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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중대한 위기: 내부자운동의 해석학과 복음 4
데이비드 B. 가너(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8/07/11 [10:45]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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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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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교수하는 데이비드 B. 가너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메시아적 무슬림들과 무슬림 복음주의자들, 내부자 운동의 해석학과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선교에 대해 연구하고 개혁주의 입장에서 비평하였다.

3.3. 상대화된 선교

앞에서 이미 드러난 대로, 내부자운동의 해석이론에 따르면, 성경에 대한 적합한 이해는 문화의 궁극성(ultimacy)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러한 문화적 궁극성은 현대 상황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종합적으로 형성한다. 왜 그러한가?

현대의 문화적 분석에 관여하기 적합한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현재 상황과 성경 사이의 문화적 유사점들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내부자운동의 문화적 구조는 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의 활동을 주로 모범적인 행동으로 보도록 몰아간다. 성경의 권위를 존중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황과 성경의 상황사이에서 병행되는 내용들을 가리어내어, 선교적 시행에 있어 그것들을 모방할 만한 방법들을 찾는 것이다. 이렇게 문화에 이끌린 모범론적 신약해석은 Lewis의 주장에 배어있으며, 근래에 자주 사용되는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믿음의 운동”과 “1세기 신자들” 사이의 형태상의 유비에 의해 강조된다.

인식된 문화적 병행, 예수의 행동들에 대한 피상적 해석, 그리고 반복적인 현상들로서 사도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피상적 해석의 관점에서 선교학적 결론들이 내려진다. 내부자운동가들은 성경에 있는 종교적 행위들이 중립적이며 협상 가능하다고 이미 결론 내리면서, 현대의 종교적 행위들을 동일한 “복음적” 유동성을 가지고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성경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교본이 돼버리며, 그 가르침은 문화적인 해석학적 체계 뒤에 가려진다.

또한 구속사에 있어 반복될 수 없으며 비교할 수 없는 사건들은, 범례가 된다. 그리고 슬프고 비참하게도, 마찬가지로 거슬리는 힘에 의해, 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이 문화적으로 협상 가능한 것들이 되고 만다. 이처럼 내부자운동의 방법론에서, 선교의 문화적 어떻게(how)는 선교의 권위가 되는 누구(whom)를 대체하고야 만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문화의 주되심에 굴복한다. 종교적 정체성이라는 발판은 그리스도의 구속적이고 다스리시는 권위의 범위를 넘어서게 되며, 상황간의 비교와 결론에 있어 수많은 실수가 발생된다.

여기서 Lewis가 지적하는 유사점들은, 명쾌하지만 고지식한 성경해석을 전제한다. 일부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종교적 전통들에 어떻게 저항하는지를 인정하면서, Lewis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상황이 초기 유대인 신자들처럼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그 위에 쌓기를 원하는 2000년에 걸친 가치 있는 가르침과 전통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1세기 유대인의 상황과 어떻게 비슷한지 보도록 밀어붙인다. 상황적, 방법론적 병행을 끌어내기에 용이하도록 상대화하는 해석학을 도입함으로써, 그녀는 다시 한 번 복음의 순전함을 들먹인다.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모범을 보인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다른 문화들과 다른 종교적 체계들로 이동하고, 그리고 그들을 내부에서 외부로 변화시킴으로써 복음의 능력을 재확언할 기회를 갖는다.” 따라서 Lewis와 다른 내부자운동 옹호자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할 일은 사도들이 어떻게 이방종교 생활을 강제하는 이방인들의 요구를 거부했는지 식별하고, 다른 종교들이 수용할만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또 다른 문화에 내재하는 종교 활동들을 새로운 종교적 정체성과 “복음적 변화”의 특질이 되도록 만드는 면에서 사도들을 모방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복음의 순전함을 훼손하고야 만다.”

내부자운동 선교학자들과 실행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진실한 열망을 표현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중요하지만, 종종 무시된 하나님 나라 확장문제에 대한 그들의 초점에 감사한다. 얼마나 많은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가는 데는 편안하지만, 교회로부터 멀리 떠나 다른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세계로 가는 데에는 무관심한가? 확실히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은 복음의 성장과 확장을 담대히 드러내며, 어느 시대에 있든지 간에 교회가 행동할 것을 촉구한다(행 1:8-9; 마 28:18-20을 비교해 보라). 사도들의 지도 아래, 1세기 신자들의 노력에서 드러난 두려움 없으며, 지치지 않고, 포괄적인 복음 선포의 역사는, 21세기 교회들에게 경이로우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모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Dennis Johnson은 사도행전을 해석함에 있어 발생 가능한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들에 대해 현명하게 경고한다. 먼저 어떤 이들은 사도행전이 전례로서 기능한다고 본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모든 것을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어떤 이들은 “비록 사도행전이 교회의 탄생기를 묘사한다고 해도, 이러한 묘사가 오늘날 우리 삶을 안내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라며 사도행전을 적용 불가능한 역사로서 보려고 한다.

신약의 풍성하고 적실한 신학, 1세기 교회의 흉내낼 수 없는 부분들, 그리고 누가-행전의 역사적 장르를 모두 염두에 두고서, Johnson은 현명하게 중도를 제시한다. 누가는 “우리의 멘토로서 바울이 구약 역사의 목적을 윤리적 교훈(고전 10:11)과 가르침(롬 15:4;또한 딤후 3:16을 보라)으로 묘사하였던 것처럼, 우리의 믿음과 생활에 차이를 만들어야만 하는” 역사를 기록한다. 요약하자면 사도행전의 적용(그리고 그 문제에 대하여 신약 전체는)은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결정적으로 고유한 사건들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 단지 저자가 일부 사람들이 그의 서술과정에서 어떤 사건들에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기록했다는 이유로 오늘날의 우리 역시 같은 반응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적용과 모방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보편적으로 중요하고 반복될 수 없는 사건들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신약 저자들을 사로잡았으며, 그들의 급진적인 메시지를 결정하였고(고전 1:18-31), 겉보기에 세련되지 않은 방법들(고전 2:1-5)을 지시하였다. 우리가 현재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가 열방의 주재이심을(빌 2:5-11을 비교해 보라)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반복할 수 없는 행동들과 사도들의 신실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부활하시고 높이 들리신 주(빌 2:1-11)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론과 선교학을 포함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권위 있게 정의하신다(마 28:18).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선교적인 의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문화를 중립화하거나, 성경적 복음의 명료성을 결여하거나, 성례를 포함해 교회만의 고유한 성격과 그 실천을 결여한 운동들을 촉진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다. 복음의 명료성과 교회만의 고유한 특성은 신적으로 정해진 교리적, 교회론적 문제이지, 문화적인 문제나 “사람이 만든 교회적 구조들”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교회의식들은 복음 자체의 문제들이다. 복음의 선포는 그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해, 타협 불가능한 그리스도 중심적, 사도적 가르침을 포함해야만 한다.

4. 결론

내부자운동의 가르침과 실행들은 그것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종종 충격을 준다. 이러한 독창적인 방법론들은 확실히 매서운 반응들을 야기시켰는데, 깨어 있는 서구 사람들의 반응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신뢰해 왔던 무슬림으로부터도 더욱 그러하였다. 무슬림 회심자인 방글라데시의 Edward Ayub목사는 자국 내에서의 내부자운동에 대한 고뇌를 말했다: “이러한 사람들의 일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기 보다 무슬림으로 남도록 조언할 뿐 아니라, 이슬람을 떠나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람들에게 다시 회심하여 모스크로 합류하라고 조언한다.” 또 다른 무슬림 회심자인 Abdul Qurban은 그가 목격했던 내부자운동의 실행을 냉정하게 묘사한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무슬림으로 하여금 예수를 그들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도록 격려하지만, 계속해서 코란을 읽고, 샤하다(“알라 외에는 신이 없으며, 모하메드는 그의 선지자이다”)를 고백하며, 모스크의 활동들에 참여함으로써 무슬림에 머문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그들의 믿음을 비밀로 유지하며, 간혹 다른 무슬림이 그들에게 예수에 관하여 물을 때에만 (다소) 드러낸다. 그들의 무슬림 정체성(그리고 그들의 믿음들)을 유지함으로써, 하지만 알려진 대로라면 복음을 믿는, 그러한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공동체 내부에 머무른다. 그들의 동료 무슬림들에게 복음의 증거를 전할 잠재적인 기회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내부자운동은 잠복기를 넘어 성숙되고, 실행되고, 인정된 확신들을 기틀 삼아 부화해 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집계되지 않은 숫자의 선교사들, 선교단체들, 그리고 설득된 백성들에 의한 내부자운동의 만연한 실행은 선교학적, 교회론적, 그리고 존재론적 위기를 창출하였다. 그것의 강력한 존재감이 곧 방글라데시의 Edward Ayub와 같은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선동가들에게 그것을 중지하고 단념하라고 애원하면서, 서구 교회에 이러한 실행들과 직면하며 싸울 것을 간청하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부자운동 옹호자들에게, 그들의 메시지와 방법론들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해야만 하겠는가?

끝으로 우리는 Lewis의 “우리는 이러한 논의(자신들을 기독교라고 밝히지 않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는 사람들에 관한)를 무슬림들이 그리스도에게 오는 것을 쉽게 하려고 새롭게 고안된 급진적 상황화, 또는 새로운 선교 전략쯤으로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보다 훨씬 더 심오한 무엇인가가 위태롭다: 그것은 바로 복음 자체의 온전함이다”라는 경고의 요지로 넘어가야 한다. 필자는 이에 동의한다. 복음이 위태롭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된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Lewis의 복음에 대한 실제적인 정의와 그것의 현대적 표현이 복음을 하찮게 여기게 한다는 점이다.

성경은 확실히 문화적 상황 가운데서, 문화적 상황에 맞추어 기록되었다. 하나님의 구속적 행동과 해석적 말씀들은 실제 역사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있는 문화적 요소들의 존재를 확언하며, 어려운 해석적 결정을 내릴 때는 내리더라도 그 같은 사실은 긍정한다(예를 들어 고전 11장에 있는 머리를 가리는 것). 그러나 성경이 유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신적으로 조직된 신학적 본질이 일시적인 문화적 요소들의 특질을 결정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문화는 문화의 해석적 권위에 따른 성경이 아닌, 성경이 스스로 해석하는 권위에 따라 보여져야 한다. 성경적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성경에 낯선 해석학을 부과한다기보다, 성경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해석학을 정의하도록 수용하는 것이다. 요약건대 신적인 정경은 그 어떤 문화적 정경도 초월하며 이기는 것이다.

선교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모든 겸손한 근면을 동원하여, 신약을 문화인류학의 렌즈를 통해 읽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비록 그렇게 하는 동기들이 자의식적으로 선교적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인류학은 ‘성경’과 ‘성경의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검토 아래 복종되어야 한다. 이러한 구별은 전략이나 의미론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복음의 순전함을 유지하는 문제이다.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주 예수를 불신의 종교적 실행과 뒤섞는 방법은 그 어떤 것도 성경적인 선교가 아니다. 그것은 명백한 혼합주의다.

혼합주의의 위험을 인지하면서, Lewis는 이러한 염려가 “효과적이고 정확한” 성경 번역을 제공함으로써, “지역의 문화적 실행들과 종교적 제의들”에 “새로운 의미들”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특정한 종교적 형태에 순응하도록 압력을 가하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우리 자신의 것 이외의 문화들에 있는 “예수 운동”을 통제하려는 유혹에 저항함으로써 덜어질 수 있다고 결론을 맺는다. 그러나 뿌리 깊은 내부자운동의 문화적 해석학이 이러한 제안들마저 통제하고 있기에, 사실상 이것들은 해결 방안으로서 부적합하다. 게다가 이미 혼합된 신학의 렌즈를 통해 혼합주의를 평가하는 것은 온전한 분석이 불가능하게끔 만든다.

내부자운동에 대한 평가는 궁극적으로 성경의 풍성한 신학적, 종말론적, 교회론적 윤곽 내에서, 성경의 권위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정의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Lewis의 내부자운동의 해석 이론은 복음의 온전한 소리를 지우고, 신중한 성경적 검토의 시금석을 통과하지 못한다. 문화의 틀에 얽매인 모범론적 신약해석을 성경에 적용시킴으로써, Lewis가 제시하는 내부자운동 이론은 성경을 성경적으로 읽는 일에 실패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이 중심이 되는 하나님 말씀의 유기적 통일성을 상실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복음과 복음 선포에 대한 그들의 결론은 그들은 성경적 실행과 교리를 모호하게 만들 수 밖에 없다. 내부자운동 옹호자들은 문화적 분석에 궁극적인 권위를 물려주면서, “복음”을 전진시키는 수단뿐 아니라 복음의 내용과 행위 역시 재정의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재정의는 성경에는 없는 종류의 “복음”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이 글의 핵심적인 질문에 대답하여, 우리는 내부자운동의 구조가 선포하는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성경적 복음이 아님을 확인하며, “다른 복음-다른 것은 없나니”(갈 1:6하-7상)라는 말씀에 근거해 이 행태를 애도하는 것이다.

물론 알곡으로부터 가라지를 완벽하게 떼어 내는 것은 장차 오실 우리의 재판장, 추수의 주님께서 친히 하실 일이다. 그러나 성경의 순전함과 진실함을 지키면서 주의 복음을 믿고, 실행하며, 그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긴급한 과제이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