론박사가 은퇴(2000년)한 시기까지, (4) 제4기는 2001년-2017년, 박아론 박사의 은퇴 이후 총신 신학의 3세대 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학지남」 발행에 주도적 역할을 한 때부터 2017년까지로 나눌 수 있다.

2. 「신학지남」의 역사

평양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조선에 온 선교사들에게 오랜 기도와 준비와 아낌없는 지원이 필요한 원대한 사역이었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1893년에 선교사 공의회가 조직되어 1900년까지 이르고, 이후 1901년부터 1906년까지 합동공의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게 된다. 이후 1907년에 조선(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고, 7명의 신학교 졸업생이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고, 1912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게 된 것이다.

조선에서 활동하던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 호주장로회 선교부, 캐나다장로회 선교부, 이상 4개 선교부의 선교사 공의회에 의해 평양신학교가 설립되었고, 평양신학교 초대 교장은 사무엘 마펫 선교사였다. 그리고 초기 평신 교수들 중에서 교장인 사무엘 마펫(마포삼열) 외에, 윌리엄 베어드(배위량), 윌리엄 스왈른(소안론), 그래함 리(이길함), 윌리엄 헌트, 찰스 번하이셀(편하설) 선교사 등, 6명 모두 미국 시카고 소재 매코믹 신학교 출신이었고 자연히 시카고에 소재한 무디 성경학교와 무디 목사의 부흥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이었다고 하는 것은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평양신학교 설립 초기에 선교사들, 특히 북장로회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평양신학교 교수들 사이에, 청교도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요소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고 본다. 당시 북장로교회(PCUSA) 외지선교회 총무 중 한 사람인 브라운(Arthur Judson Brown) 박사의 말은 당시 초기 선교사들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나라를 개방한 후 처음 25년만의 전형적 선교사는 퓨리탄 형의 사람이었다. 이 퓨리탄 형의 선교사는 우리 뉴잉글랜드(미국 동북의 여섯 주) 조상들이 한 세기 전에 행하던 것과 같이 지켰다. 춤이나 담배 그리고 카-드노리 등은 기독교 신자들이 빠져서는 안 될 죄라고 보았다. 신학이나 성경을 비판할 때 이러한 선교사는 강력하게 보수적이었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전 천년의 견해를 없어서는 안 될 진리라고 주장했다. 고등비평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으로 생각되[고] 있었다.” 고 언급하고 있다. 조선에서 활동한 초기 선교사들이 청교도적이며 동시에 자유주의에 강력하게 대항하는 보수주의 신학이라고 하는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또한 고신과 총신에서 강의한 간하배(Harvie M. Conn) 선교사도 말하기를, “한국초기교회의 역사는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적 기독교 역사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북장로교회 한국선교부 연례보고서」(1922년)에 따르면,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북장로교회 소속 40명의 선교사들 중에는 미국의 7개의 신학교 출신들이 있었다고 말하고, 그 중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이 16명, 매코믹 신학교 출신이 11명, 기타 샌 안셀모 신학교(현 샌프란시스코 신학교), 유니온 신학교 출신이 있었으며, 또한 무디 성경학교, 뉴욕 성서신학교 출신들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평양신학교는 1901년 설립부터 1905년까지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의 단독 운영이었다. 그러나 1906년 이래로, 북장로회 선교부, 남장로회 선교부, 호주장로회 선교부, 캐나다장로회 선교부가 연합하여 운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06년부터 호주장로회 선교부의 왕길지(Gelson Engel) 선교사(1902년부터 가르침)와 남장로회 선교부의 이눌서(William David Reynolds) 선교사를 필두로 4개 선교부 선교사들이 정식으로 평신에서 교수 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924년에는 라부열(Stacy L. Roberts) 선교사가 평신의 2대 교장으로 취임하고, 1927년에 신약신학자 남궁혁 박사가 평신 교수가 되고 이듬해 「신학지남」의 편집인이 되고, 1928년에 구약신학자 이성휘 박사가 평신교수가 되고, 1928년에 「신학지남」에 첫 기고를 한 조직신학자 박형룡 박사가 1930년에 평신 교수가 되어 가르치게 된 사실도 동시에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901년 4개 선교부 공의회에 의해 평양에 설립된 평양신학교는 1918년이 되어서야 「신학지남」을 발간하게 된다. 「신학지남」의 영문 이름은 Presbyterian Theological Quarterly이다. 이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신학지남」은 창간호부터 1년에 4번 발간(Quarterly)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제1기(1918년-1940년)에는 「신학지남」이 통권 제113호까지 발간되었으며, 이는 「신학지남」 제22권 5호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신학지남」은 1928년을 전후하여 큰 변화가 있었다. 창간호부터 1927년까지는 주로 1년에 4회 발간을 유지했으며, 1928년부터는 주로 1년에 6회씩 발간하게 되었다. 이 시기 편집인은 1927년까지는 선교사였으며, 평양신학교 교수인 호주 장로회 왕길지 선교사(Gelson Engel, 1918년-1920년)와 미국 북장로회 배위량 선교사(William Martyn Baird, 1921년-1927년)가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928년부터는 한국인 교수가 편집인을 맡게 되었고, 남궁혁 박사가 편집인을 맡았다.

제2기(1954년-1971년)는 「신학지남」 복간으로부터, 평양신학교에 이어 장로회 총회신학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교수한 총신 신학의 1세대 교수인 박형룡 박사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사역을 그만 둔 해까지이다.

박형룡 박사는 그 이듬해에 은퇴했다. 1954년 복간 이후 「신학지남」은 1년에 4회 발행을 하지 못하고, 1954년에서 1962년 사이에는 최고 3회까지 발행했다.

1954년에 3회, 1969년 2회, 그리고 1955년, 1958년, 1961년, 1962년에는 각각 1회만 발행했으며, 1956년, 1957년, 1959년에는 「신학지남」을 전혀 발간하지 못했다. 1963년 이후부터 1971년 사이에는 1년에 4회 발간을 지키려고 애쓴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래도 1964년에 2회, 1965년에 3회를 발간했으며, 1971년에는 3회를 발간했으나, 이중 가을, 겨울호는 합본으로 발간했다. 이 시기에 우여곡절이 많은 것은, 1954년에 복간은 되었으나,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 신사참배 강요에 참여한 사람들의 처리문제로 인한 고신의 분열(1952년)과 교회 내 자유주의 신학 문제로 인한 기장의 분열(1953년)로 인하여 교계가 안정되지 못한 것과, 이어서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문제로 인해 다시 교계가 진통을 겪고 있던 시기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결국 교회는 W.C.C. 가입문제로 인하여 통합측이 분열(1959년)하고 말았다. 이로써 장로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로 시작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측) 외에도, 고신측, 기장측, 통합측으로 크게 분열하고 말았다.

제3기(1972년-2000년)는 평양신학교에 이어서 장로회 총회신학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친 총신 신학의 1세대인 박형룡 박사가 은퇴한 후부터 그 다음 세대인 박아론 박사가 은퇴(2000년)한 시기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박형룡 박사에게 배운 2세대 신학자들이 주로 교수하던 시기로, 「신학지남」 발간을 1년에 4회씩 지켜내려고 애쓴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1978년, 1980년, 1981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94년에 3회가 발간되었고, 그 외에는 전부 1년에 4회씩 발간했다. 특이한 점은 통권 제207호가 기록에서 빠졌다는 것이다. 1985년에는 1호, 2호, 3호까지 3회 발행했는데, 1985년 가을호는 제52권 3호(통권 제206호)이다. 그 다음호는 당연히 통권 제207호가 되어야 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1986년에는 1호가 빠진 채로 2호, 3호, 4호까지 3회 발간되었다. 1985년 가을호 다음호에 해당하는 1986년 여름호는 제53권 2호로 된 것은 옳으나, 통권 제208호로 기록하여, 일련번호 순서에 있어서 “통권 제207호”가 빠진 채로 전체 기록에서 누락되어 있다.

제4기(2001년-2017년)는 총신 신학의 2세대인 박아론 박사의 은퇴 이후부터 「신학지남」 100주년을 맞는 2018년 봄호 이전까지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 「신학지남」 발간을 주도한 신학자들은 총신 신학의 3세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1년에 4회 발간을 놓친 적이 없다. 단지 특이한 점은 2007년 겨울호부터 제74권 4집(통권 제293호)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창간호(제1권 1호, 통권 제1호)부터 2007년 가을호(제74권 3호, 통권 제292호)까지는 “제1권 1호,” “제74권 3호” 등으로 표기해 왔으나, 2007년 겨울호로부터 “제74권 4집”으로 표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표기는 2007년 겨울호 이래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창간호부터 2014년 봄호(제81권 1집, 통권 제318호)까지는 제호를 한자로 된 「神學指南」을 사용하였으나, 2014년 여름호(제81권 2집, 통권 제319호)부터 한자명 외에 한글 제호를 병기하고 있다.

3. 「신학지남」에 나타난 총신의 신학 전통

한국 땅에 왔던 초기 4개의 장로회 선교부(북장로교회, 남장로교회, 캐나다 장로교회, 호주 장로교회 선교부)가 함께 공의회를 조직하고, 1901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시작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곳에서는 1901년에 개교하여 1907년 첫 졸업생 7명을 배출한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지남」 창간호를 발행한 1918년 이래로, 일제 하, 1938년 일본제국주의의 신사참배 강요로 학교는 문을 닫았으나 1940년까지 발간된 「신학지남」을 통해 초기 선교사들을 중심한 「신학지남」 논고들을 검토하고, 6.25 동란 직후에 복구된 1954년 이후의 「신학지남」 논고들을 중심으로, 평양신학교와 장로회 총회신학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발표된 조직신학 논문들을 중심으로 「신학지남」의 신학사상과 흐름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제1기(1918년-1940년)

「신학지남」 창간호(1918년 3월)부터 1927년까지 첫 10년간은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된 독무대였다고 한다면, 1927년 남궁혁 박사가 평양신학교 첫 한국인 교수로 참여(신약신학 전공)하고, 1928년에 「신학지남」 편집인이 되고, 그 해에 이성휘 박사가 구약신학 교수로 참여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첫 기고(1928년)를 한 후 1930년부터 평양신학교에서 변증학 및 조직신학 교수사역을 시작하고 있으며, 제자요 동료인 박윤선 박사는 미국 필라델피아 소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석사(Th. M.) 학위를 취득하고(1934년-1936년), 귀국하여 평신에서 성경원어 강사를 시작하였고, 1937년 9월에 발간한 「신학지남」에 첫 논문을 기고했다. 이후 평신에서 3편을 더 기고했고, 평양신학교가 폐교한 후에는 다시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전공인 신약신학 연구를 계속했다(1938년-1939년). 이 기간 동안 연구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계속하고자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에 평양신학교에서 교수하며 「신학지남」에 기고한 선교사들의 면모는 다음과 같다. 먼저 40편 이상 기고한 선교사들로는,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클라크)(173편), 라부열(74편)/나부열(53편)(Stacy L. Roberts, 로버츠)(127편), 어여만(52)/어도만(60)/어드만(4)/어더만(9)(Walter C. Erdman, 어드만)(125편), 이눌서(58편)/이눌셔(1)/리눌서(4)/리눌셔(12편)(William David Reynolds, 레이놀즈)(75편)이 있다. 그리고 10편 이상 기고한 선교사들로는, 왕길지(Gelson Engel, 엥겔)(31편), 부두일(W. Rufus Foote, 푸트)(24편), 소열도(T. Stanley Soltau, 솔타우)(22편), 배위량(William M. Baird, 베어드)(28편), 편하설 Charles F. Bernheisel, 번하이설)(14편),

마로덕(Luther Oliver McCutchen, 맥커천)(12편), 민로아(Frederick S. Miller, 밀러)(25편), 함일돈(Floyd E. Hamilton, 해밀턴)(11편), 구례인(3)/구예인(15)/그레인(1)(John Curtis Crane, 크레인)(19편)이 있다. 이 밖에 10편미만으로 기고한 선교사들이 많이 있으나 명단은 생략한다. 한국인 교수로서 40편 이상 기고한 분으로는, 채필근(48편), 남궁혁(123편), 이성휘(68편), 박형룡(창간호부터 70편/복간 후 66편, 이중 2편은 박형용으로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총 136편) 교수가 있다. 그리고 최계철 13편, 송창근 교수 18편, 김재준 교수 7편, 한경직 교수가 1편을 기고하고, 박윤선 교수는 4편을 기고하고 있고, 이 외에도 많이 알려지지 않은 한국인 기고자의 이름이 더 있다.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에 대한 연구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자.

박형룡 박사는 미국 유학(Th. B., Th. M., Ph. D. 과정 수료)후 귀국하여 1930년부터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평양신학교가 폐교된 1938년까지 교수로 가르쳤다. 박 박사는 그의 교수생활 중에 준비한 기독교 변증학 분야의 학위논문(1931년 제출)으로 1933년 1월에 “자연과학의 반 기독교적 추론”(“Anti-Christian Inferences from Natural Science”)이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Ph, D.)를 받게 되었다.

박형룡 박사의 평양신학교 교수 사역 중 박 박사의 논문이 다수 발표되어, 남궁혁 교수가 편집인이 된 이후로 폐간(1940년)까지 10여 년 동안은 남궁혁 박사, 이성휘 박사와 더불어 조직신학자 박형룡 박사가 오히려 「신학지남」의 신학의 흐름을 주도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사실은 박형룡 박사가 그의 유학 시절 실제로 몸으로 부딪히면서 배우게 된 “구 프린스턴 신학(Old Princeton Theology)”이 어떻게 평양신학교와 장로회 총회신학교, 그리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과 총신대학교에 심화되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01년 4개 장로회 선교부에 의해 평양신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신학교를 대표하는 「신학지남」이 발간된 것은 1918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이 기간 동안에 조직신학분야에 주로 글을 발표한 분은 선교사 레이놀즈(William David Reynolds, 이눌서) 박사와 박형룡 박사였다. 1906년 이래로 평양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한 이눌서 박사는 창간호가 나온 1918년부터 1937년까지 20년 동안 75편의 크고 작은 논문을 「신학지남」에 기고했다. 이눌서 박사의 논문은 1937년으로 끝나고 있다. 그의 선교 40주년을 기념하는 글이 실린 1933년 이후에도 4년 동안 「신학지남」에 기고한 것을 보면 평양신학교 초기부터 그가 선교사로서 또한 조직신학 교수로서 신학교에 미친 영향과 초기의 한국교회, 특히 한국의 장로교회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박형룡 박사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Th. B.와 Th. M. 학위를 마치고,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에 소재한 남침례교 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미치고 귀국한 이듬해인 1928년부터 평양신학교에서는 최종판이 되는 1940년까지 13년 동안 70편의 논문을 기고했다. 박 박사의 박사학위논문은 평양신학교 강의 동안 준비한 것으로 1933년 1월에 남침례신학교로부터 철학박사(Ph.D.)학위를 받았다.

「신학지남」에 실린 박형룡 박사의 논문은 해방 후 남쪽에서 복간된 1954년부터 1971년까지 66편이 「신학지남」에 실려 있다. 박형룡 박사가 1930년 평양신학교 교수가 된 이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총회신학교)에서 봉직한 1972년까지 43년의 긴 기간만큼이나, 「신학지남」과의 인연도 길어서 첫 논문을 기고한 1928년부터 마지막 논문이 실린 1971년까지 총 136편의 논문이 「신학지남」에 실려 있다.

이상에서 간단하게만 살펴보아도 평양신학교 시작부터 조직신학 분야에는 이눌서 박사가 주도적으로 가르쳤고, 「신학지남」이 창간된 첫 호부터 1937년까지 75편의 논문을 기고한 이눌서 박사의 신학은 평양신학교 조직신학의 초석을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비해 박형룡 박사의 평양신학교와의 인연은 이눌서 박사보다 훨씬 늦게 시작되었다. 박형룡 박사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이듬해부터(1928년) 「신학지남」에 기고했을 뿐만 아니라, 1930년부터 교수하기 시작한 이래로, 1938년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은 뒤에도 1940년까지 박형룡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은 70편이 된다는 사실은 박 박사가 얼마나 열심히 「신학지남」에 기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신학지남」 창간호부터 첫 10년간은 조직신학 분야에서 선교사에 의해 주도된 이눌서 박사의 독무대였다고 한다면, 박 박사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첫 기고를 한 1928년 이후에는 오히려 박 박사의 논문이 이눌서 박사의 논문보다 더 많이 발표되어, 조직신학 분야에서 박형룡 박사가 오히려 주도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 김재준 교수의 논문은 1933년에 제15권3호, 제15권 5호, 제15권 6호까지 3회, 1934년에 제16권 1호에 1회, 1935년에 제17권 1호, 제17권 2호, 제17권 3호까지 3회, 전부 7편이 실리고 끝나고 있다. 특히 1934년 1월에 실린 김재준 교수의 논문(“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 연구”)에서 이사야 7장 14절에 나오는 동정녀(처녀)를 뜻하는 히브리어 「알마」를 “젊은 여자”로 해석하고 있다. 김교수는 자신의 짧은 논문 속에서, “「동정녀」란 글자「알마」는 동정녀를 말함이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계속하여 말하기를, “그러면 이제 「표적」은 어디 있는가 하는 문제를 구명하려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표적」의 소재는 동정녀의 잉태에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그것은 「동정녀」라는 글자가 반드시 동정녀를 의미한 것이 아니매 구태여 이적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우며 「잉태하여」는 동정녀를 형용한 분사이매 자체에 중요성이 없는 까닭이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위의 신학상의 문제점을 지적한 박 박사의 요청으로, 이후 김재준 교수의 글은 다시는 「신학지남」에 실리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김재준 교수의 신학문제는 해방 후에 다시 교단적인 문제가 되었고, 이 때문에 1953년에는 교단을 떠나게 되었고 소위 기장이 출발하는 빌미가 되었다. 박박사의 초기 논문들과 김재준 교수의 글을 비교해 보면, 박 박사와 김재준 교수 사이의 논쟁을 시작으로 과거 역사의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두 사람 사이의 논문의 내용과 질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신학사상을 비교하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된다.

선교사 이눌서 박사가 1918년 「신학지남」 창간호에 처음 실린 글은 “신학변증론”으로, 시카고 매코믹 신학교 교수인 윗샷 박사가 1년 전 신학생들에게 강연한 것을 이눌서 박사가 번역한 것으로, 신앙과 경험과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 논문에서, 옛적 철학사는 추리적으로 변론하여서 사실을 상관치 아니 하였으나, 근세철학사는 사실을 자세히 헤아려보고 그 사실에 적당한 이치만 사용하게 되어 학문적으로 크게 진취한 일이라고 말하고, 헬라의 아리스도들[아리스토텔레스]부터 영국의 베컨[Bacon, 베이컨]까지 이치를 제일로 알고 그 이치에 터 된 사실을 상관치 아니하여, 서로 합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사실을 버리고 이치를 사용했는데, 근세철학사들은 사실을 잡아서 추론하되 그 사실에 합하지 아니하는 이치는 수용하지 아니하는데 이렇게 변론하는 방법을 경험방[경험방법]이라 하고 근세사상 진보에 터가 된다고 했다.

이 방법을 사용하는 버르클네[Berkeley, 버클리]와 휴움[Hume, 흄], 다르윈[Darwin, 다윈], 헉스네[Huxley, 헉슬리], 밀[Mill, 밀], 스벤스[Spencer, 스펜스]등의 이론적 잘못을 지적하고, 바른 방법으로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이치를 구하다가 진리를 얻은 증거 여러 가지가 있으되 제일 재미있는 증거는 자기 심중 경험이니 곧 믿음으로 새사람이 되어 모든 행사가 새로워짐이라. 신자가 자기 믿는 진리를 확적[실]히 설명할 구변이 없으나 선한 행위로 자기 믿는 진리를 증거 하느니라. 혹 반대자가 말하기를 개인의 경험이 스스로 속는다하나 우리의 대답은 그렇지 아니하다. 일인뿐 아니라 전 세계 수백만인이 동일한 경험으로 믿음을 증거 하나니 수백만인의 증거를 믿을 만하니라. ...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 증거는 추리적에 있는 것이 아니오 사실적으로 아는 것이니 천하 만민에게 신령한 능력을 나타냄이라.

위의 변증방법은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 방법보다는 증거주의(Evidentialism) 방법을 택하고 있으며, 기독교가 이 땅에 뿌리 내리는 상황에서 선교사에 의해 소개된 변증방법이라고 하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고 하겠다.

다음에, 이눌서 박사가 1927년에 발표한 “교회의 목적”에서는, 교회의 목적을 마태복음 28장 18절부터 20절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말 한다:

그 목적은 모든 백성으로 제자를 삼으며,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주의 분부한 것을 다 가르쳐 지키게 함이라. 그 목적을 이룰 능력은 다만 성신[성령]의 감동이니(행 1:8, 2:4, 고전 2:4), 교회의 직분 위임 시키시는 이는 성신이시니(고전 12:41), 사역도 시키시고(행 13:2, 16:7), 교회의 결정도 주장하셨다(행 15:28), 이 목적을 이룰 방법은 전도니 바울과 같이 성신이 나타나심과 권능으로 하면 목적을 성취하리라(고전 1:21, 2:4, 5).

이 박사는 교회의 결정에서, 사용되는 사람보다도 성령의 주장과 역사를 무엇보다도 먼저 앞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입교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문답할 것은 “신앙과 회개”만을 요구했고, 교회의 조직된 직분으로 “목사와 장로와 집사”를 말하고, 이들에게 마땅히 문답할 것은 이상의 “신앙과 회개” 외에, “1.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됨과 믿고 실행할 무결한 규칙됨을 믿느냐 2.이 성경의 교훈하는 교리를 발표하는 신경으로 인증하고 신종하겠느냐고 물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엄숙하게 묻는 까닭은 이단을 막고 정[바른]도리를 견고히 세우고자 함이며, 어떤 당회와 노회에서는 문답을 부주의함으로 이단지자[이단자]가 교회의 직분을 맡은 후에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슬퍼 시게 한 일이 불소[적지 아니]하니라”고 말하였다.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묻는 질문과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와 대소요리문답에 신종[信從, 믿고 따름]할 것을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교회의 직분 자들이 지금도 새겨들어야 할 교훈이다.

1933년 신학지남에는 이눌서 박사의 선교 40주년을 축하하는 글이 실렸다. 이 글에 따르면, 이 박사는 1867년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출생하고, 인문학사와 문학사를 동시에 받은 후에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위해 라틴어, 헬라어, 인도어를 공부하였으나 부친의 사업실패로 계속하지 못하고, 다시 버지니아 주에 있는 리치몬드 신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신학교 재학 시 중국선교를 희망하였으나, 1891년 10월 테네시의 내쉬빌에서 열린 연합선교회에 출석하였다가 조선학생 윤치호와 선교사 원두우 박사를 통해 조선선교사업 설명을 듣고 감동하여, 마침내 “7인의 선교개척대(남3인, 여4인)”에 속하여 1892년 11월 1일 부산으로 부부가 함께 한국에 왔다.

이 박사는 한국교회를 위해 특히 성경번역에 큰 공헌을 하였다. 1895년에는 성경번역위원으로 피택 되고, 1904년 신약번역을 끝내고, 1906년에는 개역하였으며, 같은 해 구약번역을 시작하였는데 창세기 및 시편을 번역하다가 기일(James Scarth Gale, 제임스 스카스 게일) 박사와 원두우(Horace Grant Underwood,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박사는 안식년이 되어 귀국하고 1910년 4월에 이승주 씨와 김현삼 씨의 도움으로 번역을 마쳤다. 이리하여 1908년에 모교로부터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박사는 1906년에 평양신학교 교수가 되었고, 1931년에는 중국인 가옥명(치아 유밍) 원저 『신도학』을 번역케 하여 조직신학 교과서(전체 6권)로 사용하게 되었다. 1921년에는 숭실대학 대리교장으로, 1925년부터 1931년까지는 일제에 의해 개편되어 이름이 바뀐 숭실전문학교 이사장으로 봉사했다. 1933년에 선교 40주년을 맞이한 이눌서 박사는 이후에도 1937년까지 꾸준히 「신학지남」에 기고했다.

이눌서 박사가 그의 한국선교 42년이 되는 1935년에 기고한 “영국 웨일스, 인도, 조선 삼 처[세 곳]의 부흥연락”이라는 제목의 글은, 한국에 온 선교사로 직접 목격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영국과 인도의 대부흥운동과 연결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이 박사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 한다:

지금 기술하는 것은 표제와 같이 웨일스를 필두로 인도와 조선에서 20세기 초두에 성신이 기도를 힘쓰는 신자 속에서 큰 역사를 일으켜 대부흥회를 열고 죄를 통회하며 교회가 대진한[크게 나아간] 것을 표명코자 함이다.

그리고 이어서 영국 웨일스 지방에서 1904년 과 1905년에 일어난 부흥운동을 말한다. 1904년 부흥운동 중에 한 수양회에서는 “기도회를 쉬지 않았을 뿐 아니라 8시간 계속 찬송하는 일도 있었다”고 말하고, “성신[성령]께서 주장하심으로 저희가 기도하며 간증하며 찬미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고 말한다.

인도의 카시아 지방에서도 영국 웨일스에 부흥이 크게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저희에게도 이와 같은 은혜가 임하기를 원하여 예배당과 각 가정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남녀를 물론하고 이런 은혜 받기를 기다리는 중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1905년 초에 장로회 총회가 모였을 때 간절히 기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경건회를 열어 총대들이 은혜를 받고 각기 본 교회로 돌아갔고, 다시 여러 노회들이 모였을 때 금요일 저녁에 12총대를 청하여 기도를 인도하기를 구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아멘, 아멘을 연발하여 폐회하기를 불긍[원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고, 그리고 “카시아 부흥의 아름다운 특색은 즉 아해[아이]들까지 부흥됨이다”고 말하였다.

이어서 1906년 봄에도 여러 노회가 모여 “교역에 대한 의논은 중지하고 부흥회로 모여 찬미하며 기도하는 일로 지냈다”고 말하고, “오전 10시에 예배당에 회집하고 만원됨으로 대다수가 뜰에서 비를 맞아 가면서 예배하였다”고 전한다. 이 박사는 인도 카시아 지방의 부흥운동의 결과를 전하면서 다음 세 가지를 지적 한다: 1)여러 교회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합함과 2)신자들이 각각 하나님께로서 받은 은혜를 보답하겠다는 각오와 3)주 예수의 왕국을 확장하려는 마음의 간절함 등이다.

이 박사는 조선의 부흥을 설명하면서, 미국의 유명한 목사 “화알드, 액뉴, 짠선 박사”[Howard Agnew Johnson, 하워드 애그뉴 잔슨 박사]가 웨일스 지방에 들러 부흥회를 친히 보고, 인도자인 “에본과 라벌트”[Evan Roberts, 이반 로버츠] 목사를 방문하고, 다시 유대, 애굽, 인도 등지를 들러보고, 중국에 들러 웨일스와 카시아 부흥회를 목격한대로 강연하다가 1906년 9월에 서울[당시 경성]에 도착하여, 마침 장로파 연합회가 모일 때 웨일스와 카시아 부흥의 내용을 설명하고 간증함으로 여러 선교사가 감명을 받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 말씀을 조선인 대표에게도 강설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 박사의 기술을 살펴보자:

그중에도 특히 평양서 동년 9월로 다음 해 정월 대사경회까지 매일 부흥이 나타나기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이는 잔선 박사의 강설에 자극됨이었다. 그해 8월에 평양재류 장감양파 선교사들이 1주간 원산에서 부흥회 중 대은혜를 받은 하리 영 목사를 청하여 요한1서를 공부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성신의 감동함을 받아 죄를 자복하며 눈물을 흘렸다. 성신이 큰 능력을 베풀지 않으면 아무 일도 될 수 없는 줄 깨달았으며 평양대사경 시에 선교사들은 또한 매일 정오에 한 곳에 모여 조선교우 중에 부흥이 일어나기를 위하여 간구하였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응답하셨다. 대사경회 중에 월요일에 장대현교회에 모여 고 이길함 목사가 잠시 강도 후 기도하자고 한 즉 여러 사람이 문득 같이 기도하는 지라. 이를 본 이 목사는 그러면 공통기도하자고 하였다. 회중이 모두 기도하였다. 그 형편이 마치 오순절 같이 크고 급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기도하면 할수록 죄를 인하여 근심하며 애통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다가 죄를 자복하고 죄를 자복하다가 통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밤 2시까지 계속하였다. 이런 부흥이 기타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고 이 박사는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된 평안남도 도사경회 시 일어난 대부흥을 눈에 선명하게 전한다. 이 박사는 “지난 날에 웨일스와 인도와 우리 조선에 크신 은혜를 베푸신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말하고, “통회하는 눈물이 있고 간절한 기도가 있는 곳에 성신의 화[불]세례를 받을 것이며 충만케 될 것이다”고 말하고, “오 주여 하루 바삐 우리 조선과 온 세상 모든 신자의 심령 속에서 성신의 역사를 일으켜 주옵소서” 하는 기도와 함께 논문을 마치고 있다.

이눌서 박사는 학자이면서 동시에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에 보내진 선교사였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하게 된다. 이눌서 박사는 신학교와 한국교회를 위해, 성경의 영감과 무오에 기초한 역사적 개혁신학의 초석을 놓은 신학자였으며, 동시에 한국과 한국민족을 사랑한 선교사였다는 것이 합당한 평가일 것이다.

한편, 박형룡 박사는 그의 유학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이듬해인 1928년부터 신학지남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그의 첫 논문은 “차대에 종교가 소멸될까?”라고 하는 제목의 논문이다. 이 논문은 칼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박 박사는 이 논문이 “맑스주의로부터 발표됨은 그 유물사관이 만반 해설의 개금이 된 결과니 종교의 기원을 물질적으로 설명하여 차대의 공산사회에는 종교가 소멸되리라는 결과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종교는 불완전한 사회의 고통이 인간의 두뇌에 환기한 공상적 산물이라 지적하고 완전한 사회의 출현과 동시에 이 상적 산물은 자연히 종적을 감추게 되리라”고 한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에 대한 심도 있는 비판이다.

그리고 “‘신’을 물질적 생산에 대한 권력관계의 반영으로 설명한 맑스주의는 결론하기를 인간이 인간자신의 생활을 통제함에 至[지]하여 종교는 소멸된다고 한다. 맑스의 어[언어]로 하면 인간이 ‘자유로운 사회화된 인류’로서 그 물질적 생산과정을 의식적 계획적인 지배하에 치할시, 사회는 일절의 신비적인 외피를 탈기하매 ‘신’은 소멸되고 만다”고 한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설명하고,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하는 “권력관계 반영설은 종교를 공포의 산물로 인정함이니 잠간 원시인의 공포심이 ‘신’을 조작하였다 가정하고 권력관계반영설이 종교의 소멸을 확증하는가?” 하고 묻고, “설혹 공포를 ‘신’의 근원이라 하고 동시에 권력의 공포를 ‘신’의 근원으로 인정할지라도 차대 사회에 권력의 공포뿐이 제거되는 것으로 ‘신’이 소멸될 원인이라 함은 불합리한 언론이다.” 라고 박 박사는 지적하고 있다.

이후 「신학지남」이 1940년을 끝으로 평양신학교에서 발간되던 것이 중지되던 해에, 박 박사는 “칼빈주의와 신칼빈주의”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했다.

이 논문에서 박 박사는 칼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 위대한 쩨네바[제네바] 종교개혁자에 관하여 창작이라는 명칭을 받을 만한 문구를 쓰는 것은 천재의 지력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신학의 학도된 자 그 누구든지 칼빈의 『기독교원리』[『기독교 강요』]를 수취하여 개권할[책을 펼] 때에 심중에 새로운 감동의 용출함을 금치 못함도 사실이다 라고 말하고, 최근 “신학계에 칼빈주의에 대한 흥미가 크게 증진되고 널리 퍼진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동시에 이것의 수정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고 말하고, “칼 빨트는 그의 저서와 언론으로 칼빈주의의 수정에 성공한 신칼빈주의의 패자로 추존 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칼빈의 기독교 원리에 해설된 교리들을 이해력 있는 학습을 힘씀은 당연하거니와 그것의 수정을 요구하고 기도함은 어찜인가?”하고 묻고, 자신이 “요구하는 바는 신칼빈주의가 아니라 칼빈주의의 새로운 이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 땅에 기독교 신앙이 터를 놓던 시기에 칼빈주의 신학의 바른 이해를 추구한 박 박사의 눈물겨운 여정을 살펴보는 대목이다.

박형룡 박사는 평양신학교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사역한 평생의 사역을 통해, 당시 기독교에 대항하는 각종 이교사상들, 특히 유물론 사상과 진화론 및 유신진화론 등과, 칼빈주의에 대항하는 신칼빈주의, 새 신 칼빈주의 등 현대 자유주의 및 현대 신정통 사상까지 일선에서 방어할 뿐 아니라, 후학들의 교육과 교회의 사상적 지도 및 방대한 저술을 통해 이 땅에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 칼빈주의, 청교도 장로교 신학의 터를 견고히 하는데 진력했다.

박형룡 박사의 저술들은 그가 교수 사역을 시작한 평양신학교 시절(1930-1938년)과 만주 동북신학교, 그리고 고려신학교, 다시 장로회 신학교와 이후 장로회 총회신학교에서는 주로 철필로 기록한 등사판(프린트물)을 사용하였고, 이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는 등사판(프린트물) 외에 정식으로 출판된 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의 저서들은 등사판(프린트물), 단행본, 그리고『박형룡박사저작전집』 전20권 등이 있다.

『박형룡박사저작전집』 1-7권은 차례대로 교의신학 서론, 교의신학 신론, 교의신학 인죄론, 교의신학 기독론, 교의신학 구원론, 교의신학 교회론, 교의신학 내세론이며, 1-7권은 조직신학 7권에 해당한다. 8,9권은 각각 신학난제선평 상권, 하권이며, 10권은 비교종교학, 11권은 변증학, 12권은 험증학이며, 1권부터 12권은 주로 박 박사가 저술한 신학서적에 해당한다. 13,14권은 각각 신학논문 상권, 신학논문 하권으로 되어 있고, 15권은 학위논문으로,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실려 있다. 16권은 목회서신, 전도서 주석이며, 17권은 세계견문록이고, 18,19,20권은 설교(1), 설교(2), 설교(3)으로, 그의 설교집에 해당한다. 동시대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저술이 신학저술 수권, 설교집 또는 수필집에 머무는 것을 생각하면, 박 박사의 저술은 학술적 의미에서 무게가 있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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