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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논설
종교개혁 501주년 기념, 목회자의 자기반성
종교개혁은 목회자가 자기를 반성하므로 교회와 교단총회가 변화된다
기사입력: 2018/10/27 [01:47]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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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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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인 2000년 2월 1일(화)에 월간 「교회와 신앙」에서 연재한 필자의 글이다. 2천년시대를 맞이한 목회자의 자기 반성에 대한 글이었다. 본 글을 501주년을 맞이한 종교개혁기념을 맞이하여 약간의 수정을 하여「리폼드뉴스」에 다시 게재한다.

▲  종교개혁자들   ©리폼드뉴스

금년(2018) 10월 31이면 종교개혁 501주년을 맞이한다. 그 동안 2천년 교회 역사는 엄청난 신학의 발전과 교리의 발전을 가져왔다. 2천년 교리의 역사와 신학의 역사는 우리들의 소중한 유산이다. 우리들은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에 대한 대안과 비전을 바라본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독불장군은 있을 수 없다. 교회 2천년 역사와 무관한 목회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다 신앙의 선조들이 이룩해 놓은 아름다운 신앙 유산에 대한 수혜자들이다.

그러나 아직도 신학과 교리, 성경해석에 대해 모호한 자들이 성경계시를 왜곡하고 진리의 말씀을 훼손하고 있다. 2천 년 동안 계승된 정통교리에서 벗어나 이단적인 교리를 분간하지 못하고 강단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쏟아낸다. 정통교리에 벗어난 교리라고 문제를 제기하면 솔직히 “잘 몰라서 그랬다”고 하면서 회개하고 고치면 된다. 그러나 표현상의 문제로 얼버무린다. 표현은 그 목회자의 마음속에 간직된 신학적 교리의 입장에 대한 반영의 결과이다.  문제 있는 신학적 입장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서 문제 있는 이단적인 신학적인 표현이 나온 법이다. 

우리들은 2천년 동안 계승된 아름다운 신학적 전통과 교리적 입장을 소중히 간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신학적 전통은 소중하게 간직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후손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이런 아름다운 신앙 유산은 우리들만이 향유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후손들에게 그대로 넘겨주어야 한다. 진리를 위해서 아름다운 전통을 소중히 간직해야 하지만 그 전통이 성경과 다를 때 그 전통으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신학과 신앙의 괴리


신학과 신앙의 괴리 현상은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온다. 목회자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신학과 성경 해석 이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목회자가 이해하고 있는 신학과 성경해석의 결과는 설교라는 형태로, 혹은 상담과 목회라는 형태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올바른 신학과 성경해석은 관심 밖이다. 단순히 신학과 성경해석은 고리타분한 보수주의자들이나 부르짖는 한물갔던 구시대적 발상 정도로 치부하지만 이것이 가져온 함정은 실로 엄청나다.

올바른 신학과 성경해석, 변증적인 작업이 그렇게 퇴출되어야 하는 구시대적 발상인가? 목회자란 성경을 이해하고 있는 수준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강단에 아무나 올라가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대로 말하는 것이 설교인지 이제 뼈를 깎는 아픔과 자성이 있어야 한다.

2천년 교회 역사가 그래 왔던 것처럼 비진리에 대한 복음의 변증 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지속해야 할 사명이다. 이 같은 사명의 필요성이 부각되는 것은 이 시대가 복음의 변증이 필요 없으리 만큼 건전하지 않다는 점이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계속된 이단자들의 소리들, 허튼 소리들, 성경에서 말씀한 복음과 전혀 다른 소리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올바른 복음의 회복을 위해서 신실한 주의 종들을 보내주셔서 변증하고 변호하게 하셨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는 성령에 사로잡힌 종들을 보내주셔서 교회 본래의 사명을 감당하게 한다. 그런 종들로 하여금 복음의 변증과 회복을 위해서 헌신하도록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복음의 변증 작업을 하면 "왜 당신은 인신공격을 하느냐" 한다거나 "당신이 뭐야? 당신이 하나님이냐?"라고 하면서 비아냥거린다. 복음의 변증작업을 인신공격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예수님께서는 복음과 전혀 상관없는 자들에 대한 진노의 외침을 상대의 인격도 외면한 인신공격을 하는 저격수처럼 치부하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사도 바울은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다(갈 1:8). 바울이 도대체 누구기에 자신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과격한 말을 하는가? 우리들은 여기서 "바울이 뭔데"라는 말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소개한 복음과 다르면 다 이단자라는 말이다. 바울이 증거한 복음의 기원이 자신으로부터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다(갈 1:1, 12, 엡 3:3).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가 성문화 된 문장인 성경이라는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물론 우리들이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했다가는 낭패를 볼 부분들도 있지만 일반적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그 저주의 심판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 대속의 진리, 이와 같은 은혜는 오직 성령님의 역사로만 가능하다는 이 단순한 성경의 복음도 제대로 이해해서 선포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현주소이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회요, 교단이라고 자처한 본 교단(예장합동)의 각종 행사에서 진행된 설교를 보면 이는 이미 종교개혁의 중요 정신으로부터 이탈된 설교, 예배가 만연되고 있다. 설교시간에, 예배 시간에 언제까지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종교적인 이야기로  치장할 것인가? 언제까지 특정 사람을 추겨 세워야 하는가? 정말 치사한 인간적인 냄세가 나오지 않도록 하면 안되는가? 언제까지 특정인에게 아부하는 발언들을 그 중요한 설교시간에, 예배시간에 하여야 하는지 종교개혁기념을 무색케 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의 자유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온갖 각종 비결들과 적용중심의 설교로 성도들을 억압한다. 인간 쪽에서 내세우는 온갖 이야기들로 설교 시간을 보낸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하나님의 복음이 사라졌다. 복음이 사라진 곳에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은 요원하다.

언제까지 시행착오를 범하면서 배우려는가?

잘못된 설교, 그 잘못된 설교를 통해서 기독교 아닌 기독교가 전파된다. 그런데 성도들은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고 그것이 기독교 생명의 복음인 줄 착각한다. 성도들이 무슨 신학적인 훈련을 받았겠는가? 성경에 대한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성도들은 목회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자신들의 신앙을 정리하고 거기에 기대를 건다. 그런데 문제는 목회자의 말 한 마디가 생명의 복음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그런 이야기들이 생명의 복음과 아무 상관이 없을 때를 한 번 생각해 보라. 그리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이야기에 성도들이 좋게 여기니 그 결국은 어찌 되겠는가?

보다 못해서 주변에서 "아무게 목사님의 설교는 복음이 아닙니다"라는 공격이 들어간다. 영문도 모르는 성도들은 왜 우리 목사님께 시비를 거느냐고 항변한다. "우리 교회가 한국교계에서 얼마나 큰 실적과 업적을 내고 있는데 감히 우리 교회와 목사님을…" 하면서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한다.

더 가관인 것은 그 교회 목사님은 "그런 식으로 설교를 칼질하면 문제없는 목회자가 어디 있겠느냐"고 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로 가져가려 한다. 그리고 자신의 설교에 나타난 잘못된 교리 문제를 지적할 때 그것은 표현상의 문제라고 항변해 버리거나 자신의 설교 앞뒤 상황을 무시한 결과라고 온갖 이유를 갔다 붙인다. 여기에 밀려서 이단으로 죽느냐, 아니면 어떻게 해서든지 이 상황을 벗어나느냐에 대한 치열한 생존싸움이 계속될 뿐이다.

문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반론을 제기해 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목사님은 이제 신학을 정리하고 배우고 있을 뿐이다. 이미 신학교에서 다 정리했어야 할 내용들이 목회 현장에서 시행착오를 범하면서 정리할 때 그 피해는 누구에게로 돌아가겠는가? 잘못된 가르침으로 일관하다가 교계에서 그것이 잘못된 이단적 가르침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를 하면 자신이 언제 그런 사상을 가르쳤느냐고 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성도들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그냥 폐기 처분한다. 진리에 민감한 성도들은 방황할 수밖에 없고 갈등할 수밖에 없다. 더욱 우리들을 안타깝게 하는 것은 진리에 민감한 성도들로 하여금 목회자에 대한 권위가 서서히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잘못을 지적해 주면 오히려 감사하기보다는 그것은 표현상의 문제였다거나 그런 식으로 설교를 칼질하면 이단 안 될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설전을 벌인다. 여기에서 밀리면 생존에 지장이 있다는 것이다. 그 논쟁에서 권력의 힘으로 승리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상관 없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교단 힘있는 자들에 대한 유감

우리 목회자들이 어떤 교단에 속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독립교회로 남아 있을 경우 얻는 득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된다. 노회가 있고 총회가 있다. 목회자는 언제나 노회와 총회로부터 지도를 받고 감시를 받는다. 목회자가 교회에서 자기 왕국을 건설할 소지가 많다. 소위 인간은 보스 기질이 있다. 자신이 신이 되고 싶어하는 욕망을 인류 역사 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자신을 통제하고 제재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되어 있지 않으면 목회자가 교회에서 왕으로 군림해도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단적인 내용을 가르친다고 해도 누가 그 이단적 내용을 검증하고 제재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 기준은 성경이다. 성경은 모든 논쟁의 최후 심판자이다.
 
제도적인 장치는 목회자를 올가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목회자를 보호한다. 이렇게 말하면 제도적인 장치가 어떻게 목회자를 보호하느냐고 항변할 지 모르겠다. 그 말도 맞다. 그러나 성경의 전체적인 사상과 원리에서 온 제도적 장치는 우리 인간에게 필요하다. 이런 제도적인 장치 역시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섭리에 속한다.

노회와 총회는 소속된 목회자들이 정말 바른 진리대로 목회를 하고 있는가를 감시한다. 그렇지 않을 때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과 질서 유지를 위해서 권징이라는 것으로 제재한다. 그 권징은 그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노회와 총회가 이 기능을 상실해 갈 때 큰 혼란이 임한다. 잘못된 가르침, 이단적인 가르침을 하고 있는 것이 만천하에 공개되고 폭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괜찮다"는 것이다. 권징의 기준이 성경을 비켜간다. 진리 문제를 떠나서 그 사람이 자신의 단체에 얼마만큼 이득을 가져왔고 앞으로 가져올 것인가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 버린다.

이단적인 내용을 가르치고 있을지라도 그 사람과 그 교회가 자신들의 단체에 이득을 주고 생존해 가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 이단적인 가르침은 없었던 일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교회 역사는 그 사실들이 기록되고 있을 뿐이다. 반대로 아무리 올바른 진리의 외침을 할지라도 자신들의 단체에 손해를 가져오고 치부를 드러내면 여지없이 조사처리위원이 구성된다. 아! 얼마나 불행한 현실인가? 이런 달콤한 사탕발림 때문에 인류는 권력자에게 줄서기를 시도했는지 모르겠다.
세상의 차등적 가치관이 교회 안에 침투한다.

양반을 귀한 존재로, 상놈은 천시해 온 귀족주의적 사고방식이 오늘날 어떤 형태로 발전해 가고 있느냐 하면, 양복 입고 좋은 직장에 다니면 귀한 분으로, 현장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일하면 천시하는 사고방식들이 우리 민족의 마음 저편에 자리잡고 있다. 소위 차등적 가치관이다.

이런 가치관이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 왔다. 큰 교회, 교회의 많은 예산, 좋은 자가용 등등 이런 교회와 목회자는 성공한 교회요, 목회자도 귀한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는 실패한 목회자요, 아니면 그렇게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이런 차등적 가치관을 결정하는 요인은 외형적인 물량주의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보니 큰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그 교회 목사님이 무엇인가 남다르기 때문에 교회가 외형적으로 그렇게 성장했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 결과 그런 큰 교회 목사님이 가르치는 내용, 설교집, 행정, 목회 철학은 교회 성장을 위한 교과서가 된다. 그것을 전수받기 위한 몸부림이 계속된다. 그것을 전수받고 자신의 교회에도 적용해 보지만 또 다른 시행착오였을 뿐이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된다. 교계 신문 잡지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보들은 세상 차등적 가치관이 양산해 낸 부산물들이라고 한다면 너무나 과격한 발언인가?

교회는 구원받은 무리들의 모임이다. 그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들을 보내주신 하나님만이, 말씀만이, 그리스도가 교회 머리되심을 높이높이 찬양해야 한다. 그렇다면 적게 모이든 많게 모이든 하나님께서 주신 영혼들에게 말씀으로 잘 양육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여전히 변치 않는 복음의 능력

어떤 교회 장로님이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설교 내용을 강단에서 그대로 읽어주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는 전화였다. 어떤 교회에서 목사님이 은혜로운 설교를 했다. 그런데 청년회에서 그 설교를 속기로 풀어서 회지에 그대로 실었다. 그런데 그 설교를 실제로 작성한 목사님이 이의를 제기하므로 우습게 된 사건이 있었다.
 
 필자의 스승이기도 한 구약학을 전공하신 어떤 교수님이 설교집을 발행하게 되었다. 그 교수님이 어떤 교회에 헌신예배에 설교 요청을 받아 갔다. 설교 내용은 자신의 설교집에 있는 내용으로 설교를 했다. 그런데 문제는 교수님이 한 설교를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이미 그대로 강단에서 자신이 준비한 설교인 것처럼 했다.

교회 성도들은 너무나 똑같은 설교를 담임 목사님과 교수님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되었다. 어느 분의 설교가 원본인가 사본인가? 이 문제로 장로님 사이에 큰 문제가 되어 아주 난처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아예 설교 대필 비서를 주면서 준비해 설교내용을 강단에 가지고 올라가서 온갖 원맨쇼로 묘술을 부린다. 설교내용을 작성해 준 비서의 성경해석의 관점과 설교 관점이 설교내용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다 보니 그 사람의 설교는 언제나 문제투성이다.
 
모 지방 큰 교회 목사님의 이야기이다. 설교 자료 회사로부터 매주 설교 내용을 공급받은 대로 목사님은 그대로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같은 지역 다른 교회 목사님도 같은 자료를 공급받아 설교를 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한 성도가 양쪽 교회에 참석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교회에서 얼마 전에 들었던 똑같은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무엇을 말해 주는가? 필자가 구태여 논평하지 않더라도 무엇이 문제의 심각성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물론 목회자는 다른 분의 설교를 읽고 참고할 수 있다. 또한 그래야 한다. 그러나 설교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다량의 설교 원고를 준비해 놓고 그것을 그대로 강단에 가지고 올라간다.

어떤 목사님이 필자에게 자랑삼아 하는 이야기는 더 가관이다. 노트북 컴퓨터만 가지고 있으면 '설교 준비는 끝'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 속에는 수십만 편의 설교가 내장되어 있다고 했다. 그 목사님은 이제 더 이상 서재실이 필요없고 연구 도서가 필요없다. 교회에서 제공된 도서비로 책을 구입해 본 경험이 없다.

엄청난 과학의 발전과 물질문명의 풍요 속에서, 4차 산업의 혁명속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고 있다. 교회가 시대에 뒤떨어지면 안 된다고 한다. 또한 과학의 발전을 교회가 잘 활용해야 한다고 한다. 물론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 속에서 우리들은 어떤 소중한 유산을 잃어버렸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제아무리 4차산업의 혁명시대기 우리들에게 다가왔고 패러다임의 전환을 외치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 교회를 새롭게 하고 목회자를 새롭게 해주지 못한다. 지금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들의 생명이요, 교회와 우리 목회자를 새롭게 해주는 요인인 것이다. 오늘날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능력이요, 사람들을 변화시켜주는 힘이다.

문제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얼마만큼 정직하게 던졌고 이 같은 정직한 질문의 답변을 위해서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을 얼마만큼 반성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그런 시점인 것 같다. 목회자의 자기반성만큼 교회는 새롭게 변화되게 될 것이다. 목회자의 자기반성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강단에서 목회자들의 설교가 과거 종교개혁 이전으로 회귀하려고 한다고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종교개혁 501주년을 기념하면서 목회자가 성경으로 돌아가는 자기반경이 있어야 한다.
 
소재열 목사(말씀사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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