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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개혁주의 신학에서 본 복음전도와 사회운동 1
이상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8/09/19 [09:58]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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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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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상원 교수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개혁주의 신학에서 바라본 복음 전도와 사회운동에 대한 주체, 전략, 사회적 행동, 사회구조 비판과 형성을 위한 규범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들어가는 말

마가복음 2장1절에서 12절에는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유해 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가버나움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베드로의 집으로 추정되는 집에 들어가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접한 가버나움 마을 사람들은(1절) 베드로의 집으로 모여 들어 쉬실 수가 없게 되었다. 예수님은 모여 든 무리를 대상으로 하여 하나님 나라의 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셨다(2절).

마을 사람들 중에는 들 것에 중풍병자를 싣고 온 네 사람도 섞여 있었다(3절). 네 사람은 예수님이 병자를 치유해 주신다는 소문을 듣고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것이다. 집 안팎으로 둘러싸고 있는 마을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께 접근하기가 어렵게 된 네 사람은 집 옆의 계단을 올라가 우리나라의 초가지붕처럼 갈대를 엮어서 얹어 놓은 지붕을 뜯어내고 중풍병자를 들 것에 실어 예수님이 있는 자리로 내려 보냈다(4절).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중풍병자를 맞이한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오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던 네 사람의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시고 이들에게 즉각 반응을 보이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절). 예수님의 반응은 독자들을 의아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네 사람과 중풍병자는 중풍병이 치유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왔는데, 예수님의 첫 반응은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왜 이런 동문서답과 같은 반응을 보이셨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여하튼 이 선언이 있고 난 이후에 서기관들과의 무언의 논쟁을 거쳐서 예수님 자신이 죄를 사해주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자임을 분명히 하고 난 이후에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선언하심으로써(11절) 중풍병도 치유해 주셨다. 중풍병자가 죄사함과 중풍병 치유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얻은 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이런 일은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고 놀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12절).

이 사건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은 이 논문의 주제 곧 “복음전도와 사회운동”의 관계를 설정하고자 할 때 매우 유익한 지침들을 담고 있다.

첫째로, 예수님이 중풍 병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고통을 겪어 왔고, 오로지 중풍병이 낫기만을 오매불망 바라고 있는 이 환자에게 죄 사함을 먼저 선언하신 것은 중풍병이라는 중증질환으로 고통 받고 있는 환자의 경우에도 죄 사함을 받고 영혼이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것 곧, 영혼의 구원은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몸이 구원받는 것보다 우선순위에 있어서 앞선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둘째로, 예수님이 죄 사함을 선언하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시는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당대의 유대사회의 구조가 왜곡된 구조임을 지적하면서 이 왜곡된 구조는 변혁되어야 함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유대사회의 종교체계는 가난하고 병든 자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고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며, 나아가서는 하나님 나라로부터 배제된 자들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해석했다.

따라서 병들고 가난한 자들은 사회의 계급구조에서 죄인의 계층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죄의 회개를 요구하시지도 않고 바로 죄사함을 선언하신 것은 이와 같은 왜곡된 사회구조로부터 중풍병자를 해방시키시는 동시에 이와 같은 구조를 왜곡된 구조로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왜곡된 구조가 하나님의 뜻에 반하며 따라서 변혁되어야 함을 자명한 논리적 결론이다.

셋째로,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죄를 먼저 사해 주심으로써 영혼구원의 우선성을 분명히 하셨으나 그렇다고 해서 중풍병을 치유하는 일을 간과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곧바로 중풍병자의 중풍병을 치유시켜 주심으로써 중풍병자의 신체도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키셨다. 예수님은 진정한 구원은 영혼과 몸이 포함된 전인적인 구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

중풍병을 치유하시는 과정에서 예수님이 시사하신 세 가지 지침들은 개혁주의적인 관점에서 복음전도와 사회운동의 관계를 설정할 때 훌륭한 규범적인 지남(指南)이 된다. 첫째로, 복음전도에 있어서 개인 영혼의 구원은 논리적으로 우선한다. 둘째로, 그러나 진정한 구원은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몸의 구원까지도 포함하는 전인적 구원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사회의 구조가 왜곡되었을 경우에 왜곡된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과 변혁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주어진 소명이다. 이 글은 이 세 가지 원리를 규범적 지침으로 삼고 복음전도와 사회운동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I.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전도와 사회운동과의 관계를 규명하기 전에 복음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은 자연스러운 서술의 순서다.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금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창3:6) 이후에 인류와 인류를 둘러싼 세계는 아담으로부터 전가된 원죄(롬5:12)와 자범죄의 세력, 그리고 죄에 대한 형벌로서 주어지는 사망의 세력에 장악되었다(롬6:23).

그러나 삼위일체의 제2위로서 하나님이신 동시에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인류가 범한 죄와 죄에 대한 사망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시고 사망의 형벌을 이기고 부활승천하심으로써 죄와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객관적 근거를 마련하셨고, 이어서 구주를 영접하는 모든 자들의 속사람 속에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믿는 자 개인을 실질적으로 살려 내시는 사역 곧,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속사역을 적용하시는 주관적 구속사역을 통하여 믿는 자들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복음 곧 좋은 소식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은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내용을 창세 전으로부터 재림 이후까지 시간과 영원을 관통하여 뻗어 있는 장엄한 스케일 안에서 전개하고, 공간적으로는 믿는 신자 개인의 은밀하고 깊은 속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의 영역을 거쳐서 사회와 자연 전체를 포괄하는 우주적인 스케일 안에서 펼치며, 그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아홉 단계의 구원의 서정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극히 풍요로운 모습으로 제시한다. 이 장엄하고 풍부한 구원의 면모들을 개관해 보자.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결정하시고 계획하시는(엡1:11)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의 중요한 핵심적인 한 부분으로서 창세전의 영원에서 사람들을 선택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도록 예정하셨다(엡1:3-5). 하나님은 복음 증거자들을 통하여 모든 인류를 향한 구원의 초청을 하신 다음(마22:1-14, 혼인잔치의 비유 눅14:16-24, 대잔치의 비유 마11:28; 행17:30, 외적인 부르심), 예정하신 자들을 성령을 통하여(고전2:14;요3:5) 내적으로 유효하게 부르신다(롬8:28; 벧후1:10; 롬1:6,7; 유1, 내적인 부르심).
 
부르심을 받은 자는 내적인 부르심이 임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고전1:9) 모든 구원의 과정들이 일어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된다(그리스도와의 연합).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에게는 내적인 부르심과 동시에 엄청난 구원사건이 일어난다. 성령이(요1:13;3:6)이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약1:18) 그의 속사람 속에 들어와 그를 단번에 거듭나게 하여 새 사람을 만들어 버린다(중생). 중생은 완전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취소되지 않는다.

중생한 자는 단번의 중생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시민권을 영구적으로 보장받는다. 그가 중생하는 순간에 믿음이 형성되고(요일5:1, 믿음) 이 믿음을 통하여(롬8:30, 5:1; 갈2:16) 중생과 동시에 그에게 법정적인 칭의가 주어진다(갈3:26,27; 요1:12, 칭의). 중생이 완전한 것처럼 칭의도 단회적이고 완전하며, 칭의 시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에 대한 책임과 형벌이 영구적으로 제거된다. 칭의를 받은 자에게는 칭의를 받는 바로 그 순간에, 그리고 논리적으로는 칭의 다음에 하나님의 양자로서의 신분이 영구적으로 주어진다(요1:12). 신자의 내면 안에서 일어나는 단번에 그리고 완전하게 주어지는 시초의 구원사건 곧, 중생, 칭의, 양자됨에 의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신분은 영구적으로 취소되는 일이 없이 확정된다.

그러나 구원사역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중생, 칭의, 양자됨과 같은 단회적이고 완전하고 그 효력이 영구적인 구원사역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그리고 바로 그 직후부터 겉 사람의 영역에 여전히 남아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죄의 오염들로부터 실존적으로 해방되고 하나님의 뜻을 불완전하게나마 이 땅 위에서 실현하기 위한 평생에 걸친 싸움이 시작된다. 이 싸움은 성령이 주도하시지만 인간의 의지를 비롯한 모든 기능들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인간의 모든 기능들이 참여하는 한에 있어서 이 싸움은 완전할 수 없고 죽는 날까지 끊임없는 과정 속에 있게 된다. 속사람의 영역에서 영구적으로 거듭난 신자는 이제 실존적인 생활 속에서 날마다 새롭게 거듭나야 하며,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단회적인 시초의 회심(막1:15, 좁은 의미의 회심)을 할 뿐만 아니라 날마다 범하는 죄에 대한 실존적인 윤리적인 회심을 새롭게 반복적으로 해야 한다(마26:75, 베드로의 회심 계2:5,6,21,22;3:3,19, 소아시아 지역교회들의 회심).
 
중생 시에 복음에 대한 신뢰를 의미하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신자(좁은 의미의 믿음)는 생활 속에서의 지속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뢰(넓은 의미의 믿음)와 교회의 특수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특별한 능력을 뜻하는 믿음(고전12:9, 넓은 의미의 믿음)을 지속적으로 받아야 한다. 단회적이고 완전한 법정적 칭의를 받은 신자는 생활 속에서 날마다 의로운 삶을 삶으로써 실존적이고 윤리적인 칭의를 반복하여 지속적으로 받아야 한다(롬6:18, 19, “의에게 종이 되었으나” 계속하여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러야 함).

칭의 시에 법적인 양자의 신분을 보장받았지만 실생활에서 양자의 축복에 참여하고 양자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칭의 시에 그리스도의 거룩이 자신의 거룩으로 여겨진다는 의미에서 성화된 신자들(고전1:2; 6:11; 행20:32; 26:18)은 생활 속에 남아 있는 죄의 오염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며, 이 삶은 한 개인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가난의 문제뿐만 아니라 환경오염의 문제까지를 포함한 사회적 차원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성령이 주도하시는 이 모든 과정에 인간이 참여할 때 인간 편에서의 실수와 불완전함이 있을 수 있으나 성령께서는 견인의 은혜로 붙드신다(요10:28; 롬8:31-39). 중생 시에 시작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고후3:17-18)은 영혼의 경우는 육체적인 죽음의 시점에(눅23:43, 예수님의 옆에 매달린 강도 고후5:6, 8; 빌1:21-23) 완성되고, 몸의 경우는 재림 시에 완성되며(고전15:44-45, 49), 죄로 인하여 망가진 우주는 재림 시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면서 완성될 것이다(벧후3:13). 이 엄청난 과정이 복음 곧 복되고 좋은 소식이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일들이 모두 성령을 통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도적인 사역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상에 개관한 복음의 내용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로, 모든 구원의 시작은 절대적으로 한 개인의 내면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중생, 칭의, 양자됨과 같은 영혼의 변화로부터 시작되고, 이 시초의 영혼의 변화는 신자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분을 완전하고도 영구적으로 확정 짓는다. 따라서 영혼의 구원은 논리적 순서에 있어서 반드시 선행해야 한다.

둘째로, 그러나 중생, 칭의, 양자됨을 통한 시초의 구원의 은혜는 풍성하기 이를 데 없는 구원의 은혜의 시작일 뿐이며, 이후 신자의 개인적인 생활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 속에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실존적이고 윤리적인 거듭남, 회심, 믿음, 칭의, 성화 등을 통하여 증시되고 또한 구체화되어야 한다. 신자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을 말씀과 성령의 지시에 순응하여 이 성화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개입되는 한 이 삶은 완전에 이를 수 없으며 항상 불완전함속에 남아 있게 된다.

셋째로, 신자의 삶의 환경을 형성하는 완전하고 이상적인 구조적 환경은 마지막 날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용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일 뿐, 인간의 의지와 노력 - 그것이 성화의 삶의 과정이라 할지라도 -을 통하여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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