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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개혁주의 신학에서 본 복음전도와 사회운동 2
이상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8/09/26 [14:39]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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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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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상원 교수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개혁주의 신학에서 바라본 복음 전도와 사회운동에 대한 주체, 전략, 사회적 행동, 사회구조 비판과 형성을 위한 규범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II. 복음전도의 주체

이 풍성한 복음은 인간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전달되지 않으면 아무리 풍성한 복음이라도 실질적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효과를 거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10:17)는 말씀이나 “그들이...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라는 말씀이나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는 말씀은 복음이 인간들에게 언어로 전달될 때 비로소 인간들이 구원받는 사건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복음의 전달주체는 누구인가? 우선 성경은 복음전도의 주체로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사를 제시한다. 하나님과의 화목(고후5:20)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고후5:21)을 하나님이 권면하신다(고후5:18)는 말은 성부 하나님이 복음전도의 주체이심을 뜻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행10:36)라는 말씀이나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엡2:17)라는 말씀은 성자 하나님이 복음전도의 주체이심을 뜻하며,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15:26)라는 말씀은 성령 하나님이 복음전도의 주체임을 뜻한다. 또한 하나님은 천사들을 복음전도의 주체로서 사용하기도 하신다.

“천사가 이르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는 말씀은 천사가 복음전도자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 자신이나 천사들이 직접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아직 성경이 기록되지 않은 시대에 사용된 특별하고 예외적인 방식으로서, 통상적인 방식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직접 복음을 전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상적으로는 인간 전도자들을 세워서 말로써 복음을 전달하게 하신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은 제자들에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을 명령하셨고(행1:8), 빌립을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행8:26-40), 베드로를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에게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행10장),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셨고(벧전2:9),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들로 하여금 생명의 말씀을 밝히도록 하셨다(빌2:15-16). 존 스토트(John Stott)가 지적한 바와 같이 복음을 듣고 자기 자신은 복음이 주는 구원의 엄청난 혜택을 누리면서도 이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지 않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다.

III. 복음 전도의 전략

복음전도는 말 또는 언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단지 말이나 언어만으로는 효과를 거두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는 말씀에 따라서 효과적인 복음 전도를 위한 전략을 세울 필요가 있다. 먼저 말로만 하는 복음전도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를 검토한 다음에 효과를 거둘 것으로 예상되는 복음 전도 전략은 어떤 것인가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먼저 복음전도가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경우에 대해서는 간하배(Harvie Conn)와 로날드 사이더(Ronald J. Sider)의 분석을 소개하고자 한다.

간하배는 복음 전도의 장애물이 되고 있는 신앙생활로서 “세상 중심적 영적 생활”과 “영혼중심적 영적 생활”을 제시했다. 세상 중심적 영적 생활이란 영혼을 고려하지 않은 체 육체만을 고려하는 유물론적인 신앙생활을 가리킨다. 이 입장은 개인적인 경건이나 교회생활을 세상 속에 환원시켜 버린다. 이 입장은 하비 칵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세속화를 “복음의 적이 아닌 복음의 열매”로 간주하며, 1954년의 WCC대회에서처럼 ‘그리스도는 교회와 세상의 희망’이라는 전통적인 명제에서 ‘교회’를 삭제하고 ‘그리스도는 세상의 희망’이라고 말하며, 1961년의 WCC 대회에서처럼 전통적인 명제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를 삭제한다. 이 입장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고 보고 “세속적인 것이야말로 우리가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거룩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 세상의 것이 곧 영적 생활이다. 이 입장은 복음 전도의 사명을 거부한다.

반면에 영혼 중심적 영적 생활은 육체를 고려하지 않고 영혼만을 고려하는 입장으로서 영적 생활은 저세상의 것으로 보고 사회의 문제들을 외면하고 개인의 경건이나 교회생활을 영적 생활의 전부로 간주한다. 이 입장은 복음전도의 사명은 육체적 필요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비물질적인 임무로 환원시킨다.

간하배가 제시한 두 유형을 I.에서 제시한 복음의 내용에 비추어서 해석해 본다면, 세상 중심적 영적 생활은 사회적 차원에까지 확대되어야 할 성화의 삶을 제외한 모든 다른 구원의 서정들 단계들을 전면적으로 무시 내지는 폐기함으로써 구원의 은혜를 인격적인 내용물이 없는 빈약한 사회구조라는 껍데기로 환원시켜 버렸으며, 영혼 중심적 영적 생활은 구원의 서정들 가운데 성화의 차원이 사회적인 문제들에까지 포괄한다는 점을 간과하였다.

한편 로날드 사이더는 지양해야 할 복음전도 전략으로서 네 개의 양상을 제시했다. 첫째 입장은 개인주의적 복음전도 양상이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이 이 입장을 대변하는 대표주자로서 개인 영혼의 구원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보는 한 편 사회적 정의는 최우선적인 사명은 아니라고 보는 입장이다. 복음주의자들의 국제회합으로 열렸던 1966년의 휘튼대회에서 복음을 개인 구원의 복음과 동일시한 것이나 1974년의 로잔대회가 복음전도와 사회참여가 모두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의무이지만 복음전도가 최우선이라고 주장했던 것에서 이 입장이 잘 표현되었다. 이 입장에 따르면 사회구조는 전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둘째 입장은 급진적인 재세례파의 양상으로서 교회의 주요한 사명은 다만 신자들의 공동체가 되는 것으로 보고 정치적 행위를 교회의 주요 업무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세 번째 입장은 주류교회의 일치운동양상으로서 개인과 사회구조가 모두 복음화의 대상이라고 파악한다. 이 입장은 자유주의적 하위유형과 보수주의적 하위유형으로 다시 구분된다. 자유주의적 하위유형은 죄와 구원의 수직적 측면을 중요시하지 않는 입장으로서 주로 해방신학을 통하여 대변되었다. 해방신학은 교회와 사회의 구분을 철폐하고 민주적 사회주의로써 자본주의의 억압을 대체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해석했다. 보수주의적 하위 유형은 리차드 마우(Richard Mouw)가 대변한다. 마우는 구원은 개인구원뿐만 아니라 죄로 오염된 모든 창조질서의 구원으로까지 확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네 번째 입장은 깁슨 윈터(Gibson Winter), 존 힉(John Hick), 폴 크니터(Paul Knitter), 마리안 보헨(Marian Bohen)등이 보여 준 입장으로서,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고 수평적 관심으로 수직적 관심을 덮어 버리는 세속적 기독교양상이다. 이 양상에 따르면 죄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가해행위로만 파악된다.

사이더가 분석한 네 가지 입장들은 간하배가 말한 두 가지 입장을 보다 세분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원의 의미를 사회적 차원을 무시하는 급진적 재세례파양상이나 일부 개인주의적 복음전도양상은 간하배가 분석한 영혼중심적 영적 생활에 대한 비평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고, 구원의 개인영혼구원의 차원을 무시하는 주류교회의 일치운동양상 중에서 자유주의적 하위유형과 세속적 기독교양상에 대해서는 간하배가 분석한 세상중심적 영적 생활에 대한 비평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다만 개인주의적 복음전도양상에서 사회구조의 변혁보다 개인영혼구원이 우선해야 한다는 명제는 정당한 것이며, 이와 동시에 주류 기독교의 보수주의적 하위유형에서 개인영혼구원과 사회구조변혁을 동시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도 유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명제 곧, 개인영혼구원이 사회구조변혁보다 우선한다는 명제와 개인영혼구원과 사회구조변혁이 동시적으로 중요하다는 입장을 어떻게 서로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복음전도 전략은 어떤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필자는 말과 사랑의 실천을 통한 복음전도를 강조했던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의 입장, 상황화를 제시한 간하배, 동일화를 주장한 존 스토트, 성육신적인 하나님 나라로서의 기독교를 제시한 로날드 사이더의 관점들을 차례로 소개하고 종합하여 평가하고자 한다.

프란시스 쉐퍼는 복음전도의 원리로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역사적 기독교의 완전한 교리적 입장을 명확하게 견지할 것. 둘째, 정직한 질문에 정직하게 답변할 것. 셋째, 하나님이 우리의 세기에 존재하신다는 것을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차원에서 전시할 것.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13:17)는 말씀은 앎(정통교리)이 선행하지만 반드시 행함(윤리적 실천)이 동반된다는 것 곧 정통주의에는 신조가 선행하지만 실천이 반드시 뒤 따른다는 것을 말한다.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권위를 확신하기만 하는 자들이 아니라 성경의 원리에 따라 사는 자들이다.” 세상은 우리를 보고 판단할 권리가 있다. 세상이 그리스도인 안에서와 집단적인 관계 안에서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복음전도의 성패가 결정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결과를 말로 보여 준다면 세상은 그 결과를 말로 해소시켜 버릴 것이지만, 복음의 결과를 실체적이고 집단적으로 보여 준다면 이 결과를 말로써 해소시켜 버릴 수 없게 될 것이다. 쉐퍼가 복음의 결과를 집단적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할 때는 교회를 염두에 둔 것이다. 쉐퍼는 교회는 두 가지 원리를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 하나는 가시적인 교회의 순결의 원리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관찰 가능한 사랑을 전시해야 한다는 원리다.

간하배는 상황화(contexualization)를 복음전도의 전략으로 제시했다. 간하배가 말하는 상황화는 삶의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판적인 질문들과 사건들로부터 복음전도를 완전히 격리시키지 못한다고 파악한다. 복음전도자는 다른 개인들 가운데 살고 있는 자들로서 모든 삶의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심을 인정하고 상황이 묻는 물음에 “경청하는” 태도로 복음전도에 임해야 한다. 여기서 간하배가 상황의 비판적 질문을 경청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가하고 소외된 계층의 부르짖음을 염두에 둔 것이다. 가난한 계층의 비판적인 질문에 대응하여 복음전도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을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창세기18장19절 말씀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마태복음5장6절 말씀에 순종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고통에 응답할 것을 주문한다. 물론 이 응답의 방식은 사회복음주의에서처럼 전도보다 정치적 관심과 사회적 행동에 더 많은 관심을 표하는 것이어서도 안 되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한 특별헌금을 하는 것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여기서 간하배는 사회적 행동은 개인이나 교회가 우발적으로 시행하는 구제금 전달의 단계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사회구조변혁으로 나아가야 함을 시사한다. 간하배는 기독교인과 교회가 개인영혼구원을 위한 사역과 함께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위한 사회구조변혁에 헌신한 예로서 1970년대에 남미에서 전개된 ‘심층전도운동’(Evangelism in Depth Movement), 리베리아의 ‘엘리자베스 토착민 내지선교’(the Elizabeth Native Interior Mission), 미국의 ‘갈보리의 소리’(the Voice of Calvary)와 미국의 ‘개혁공동체운동’(The Reformed Community)을 예시한다.

스토트는 동일화(同一化)를 복음전도의 전략으로 제시했다. 스토트가 말하는 동일화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그리스도도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셨다는 말씀(요17:18;20:21)이 동일화의 근거로 제시된다. 선포 없는 동일화도 피해야 하지만 동일화 없는 선포도 피해야 한다. 그런데 동일화는 동화(同化)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소금은 짠 맛을 잃으면 소용이 없다. 그리스도인은 죄인의 친구라야 하지만 죄인에게서 떠나 있어야 한다(눅7:34; 히7:26).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있지만 동시에 세상에 속하지 않아야 한다(요17:8). 이 말의 보다 구체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구속받은 성도와 공동체로서의 진정한 모습 곧, 사랑하는 모습을 실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어떤 다른 복음전도 방법을 도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복음전도에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것은 말로는 하나님을 시인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하는(딛1:16) 그리스도인의 일관성 없는 삶의 모습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아야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인 줄 알 수 있고(요13:35),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어야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구원의 사건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기 때문이다(요17:21). 영이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셨지만 잠시 후에 부활 승천하셔서 다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실재를 알게 된다(요1:18; 요일4:12).

사이더는 성육신적인 하나님 나라로서의 기독교를 복음전도 전략으로 제시했다. 사이더에 따르면 복음전도는 사회적 행위와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사이더는 복음전도가 사회적 행위로부터 구별되어야 하는 이유를 여섯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로 복음전도는 개인의 회심을 요청하는 반면에 사회구조가 인격적인 회심을 하는 것은 아니며, 둘째로, 복음전도는 죄사함,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 부활하신 임재 안에서의 기뻐함 등을 산출하지만 사회적 행위는 더 깨끗한 품질, 더욱 강한 민주주의, 더 위대한 경제적 정의를 산출하며, 셋째로, 복음전도는 비기독교인들을 예수의 제자로 삼는 것인 반면에 사회적 행위는 사회경제적 행복과 정신적인 행복을 확보하고 향상시키는 것이며, 넷째로, 굶주린 자를 먹이고 노예 생활을 끝내고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정의를 증진시키는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정당성을 지니며, 다섯째로, 복음전도와 사회운동을 동일시하면 필연적으로 복음전도가 태만해지며, 여섯째로, 복음전도는 결정적인 순간에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복음전도와 사회적 행동은 구별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복음전도는 우선순위에 있어서 앞서야 한다. 사이더는 복음전도가 사회적 행동에 앞서야 하는 다섯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로, 기독교적 사회책임을 가져야 한다면 기독교인을 만드는 복음전도가 논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둘째로, 영생을 얻는 일은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중요한 바, 사회적 행동을 통해서는 영생을 얻게 할 수 없다. 셋째로,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소명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소명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 말은 복음전도의 소명을 가진 자에게 사회적 행동의 중요성을 일방적으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넷째로, 긴급한 시점에서는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선행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을 때는 사회운동 이전에 주님을 영접하도록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섯째로, 시간과 자원을 복음전도와 사회적 행동에 균형 있게 쓰는 것이 중요하지만 시간과 자원의 제한성을 고려할 때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전도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복음전도와 사회적 행동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도 사이더는 복음전도와 사회적 행동이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로, 진정한 복음전도는 복음 전도 대상자의 모든 상황에 적용하는 상황적인 전도다. 죄를 회개하라는 요구는 개인의 죄뿐만 아니라 불의한 사회구조에 연루된 모든 것을 회개하라는 요구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라는 요청은 사회운동의 뿌리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둘째로, 복음전도는 사회운동을 초래하는 동시에 사회운동은 복음전도의 목적이다. 셋째로, 교회 공동체 자체가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공동체가 될 때 광범위한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 넷째로, 교회의 사회적 관심은 복음전도를 촉진하며, 반대로 불의에 대한 교회의 침묵은 복음전도를 침식한다. 불의에 대한 도전은 교회 성장을 일시적으로 둔화시킬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교회의 견실한 성장을 견인한다. 다섯째로, 사회운동은 복음전도의 열매들을 보호해 준다.

이상에서 소개한 복음전도와 사회적 행동 간의 관계에 대한 제안들의 핵심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복음전도는 논리적으로는 항상 사회적 행동에 선행해야 하며, 긴급한 상황을 제외하면 시간적으로도 사회적 행동에 선행해야 한다. 둘째로, 복음전도와 사회적 행동은 그 목표와 결과에 있어서 다르기 때문에 구별되어야 하며, 각각 독특한 소명을 수행한다. 셋째로, 그러나 복음전도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행동의 근거가 되고 사회적 행동은 복음전도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의미에서 긴밀하게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어서 기독교인들과 교회는 두 영역에 모두 헌신해야 한다. (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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