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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중대한 위기: 내부자운동의 해석학과 복음 2
데이비드 B. 가너(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8/06/27 [09:49]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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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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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교수하는 데이비드 B. 가너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메시아적 무슬림들과 무슬림 복음주의자들, 내부자 운동의 해석학과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선교에 대해 연구하고 개혁주의 입장에서 비평하였다.

2. 내부자운동의 해석학

2.1. Rebecca Lewis와 내부자운동 옹호

그러한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이제 우리는 또 다른 풀러선교학자 Ralph D. Winter의 딸인 Rebecca Lewis로 넘어가기로 한다. Lewis는 자신의 저서에서 내부자운동을 철저하게 두호하려고 시도해 왔으며, 그것의 정당한 특질을 정의하고자 애썼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할 때, 종교적, 문화적 정체성은 대체 어떤 의미에서 바뀌지 않은 채로 남아있을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하는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적절하게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그들의 종교가 아닌, 그들의 심령을 변화시키기 위해 부르셨다고 확언할 수 있는가?” 이론가일 뿐 아니라 북아프리카 베르버족 선교에도 경험이 있는 Lewis는 자의식적으로 그녀 자신의 선교 과업을 떠올린다. 대부분 인터넷으로 접속 가능한 그녀의 늘어가는 전집 역시, 내부자운동을 증진시키고 실행하는 그녀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그녀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말하기 전에, Lewis의 명료한 저술, 일반 해석학적 일관성 등에 대해 칭찬하기로 하자. 하나님 나라의 사역의 경계를 규정하는 것에 대한 그녀의 거절과 맞물려있는, 전세계적 복음화에 대한 McGavran 풍의 비전은, 표면적인 수준에서는 칭찬할 만하다. “우리는 이전에 그런 방식으로 일을 한 적이 한번도 없다”라는 식의 태도는 비양심적이고 형편없는 것인데, 루이스의 사고에서는 그러한 태도가 발붙일 곳이 없다. 게다가 복음의 메시지를 그 선포 방법으로부터 따로 떼어놓는 관행이 있는데도, Lewis는 둘의 불가분성을 정확히 단언한다.

내부자운동에 대한 Lewis의 확고한 방어는, 내부자운동 사상의 전형적인 해석학적, 방법론적 접근법을 도입한 “복음의 순전함과 내부자운동(The Integrity of the Gospel and Insider Movement)”이라는 제목의 논고에 등장한다. 이 논고는 앞으로의 분석을 위한 우리의 주된 참고자료로 (그것만 자료로 사용하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사용될 것인데, 왜냐하면 이 논고가 전형적인 내부자운동의 해석학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신학적, 선교학적 주장을 유용하게 정제하였기 때문이다. 내부자운동에 대해 호기심이 많거나 관심이 있는 자들은 여기서 해석적이며, 신학적인 토대들에 대한 접근 가능한 설명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Lewis는 내부자운동의 비평가들을 의식하며 우리가 어떻게 기독교복음을 이해하며 내부자운동을 평가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논의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그녀의 논고는 내부자운동 담론에 비추어 볼 때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성경 본문과의 연결, 전반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주장들, 그리고 악의 없이 단순한 호소를 한다는 점에 있어서 답변을 요한다. 더욱이 다른 곳에서 Lewis는 선교와 그 밖에 내부자운동 관련 주제들에 작용하는 사회학적 요소들에 대한 글들을 여럿 쓴 반면, 이 논고에서는 내부자운동의 철학과 방법론에 대한 가장 유력한 성경적인 근거들을 상세히 제시하려고 시도한다.

그렇게 선택된 성경 본문들을 다루면서 Lewis는, 내부자운동이 단순히 여러 개 중 하나의 성경적인 입장이 아니라 유일한 성경적 입장이라고 분명하고 야심차게 주장한다. 또 다른 저명한 내부자운동의 옹호자인 Kevin Higgins는 이토록 분명한 야심에 보조를 같이하여 내부자운동이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필자는 내부자운동에 대한 논쟁이 실제로 복음에 대한 논쟁이라고 믿으며, 이것은 16세기의 개혁 운동인 루터교, 개혁주의, 성공회, 그리고 재세례파처럼 잠재적으로 지각변동을 일으킬 만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한 운동들은 근본적인 성경의 진리, 이신칭의, 은혜의 복음, 만인 제사장설, 그리고 교회와 신자의 삶에 있어 성경의 위치와 같은 기본 진리의 회복에 의해 촉발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운동들은 교회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관행이나 교리를 재평가하도록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허락하신,” 그러나 명목상으로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는, 또는 전통적인 기독교 형태 혹은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무슬림, 힌두교, 그리고 불교신자들의 숫자가 늘고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면서, Lewis는 내부자운동이 사실 선교학자들에 의해 고안된 것이 아니라 “만약 그것들이 성경적으로 적법한지 평가하도록” 우리에게 촉구하는 자생적인 활동이라고 제안한다. 선교학자들의 역할은 설득적이며 촉진적이라기보다, 수동적이며 관조적이라고 묘사된다. 우리가 내부자운동의 기원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어떻게 다루든지 간에, 증가하는 출판물들이 명확히 주장하는 것처럼, 영속적인 것은 수동적이기 어렵다. 서술은 공개적으로 규범이 되어왔으며, Lewis의 주장은 Higgins의 분석과 상응하여 실천과 교리에 공히 관련되는 규범상의 질문을 제기한다.

2.2. 내부자운동의 위험성

내부자운동의 주장들에 맞설 때에 보통 맞닥뜨리는 어려움 중 하나는 명료성이다. 정의들, 신학적 요소들, 그리고 내부자운동의 단언들에 대한 명확한 적용들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채로 남아있다. 내부자운동은 큰 궤적을 그리는 주장들을 하면서도 그 궤적들의 명확한 특질에 대해서는 유동적인 특징이 있다. 내부자운동의 사상이 Paul Hiebert의 “핵심부(centered set)” 이론, 즉 예수를 따르는 것을 동적으로(movement) 정의하는 이론처럼 정의를 거부하는 것은, 의도적이다. 예수를 믿는 믿음은 교리(“경계선”) 그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방향성(orientation)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정해진 경계들을 따라 특정한 믿음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되신 예수님(“중심부”)을 향해가는 과정 그 자체인 것이다.

Lewis는 이러한 생각에 보조를 맞춘다. 그녀는 비록 모든 것이 수용 가능하지는 않다고는 말하지만, 경계선에 대한 그녀의 투철한 신념은 그런 질문을 분석할 도구나 구체적인 이 시대의 실례를 생략하도록 부추긴다. 자세한 분석과 실례는 부적당한 경계를 세우게 되고, 경계를 세우는 순간 내부자운동의 개념이 전복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중심부”로의 지향성은, 특정 경계를 반대하는 것 자체로서 경계선을 삼는다(bounded).

Lewis는 2007년에 내부자운동의 궤적을, 다양하며, 비서구적이며, 비전통적인 공동체적 특성을 토대로 묘사하였다: “내부자운동은 그들 자신의 기존의(pre-existent) 가족간 연결고리를 유지하며, 그것을 변화시키는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 자신의 기존의 가족과 공동체의 붕괴를 최소화한다. 이처럼 믿는 가족들과 그들의 관계상의 연결고리들은, 각 지역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를 정당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Lewis와 다른 내부자운동 옹호자들은 다른 종교적 구조들을 충분히 중립적인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메시아적” 혹은 “성경적” 무슬림을 말하며, “예수의 힌두교 제자들”을 말한다. 따라서 그들에겐 무슬림, 힌두, 불교신자들을 막론하고, 현존하는 모든 사회종교적 구조가 예수를 믿는 적절한 방식이자 표현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Lewis는 우리로 하여금 사고의 범위를 재검토하도록 만들며, 경계선의 제한을 두지 말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비기독교적 공동체들을 정당화할 것을 촉구한다. 그녀는 성경이, 이러한 종교적 형태들에 대해 그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주장한다: “신약에서처럼, 그(예수)는 종교적 구조들, 또는 형태들이 그의 이름으로 수립되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Lewis가 내부자들을, 이러한 연결점들을 “유지하며 변화시키는” 자들로서 묘사하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시키는 영향력이 얼마나 효율적인가는 매우 의심스러우며, 그 효율성을 객관적으로 측정하기도 사실 불가능하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러한 연결점과 그 실천이 변혁을 가져오도록 하는 방식이, 다른 종교들의 전통과 관습을 수용하도록 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지지자들에 의해 주장된, 내부자운동 사상을 지배하는 종교적 활동들의 중립성은 철저히 성경적인 정밀 검토를 거쳐야 한다. 생생한 선교학적 질문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서 신학적이며 교회론적인 요점을 이해해야만 하는데, 이는 Lewis 자신이 모호함 없이 확장해 왔으며 반복적으로 읊곤 하는 바로 그 점이다: “순전한 복음”이 달려있다.

이처럼 중대한 이해관계와 조화시키면서, 우리는 이러한 순전함에 대한 질문을 숙고해야만 한다. Lewis가 말하는 내부자운동의 복음이란 진실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성경적 복음을 의미하는가? 성경에 대한 내부자운동의 접근법은 보편적으로, 구속적으로, 해석학적으로, 교회론적으로, 그리고 선교학적으로 그에게 관한 모든 것을 포함하여, 부활하신 주로서의 예수를 제시하는가?

2.3. 내부자운동 해석학의 근간

Lewis는 “순전함”에 있어 핵심적인 원리들을 묘사한다: 복음의 변하지 않는 내용과 변하지 않는 범위. 후자에 관해 Lewis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좋은 소식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또한 전자에 관해 그녀는 복음의 순수함(갈 1:1-9)에 대한 바울의 칭찬에 일맥상통하는 말들을 공언한다: 우리는 복음에 “기독교적 전통들을 고수하는 것과 같은 부가적인 요구사항들을 덧붙임으로써” 복음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복음의 순수성과 보편성을 명확히 긍정하는 이러한 첫 명제는 전도유망해 보인다. 그녀의 성경역사에 대한 개요에서, 그녀가 복음을 히브리 성경에 대한 실현으로 이해하면서 성경의 유기적 특성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보여줄 때, 이러한 전도유망함은 더 두드러진다:

할례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의 표시이기 때문에, 그리고 오순절은 모세에게 돌판에 율법을 주셨던 것을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에, 새 언약으로서의 복음과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은 히브리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들의 폐지가 아닌 성취이다.

그러나 Lewis의 공식에 나타나있는 구조의 기저를 파헤치다 보면, 그 해석이론의 불안정한 면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유기적인 성경적 성취에 대한 확언은, 복음의 유대적 성격이 “종교적 체계”의 문제라는 그녀의 주장에 의해 약화된다. 옛 언약의 실행은 문화적으로 구체적인 특질을 띄며, 그것들은 복음의(영적인) 문제가 아닌 종교의(인간의) 문제이다.

구약의 “종교적 체계”가 “하나님이 주신”것이라는 사실조차도 특정 관습을 요구하는 그 내용이 단지 나라로서, 문화로서, 사람들의 집단으로서의 유대인들을 위한 것임을 의미할 뿐이다. 복음의 변치 않는 내용은 신약시대 유대인들의 배경 속에 먼저 존재했으나, 그들의 종교적 관행이란 그들 민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으며, 이 같은 복음의 유대적 성격은 유대 공동체에 스며들었다는 역사적 흔적을 남긴 것 외에는 의미 없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Lewis에게 “유대적 종교 공동체”란 1세기의 어떤 사람들이 예수를 그들의 종교적 삶과 그 형태로 전유한 것으로서, 문화적이며, 비(非)신학적인 실체인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공동체에서의 관행들은 궁극적인 의미에서 영적으로 중요하지 않으며, 복음의 실제 본질로부터 전적으로 떨어져 있다. 따라서 복음의 의미는 이러한 문화적 현상들을 초월하되, 급진적인 변화의 방식으로가 아닌 점진적인 재해석의 방법으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그녀의 사고에 내재하는 비평적인 하부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Lewis의 신념을 지탱하는 것은, 바로 McGavran과 Kraft의 경우에서처럼, 문화인류학이다. 그 같은 문화인류학적 사고에 따르면, 문화의 할당가능성(assignability)은 시간이 증명해준다. 유대 종교적 형태가 종결되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신적이고 권위적인 명령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거나, 혹은 적어도 그들이 영적인 삶에서 필요한 방식의 영적 취지가 그 종교형태에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Lewis는 “바울은 유대 신자들의 종교적 전통이 그들을 그들의 죄된 본성으로부터, 그리고 마귀의 세력에 대한 속박으로부터(갈 4:3) 구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한다(엡 2:3). 그 후 그녀는 “이러한 전통들 둘 중 그 어떤 것도 죄로부터 이방인들을 구해내지 못하며, 단지 새로운 유형의 속박으로 이끌 뿐이었다.”라고 결론짓는다. 이러한 언어는 표면상으로는, 바울의 생각과 양립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바울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종교적 활동에 기대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의존할 것을 촉구하였다. Lewis가 반복하는 것처럼 “바울의 주된 관심은 확실히 복음의 순전함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종교적 전통들,” 복음의 순전함, 그리스도에 대한 의존 등과 같은 표현을 통해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Lewis가 제기하는 주요한 종교형태란 할례이다. 그녀의 지대한 문화적 관심에 따라서, Lewis는 바울이 “언약의 표시를 외적인 표시(할례, 창 17:3)로부터 내적인 표시로 바꾸었다”고 주장한다. Lewis에게 언약의 외적 표식이란 종교적 전통들이며, 그것들은 그 자체로는 옛 언약의 표현 방식에 있어 어떤 실제적, 영적 가치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문제를 발견한다.

이러한 결론은 할례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옹호하는데 실패할 뿐이며, 이는 이 표시의 철저한 영적 성격을 무시할 뿐 아니라, 성경(구약과 신약에서)이 구속, 믿음, 그리고 순종을 통합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일부가 정도를 벗어나 그렇게 취급했을 뿐, 할례는 단순히 종족의 표지가 아니었으며, 표면적인 할례란 도덕적 책임의 문제이지, 종교적 중립성을 띄는 것이 아니었다(롬 4:11).

할례에 관한 질문들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로마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그리고 골로새서와 같은 바울서신들을 들추어 보도록 만든다. 우리는 여기서 간단히 골로새서 2장 11절부터 12절을 주석하기로 한다. 이 본문에 대한 해석들은 다양하나, 모든 합리적인 주해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속죄에서 할례의 신학적 의미가 성취되는 것을 발견하는 데에서 할례의 영적 중요성을 찾아낸다는 것이다.

바울이 할례에 제공하는 영적 비중은 신약에서 만들어 낸 것(롬 2:28-29; 4:11-12)이 아닌, 신약에서의 성취였다. 바울은 할례를 외부적 실체에서 내부적 실체로 바꾸지 않았다. 할례는 언제나 영적 표식이었다(신 10:12-16).실로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의 언약백성의 순종을 위해 명백히 제시한 언약적 명령의 문제였다(창 17; 레 26:40-42; 롬 2:25-29; 엡 2:11-14).

바울은 할례로부터 구속적 효능을 구하는 자들을 반복해서 호되게 꾸짖는다(갈 5:2-6). 그러나 그 꾸짖음에서 조차, 바울은 표식 그 자체에 대한 순전히 문화적인 해석을 거부한다. 할례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고, 또 그것을 받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바로 설 권리를 획득하는 수단도 아니다(갈 6:15를 보라). 사도바울은 구약전체에 나타난 할례의 유기적 영적 의미에 대하여 말하고, 할례의 표징이 어떤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절정에 도달하였는지에 대해서 말한다.

요약건대 육체적 할례가 오직 구약시대에만 명령되었다고 해서,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문화적, 또는 단순한 종교적 관습으로 전락시킬 수는 없다. 그러한 결론은 기껏해야 유치하고, 어불성설인 해석일 뿐이다. 할례의 의무를 중단시키는 신약의 변화는 할례의 문화적 융통성(negotiability) 때문이 아니라, 언약적 기능에 대한 우선적인 결론 때문이다(엡 2:12). 따라서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전환은, 문화적 형태들이 사도들에 의해 창조적으로 전용되거나 해석적으로 도용되었다고 하기 보다는, 영적 약속으로부터 영적 성취까지의 이동 경로를 드러낸다고 보아야 한다.

할례에 대한 Lewis의 문화중심적 묘사는 그녀의 해석 방법의 구조적 기반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할례의 폐기가 곧 영적 타협 가능성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녀의 성경해석이 인식론적으로 문화라는 동인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대의 풍습에 있어서의 문화 중심주의는, 다른 종교적 관행들 역시 문화적으로 중립적이며, 그럼으로써 복음에 관해 어떠한 관심도 없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렇듯 문화라는 틀이 Lewis의 내부자운동 해석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녀의 할례 개념을 통한 성경해석을 분석할 때 더더욱 잘 드러나게 된다.

2.4. 요한복음 4장과 사마리아주의

내부자운동의 주창자들에 의해 빈번하게 언급된 본문을 이용하여, Lewis는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다루시는 것(요 4)이 유대 종교를 넘어, 확장된 복음의 메시지를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Lewis에 의하면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신자들에게 개종자가 되라거나 유대 회당에 오라고 요구하지 않고,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 자유를 주셨다.” 이러한 결론은 사실이지만, Lewis가 이 구절로부터 추론하는 방식으로 그러하지는 않다. 예수님은 유대 전통/관습이 수용할 만한 것인 것처럼, 사마리아 전통/관습도 수용할 만한 것이라는 식으로 문화적 유동성에 대해 선포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회, 종교적 정체성의 유동성에 대해 설교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그가 아브라함과 모세를 통하여 왔던 계시를 성취하시고, 약속된 새로운 시대를 도래하게 하시려고 왔다는 점을 선포하셨다.

그 구절의 역사-전환적인 성격은 명백하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 “신령과 진리로”드리는 예배에 관한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시간적인 중요성으로 가득한 것이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유대적 성격, 그 특수성이 이러한 역사적, 종말론적 요점을 뒷받침한다.

예수님이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 4:22)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유대인이라는 지엽적 정체성에 근거하여 자신의 신학적 중요성이라는 넓은 범위를 주장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사마리아 여인에게 구원이 유효하게 되는 것은 유대의 메시아로서 팔레스타인에서부터 역사 속에 들어오시는 그의 구약을 성취하는 성육신적 정체성으로 말미암음이다(“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4:26).

그의 구원적 가치는 구체적으로 말하면 특별계시의 성취에 있는데, 그 특별계시는 아브라함 언약에 의거하여 특수성(유대인)으로부터 보편성(사마리아인들, 이방인들 등)으로 이동하는 종류의 것이다(창 12:1-3). 요약하자면, 그의 보편적 적절함은 그의 종말론적 특수성으로부터 나온다.

그렇다면 결정적인 신학적 중요성을 지닌 채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하신 예수의 가르침은, 단순히 문화적 중립성을 확언하는 것으로 축소될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을 성경적 계시의 진정한 성취와 종말론적 메시아로 드러내시면서, 그 여인을 역사적 순간의 신학적 비중과 어울리는 새롭고, 급진적인 충성으로 부르셨다. 그의 존재론적, 종말론적 정체성은 예배에 대한 명확히 다른 종류의 이해와 실행을 요구했다. “신령과 진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에 의해 정의되지, 사마리아주의에 의해서 정의되지 않는다.

물론 예수를 따르는 것은 사마리아 여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비정당화하는 일은 아니지만, 예수를 신실하게 따르는 것이 곧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종말론적 변화보다 문화적인 방식으로, 그녀의 종교적 정체성과 관행들에 대해 확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 역시도 옳지 못하다.이 사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지닌 신학적 권위 아래 사마리아주의의 모든 측면들을 두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권위를 사마리아의 문화 혹은 종교적 주도권에 양보하라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백 번 양보하더라도, Lewis의 견해는 이 본문에 내재된 종말론을 생각하지 못하였고, 그럼으로써 본문의 중심 의미를 퇴색시키며, 문화적 다양성과 신학적 본질을 혼동하는 실수를 범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2.5. 사도행전 15장과 구속사

Lewis는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의 문화적/종교적 유사성들을 인지한 후, 이방인과 그들의 문화, 종교에 관한 보다 어려운 사례들을 검토하는 것으로 넘어간다. 그녀는1세기 복음의 확장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요약하면서, 몇 개의 개괄적인 질문을 던진다:

복음의 메시지가 그 당시 이해되었던 것처럼(모세의 율법을 지켰던 할례 받은 신자들) 믿음의 가족에 합류한 자들에게만 은혜를 주었는가, 아니면 그들의 사회적, 종교적 상황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그리스도 자신이 성유신하셨던 종교적 체계를 받아들이는 자들을 구원하는 데 국한되는 능력인가, 아니면 생경한 상황에 있는 자들 또한 구원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처음 접했을 땐, 해롭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복음이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이 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복음이 행위의 종교를 거부한다는 것을 그 누가 부인하겠는가? 그러나 사도행전 15장의 논쟁으로 넘어가면서 Lewis는, 그러한 질문을 통해 그녀가 의도하는 것을 전면적으로 드러낸다. 그녀는 옛 언약에 있어 신실한 유대인들을 “종교적 전통들”을 실행하는 자들로 묘사하며, 이후 사도행전 15장에 있는 베드로의 연설이 “그들의 이방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하는 신자들을 구원하는 복음의 능력을 옹호하려는 것”이었다고 결론짓는다.

그녀는 사도 바울의 사례를 직접 언급하며, 바울은 복음이 외부적인 종교적 기대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은 채 이방백성의 집단에게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Lewis는 종교적 행위들을 복음과 직결된 문제로 만드는 것은 복음의 순수함을 왜곡시키는 일이라고 결론 내린다. 이에 더하여 그녀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전통들을 통해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이 확실히 드러났고, 따라서 “신자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란 복음”이지 그의 종교가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그러므로 Lewis가 보기에는, 복음이 각 사람의 종교적 정체성 혹은 실행들을 뛰어넘기에-혹은 좀 더 낫게는, 각 사람의 종교적 정체성이나 실행들에 관심이 없기에-각자의 종교적 행위는 복음의 영역 밖에 있다.

1세기 유대인-이방인 사이에 존재했던 문화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은 꽤 신속하게 해결되었다. 성경에 의하면 참 믿음은 신자들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정체성을(골 3:1-17) 세우고, 주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구별된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 속에서 새로운 가족적 정체성을 수립하도록 만든다(롬 8:16-17; 고전 12:12-31).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종교와 문화를 초월하는데, 이는 종교와 문화를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들의 거룩하지 못한 실행들을 꾸짖으며, 신적으로 계시된 윤리적, 종교적 형태를 갖추어, 구속받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그리스도께서 조성하신 성경적 공동체로 부른다.

하나님의 믿음의 선물은 죽은 심령, 믿지 않는 심령에 생명을 주며(엡 2:1-10), 모든 거스르는 도덕적, 종교적 관행들과 싸운다(약 2:14-26; 고전 6:1-20). 그것들이 계시된 종교를 왜곡한 것이든, 또는 인간적으로(혹은 마귀적으로) 만들어진 거짓 종교이든지 간에, 각자의 핵심적인 헌신들과 관행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종합적이며 급진적인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히 10:19-39; 고전15:1-58).

내부자운동을 옹호한다면, 불신과 복음 사이의 대립의 원칙에 동의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종교 문화들이 자율성을 띈다는 내부자운동의 신념은, 복음이 무엇과 어떻게 싸우는지에 대해 막연하며 적절하지도 못한 입장을 취하도록 만든다. 문화적, 종교적 관행들에 끼치는 복음의 권위 있는 영향력은 개인의 해석 이론이 구속역사적이라기보다 문화적일 때, 구제불능 수준으로 모호해진다. 여기서 Lewis의 설명은, 그녀가 상황을 핵심적인 신학적/종말론적인 관점보다, 유동적인 문화적 패러다임을 통하여 평가하기 때문에 그러한 모호함을 피해갈 수 없다.

차후 우리는 복음의 능력과 부르심에 관해 보다 상세한 내용들을 탐구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기적이고 신학적으로 풍성한 성경적 계시의 윤곽이, 종교적 정체성과 관행들을 분별없이 긍정하고, 믿음과 불신 사이의 영적 대조를 어떤 방식으로든 최소화하려는 문화적 분석 아래 짓눌리지 않을 것임만 확언하고 넘어가겠다.

Lewis의 주장을 더 살피기에 앞서, 먼저 성경 해석에 관해한 마디 하는 것이 수순일 듯하다. 성경해석학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모형화되고, 기대되며, 성취된 구속역사 사건들의 유기적인 성격이다. 성경의 구속역사적 관점에서 예수는 성경(유대적)적 약속의 화신이시다. 따라서 요한복음 4장에 있는 종말론적 요점은 사실 성경 계시의 특징이기도 하다. 예수의 유대적 성격은 그렇다면 신학적인 이유 때문에 중요한데,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신적 계시가 임했고 메시아의 약속이 임했기 때문이다 (창 12장). 더욱이, 그리스도의 아브라함 언약(창 12장)성취는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과도 관련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는 모든 자들-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아버지로 불린다(롬 4:11-12; 갈 3:7-9, 27-29). 신적 계시가 유대인들을 통해 오기는 하였으나, 그것의 권위적이며, 구속적인 메시지는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구약에서 많은 이들이 기대했던 것처럼(창 12:1-3; 벧전 1:10-12와 비교해 보라), 모든 역사의 유일한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를 전개시키셔서 그의 생애와 죽으심, 부활과 승천하심이라는 대단원으로 이끄셨다. 신약의 계시는, 영적으로 역동적이며 영적으로 살아 있지만 아직은 그리스도를 기대하고 있는, 구약의 계시에 근거를 둔다. 구약에 대한 준종말론적 초조함(기대)은 사실계시 자체에 배어 있는 것이다.

사도들에 의해 제시되었던 것처럼, 주후 1세기는 독특하며, 결코 반복될 수 없는 구속역사의 시기이다. 그것은 시대적 전환점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약속된 새 시대를 열었다(행 2:17; 히 1:1-2;9:26; 마 12:28과 비교해 보라. 롬 8과 고전 15에 있는 바울의 “첫 열매들”의 사용). 신약 전체는 구약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되, 모든 구약이 기대의 실체로서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을 제시하는 것은 신약에서 절정에 이른다(예를 들어 눅 24:13-49; 롬 1:1-7; 히 1:1-4; 요 5:39-47).

따라서 우리는 신약이 그 자체로 관심을 갖는 주요한 사건들-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의 핵심에는, 종말론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따라서 사도행전과 신약의 서신서들은 이러한 역사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건들의 견지에서 먼저 이해되어야 한다. 바울이 언급했듯, 그의 모든 사역은 그리스도의 성경을 응하게 하는 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에 집중되어 있었다(고전 2:2; 15:1-3).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바울의 성경 해석을 시종일관 좌우했으며(고후 1:20), 그리스도의 역사적 승리는 바울의 선포 방법론을 정의하였다(엡 3:8-13).

사도적 사역의 해석적 전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성취이다. 이러한 종말론적 핵심이 성취되었고, 적용되었으며, 선포된 구속에 대한 모든 고찰들을 좌우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역사적으로 독특한 전환기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이러한 보편적 함의를 이해하는데에와 전례 없는 성령의 부어 주심을 이해하는 데에 자라갔다. 당시 문화들은 이러한 역사의 결정적 순간에 의해 동요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 시기가 단순히 문화적 격변기는 아니었다.

이 시기는 무엇보다도 구약의 예배 형태가 그러한 형태들의 본질-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대체되었던, 신학적 격변기였다. 사도들은, 이러한 영적인 모형론적 형태들(구약)이 그것들의 실체(신약)로 이해되고 적용되게끔 교회를 이끌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전환은 문화적 순응이 아닌 유기적인 신학적 실현의 문제였다. 옛 언약이라는 그림자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빛에 자리를 내주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헬라인들의 움직임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또한 헬라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종교적 전통을 채택하라고 강요받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사도행전 15장처럼 일처리를 한 이유는, 사도들의 문화적 중립성 때문이 아니다. 도리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출범시켰으며, 그의 영을 부어주심으로 확증된 시대적 전환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아브람에게 주셨던 약속의 성취로서(창 12), 복음 안에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표시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신학적 실재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2.6. 종말론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정체성

그러므로 요약하자면, 사도행전 15장에 있는 주장은 “그들의 이방인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하는 신자들을 구원하는 복음의 능력”에 대한 변호가 전혀 아니다. 그러한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축소주의적이며, 신학적으로 무기력한 해석이 되어버린다! 옛 언약의 유대 관행들은 신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실제로 영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요성은 모든 자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십자가 사역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따라서 옛 방식의 구약 믿음은 이제 종료되었다: 구약의 믿음은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 덕분에, 옛 언약 속의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은 종말론적으로 후퇴하는 것이며, 따라서 옛 언약의 영적 표시들을 통해 언약의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더 이상 필요 없는 일이 되었다.

옛 언약의 관행이 이같이 종결된 것은, 하나님의 영적 약속들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신실함을 드러냈다(창 12, 갈 3:8)! 물론 우리는 사도들이 그들의 청중들에게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무분별하게 버리라고 요구한 것을 찾을 수 없다. 대신 우리는 그들이 청중들에게 순종을 낳는 믿음(롬 1:7;16:25)을 일관되게 촉구하면서, 이제 그들의 정체성은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해 정의된다고 하는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정체성으로 인해 그들은 그들의 모든 삶들, 문화적 습관들, 그리고 종교적 관행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명백한 권위 앞에 내어놓을 것을 요구받는다. 민족적 다양성 내에 존재하는 믿음과 신앙고백의 일치는, 종말론적 하나님의 백성이 다양한 구성원들로 풍성하게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단일하다는 점을 나타낸다(히 2:10-18; 계 7:9-12).

하지만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 사건에서 그랬던 것처럼, Lewis는 사도행전 15장을 가장 중요한 문화적 상황으로 지목하며, 그녀의 해석학적 관점을 앞세워 구속역사적 관점을 무시해버린다. 문화를 해석적으로 주요하게 승격시키며, 종교의 영적 의미을 중립화시키는 Lewis의 내부자운동 사상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란 거짓 종교부터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닌, 거짓종교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토록 결정적인 신학적 실수는 Lewis가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뿐 아니라, 전 세계 종족들 중에서 이 시대에 이루어지는 내부자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녀가 성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나타내준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