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개혁신학
[논문] 이신칭의 교리 500년(1)
서철원(前 총신대학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8/07/25 [09:37]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김순정
배너
이 글은 서철원 박사가 개혁신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이신칭의 교리를 강조한 종교개혁으로부터 500주년이 되는 현재까지 교회가 지켜온 전통을 연구하여 제시하고 있다. 오늘 교회는 이신칭의교리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강조하고 있다.

1 서론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처음 그리스도교의 복음 선포만큼 인류역사에 새로운 기원을 세웠다. 그리스도교의 시작에 전도자들은 죄로 죽음뿐인 세상에 처음으로 죽음을 벗어나 생명에 이르고 영생에 이르는 복음을 선포하였다. 복음 선포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서 생명에 이르고 악의 세력에서 놓여나 참 자유와 해방을 누리며 구원의 기쁨 속에 살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기쁨과 감격과 평화와 생명의 약동을 가져왔다.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복음 선포에 핍박과 박해가 끊임없이 동반하였어도 복음 선포는 계속되었다. 많은 전도자와 믿는 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고문당했어도 복음 선포는 계속되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교회가 많이 세워졌다.

그러나 교회가 번창하고 제도화되면서 은혜의 선물로 받았던 구원이 인간이 획득해야 할 사항으로 변해갔다. 의 곧 구원을 받으려면 그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되었다. 선행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자격을 얻어야 한다. 그러면 의 곧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교회를 완전 정복하므로 백성들은 교회의 지배와 횡포에 한 숨 쉬며 평안과 영생을 얻을 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구원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 가중되어 교회에 구원의 기쁨이 없어졌다. 인간의 노력과 사랑의 수고가 의와 영생을 결정한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세례 받을 때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고 믿음의 가능성이라고 할잠재신앙 (fides implicita) 혹은 토마스의 제시대로 비형성적인 믿음 (fides informis)이라는 것이다. 이 믿음이 나를 구원하는 믿음이 되려면 사랑의 선행으로 잠재신앙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그 믿음이 구원하는 믿음 (fides salvifica)이 된다. 은혜로 얻은 믿음은 잠재신앙이어서 나를 구원할 수 없다. 사랑의 선행으로 잠재신앙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객관적 구원은 이루어놓으셨지만 그것을 내 것이 되게 하는 일은 내가 다해야 한다. 사랑의 선행과 고행과 금욕 등이 나를 의롭게 만든다. 의롭게 되는 일을 할 때 하나님은 돕는 은혜는 주시지만 내가 일은 다해야 한다. 은혜는 돕고 내 본성이 일을 이루어내므로 그것이 공로가 되어 내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 의롭게 되기 위해서 하는 선행과 금욕과 고행은 말로 할 수 없는 고역이었다. 그런대도 내 구원은 멀어지기만 했다.

이렇게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를 당하며 신음할 때 하나님은 루터를 세우셔서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진리를 굳게 세우게 하셨다.

그러나 오직 믿기만 하므로 구원에 이른다는 진리는 많은 반대와 배척을 불러일으켰다. 다. 종교개혁 자체 내에서도 반대와 반발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에 수정을 가할 정도가 되었다.

그 후 웨슬리의 감리회 운동은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로마교회의 구원방식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20세기 후반에도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란 주제로 이신칭의 교리를 바꾸는 학적 작업이 성경학자들에 의해서 깊고 넓게 전개되었다. 새 관점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믿음에 행함을 더해야 완전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얼마나 그릇된 가르침인가? 종교개혁을 완전히 무로 돌리는 작업을 주석과 새로운 해석으로 이 일을 시도하고 있다. 이런 가르침은 갈라디아서의 가르침에 의해서는 저주받을 복음이다. 다른 복음이다. 다른 복음은 없고 오직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뿐이다.

2 이신칭의 교리의 확립

2.1 로마교회의 신학적 정립

로마교회가 믿음과 선행을 합해야 확실한 구원을 얻게 된다고 가르치므로 사람들이 선행과 금욕과 고행을 열심히 실행하였다. 공로가 되는 것은 선행과 금욕과 고행만이 아니었다. 큰 액수의 헌금은 연옥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낼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면죄부를 발매하였다.

이런 교회의 행습을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적으로 정립하였다. 그는 의롭다함을 받으려면 그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신학에 도입하였다.

2.1.1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 규정

로마교회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는 자격에 따라 공동체의 선을 배분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Nichomacheia Ethica, V, iii, 7-8). 그는 정의와 불의가 있는데 두 극단의 중도가 정의라고 규정하였다 (Nichomacheia Ethica, V, i, 1-2). 불의는 첫째로 법을 깨뜨리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의 몫 이상을 취하는 것이다. 그럼 의는 공평한 분배 혹은 공정함이다 (NE, V, I. 8-12). 자기 몫 이상을 취하는 것을 불의라고 규정하면 (NE, V, ii, 2-5) 정의도 분배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분배할 때 공동체 회원들 간에 동등한 몫으로 나누거나 부동등한 몫으로 나누게 되기 때문이다 (NE, V, ii. 13-iii.1). 분배의 경우 불의는 부동등이고 정의는 동등이다 (NE, V, iii.2-6). 분배를 받을 두 사람이 동등하면 같은 몫을 배당해야 하고, 동등하지 않으면 같은 몫을 가질 수 없다. 동등한 사람들이 합당한 배당을 받지 못하고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이 동등한 몫을 배당받으면 싸움과 불평이 일어난다 (NE, V, iii. 5-6).

그러므로 분배할 때 일종의 자격에 근거해야만 하므로 자격에 의해서 배당하는 것이 정의라고 규정하였다 (NE, V, iii. 7-8). 이 정의의 개념을 칭의 개념에 적용하여 구원의 법을 완전히 바꾸었다.

2.1.2 토마스의 의의 규정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받아들여 의의 개념을 거의 비슷하게 정의하였다. 정의는 자기의 권리를 자기에게 배정하는 것이고 빚진 것을 해당자에게 돌리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Summa Theologica, III, quaestio 58 articulus 1, a3, a4).

그는 의의 행동도 동일하게 정의한다. 합당한 의의 행동은 자기에게 자기의 몫을 되돌리는 것이다 (ST, III, q58a11; 961a1). 더구나 공동의 선을 분배함에 있어서는 개인의 권위에 맞아야 한다 (ST, III, q61a1. 2). 곧 의는 자기에게 자기의 권리를 돌리는 것이다. 의의 행동도 자기에게 자기의 몫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선을 분배할 때도 개인의 권위에 맞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런 의의 개념을 구원받음 혹은 칭의에 적용하면 자격에 의해서 합당한 몫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선물로 곧 은혜로 의를 받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의롭다함을 받으려면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이런 의의 개념에 근거해서 로마교회가 선행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칭의의 법으로 정하였다. 이 가르침을 따라 로마교도들은 선행과 금욕과 고행을 해서 자격을 갖추어 의를 얻으려고 전력하였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았고 사람의 사고에 근거했으므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면 할수록 구원에서 더 멀어져갔다. 그래서 고통과 마음의 불안은 더 심해졌고 결국 죽을 때 교회의 판정에 의존하는 길 밖에 없게 되었다.

2.2 루터의 이신칭의

루터는 로마교회의 가르침대로 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행과 금욕으로 결코 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믿음으로 의로운 자가 산다는 말씀 (합 2:4)을 익히 알았어도 교회의 가르침과 관습을 벗어날 수 없었다. 늘 선행을 하고 고행을 하여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었다. 선행을 행해도 심판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판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하나님은 자격에 미달하는 루터를 칼로 치려고 서계시는 분이셨다. 하나님은 심판주이시고 은혜로운 구원주이실 수 없었다. 그래서 루터는 내가 어찌하면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절규를 계속 하였다. 자기의 행함으로는 결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밝히 깨달았다.

그러던 중 로마로 가서 무릎으로 피 흘리며 사닥다리를 기어오르는 고행을 할 때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를 얻으면 전적으로 은혜로 얻는 것이므로 (sola gratia) 인간의 공적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이 깨달음으로 루터는 로마교회를 이탈하고 종교개혁을 할 수 있었다. 로마교회에 대항해서 루터가 목숨을 건 도박을 하였다. 공로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만 곧 전적으로 은혜로만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믿음과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전적인 선물이라고 외쳤다. 곧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믿기만 하면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주창하였다. 행함과 공로를 전적으로 배척하였다. 구원이 은혜의 선물이므로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만이 모든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신칭의 교리가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구호는 오직 믿음 (sola fide)으로 오직 은혜 (sola gratia)로 였다. 이 구호는 로마교회의 가르침의 심장부를 꽂았다. 이 구호로 로마교회가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로마교회를 강타하여 교회가 나뉘게 되었다. 하나의 교회가 둘로 셋으로 분열되어 통일 교회가 분리된 교회가 되었다. 교회의 단일 통치가 그리스도의 통치로 옮겨졌다.

이신칭의 교리는 인간 스스로 하늘에 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품에 안아 하늘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만천하에 밝혔다.

2.2.1 이신칭의 교리의 확립

루터는 이신칭의를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 (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으로 세웠다. 종교개혁 교회가 일치해서 이신칭의를 교리로 세우므로 종교개혁 교회의 교리가 되었다.

루터는 죄인이 율법의 행함 없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확신 (엡 2:8-9; 롬 1:17; 5:1; 갈 3:11; 히 10:38)을 많은 투쟁을 통해서 얻게 되었다. 의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고 합당하게 벌주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단언하였다. 의는 사람이 자기의 노력과 공로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죄인이 할 일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칭의란 하나님의 법정적인 행동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주 예수를 믿는 죄인을 무죄라고 선언하시고 그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주신다. 오직 그를 믿는 믿음에 근거해서 그렇게 하신다.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은 선한 행실들로 그 생명과 능력을 드러낸다. 그것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선행과 거룩한 삶은 믿음의 필수적인 현시이다.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의 교리가 복음의 총화이고 실체이다. 이 교리가 기독교의 핵심이고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이다. 기독교 전체가 모여서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종교개혁교회 곧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는 지역별로 모여서 신앙고백서 (confessio fidei)를 작성하였다.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교리로 채택하였다.

2.2.1.1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Confessio Augustana, 1530)

루터의 종교개혁 후 1530년 처음으로 종교개혁교회가 아우구스부르크에 모여 이신칭의 교리를 채택하였다.

공로나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리스도가 대신 속죄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셨기 때문에 죄용서를 믿기만 하면 의롭다함을 받는다.

4조: 교회들은 가르친다. 곧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능력이나 공로나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 (죄용서와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이 은혜로 받아졌다고 믿으면 또 그리스도가 그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자기들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믿으면 값없이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이 믿음을 하나님은 자기 앞에서 의라고 여기신다(롬 3장과 4장)

2.2.1.2 일치공식 (formula concordiae, 1580, 혹은 1576)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후에 신학자들 사이에 시비가 된 부분들에 대해 일치를 보아 일치공식을 작성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받는다.

3조: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의에 관하여 (De Justitia Fidei Coram Deo) 만장일치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의 규칙과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의 판단에 따라) 우리 교회에서 가르친다. 곧 우리 가장 비참한 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 받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의이다.

2.2.1.3 제 2 서서 신앙고백서 (Confessio Helvetica Posterior, 1566)

죄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고 행함이나 공로로 말미암아는 전혀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

제 15 장 신자들의 참된 칭의에 관하여 (De Vera Fidelium Justificatione) 1. 의롭다함은 칭의에 관한 시비에서 사도에게는 죄들을 사하는 것과 죄과와 형벌을 면제해주는 것과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과 의로운 자라고 공포하는 것을 지시한다. 2. 그런데 우리 모두는 본성으로 죄인들이고 악행한 자들이며, 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악행한 자로 정죄받고 또 죽음에 해당하는 자들로 정죄되었음이 가장 확실하다. 의롭다함을 받음은 곧 심판주 하나님으로부터 죄와 죽음이 면제된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으로이고 어떤 우리의 공로나 고려 때문이 전혀 아니다. 3. 사실은 그리스도가 세상의 죄들을 자기에게로 받아지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직 고난 받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와 화해하셨다.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전가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전가하셨다.

이렇게 우리는 죄에서 깨끗하게 되었고 씻어졌고 거룩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주어졌으며 죄와 죽음과 정죄에서 놓여났으며, 의로운 자들이 되어 영생의 상속자들이 되었다. 더 합당하게 말하면 하나님 한분만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고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 그는 우리에게 죄들을 전가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신다.

4. 우리는 이 칭의를 받되 어떤 행동들로 말미암아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으므로 죄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율법이나 어떤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님을 사도와 함께 가르치고 믿는다.

2.2.1.4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Heidelberg Catechismus, 1563)

내가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만 된다. 우리의 선행은 결코 우리를 의롭다고 할 수 없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1-62 문답에서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을 밝히고 있다.

문 61. 왜 당신은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말합니까? 라고 묻는다.

답. 나는 믿음의 가치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마음에 들 만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배상과 의와 거룩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이기 때문입니다. 또 나는 의를 받되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고 달리는 결코 내 의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우리의 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뿐이고 믿음으로만 의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문 62. 그러나 왜 우리의 선행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의 일부나 전부가 될 수가 없습니까?

답.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철저히 완전해야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일치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재 삶에서 우리의 가장 선한 행위들도 불완전하고 죄로 더럽혀져 있습니다.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 앞에 의가 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의 법에 완전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고 전적으로 일치할 수도 없기 때문이고 더구나 죄로 물들어있기 때문이기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2.2.1.5 불란서 신앙고백서 (Confessio Fidei Gallicana, 1559)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제사로 완전히 의롭다함 곧 모든 죄에서 구출되었다. 이 죄용서를 믿는 것이 의이다.

불란서 신앙고백서는 칼빈이 작성하였다.

17조: 주 예수가 십자가에서 드린 완전한 희생제사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였고 그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 . .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깨끗하게 되었고 완전해졌다는 것을 우리는 선언한다. 그의 죽음에 의해서 우리는 온전히 의롭다 함을 받았고 오직 그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우리의 불의와 범죄들로부터 구출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 곧 그의 희생제사로만 우리가 의롭게 되었고 모든 죄에서 구출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18조: 우리의 모든 칭의는 우리의 죄 용서에만 달려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다른 모든 수단들을 배척한다. 또 어떤 덕이나 공로를 주장함이 없이 우리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만을 의뢰한다.

칭의는 전적으로 믿음만으로 이고 모든 다른 수단들 곧 덕이나 공로를 배척한다고 선언하였다.

20조: 우리는 이 칭의에 오직 믿음만으로 동참자들이 되었음을 믿는다. . . . . 이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칭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의 사랑을 선언하고 증거하신 값없이 주신 약속들에만 의존한다.

우리가 칭의에 동참은 전적으로 믿음으로만 된 것이다. 반복적으로 같은 진리를 반복한다.

2.2.1.6 화란 신앙고백서 (Confessio Belgica, 1561)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우리의 죄가 다 용서되었다. 이것을 믿음으로만 받는다.

22조; 바른 믿음은 성령이 일으키시는데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공로를 받아들이고 그를 자기 것으로 삼으며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것도 구하지 않는다.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으므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들은 그 안에서 완전한 구원을 가진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는 충분하지 않아서 그 외에 다른 어떤 것이 더 요구된다고 단언하는 것은 총체적 참람이 된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반쪽의 구주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과 함께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곧 행함 없이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정당하게 말한다. 그러나 더 분명히 말하는 것은 믿음 자체가 우리를 의롭다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해 들이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은 우리의 완전한 구원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충분하지 않아서 다른 어떤 것을 더 요구하는 것은 큰 참람이다.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러나 믿음자체가 우리를 의롭다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도구일 뿐이다.

23조: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죄들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사면하는 것임을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을 뜻한다.

또 바울 사도가 말하기를 우리는 그의 은혜로 값없이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근거를 굳게 붙들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우리 자신을 그 앞에서 겸손하게 한다. 또 우리 자신의 실상을 인정하고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신뢰하지 않고 우리의 공로도 의지하지 않으며 오직 십자가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순종만을 의지하고 신뢰한다. 우리가 그를 믿으면 그의 순종이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2.2.1.7 영국교회 39개조 (Articuli XXXIX Ecclesiae Anglicanae, 156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그 구속을 믿는 것이 의가 된다.

11조: 우리는 오직 우리 주와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믿음에 의해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받아졌다. 그리고 우리의 공로나 우리의 자격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었다는 가장 건전한 교리 (doctrina est saluberima)이고 위로가 가득하다.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우리의 공로나 자격 때문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만 된 것이다. 이것이 가장 건전한 교리라고 단언하였다.

2.2.1.8 제 2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Confessio Fidei Scoticanae, 1580)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 제 2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는 조항들이 없고 전체로 한 단원으로 작성하였다. 그 중에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음에 대해서 라고 하여 (de justificatione per solam fidem)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2.2.1.9 아일랜드 종교조항들 (The Irish Articles of Religion. 1615)

칭의와 믿음에 관해서 그리스도가 피 흘리심으로 죗값을 다 지불하셨으므로 우리는 믿기만 하므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는 결코 의롭다함을 받게 할 수 없다.

34조. 우리는 오직 우리 주와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겨지고, 우리 자신의 행함이나 공로 때문에 의롭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공로로부터 받는 의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데 우리의 완전하고 충만한 칭의를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취해지고 허락받는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이고 우리의 공로가 전혀 아니다.

35조. 이런 칭의가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지만, 속전을 전혀 지불함이 없이 우리에게 값없이 올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 편에서 속전을 치르거나 배상을 함을 우리에게 요구함도 없이 큰 자비를 나타내시어 우리를 이전의 속박에서 구출하셨다. 이런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세계가 속전의 일부라도 스스로는 지불하기가 불가능하므로, 무한히 자비하신 우리의 하늘 아버지가 우리는 아무런 자격도 없는데도 자기의 친 아들의 가장 보배로운 공로를 우리 위해 마련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이로써 우리의 죗값은 완전히 지불되고 율법은 성취되고 그의 공의는 완전히 충족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그를 진심으로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의이다.

그는 그의 죽음으로 그들에게 죄에서 사내는 몸값을 지불하셨다. 그는 그의 삶에서 그들 곧 믿는 자들을 위해서 율법을 성취하셨다. 그래서 그 안에서 그에 의해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성취자라고 불릴 수 있다. 우리가 연약하므로 할 수 없었던 것을 그리스도의 의가 성취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와 자비는 서로를 포용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칭의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를 막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를 막아내어 우리 자신의 행함의 의가 우리의 칭의를 정당하게 해주는 원인이 되는 것을 막는다.

그리스도가 피 흘려 속전을 지불하므로 죗값을 다 갚으셨다. 이것이 믿는 자들에게 의이다. 인간의 공로나 자격은 전적으로 배제되고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우리의 완전한 의가 되었다.

36조. 우리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할 때 참된 회개, 소망, 사랑과 하나님을 두려워함도 없이 이미 말한 의롭다고 하는 믿음만이 사람 안에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 행동과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그 자체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거나 우리를 의롭게 할 만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 우리는 이미 말한 우리의 덕들 곧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공로와 다른 덕과 선행의 공로를 다 버려야한다. 이런 것들은 너무 약하고 불완전하고 불충분해서 우리의 죄용서와 칭의를 받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 우리의 유일한 구속주, 구주시오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들을 의뢰하는 것뿐이다.

믿음 자체가 우리를 의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또 믿음을 말할 때 회개와 소망과 사랑이 함께 하지만 그런 것들은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속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뢰하는 것뿐이다.

2.2.1.10 돌트총회의 정경들 (Canones Synodi Dordrechtanae, 1618-1619)

하나님의 아들이 죗값을 다 갚아 우리를 구속하셨으므로 믿음과 칭의와 성화를 우리에게 주셨다. 돌트총회는 알미니안 5개조를 반박하고 그에 대한 바른 공식을 제시하려고 모였으므로 칭의에 관하여 특별한 항목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칭의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표현하는 진술들이 드러난다.

교리의 제 1 항목 예정에 관하여 제 7조 중에서; 택자들에게 참 믿음과 칭의와 성화를 수여하시기로 작정하셨다고 진술하여 믿음과 칭의와 성화가 다 은혜의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교리의 제 2 항목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로 인한 사람의 구속에 관하여 제 2조 중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격에서 죗값을 갚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 자신을 구출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무한한 자비에서 그의 독생하신 아들을 주셔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죄로 정죄되시고 저주가 되시사 우리 대신에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공의에 배상하시기로 하셨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대신에 죗값을 갚으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교리의 제 3, 4 항목 인간의 부패와 하나님께로 돌아감과 그 방식에 관하여 제 14조 중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져야 한다. 믿음이 실제로 사람에게 수여되고 호흡을 불어넣어졌다. 곧 하나님이 믿을 의지와 믿음의 행동을 생산하셨다.

이로써 의롭게 되는 근본인 믿음도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고 믿도록 하는 일도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여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한다.

2.2.1.1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Confessio Fidei Westmonasteriensis, 1647)

그리스도가 죗값을 지불하므로 의를 이루셨으므로 이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여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 이 구속을 믿는 것이 의이다.

제 9 장 칭의에 관하여 (De Justificatione)

I조. 하나님이 효과있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고 하신다. 의를 그들에게 주입해 넣으신 것이 아니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셔서 그 사람들을 의롭다고 여기시고 받으시므로 의롭다고 하신다. 그들 안에서 행해지거나 실제로 행한 것 때문에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고 하신다. 믿음이나 믿음의 행동이나 복음에 순종을 그들에게 전가하시므로 아니고, 그리스도의 순종과 죗값 지불을 그들에게 전가하여 의롭다고 하신다.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이 믿음도 그들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을 그냥 의롭다고 하신다. 의를 그들에게 주입하셔서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므로 그들을 의롭다고 여기시므로 의롭게 하신다고 하신다. 그리스도의 순종과 죗값 지불을 그들에게 전가해서 그들을 의롭다고 하신다.

II조.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여 의지하는 믿음이 칭의의 유일한 도구이다. 그렇지만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할 때 믿음은 칭의의 하나의 도구일 뿐임을 강조한다.

III조. 그리스도는 그의 순종과 죽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의 모든 죄의 빚을 다 갚으셨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아버지의 공의에 합당하고 실제적이고 온전한 배상을 다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의 칭의는 오직 값없는 은혜일 뿐이다.

의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의 빚을 다 갚으심이다.

IV조. 하나님은 영원부터 모든 택자들을 의롭다 하기로 작정하셨지만 때에 맞게 성령이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적용하실 때 의롭다함을 받는다.

택자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성령께서 시간에 맞게 적용하실 때이라고 하여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믿음고백으로 의롭게 됨을 강조한다.

2.2.1.12 이신칭의가 교리로 확정됨

종교개혁교회는 일치해서 이신칭의를 교회의 교리로 확정하였다. 종교개혁으로 두 복음주의 교회가 생겨났다.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이다. 루터교회는 1530년, 1580년 두 차례 총회를 열어 이신칭의를 교리로 확정하였다. 개혁교회는 나라별로 총회를 열어 이신칭의를 교리로 확정하였다.

이로써 이신칭의 교리가 종교개혁교회의 교리가 되었다. 따라서 이 교리를 부정하거나 다른 내용을 추가하거나 내용을 바꾸면 이단이 된다. 고대교회가 정한 삼위일체 교리와 하나님의 성육신의 교리처럼 전 기독교 세계가 다 인정하지는 못하더라도 종교개혁교회의 교리임에는 아무런 이의나 변동이 있을 수 없다.

종교개혁교회가 종교개혁교회로 남으려면 이신칭의 교리를 굳게 붙들어야한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