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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개혁주의 신학에서 본 복음전도와 사회운동 3
이상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8/10/03 [16:45]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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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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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상원 교수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개혁주의 신학에서 바라본 복음 전도와 사회운동에 대한 주체, 전략, 사회적 행동, 사회구조 비판과 형성을 위한 규범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IV. 사회적 행동의 의미

지금까지의 논의의 과정에서 사회봉사, 사회참여, 사회적 행동, 사회구조의 변혁 등과 같은 용어들을 특별히 정의하지 않은 채 사용해 왔다. 기독교인과 교회의 사회적 행동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하여 충분한 설명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도대체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사회적 행동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정확히 규정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사이더는 교회의 사회적 관심을 구제, 개발, 구조적 변화라는 세 유형으로 구분한다. 구제는 “자연재해 혹은 사회적인 재난의 희생자들을 돕는” 사회적 실천이며, 개발은 “개인 가족 그리고 공동체들을 도와서 그들이 자신을 돌볼 수 있도록 합당한 도구, 기술, 그리고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사이더에게 있어서는 구제나 개발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는 진정한 사회적 실천이 될 수 없다. 사이더는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연못에 사는 고기를 공급해 주는 것을 비유로 하여 설명한다. 사이더가 전개하는 논증의 핵심은 이것이다. 구제는 연못에서 몇 마리의 고기를 잡아서 직접 건네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극히 한시적으로 가난한 자의 끼니를 한 두 끼 정도 해결해 줄 수 있을 뿐, 근본적은 대책은 될 수 없다. 이보다 더 발전된 방법은 연못에서 고기를 잡는 도구와 기술과 연못의 고기 정보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사이더는 이것을 개발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특정한 사람이 연못을 소유하고 있고 연못에서 고기 잡는 것을 통제한다면 고기를 잡는 도구와 기술과 정보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연못에서 안정적으로 고기를 잡아서 생존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연못의 소유구조의 성격을 바꾸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서 연못을 소유를 공공소유로 하든지, 아니면 연못의 소유권을 유지하더라도 연못의 고기는 자유롭게 잡도록 하는 등의 법 혹은 구조의 변혁이 있어야 한다. 통상적으로 사회봉사라는 말은 구제와 개발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사회적 행동은 사회구조의 변혁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가 칼빈주의적 기독교의 특징을 “세계-형성적 기독교”(world-formative Christianity)라고 규정하고 그 의미를 설명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월터스토프는 칼빈에 이르러서 역사의 변두리에서 역사의 중심무대로 등장한 “세계-형성적 기독교”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도는 자기가 몸담은 세계의 사회구조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그 구조는 자연 질서의 일부가 아니라 인간이 결정한 것이므로 서로 협력해서 바꿀 수 있다. 아니, 그것은 개혁이 필요한 타락한 구조이기에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 자기가 몸담은 사회 질서의 개혁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제자들의 사명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신앙에 덧붙여진 어떤 것이 아니라 기독교 영성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월터스토프에 따르면 중세시대에는 불평등한 위계적인 사회구조를 하나님이 낳으신 자연스런 질서로 파악했다. 이 질서는 하나님이 정해 주신 질서이기 때문에 인간이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구적으로 견고할 것만 같았던 중세의 봉건적 사회구조는 시장경제의 등장, 도시화,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행동주의 등의 영향을 받아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이때 등장한 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이며, 이 감사는 철저한 순종을 통하여 나타나야 하며, 이 순종의 현장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업이라는 인식에 공감대를 이루었다. 그런데 직업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루고자 할 때 일부 직업은 왜곡되고 타락하여 소명을 이루기에 적합하지 못한 것이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런 직업들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예컨대 칼빈에게 있어서 재봉사가 다른 기술을 배우거나 상인이 농부로 전향해서는 안 될 이유는 없었다.
 
이처럼 칼빈이 왜곡되고 타락한 일부 직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성경의 재발견을 통해서였다. 성경 특히 구약의 선지서들은 사회구조가 악하고 왜곡되었음을 보여 주는 진술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자는 악하고 왜곡된 사회구조를 보았을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조로 변혁시켜야 한다는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루터는 성직만을 소명으로 보았던 중세시대의 소명관을 모든 세속적인 직업에게로 확대 적용했다는 점에서 형성적 특성을 보여 주었지만, 소명 그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칼빈은 직업이라는 사회구조를 변혁시킬 수 있다는 뚜렷한 인식에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칼빈이 사회구조 전체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과 변혁에까지 충분히 나아갔던 것은 아니다.

개혁주의 진영에서 사회구조변혁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네덜란드의 흐룬 반 프린스터러(Groen van Prinsterer)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부터였다. 18세기 전반기 네덜란드 사회는 후발자본주의국가로서 급격한 산업화로 인하여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미숙련빈민계층으로 전락하고 생계유지를 위하여 여자들과 어린이들이 대거 노동현장에 동원되어야 하는 현실에 처해 있었다. 프린스터러는 특히 교육문제에 주목했다. 아이의 교육권을 부모가 가지고 있었던 법 구조 때문에 부모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공장에 보내도록 결정하면 막을 길이 없었고, 아이들은 미숙련 노동자 신분을 대물림 받아야 하는 비참한 현실 속에 있었다. 프린스터러는 네델란드의 사회의 교육제도를 국민의무교육제도로 바꾸지 않는 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보고 의무교육법 제정운동에 헌신했다.

카이퍼는 프린스터러가 교육이라는 작은 영역에 천착했던 사회구조변혁 사상을 네덜란드 사회 전체로 확대시켰다. 카이퍼는 1891년 네델란드 전국기독교사회회의의 기조연설에서 진정한 사회 문제는 기존의 사회구조가 계속 유지될 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건축구조학적 비평(architectonische critiek)에서 시작하여 동시에 새로운 사회구조 형성을 위한 건실한 토대를 확립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날 때 성립된다고 주장함으로써 본격적인 사회구조비평의 문을 활짝 열었다. 카이퍼의 사회구조비평은 개혁주의 사회사상의 본령인 영역주권론(sphere sovereignty)으로 확대되었다. 헤르만 도예베르트는 카이퍼의 영역주권론을 사회구조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로 확대하여 우주의 구조를 15개의 양상으로 나누고 각 양상들의 구조와 규범적인 법칙을 탐구하는 우주법 이념의 철학으로 정교화시켰다.

V. 사회구조 비판과 형성을 위한 규범적 근거

기존의 사회구조의 왜곡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사회구조 형성의 규범적 근거는 무엇인가? 개혁주의 진영의 사회구조비평이 성경의 재발견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은 비평의 규범적 근거도 성경에서 발견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사회구조비평의 규범적 대 강령은 정의의 원칙이다. 사회는 다양한 구조로 되어 있는데, 사회의 모든 사적인 구조들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기본적 사회 구조”(the basic social structure) 곧, 정치경제구조다. 성경은 매우 분명하게 정치경제구조의 규범적 표준이 정의의 원리임을 분명히 하되, 핵심은 사회 안의 약자에 대한 우선적 배려임을 분명히 한다.

정치적 정의의 경우에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는 샤파트인데, 이 용어는 법률용어로서 분쟁 중인 두 당사자 사이에 내재하는 갈등을 중재함으로써 사회의 불만요인을 해소한다는 뜻을 지닌다. 처음에는 모세 혼자 담당했던 분쟁조정임무는 70인 의회(민11:16,17)와 10부장, 50부장, 100부장, 천부장으로 구성된 행정조직(출18:13-27)을 구성하여 담당하도록 했다. 분쟁의 조정에 이처럼 국가기관이 중재에 개입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로, 강자의 횡포로부터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갈등 속에 들어간 두 당사자를 그대로 방치하게 되면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제압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가 국가의 힘으로 개입하여 공정하게 시비를 가려 주면 약자가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둘째로, 분쟁조정자로 나서는 국가기관들이 타락하면 불법적인 강자로 등장하여 약자인 국민들을 괴롭힐 수 있다.

70인 의회나 각 부장들을 둔 것은 이런 폐해를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70인 의회나 각 부장들은 모세의 수직적인 지시를 받지 않고 각각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권한을 받아서 자율적으로 분쟁조정역할을 담당했다. 약자의 보호라는 관점은 성경에 제시하는 경제적 정의의 내용을 살펴보면 확연히 두드러진다. 하나님은 100마리의 양을 치는 목자로서 비유되고 있는바, 이 목자는 한 마리가 길을 잃었을 때 99마리의 행군을 중단시키고 한 마리를 끝까지 찾아서 무리에 합류시킨 후에야 비로소 양의 무리를 이동시킨다(마18:12-14). 이 목자의 행동은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생산성과 효율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가장 약한 구성원들의 생존을 우선적으로 보장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성경이 제시하는 경제정의는 바로 이 하나님의 마음과 행동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있는 과부, 고아, 객과 같은 사회경제적인 약자들에 대하여 편당성에 가까운 우선적인 배려를 하신다(신10:17-18).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에서 나그네와 종이라는 사회적인 약자의 삶을 체험하게 하신 후에 이 체험을 근거로 하여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있는 약자들에 관심을 잃지 않도록 명령하신다(출22:21-24;23:9; 신10:19이하). 구약의 이방국가들에서는 모든 토지를 절대군주의 소유로 만들고 모든 백성들은 왕으로부터 토지를 임대받아서 농사를 짓고 높은 임대료를 지불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으나, 이스라엘에서는 토지를 모든 백성들에게 분배하여 소유권을 갖도록 함으로써 가족들의 최소한의 생계유지를 위한 확실한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희년제도(레25장)는 돈을 빌려준 경우에 돈을 빌려 준 사람은 돈을 돌려받지 않아도 여전히 부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돈을 빌려간 사람은 돈을 갚고 나면 또 다시 빈궁에 시달린다는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희년에 돈을 갚는 일을 조건 없이 면제해 주도록 했고, 땅을 산 사람은 산 땅을 돌려주어도 이미 50년간 땅을 이용하여 충분한 혜택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돌려주는 땅 외에도 더 많은 땅을 대부분 소유하고 있는 것이 통례였던 반면에 땅을 판 사람은 생계의 항구적 기반을 잃어 버려 계속되는 빈곤의 악순환 속에 들어간다는 점을 고려하여 산 땅을 조건 없이 땅을 판 사람에게 돌려 주도록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에게 돈을 빌려 줄 때는 투자목적으로 돈을 빌려 주는 것이므로 빌려 준 돈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이윤을 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자를 받도록 했다(신23:20). 그러나 동족이 돈을 빌려갈 때는 생활고 때문에 빌려가는 것이므로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했다(출22:25; 레25:16이하 신23:19). 옷을 저당 잡았을 경우에는 밤이 되면 저당 받았던 옷을 돌려줌으로써 옷을 저당 잡을 정도로 가난한 자를 추위로부터 보호하셨으며(출22:26-27; 신24:12-13). 맷돌은 생명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저당잡지 못하도록 했다(신24:6). 빚을 갚든 안 갚든 무조건 안식년에는 면제해 주고 저당물은 돌려 주도록 했다(신24:10-11).

나가는 말

복음은 시간적으로는 창세전부터 재림 이후의 영원과 시간을 관통하고, 공간적으로는 인간의 깊은 내면의 세계로부터 우주에 이르기까지 이르는 광대한 차원을 가지는 영광스럽고 장엄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이다. 이 장엄한 스케일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신비스러운 연합이 일어나며, 이 연합 안에서 부르심, 중생, 칭의, 양자됨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스러운 신분이 오직 값없이, 은혜로,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취소될 수 없이 영구적으로 확정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신자들에게는 성령의 주도하에 자신의 의지를 조응시켜서 사회생활을 포함하는 생활의 차원에서 성화의 삶을 살아내라는 준엄한 명령 아래 들어간다.

놀랍도록 영광스러운 구원의 축복은 언제나 한 개인의 속사람의 차원에서의 중생으로부터만 시작되므로 개인영혼의 구원은 논리적으로는 절대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긴급한 상황이 아닌 한 우선순위에 있어서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 개인의 속사람의 차원에서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고 사회변혁의 원동력이 되며, 사회변혁의 실천은 복음전도의 효율을 결정적으로 높이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 영혼의 구원과 사회참여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으며 기독교인들과 교회는 개인 영혼의 구원과 사회참여, 복음전도와 사회적 참여에 모두 헌신해야만 한다.

기독교인들과 교회는 구제와 개발과 같은 개인윤리적인 의미의 사회봉사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사회구조변혁에도 적극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윤리적 실천은 법제화에서 최종적인 결실을 거두는 법이다. 성경은 구약의 선지서들이 잘 보여 주는 것처럼 인간의 죄를 비판하되 구조적인 죄까지도 비판하고 있으며, 개인의 내면적인 왜곡된 사상과 개인의 왜곡된 생활의 개혁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게 되어 있을 때는 왜곡된 사회구조도 비판하고 개혁할 것을 요구한다. 기독교인들과 교회는 한국의 사회구조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약한 자들의 생존권이 보호받는 구조를 갖추고 있는가 등을 예의주시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비판하고 대안으로서의 사회구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사회구조변혁에의 헌신은 긴급한 경우가 아닌 한 교회의 이름으로 수행하기 보다는 교회는 후원자의 입장에 서고 이 문제를 다루는 일에 익숙한 식견과 능력을 지닌 전문가들이 별도의 기구를 형성하여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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