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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마틴 로이드 존스의 인간론: 목회상담적 평가 및 함의 2
이관직(총신대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기사입력: 2018/10/31 [10:06]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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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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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관직 교수     © 리폼드뉴스


이 글은 이관직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청교도 목회자이자 설교자였던 로이드 존스의 인간론에 대한 목회상담적 평가와 함의를 논하고 있다.


3.3 심리학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함

현대 심리학은 하나님과 단절된 채 학문으로서 자리잡아온 학문이다. 따라서 심리학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비판적인 입장에서 접근해야 하는 학문이다. 개인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심리학은 인간의 영혼을 배제하고 창조주 하나님과 연결된 피조물로서의 인간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와 결점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은 인간이해를 도와주는 일반학문으로서 가치를 여전히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반 학문의 영역에 속하는 의학을 공부한 로이드-존스는 의사로서 일반 의학의 지식을 설교에서 활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신체적 병의 특성이나 진단의 중요성, 올바른 처방과 같은 의학지식을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필요할 때 사용하였다: “낱낱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낱낱의 문제는 크고 중심적인 질병의 여러 증상에 불과합니다.” 이 설교에서 그는 증상 중심적인 치료의 한계와 원인론적 접근의 유용성을 인간의 죄와 연결하여 잘 지적했다.

의학에 대한 그의 태도와 대조적으로 로이드-존스는 심리학 전반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기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다음에 인용된 설교문에서 로이드-존스가 취한 입장은 심리학의 가치를 매우 절하하는 것처럼 표현했다:

성경의 심리학은 현재 유행하는 심리학보다 훨씬 깊고 심오하며 정확합니다. 그것은 현대 분석법의 기본 원리들로 간주되고 있는 것들을 완전히 경멸합니다. 예를 들어, 현재 우리가 많이 듣고 있는 유전적 요인을 완전히 경멸합니다. 성경의 심리학이 한 인간과 그의 인생사를 검토하는 것을 보면 정말 유전적 요인을 조롱거리로 만들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그러면 그토록 경건한 아버지에게서 어떻게 그토록 전혀 쓸모없는 방탕한 아들이 나올 수 있는지, 변변치 않은 아버지에게서 어떻게 그토록 경건한 아들, 하나님의 집에 열심을 품고 개혁 활동을 열렬히 수행해 나가는 경건한 아들이 나올 수 있는지 정말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야곱과 에서처럼 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습니다. … 환경 요인도 같은 방식으로 다룰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이상적이고 훌륭한 환경이라 해도 그 속에서 얼마든지 비극적인 결과를 낳을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친구이자 유대 민족의 조상인 위대한 사람 아브라함은 우상을 숭배하는 족속에서 나왔습니다. 그뿐인 줄 아십니까? 좋은 환경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아이들도 얼마든지 잘못된 길로 나아갈 수 있으며, 나쁜 환경(예를 들어 우상숭배나 나쁜 짓을 하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도 얼마든지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것, 아니 심지어 같은 환경에서 자란 형제자매마저 서로 완전히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계속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이 설교에서 심리학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지적한 예들은 부분적으로는 타당성이 있으며 매우 통찰력이 있다. 성장기의 경험이 후기 인성 발달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는 정신분석학의 각종 이론들, 특히 대상관계이론이나 애착이론, 또는 발달심리학의 이론이 결정론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론들 조차 반드시 결정론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로이드-존스의 비판은 실제보다는 문제점을 확대해서 비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성격발달은 유전자와 같은 본성 및 기질과 각 개인의 죄성 그리고 취약성(vulnerability) 그리고 양육적인 환경의 다양한 변수들이 어우러져서 생긴다는 점에서 성경 인물들의 가계에서 나타나는 몇 예를 통해 부모 양육의 중요성과 양육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심리학의 기여를 가치절하 하는 부분은 균형 잡힌 비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과잉일반화의 화법을 종종 쓴다는 점에서 로이드-존스의 설교에서는 ‘모 아니면 도’(all or nothing)의 입장을 취하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성격적으로 이해한다면 ‘경계선’(borderline) 성격의 사고방식의 특징이 부분적으로 드러난다.

로이드-존스는 다음의 설교에서 그가 심리학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가 심리학을 야박하게 평가한다고 여기는 분들이 있을지 몰라서 잠깐 변명을 하겠습니다. 저는 심리학이야말로 기독 신앙을 위협하는 가장 교묘한 위험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기독 신앙의 힘으로 산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신앙이 아니라 단순한 심리적 기제에 의지해서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진짜 위기가 닥치면 그대로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하는 것은 심리학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그는 심리학을 비판하면서도 그 자신이 심리학의 용어를 사용하는 모순을 보이기도 한다:

걱정에 대처하는 기독교의 방식과 여타 방식 간의 차이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사도는 걱정이 생길 때 어떻게 하라고 말합니까? 단순히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상식과 심리학에서는 그렇게 말합니다. “걱정하지 말고 마음을 다잡으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가 이렇게 말하지 않는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걱정거리가 있는 사람에게 아무리 걱정하지 말라고 해봐야 소용이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이것은 심리학적으로도 형편없는 대처법입니다. 의지가 강한 사람은 의식적으로 걱정을 억누르겠지만, 무의식에는 계속 걱정이 쌓일 것입니다. 이른바 억압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억압은 걱정보다 더 해롭습니다. 제가 바울의 ‘심리학’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람은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걱정하고 싶지 않아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또한 성경은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대중적인 심리학의 표어이자 사람들이 좋게 평가하는 말입니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왜 걱정하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는 제게 누가 그런 말을 한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아니,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잖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면 어떡합니까? 문제의 핵심이 여기 있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말입니다.

그는 정신분석학에서 주장하는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영역을 인정하고 있다. 방어기제의 하나인 억압이라는 용어도 구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논박하는 방법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라는 그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보인다. 그의 논지는 언뜻 듣기에는 맞는 말 같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과장해서 강조하거나 비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설교자는 진실해야 한다. 과장하거나 축소하는 어법을 쓰면 우선 듣기에는 인상적일지 모르지만 균형 잡힌 사고를 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양산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설교할 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장하는 것에는 자칫 거짓의 위험성이 있다는 점을 설교자들은 민감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로이드-존스는 염려에 대해서 같은 설교에서 심리학의 접근이 갖고 있는 문제를 계속 논박한다:

걱정하고 근심하는 불쌍한 사람에게 ‘아무 걱정 하지 마세요. 걱정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걱정해봐야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아요’라고 쉽게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전적으로 옳은 말이고 상식적인 말입니다. 심리학자들도 ‘걱정하느라 힘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걱정한다고 달라질 건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에 대한 저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아, 그렇지요. 그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지금 생길지도 모르는 일 때문에 걱정하고 있습니다. 걱정한다고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은 맞지만, 어쨌든 그런 일이 생길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고 나는 그 가능성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니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거지요.

이 부분에서 그의 논박은 허술하게 보인다. “걱정해봐야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아요”라고 쉽게 말하는 이들의 말에 대해서 그는 “물론 전적으로 옳은 말이고 상식적인 말입니다” “아 그렇지요. 그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논박한다. 그는 심리학의 접근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예 그러나”(yes, but)의 접근을 취한다.

심리학자들이나 상담사들의 접근은 사실상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지 않다. 이 세상에서 증상으로부터 덜 고통하고 삶에서 좀더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그들의 목표의 한계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고 해서 그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상식적인 접근이 유익을 줄 수도 있다. 그들의 접근에 대해서 유용성을 인정하면서도 기독교 복음이 심리학의 접근보다 탁월하게 유익함을 주장한다면 균형 잡힌 주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로이드-존스의 접근은 심리학의 유익성에 대해서 좀더 냉소적인 입장에서 인정하거나 ‘심리학을 깨부수는’(psychology-bashing) 접근의 뉘앙스가 강하게 풍긴다. 이것은 필자의 개인적인 느낌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로이드-존스는 그의 설교문 중에서 때때로 심리학의 제한적인 통찰력과 기여를 인정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그의 심리학에 대한 입장에서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리학도 어둠에 대해 어느 정도 알려 줍니다. 인간의 본성, 정신, 내면의 본질적인 영역을 분석하고 조사해서 그 속에 숨어 있는 여러 가지 더럽고 추한 것들을 찾아냅니다. 프로이트 심리학도 그 정도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인정합시다. 프로이트 심리학도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보여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프로이트의 말을 듣는다면, 사람은 자신의 지성에 지배받지 않고 욕구와 열정에 지배받는다고 결론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 점에 관한 한 프로이트의 주장은 옳습니다.” 정신분석학의 용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방어기제로서 ‘투사’의 역동성을 인정하며 사용하기도 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을 방어하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볼 수 없는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서는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실상을 들여다보는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에게 유사한 상태가 나타나는 것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진리와 비교할 때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심리치료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의 지적은 통찰력이 있다: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심리치료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노라 고백하는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붙잡는 일입니다.” 필자는 이 사실을 세상이 말하는 웰빙의 한계와 진정한 웰빙의 삶을 비교하는 글에서 지적한 바 있다.

기독교 신앙과 양립하는 체계로서 심리학이 권위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점에서 로이드-존스의 비판적인 태도는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 설교자들 중에서 미묘하게 인본주의적인 접근을 하는 설교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그의 심리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받아들일 가치가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 전반에서 풍기는 입장은 터툴리안이 취했던 “아테네와 예루살렘은 서로 상관이 없다”는 입장에 가깝다는 느낌을 준다. 철학과 기독교와의 관계성에 대해서 로이드-존스가 언급할 때에도 긍정적인 면을 언급하는 것은 일부이며 대부분의 경우에는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심리학과 기독교와의 관계성에 대한 그의 입장과 닮아 있다. 자칫 과잉일반화해서 심리학 전체를 기독교와 배치되는 학문으로서 언급할 때 청중들의 입장에서는 오해할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은 가능성이 로이드-존스의 설교집 『교리 강좌 시리즈』를 읽는 과정을 통해 회심했다고 고백한 옥성호가 쓴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서 취한 입장에서 보인다는 점에서 로이드-존스의 입장을 조심스럽게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심리학이라는 학문도 일반 학문의 한 영역이며 그 학문의 영역에도 하나님 주권성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개혁신학이 일반 학문을 대하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로이드-존스의 심리학에 대한 태도는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일반은총의 영역을 약화시키는 한계점을 가질 수 있다고 평가하고 싶다. 설교를 하다 보면 실제보다 더 강조하거나 약화시켜서 말로 표현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로이드-존스의 심리학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좀더 긍정적인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로이드-존스의 인간론의 목회상담적 함의

이 장에서는 2장에서 창조된 인간, 타락한 인간, 구속된 인간, 그리고 종말론적인 인간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한 로이드-존스의 인간론이 21세기 한국교회 성도들을 위한 목회적 돌봄과 전문적인 목회상담의 현장과 실제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다룰 것이다. 십자가 복음을 부각하는 목회상담과 죄를 심각성을 인식하되 죄의 패러다임으로만 접근하지 않으면서 폭 넓은 인간이해를 통하여 진단하고 처방하여 회복시키는 목회상담의 필요성을 제시할 것이다.

4.1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는 상담을 지향해야 한다.

현대 심리학과 상담학의 흐름을 주도해왔던 인본주의 심리학은 전체적으로 인간에 대해서 긍정적인 관점을 견지해왔다. 특히 최근에 주목을 받고 있는 긍정심리학은 인간의 병리성보다는 인간의 장점과 미덕을 강조함으로써 인간 문제와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접근을 하고 있다. 이런 접근은 로이드-존스가 강조한 피조된 인간의 가치성와 존엄성과 접목점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귀하게 창조된 인간의 특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부분적으로 타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본주의 심리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현대 목회상담운동은 하나님의 형상 회복에 기여하는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교회 공동체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 집단적인 돌봄보다는 개인적인 관심과 힐링에 초점을 맞추면서 장기간의 전문적인 상담까지 제공하는 치유적인 사역을 해왔다는 점에서 이런 접근은 앞으로도 계속 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본주의적인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접근은 부분적인 타당성이 있지만 기독교적인 정체성과 성경적인 진리가 온전히 드러나지 못하는 상담이라는 점에서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로이드-존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의 어떠한 노력과 시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결코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존재이며 십자가 복음 외에는 궁극적인 회복과 치유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상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개인과 가족, 그리고 사회시스템과 죄로 깨어진 세상이 가진 죄성과 병리성과 악의 모습에 대해서 균형 있게 강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하나님의 형상 회복에 초점을 맞추는 목회상담을 하는 것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4.2 죄의 진단 기준을 견지하되 과용하거나 오용하지 않는 상담을 해야 한다

십자가 복음의 유일성의 근거는 모든 인간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스스로 이를 수 없다는데 있다. 죄는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로이드-존스도 죄를 인간의 핵심 문제로 보았다.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라고 보았다:

그렇지만 죄라고 하는 열쇠로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그러면 모든 문이 열리며 뒤엉켜 있던 실타래가 갑자기 확 풀어지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경우든 그 열쇠를 적용해 보십시오. 항상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현대인은 죄를 하나님의 관점뿐 아니라 인간의 관점에서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릅니다. 문제는 우리 모두 본질상 자신의 문제와 내적 본성을 정직하게 대면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실제 모습 대신 이상적인 자아상을 토론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을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대면하려 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기만 한다면 즉시 죄라는 문제에 바른 견해를 갖게 될 텐데 말입니다.

그는 내담자의 변화와 성숙과 치료를 목표로 하는 현대의 목회상담사들에게 죄의 문제를 핵심적인 문제로 볼 것을 도전한다:

누군가가 묻습니다. ‘사람들의 능력이나 교육이 중요하지 않으며 출생이나 양육이 아무런 차이점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뜻입니까?’ 나의 대답은 그런 모든 차이들이 단지 죄의 드러나는 형태들을 조금 수정시켜 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그 질병은 여전히 거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증상에 약을 투약하기는 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질병 자체를 치료하는 일에는 몹시도 서둡니다. 그 누구도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면제되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부유하건 가난하건, 유식하든지 무식하든지 모두가 죄의 희생자입니다. 학식, 지식, 교육은 단지 겉옷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과거와 동일한 상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필자는 죄가 인간의 핵심 문제라는 로이드-존스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목회상담사는 성경의 진리에 토대하지 않은 상담사이다. 일반 상담사들과 구별되는 정체성이 약한 상담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이드-존스가 강조한 죄에 대한 관점을 목회상담 과정에 접목할 때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단기상담이나 위기상담의 경우에는 죄의 문제를 핵심적으로 다루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교자와 상담자의 역할은 공통분모를 갖고 있지만 구별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상담자가 설교자의 몫까지 상담과정에서 담당하려고 할 때 상담의 장점과 특성이 흐려질 가능성이 있다. 설교자 역시 상담자의 몫까지 설교를 통해 다 담당하려고 한다면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설교는 좀 더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 초점을 맞춘다면 목회상담은 좀 더 죄의 결과로 빚어진 내담자의 삶을 공감하며 이해하고 구체적으로, 개인적으로 돕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성도의 당면한 삶의 문제와 위기를 극복하도록 돕는 것도 의미 있는 목회사역의 일부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것도 목회적이며 성경적인 돌봄의 형태일 수 있기 때문이다. 병든 자를 돌보며 마음이 아픈 자를 위로하며 공감하며 격려하는 것은 고통과 위기 가운데 있는 성도가 소망 중에 견디며 신앙의 여정을 계속하도록 하는데 꼭 필요한 사역이기 때문이다. 수술을 한 사람은 중환자실을 거쳐서 회복실에서 회복 기간이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고 할지라도 약을 소화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닐 때에는 기본적인 돌봄과 회복을 돕는 보양식이 더 유익하고 효과적이다.

죄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는 목회상담사들은 정체성이 약하거나 극단적인 접근을 하는 상담사들이다. 그러나 내담자의 신앙수준과 심리적 수준을 고려하고 제대로 진단하지 않은 채 죄가 핵심문제라고 해서 쉽게 죄의 이슈를 다루는 것은 또 다른 극단적인 접근이다. 이것은 직면을 하는 시기를 조정하는 지혜와 연결된다. 직면이 필요한 내담자라고 해서 아무 때나 아무렇게 직면하는 것은 상담에서 의료사고를 일으킬 위험성이 높은 접근이다. 내담자와 상담자가 치료적 관계를 맺고 신뢰감을 형성하고 내담자가 감내하고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을 잘 파악하여 직면하는 것은 ‘기예’(art)이다. 상담에서 죄의 이슈를 다루는 것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될 필요가 있다.

로이드-존스가 죄를 강조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유일성과 탁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 점에서 그의 설교는 인간의 핵심적인 필요를 인식시키며 진단하며 처방하는데 설교의 목적을 잘 성취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제를 죄와 연결해서 이해하려는 그의 설교는 자칫 또 다른 과잉일반화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는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경우든 그 열쇠를 적용해 보십시오. 항상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지만 문제는 죄라는 열쇠를 가지고 모든 자물쇠를 열 수는 없다는 사실에 있다.

모든 문제를 죄로 압축시키는 표현이 다음의 설교에서 다시 등장한다: “성경에 따르면 인생은 절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처럼 복잡다단하지 않습니다. 사실들만 보면 절망적일 만큼 복잡해 보이지만 그에 대한 설명은 아주 간단합니다. 죄가 그 모든 문제의 발생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결과 그렇게 복잡해진 것입니다.” 로이드-존스의 설교의 특징 중의 하나는 ‘절대’ 또는 ‘아주’와 같은 부사를 자주 사용한다는 점에서 자칫 성도들의 겪고 있는 삶의 다양한 문제들을 단순화 시키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다. 윤리적인 차원에서도 아디아포라(adiaphora)의 영역들이 적지 않다. 그가 표현한 것처럼 죄의 결과로 복잡해진 것을 흑백으로 쉽게 가릴 수 없는 영역들이 더 많이 있다는 점에서 설교자가 강조한답시고 ‘절대’ 또는 ‘모두’와 같은 표현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절대 진리에 대해서는 ‘절대’라는 표현을 써야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 자주 사용하는 것은 남용의 우려가 있다.

로이드-존스의 설교는 자칫 ‘반쪽 진리’(half-truth)로 끝날 수도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죄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죄가 아닌 영역으로 다룰 수도 있는 삶의 ‘아디아포라’의 영역을 실제 성도들의 삶에서 다룸에 있어서 한계를 가질 수 있다. 올바른 진리와 교리를 콘텍스트에 적용하는 것은 분명히 탁월한 부분이지만 죄의 교리로 콘텍스트를 다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욥이 당한 고난에 대한 욥의 친구들의 패러다임은 ‘죄 패러다임’이었으나 욥의 경우를 제대로 진단하고 처방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향해서 던졌던 질문도 그의 상황을 제대로 진단하는 것이 아니었다.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고 자신의 죄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소경이 되어 출생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볼 때 로이드-존스의 주장은 인간 문제를 죄의 렌즈로 해석하는 단순화 내지 과잉일반화의 위험성을 띠고 있다.

상담 현장에서 만나는 내담자들의 문제는 어느 한 가지의 문제로 꼭 집어서 설명하고 진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닐 때가 대부분이다. 개인의 죄의 문제라는 열쇠로는 해석과 설명이 되지 않는 경우들이 적지 않다. 자폐증, 정신지체(MR, Mental Retardation), 선천적 또는 후천적 장애, 정신분열증(조현병), 갱년기 우울증, 계절성 우울증, 호르몬의 결핍이나 과잉, 또는 각종 암과 같은 고난과 씨름하는 이들을 개인적인 죄나 집단적인 죄로 해석해서 치료하고 접근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깨어진 세상에서 살게 된 원래의 이유인 ‘원죄’라는 틀로 설명하고 진단하기에는 진단명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내담자를 실제적으로 돕는 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원죄의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해결하는데 문제는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 사람의 실제적인 고난과 고통이 없어지거나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원죄로 죄인이 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왜 특정한 질환이나 핸디캡으로 고통을 겪게 되었느냐고 질문할 때 대답할 수 없다는 점도 어려운 부분이다. 성경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도 일부인 것처럼 인간의 고통에 대한 설명과 해석도 성경에서 부분적으로 계시되었다. 욥기에서 하나님은 욥의 고난의 궁극적인 이유와 원인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으셨다.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으로 말해야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이 공감을 받고 용기를 얻는다.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진 부분을 마치 아는 것처럼 쉽게 죄라고 설명하거나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의 접근이 유효하지 않았음을 성경에서 보면서도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설교나 상담에서 쉽게 죄라는 진단명을 사용하고 회개라는 처방전을 제시할 때가 많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돌을 던져서 맞으면 다행이고 안 맞으면 할 수 없고”라는 식의 접근은 목회적 돌봄을 제공하는 목회자들의 민감성(sensitivity)과 긍휼심이 떨어지는 접근이다. 이와 같은 접근은 ‘목회 사고’(pastoral malpractice)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정신의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심리적인 병을 약으로 고치는데 한계가 많았다. 효과가 검증된 약물의 개발이 잘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울증의 경우에도 뇌에 전기충격을 주어서 치료하려고 했던 때도 있었다. 정신의학이 여러 형태의 심리적이며 정신적인 고통과 씨름하는 성도들에게 도움을 주어서 신앙여정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협진’ 차원에서 그 가치를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 성도의 모든 문제를 설교나 교육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기대라고 볼 수 있다. 정신분열증을 예로 든다면, 항정신성 약이 개발되기 전에 목회자들은 정신분열증이 발병된 성도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다. 대화 자체가 되지 않고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고 환각과 망상을 가진 성도에게 설교하고 기도해도 거의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복음을 받아들이고 후속적인 신앙 여정을 살아가야 할 성도들에게 설교와 성경공부, 기도와 교제가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신의학, 상담학, 사회복지학과 같은 일반은총 영역의 학문적인 성과와 결과물을 잘 활용하여 성도들의 개인적인 삶의 질과 가족 간의 관계의 질을 높여 가는 것을 인본주의적인 접근이라고 매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선순위는 분명히 지켜야 한다. 그러나 타락한 세상에서 사는 성도들조차 완전하게 성취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지 않고 여전히 세상에서 발을 딛고 살기 때문에 현세의 삶에 대한 돌봄과 접근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백성이 그리스도인이지만 그리스도인도 여전히 몸의 한계를 갖고 있는 존재로서 하루 세끼 식사를 해야 하며 일정한 시간의 수면을 취해야 하는 존재다. 병이 들 수 있는 취약성이 있다. 어떤 병들은 죄의 결과로 온 것도 있지만 어떤 병들은 죄를 회개한다고 치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부활을 믿지만 성도가 죽었을 때 다시 살아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극단적인 신앙을 가진 일부의 광신자들은 가족이 죽어도 장례를 치르지 않고 살아날 것이라고 믿고 계속 기도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죄도 여러 범주의 죄가 있다. 죄의 특성과 죄의 파괴적인 능력은 분명히 인식되어야 하고 가르쳐져야 한다. 현대 사회는 죄조차 병으로 또는 장애로 명칭을 바꾸어 쓰며 죄에 따른 책임을 묻지 않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기독교 복음의 유일성과 탁월성을 강조하려면 죄를 강조해야 한다. 목회상담 현장에서 죄를 강조하지 않는 목회자나 상담사는 죄를 강조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반대로 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목회자나 상담사는 다른 영역의 가능성들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대하며 내담자들에게 과도한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심어주지 않도록 균형 있게 죄를 강조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로이드-존스의 죄에 대한 강조는 핵심을 관통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현대 문화와 현대 교회가 죄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을 꺼려하는 상황 속에서 그는 선지자적인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목회상담에서 인간의 죄의 문제와 복음의 가치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삶의 증상을 완화시키거나 문제해결에 초점을 맞추는 상담으로서는 목회상담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내담자의 근본적인 상태를 제대로 인식하도록 돕고 건강한 죄의식과 죄책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복음 진리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4.3 폭넓은 인간이해를 견지하면서 상담해야 한다

로이드-존스는 심리학의 한계와 위험성에 대해서 반복해서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심리적 특성이 영적 영역과 연결점이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개인의 차이와 기질의 차이를 인정했다:

각자의 기질과 유형에 따라 부딪치기 쉬운 문제와 어려움과 곤란과 시험이 다릅니다. 물론 우리는 같은 구원과 같은 필요를 공유한 자들이며 같은 싸움을 싸우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부딪치는 어려움은 각각의 경우에 따라, 각각의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침체의 문제를 다루면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모든 측면에서 똑같으리라고 전제하는 것만큼 무익한 짓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다 똑같을 수 없습니다. 그 운동이 적성에 맞는 학생도 있고 맞지 않는 학생도 있는데 무조건 똑같은 운동을 부과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식이요법을 권장하는 것만큼이나 괴이한 짓입니다.

그는 기질적인 차이에 대해서 심리학이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고 활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기질적인 차이가 영적인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인간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른바 내향적인 사람이 있고, 외향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대체로 자기 속을 들여다보는 유형이 있고, 항상 자기 밖을 쳐다보는 유형이 있습니다. 자신이 그중 하나에 속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 더 나아가 영적 침체의 상태에 더 빠지기 쉬운 유형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로이드-존스는 몸과 영혼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의사로서 신체적인 병이 영적인 영역에 미치는 영향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몸과 정신과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인 문제와 신체적인 문제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도 몸이 쇠약해지면 건강할 때보다 영적침체의 공격에 노출되기 쉽습니다.” 심지어 그는 모든 문제가 영적인 것처럼 진단하는 것이 마귀의 전략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근본적인 문제는 신체적인 데 있는데 마치 영적인 데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모든 면에서 두 영역을 신중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몸 상태 때문에 힘든 것인데, 마치 영적인 문제가 있는 듯 죄책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몸 상태가 영적 상태에 일부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영적인 문제에 더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와 같은 지적은 신앙인의 삶을 지나치게 영적인 렌즈로만 보려고 하는 일부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경종을 울려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필자는 로이드-존스가 인간의 신체적인 영역이 영적인 영역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강조한 것에 비교해 볼 때 심리적인 영역이 영적인 영역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훨씬 덜 강조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그것은 그가 의학공부를 하고 전문인 의사가 된 것과 관련성이 깊다고 본다. 그는 의사로서의 전문가였지만 심리학이나 정신의학 영역에서는 전문가는 아니었다. 인간 마음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은 주로 성경에 기반을 둔 것이었지 심리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연구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었다.

전문상담자의 윤리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로이드-존스가 자신이 깊이 있게 알지 못하는 심리학의 영역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비판한 것은 한편으로는 전문인으로서의 설교자의 윤리에서 비판될 수도 있는 영역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그는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직업주의’(professionalism)를 비판하고 배격했지만 전문가(professional)의 중요성까지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자신이 전문 영역이 아닌 부분에 대해서 쉽게 비판하는 것은 설교를 듣는 청중들 중에 있을 수도 있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설교의 권위와 신뢰성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하는 걸림돌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전문상담자들의 윤리 중의 하나는 자신이 능숙하지 못한 상담이론이나 치료기법을 사용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사가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니며 자신이 능숙하지 못한 의료기술을 환자에게 사용하는 것은 의료윤리에 어긋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5. 맺는 말

로이드-존스는 이미 소천했지만 그가 남긴 설교는 웨일즈 지방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유럽 교회와 미국 교회 그리고 한국 교회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미치고 있다. 한국교회 많은 설교자들과 성도들이 그의 설교를 통해 복음 진리의 탁월성과 유일성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도록 영향을 끼쳤다. 필자도 그의 설교집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복음 진리에 다시 세워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이 논문을 통해 로이드-존스가 견지했던 성경적, 신학적 인간론은 한국교회 목회상담사들과 기독교상담사들에게 상담의 방향성을 제시하며 성경적인 인간관에 기초한 인간이해를 하도록 하는데 큰 유익을 주는 것임을 밝혔다. 특히 성경 시대의 인간상이나 현대의 인간상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한 그의 인간이해는 성경 진리가 현대 인간을 이해하며 치료하는데 여전히 동일하게 유효하며 탁월한 수단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성경에 기반을 둔 목회상담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잘 깨닫게 해주는 인간이해라는 점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의 설교 방식과 인간이해가 가진 어느 정도의 극단성은 걸러낼 필요성이 있는 한계점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균형 있게 그의 인간론을 목회상담과 사역에 접목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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