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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중대한 위기: 내부자운동의 해석학과 복음 3
데이비드 B. 가너(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8/07/04 [10:23]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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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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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교수하는 데이비드 B. 가너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메시아적 무슬림들과 무슬림 복음주의자들, 내부자 운동의 해석학과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선교에 대해 연구하고 개혁주의 입장에서 비평하였다.

3. 내부자운동의 해석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그리고 선교

Lewis는 현대의 선교 상황을 언급하기 위해 유대인-이방인 관계에 대한 그녀의 해석으로 돌아간다. 그녀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1세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한, 최소 두 가지의 급진적으로 다른 종교들이 존재했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모세의 율법과 유대 제의적 성일들에 생기를 불어넣은 유대교 형태의 종교가 있었고, 철학을 사랑하는 심령으로 돌아서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함의를 탐구하는 그리스-로마 형태가 있었다.

Lewis는 이러한 고대 분석을 토대로 하여, “바울은 복음이 급진적으로 다른 문화들에 어떻게 파고 들어가는지에 대한 표본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급진적으로 다른 (유대인의, 그리고 이방인의) 문화들”을 확언하는 역사상의 오류를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충격적인 진술과 그 근거들은 추가적인 검토를 필요로 한다. Higgins가 약속하였듯, 내부자운동은 진실로 “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교회 관행들과 교리들을 재평가”하도록 만들며, 따라서 Lewis의 결론들은 앞으로 우리가 살피게 될 것처럼, 믿음과 신실함에 대한 정형화된, 그리고 상대화된 확언들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이제부터 내부자운동의 현대적 실행과 가르침을 위한 그녀의 해석학의, 3가지 서로 연결된 적용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3.1. 상대화된 종교적 관행

Lewis의 요약된 진술들은 명명백백하게 종교의 문화적 상대성에 대한 내부자운동의 견해를 반복한다. 내부자운동의 사고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그들의 고대 전통들을 취하여 새로운 “복음”의 의미들을 더하고, 또한 이방인들 역시 그들 자신의 종교적 성향들을 취하며 거기에 새로운 의미들을 부여함으로써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에 걸맞는 “복음”을 수립한다. 구약이 유대인들의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주어진 이상, 우리는 그것을 인간적인 상황에 근거해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구약을 그 신약 성취와 결부시켜 보는 것은 그 자체로 문화적이다. 그러한 해석은 유대인들에게는 좋은 것이나 이방인들에게는 불필요한 것이다. 심지어 신약의 명령들은 내부자운동의 해석학에 의해 요구되는 문화적 렌즈들을 통해 읽혀야 한다. 복음의 초월적이며, 불변하는 능력에 대한 Lewis의 생각은 역설적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의 문화에 따라 변하는 성질의 것이라는 그녀의 주장을 흐려놓는다. 복음의 초월성은 일시적이 되며, 그 능력 역시 묵인된다. 복음의 전유는 종교 문화라는 절대규범(norma normans)에 따라 조성된다.

종교생활에 대한 내부자운동의 이해는-성경적인가 또는 성경 외적인가를 막론하고-Lewis를 두 방향으로 인도한다. 한편으로 유대인들에 대하여서는, 내부자운동의 관점은 구약의 약속들에 대한 복음의 성취를 상대화시킨다. 옛 언약의 관행들을 영적, 신학적이지 않은 문제로 몰아넣음으로써, Lewis는 그 관행들에 대한 신약의 해석을 유대 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만든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문화를 대하는 이러한 자세는 이방 종교생활을 중립적이며, 협상 가능한 문제들로 돌리기에 용이하도록 만든다. Lewis가 1세기 이방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종교 활동을 유지했다고 주장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녀가 이런 문제의 현대적 함의에 대해 추론한 것을 살펴보면 종교상대주의가 보인다는 점은 분명하다. 무슬림은 무슬림에 머물며, 불교 신자들은 불교 신자로 남고, 힌두교도들은 힌두교 안에 남는다. 왜 그런가? 그들이 실상은 “그리스-로마 세계의 우상숭배적인 신전과 비슷한 문화 가운데” 살며, “그들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그들의 종교문화의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그들이 속한 가족들과 공동체가 예수를 그들의 주와 구원자로 인정하며 예수께 자신을 내어 드린다고 주장하기”때문이다.

일면 Lewis의 주장에는 옳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대부분 그들의 문화에, 그들의 일터에, 그들의 가족 연결고리들을 유지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마 5:13-16). 그러나 내부자운동 사상은 불합리하게도, 문화를 유지하며 간직하는 일에 대한 경계들을 정당하지 않게 확장하며, 복음의 권위를 불가피하게 희석시킨다. 복음을 문화적 제약에 맞추어 제공함으로써, 문화적 기득권이 복음의 권위를 상대화시킨다. 이런 면에서 Lewis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종교적 형태를 다른 것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한다. Lewis에게 무슬림, 불교 신자, 혹은 힌두 종교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단순히 괜찮기 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곧 복음의 순전함이 유지되는 유일한 길이다. Lewis에 따르면 불변하는 복음은 핵심부상의 복음이며, 이른바 공유된 정체성과 단일한 형태의 종교 활동에 의해 방해 받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 대가가 너무 지나치다. 문화인류학이 해석학을 좌우한다면, 문화와 믿음은 비성경적 융합을 경험할 것이며, 믿음과 불신 사이의 대립도 흐려지며, 믿음의 행위와 불신의 행위 사이의 구별을 희미하게 한다.

물론 Lewis는 이러한 인식론적이며 방법론적인 요점들에 대한 그녀 자신의 생각을 성경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녀는 풀러산의 축소 불가능한 문화적 다양성 개념에 맞추어, 그녀의 성경 권위에 대한 평가를 부지불식간에 재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서로 다른 문화 속의 사람들은 …… 성경의 최고 권위에 입각하면서도 각자의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의 믿음을 살아낼 성경적인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Lewis에게 성경의 권위란, 복음을 순종하려는 결단을 내릴 권리를 종족집단이나 심지어는 이 문제로 고심하는 개개인에게 맡기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교회에서 행하는 일들에 관련된 문제들이 즉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Lewis가 세례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해석학적 접근은 세례의 필요에 대한 질문을 내부자 순종행위의 차원에서 제기한다. 사실 일부내부자운동에 동조적인 사람들은 세례가 타협의 여지가 있는 형식이며, 성경적으로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결정해 왔다. 여기서 우리의 논의를 위하여는, 문화적 우선순위의 해석적 이론이, 본질적인 교회론적 질문들에 대해 혼란을 가중시킨다고만 말하면 충분할 것이다. 내부자운동 해석학은 문화와 계시를 거꾸로 놓는다. 그것은 종교와 문화가 성경적 계시의 권위 하에 완전하게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계시의 권위를 종교와 문화의 권위 아래 둔다. 다시금 말하지만, 복음을 상황화시켜서 적용하는 일의 타당성은 분명 인정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러한 상황화된 복음의 적용을 확언하는 방식은, 그리스도의 권위의의미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교묘하게 회피하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예를 들어 출 20:4-6; 신 4:2; 막 7:6-9), 하나님에 의해 계시되지 않은 예배 활동-심지어 열광적인 예배 활동이라고 하더라도-은 거짓 종교에 불과하다. 그것은 명백한 우상숭배다. 바울이 주목했듯, 지식 없는 열심은 전적으로 부족한 것이다(롬 10:2). 더군다나, 만약 우상숭배가 한 사람의 행위(종교)에 의하여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 특성을 무엇으로 구분 지을 수 있는가? 심령의 우상숭배가 곧 삶의 우상숭배이다. 삶의 실천은, 심중에 있는 믿음의 헌신을 나타낸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에게 그들의 성전과 제단에서, 그리고 그들의 친숙한 이방 관습에 따라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격려했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한 제안은 분명 터무니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내부자운동의 복음은 회심한 무슬림이 이슬람의 다섯 기둥(the Five Pillars of Islam)을 행해도 된다고 말한다.

그러한 상대주의는 단체적 실행의 문제일 뿐 아니라, 개인적 진실성과 도덕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무슬림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내부자운동가들의 관심은, 샤하다(“알라 외에는 신이 없으며, 모하메드는 그의 선지자이다”)를 말하는 것의 영적인 중요성에 관해 얼버무릴 만한 근거를 제공해 왔다. 일부는 메시아적 무슬림들이 그것을 실제로 믿거나 독실한 무슬림의 방식으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이슬람 개종 기도문을 반복해서 읊어도 된다고 주장해 왔다. 진실성에 저촉된다는 주장에 답하여, Rick Brown은 부정직과 위장을 구별하려고 한다. Brother Yusuf와 같은 다른 이들은 “샤하다를 말하는 것이 예수에 대한 신자들의 증언에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그것은 그에게 들을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다섯 기둥이라는 이슬람에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를 긍정할 권리에 대한 결정-진정성이 있든지 없든지를 막론하고-은 개인의 문화적 상황, 실용주의, 또는 개인적인 기호(두려움?)에서 나온다. 내부자운동 사상은 문화, 공동체, 종교에 대한 과도한 의존 속에서도 역설적으로, 완고한 서구의 개인주의를 유지한다. 복음이 개인의 종교적 습관과 맞서는 방식에 대한 결정은 새로운 그리스도 추종자에게 달려있으며, 또한 궁극적으로는, 성경에서 울리는 하나님의 권위 있는 음성 또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공동체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이처럼 내부자운동의 사고에 대한 표명은 매우 다양해서, 문화적, 종교적 다양성에 관해 각기 다른 많은 해석자들이 각기 다른 결론을 내리는 것이 놀랄 일이 아니다. 내부자운동의 다양한 결론이 내부자운동의 해석학의 인식론적, 해석학적 부적절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만큼이나, 그들의 이론에는 상대성이 두드러진다. 내부자운동은 성경의 권위, 기독교 교리, 기독교 도덕성, 그리고 교회에 대한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뒤엎어버린다.

3.2. 상대화된 교회에서의 상대화된 거룩함

Lewis는 순결하며 능력 있는 복음에 대한 정당함을 변호하면서 기록하기를, “바울은 로마서 6-15장에서 복음은 신자의 삶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 묘사한다”고 한다.” 이것은 참으로 그러하지만, Lewis와 달리 바울은 복음을 성경적 계시 전체를 아우르는 언약적 맥락으로부터 제거한 적이 없다. 은혜가 은혜되는 것은, 율법이 객관적이고 신적인 정죄를 내리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책은 이토록 선하며 거룩한 율법의 맥락 속에 놓여 있기에(딤전 1:8;롬 7:12), 진실로 성경적인 은혜 역시도 실제적으로, 성경적으로 정의된 죄책 아래에 있는 이에게까지 미친다. 진정한 성경적 은혜는 실제적으로, 성경적으로 정의된 죄에 의해 정죄 받은, 타락한 자에게 임하는 것이다. 바울이 말했듯 이는 필수적이며, 신자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요 6:38; 15:10; 롬 5:19; 갈 4:1-6) 부활의 삶을 누린다.

즉 모든 신자들의 부활(고전 15:1-58)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영의 능력에 의해,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순종하도록, “영광스러운 복음에 따라”(딤전 1:11상) 사는 것이다(롬 13:8-14; 갈 5:1-26; 딤전 1:8-11; 약 1:8-13). 이와 대조적으로 Lewis는 복음의 도덕적 변화 능력에 대한 개념을, 명확한 성경적 명령으로부터의 변화를 추상해내는 방식으로 강조한다. Lewis에게 복음의 변화는 내적이고 신비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녀가 문화에 치중하며 주장하는 내부자운동 이론은 복음을 한 사람의 삶, 문화, 종교생활,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전체적인 의미들로부터 분리시킨다. Lewis에게 있어 복음이 그 본질적인 순결함과 순전함을 유지하려면 이러한 형식적(종교적이며 문화적인) 무관심이 필요하다. Lewis에게 복음의 순전함은, 문화적 소속감을 확실하게 하기 위한 외적인 실행들을 필요로 한다. Lewis는 이러한 공식을 동원해 심령과 삶을 효과적으로 나누는데, 곧 “자유케 하는 율법”(약 1:19-25)이라는 미명하에 복음의 믿음을 하나님 말씀에 의해 정의된 복음의 실행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러나 적어도 두 가지 이유로 구약과 신약의 계시는 이 같은 분리를 용납할 수 없다.

첫째, 우리가 로마서 1장1절부터 7절(갈 3:8과 비교해 보라)의 바울의 정형화된 요약에서 본 것처럼, 신약의 복음이 곧 구약의 복음이다. 복음의 실재는 구약과 신약을 가로지른다. 물론 시대는 다르다. 하나는 기대의 시절이며, 또 하나는 실현의 시대이다. 그러나 복음의 정수는, 유기적으로 역사의 어느 시대에나 편만하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철저히 은혜로운 계시의 관점에서, 신약의 심령/삶의 순전함은 구약의 심령/삶의 순전함이며, 종교 개혁가들이 언급했듯이 구원은 언제나 오직 믿음에 의해서이지만, 믿음 홀로만으로는 절대 아니다.

구약과 신약 모두에 따르면 행하는 믿음만이 오로지 진정으로 살아있는 믿음이다(시 1; 약 2:14-26; 엡 2:8-10; 갈 5:6). 이러한 믿음의 행위는 그 근거를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서 찾으며, 그의 말씀은 믿음으로 그의 음성을 이해하며 순종하는 일의 근간이 된다. 정체성, 믿음, 그리고 순종은 성경적 복음에서 유기적으로 서로 관통한다-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말이다. 복음은 모든 시대의 신자들이 심령과 삶을 떼어 놓을 수 없게끔 묶는다. 마치 구속자에 대한 믿음이 구속자의 계시된 뜻에 입각한 삶과 생활들을 요구하듯이(출20:1-17; 롬 12:1-2와 비교해 보라) 말이다.

둘째, Lewis의 “예수 그리스도에 기반을 둔 두 개의 급진적으로 다른 종교들”이란 표현은, 그 같은 용어로서 그리스도의 연합된 지체(엡 4:1-6과 비교해 보라)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의 문제와 혼선을 일으켜,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합되고 그럼으로써 서로 연합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예수님의 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의 전반적인 함의를 수용하는데 실패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신약의 두드러지는 요점은 교회론적 연합이며, 이 연합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근거를 둔 것인 동시에 공유된 정체성, 믿음, 그리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교제를 실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엡 2:11-22; 요 17:1-26; 고전 1:18-31). 이런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그가 명확히 기술한대로 적극적으로 실행하였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엡 2:14-21).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성취된 신학적 연합은 기능적, 관계적, 도덕적, 그리고 교회론적 연합을 명시한다. 하나님의 백성-유대인 또는 이방인-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영구히 같은 뜻, 같은 예배, 같은 믿음과 실행, 같은 정체성, 같은 공동체(엡 4:1-6)에 참여하게 된다. 인식되고, 실현되고, 맛보게 되고, 보존된 그러한 종말론적 실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백성이 교회 차원의 연합을 실천하도록 이끈다.

앞서 살폈듯이 Lewis는, 사람들이 자주성을 발휘하여 예수를 어떻게 전유할지를 결정하는 것을 드러내 놓고 극찬한다. 그리하여 내부자운동의 경계들은 희미한 채로 남아 있으며, 심지어 내부자운동의 핵심부 궤도마저도 문화적 주도권 이론에 대한 믿음에 의해 흐려지고 있다. 하지만 예수와 사도들이 가르쳤던 상세한 삶의 요구들(우리들의 종교생활과 예배생활을 규정하는 규범들)을 떠나서 그리스도의 주되심, 성경적 권위, 그리고 그 분 안에 있는 영적 변화를 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문화에 의해 수립된 종교는 분열을 피할 수 없다. 분열된 종교들은 분열된 교회를 낳으며, 신적 계시의 요점을 깡그리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진정한 대화는 믿음과 심령의 문제(요 3)인 동시에 새로운 정체성의 문제이다(고후 5:16-21).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들은 제자도의 길로 들어서는데, 그 길은 좁으며(마 7:13-14) 대가가 따른다(눅 9:23). 교회에서의 기독교 정체성과 그것의 새 언약적 형태들은 그리스도 제자들에게 선택사양이 아니다(엡 4:1-6). 교회는 단순히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체성에 매력을 느끼고 그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종교 구도와 종교적 연결점들 속으로 예수님을 끌어들이려는 이들의 헌신된 공동체 정도가 아니다.91 참 신자들이 속한 나라의 왕 중의 왕께서 신자의 정체성을 정의하신다. 교회의 머리이신 신랑께서 이 정체성을 정의하신다. 양들의 큰 목자장께서 이 정체성을 정의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정체성의 분명한 부르심을 빼놓은 채로 회심을 논하는 것은 복음을 왜곡하는 것이다(골 3:1-17; 엡 1:3-14; 4:17-5:21). “요약하자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개인의 종교적 정체성은 이슬람 정체성과의 불가피한 파열을 가져오게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단절이 존재하지 않는 척하거나 혹은 그것이 단순히 문화적 형태들의 문제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행위다.” 무슬림(혹은 불교 신자 혹은 힌두) 정체성을 지닌 채 예수를 따라가려 할 때 개인적 정체성은 개인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궁극적인 정체성과 결별함으로써, 피할 수 없는 종교적 정신분열을 겪게 된다.

하나님의 영이 기대 이상의 방식들로 일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요한복음 3장을 보라). 그러나 그가 성경대로 정의된 그리스도의 교회를 고려하지 않은 채 일하신다는 진술은 지극히 비성경적이다. 결국 성경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 그의 교회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과(예를 들어 엡 1:22-23;5:23을 보라), 또한 성령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의 뜻과 절대적으로 결속된 형태로 일하신다(요 14:15-17, 25-31; 16:4-15; 롬 8:9-11)는 것을 매우 명확하게 한다. 더욱이 사도들이 가르쳤던, 예수님께서 주인 되시는 교회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가르침 역시도, 독특하고 타협 불가능한 교회의 속성을 계시한다: 성경적 조직(딛 1:5), 정규적인 모임(히 10:24-25); 세례(마 28:18-20; 행 2:38-39); 성찬(고전 11:17-32); 그리고 설교, 교제, 기도(행 2:42; 딤후 4:1-2)를 포함하는 교회 말이다.

요약하자면, 주님께서는 자신의 사도들을 통해 교회의 표지와 속성들을 정의해 오셨으며, 이런 문제에 있어서 성경적 순전함이 문화적 적응성으로 인해 축소될 수는 없다. 그러나 내부자운동의 다음과 같은 주문은 회교선교 사원에서 여전히 들려 온다: 예수님은 “종교적 구조나 형태들이 그의 이름으로 수립되었다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Lewis에게 있어 교회론의 체계는 어떤 의미에서 선택사양에 불과하다. 교회의 형태는 문화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서구가 특정 문화 형태를 예배 형식에 주입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일이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교회론과 지체의 역동성이 문화적으로 결정된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상대화되고, 통일성을 해치며, 과도기적인 교회론의 인본주의적 구조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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