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개혁신학
[특별기고] '예수 그리스도 이해하기'의 위험과 맹점
예수 이해를 논하려고 할 때, 예수를 이해하지 말고 믿으라
기사입력: 2018/10/29 [22:40]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리폼드뉴스
배너

▲ 고경태 목사     © 리폼드뉴스
예수의 인생에 대해서 4복음서로 이해가 가능한 것일까? 라이마루스 이래로 불가능하다고 확증했다. 그리고 자유주의에서 예수 이해를 탐구했지만 답을 내지 못했다. 4복음서로 예수를 이해할 수 없는데, 어떻게 예수를 믿을 수 있을까? 칼 바르트는 예수 이해를 위해서는 1-30년 간의 예수 이해를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1-30년에 생애에 대해서 거의 침묵하고 있다. 브루너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마태, 누가 복음에만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 시대정신 위에서 현재 교회는 예수를 이해하고 논하고 있다.


예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물었던 질문이 여전히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유효하다. 사도 베드로께서 “주는 그리스도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답하신 것은 천국의 열쇠와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에서 예수에 대해서 물을 때에 이 답(마 16:16)을 하는 것이 간단한 훈련을 받은 사람의 대답일 것이다.


그런데 세례, 학습 문답에서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오 참 사람입니다”라고 문답한다. 이 두 대답의 차이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신가? 쉽게 둘 다가 답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답은 언제나 하나이다. 둘 중에 하나를 어떻게 택할 것인가?


예수 이해는 명료한 믿음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핵심 요소이다. 그런데 명료한 예수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상황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스스로 예수에 대한 답변을 한다면 확인되지 않은 예수를 반포하는 위험한 현상이 발생한다. 새로운 독약이 좋을까? 옛날의 양식이 좋을까? 새로운 복음, 새로운 이해는 양식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안전하고 복되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인간 능력으로 예수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대 교회로부터 예수를 믿음의 주로 고백했다. 오직 예수를 믿음의 주로 고백했다. 그래서 삼위일체 신앙까지 이를 정도로 예수를 믿었다. 교회에서 첫 교리가 삼위일체 교리인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참 하나님으로 믿은 것이다. 일상적으로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차등적인데, 기독교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동일실체이시다.


예수를 참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교회는 더 이상 예수의 1-30년의 생애에 대해서나, 3년의 생애에 대해서 호기심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를 믿음으로 훈련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와서 이신론적 기초 위에서 성경을 해석하면서 예수를 이해하려고 덤볐다. 그리고 “예수라면 어떻게 할까?”라는 대표적인 문구까지 등장했다.


예수의 행동방식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더 굳세게 믿는 것이 기독교의 경건이다. 자유주의에서는 예수의 자의식을 탐구했다. 칼 바르트, 톰 라이트는 예수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려 숭고한 사랑을 행동했다고 주장한다. 예수 의식을 탐구하지 않았지만 선언적으로 규정한 방식이다. 그래서 반틸 박사도 전제주의를 선언해서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변호했다. 예수께서 나의 주이시고 구주이심을 고백하는 것, 학문에서는 전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경솔하게 예수 이해를 설교하면 심각한 오해와 오류가 증식된다. 12세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사건에서 예수를 규정하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누가가 왜 그 본문을 거기에서 기록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를 단순한 인간으로 밝히려하거나 신의식의 발생시점을 밝히려는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이해가 제한된 성경 본문에 설 때에 침묵 혹은 본문을 떠난 기독론적 해석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릇된 본문 해석, 자기 독단, 탁월한 신학자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은 증명되지 않는 양식을 공급하는 것이다. 개혁신학은 증명되지 않는 신학, 잠재적 신학은 독소 문장으로 규정한다. 해석자가 명료하게 성경본문, 자기이해, 자기발언을 정립한 뒤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는 검증(장로와 동료와 함께)과 연마를 통해서 정선된 복음 문장을 창출하여 선포해야 한다.


윤리를 그릇되게 설명한다면 윤리적인 함정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그릇되게 전하면 천국문에서 멀어지고, 더 위험하게 지옥문으로 인도하게 된다. 가장 어리석은 자는 천국문으로 인도한다고 생각했는데 모두를 지옥문으로 인도하는 자일 것이다. 거짓 복음을 전하면 저항해야 한다. 거짓 복음에 아멘을 하면 그 거짓 복음에 동조하여 같은 책임이 될 것이다.


목사가 바른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항상 그러할 수 없는 한계와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목사는 그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너무나 충분하고 완전하다. 그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없고, 범한 오류를 인지하고 수정하고 바른 이해로 전환하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그 오류를 수정은 반드시 오류를 지적한 대상에게 제시해야 한다. 종로에서 뺨을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것은 황당한 상황이다. 우리는 영화 <밀양>의 내용처럼 독단적으로 오류를 수정하는 구조를 정당화시키는 것은 부당하다.


필자는 예수 이해를 논하려고 할 때, 예수를 이해하지 말고 믿으라고 주장한다. 성경은 이해가 아닌 믿음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를 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오류에 빠졌다고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예수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다.


칼빈의 인식론 구도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이 순환적으로 발전한다. 예수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대상이다. 믿음의 대상은 탐구하지 않고 믿어야 한다. 자기 예수 이해를 밝히는 것은 한계에 있는 지식을 선포하는 것이어서 위험하다. 자기 구주의 이름(인격과 사역)을 그릇되게 말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동일범죄이다(3계명). 예수는 이해 대상이 아니라 믿어야 할 유일한 대상이다.


고경태 목사(주님의교회 담임, 총신대학교 조직신학 Ph.D.) 

배너
배너
배너
최근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