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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중대한 위기: 내부자운동의 해석학과 복음 1
데이비드 B. 가너(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8/06/20 [10:05]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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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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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vid B. Garner     © 리폼드뉴스
이 논문은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교수하는 데이비드 B. 가너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메시아적 무슬림들과 무슬림 복음주의자들, 내부자 운동의 해석학과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선교에 대해 연구하고 개혁주의 입장에서 비평하였다.

1. 메시아적 무슬림들과 무슬림 복음주의자들

1.1. 내부자운동(IM)이란 무엇인가?

2011년 6월, 미국장로교회(PCA)는 “신실한 증인에게 촉구함”이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통과시켰다. 이 선언문은 하나님에 대한 가족적 용어(아들, 아버지)를 덜 공격적인 용어들로 번역하고 있는 성경번역들에 대해 경종을 울림과 동시에, 내부자운동(Insider Movements)이라는 갈수록 널리 퍼져가는 운동에 대해 교회의 주의를 환기시켜 주었다. 근래 어떤 사람들은 예수운동(Jesus Movements)이라고도 부르는 이 물의를 일으키는 방법론은, 역사적으로 기독교 복음이 가혹한 반대를 받았던 지역에서 인기를 얻어왔다.

방글라데시와 같은 무슬림 국가, 혹은 불교나 힌두교가 주류를 이루는 나라들에서 눈에 띄는 성과가 드물다는 인식에 따라, 복음주의적 선교사은 1980년대부터 내부자운동 기법들을 도입해 왔다. 내부자 운동은 1990년대에 많은 선교 종사자들이 그 전술들에 매혹됨에 따라 전 세계로 확장되며 인기를 얻었다. 이렇듯 약 20여 년간의 형성 기간을 거쳐, 내부자운동의 다양한 형태들이 주류 교단/단체로 편입됐으며, 범단체적 범교단적으로 주류에 편입되어서 현재 복음주의적 선교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내부자운동가들의 장점은, 기독교의 깃발 아래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멈추기 위하여 그들이 선교학적 사각지대들을 다루려고 노력해 왔고, 방법론상의자가 성찰이 더 잘 이뤄져 왔다는 점이다. 본 논고의 관심은 문화적 제국주의를 교정하는 데에 그들이 성공했는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내부자운동 사상 중에서 물의를 일으키는 요소들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내부자운동 지지자들 중 다수가, 그리스도께로 회심한 무슬림들이 회심 이후에도 다양한 이슬람 관행들을 지키며, 이슬람 사회에 속한 채로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회피론적 관점은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표만 달지 않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것으로서, 회심한 무슬림들에게 회심 이후에도 외적으로 이슬람 종교 내부자로 머물 것을 요구하며, 원래 그들이 속해 있던 이슬람 문화와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라고 권면한다.
 
이 때 대부분의 내부자운동 옹호자들이 의도하는 바는, 무슬림들이 회심한 후에도 내부자로 남아서 원래의 문화와 종교적 관행을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하라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러한 종교적 전통들을 각색하여, 그들의 동료 무슬림들을 이사-마시(Isa-Masih(메시아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다.

일부 내부자운동가들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슬람으로 공적개종을 함으로써 사회적, 종교적 경계의 “내부”로 들어가야 한다고 단언하며, 실제로 일부 서구 선교사들은 예수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무슬림들의 관행에 참여해왔다. 여전히 다른 학자들은 진정한 이슬람의 관점이란 “모든 선지자들(예를 들어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수, 그리고 무하메드)에 의해 계시된 종교는 본래 동일하며…… ‘진정한 이슬람’은 곧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선교에 대한 이 같은 관점의 변화들이 어떻게 하여 매력적으로 보이게 되었나? 분명 여러 원인들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내부자운동의 실행이 만연하게 된 것은 그것이 옳다는 확신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성경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단언하면서, 내부자운동 방법론을 지지하는 것만이 순전한 복음을 존중하는 길이며, 오늘날 하나님의 영을 따르는 길은 그뿐이라고 믿어 온 것이다.

내부자운동 옹호자들은 그들의 선교학적 방법론들을 성경이 허용할 뿐만 아니라, 성경에 묘사된 사도의 모본에 따라 명령되었다고 본다. 과연 그러한가? 내부자운동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1세기의 성공을 재현하면서 묻혀진 역사적 선교라는 보석들을 발굴해왔는가? 사도적 방법과 1세기종교의 접촉점(interface)에 대한 내부자운동의 해석과 적용은 그것을 확장시키는 풍성한 재발견인가, 아니면 급진적 재정의인가?

내부자운동의 사상을 살핀다는 것은 해석학적 신념을 결정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며, 따라서 우리의 분석 역시 이러한 해석학적 특징들에 초점을 둘 것이다. 공개적으로 개종한 사람들과 선교전문가라고 일컬어지는 이들 중에서 내부자운동의 관행을 옹호하는 이들이 있을 것임은 확실하고, 그들은 선교의 열매가 곧 증거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사례들을 나열하는 것이나 추정된 성공과 실패의 목록들 중 그 어느 것도 내부자운동을 바르게 평가할 수 없다.
 
내부자운동의 사상은 성경에 따라서 다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으며, 내부자운동가들 스스로가 이러한 필요를 파악해왔다. 비평이 많아짐에 따라, 내부자운동 옹호자들은 일화들과 통계들을 산출할 뿐 아니라, 성경자체를 근거로 삼음으로써 내부자운동의 실행을 공개적으로 방어해왔다.

그러한 방어들은 주로 선교학자들과 선교전문가들로부터 지속되어 왔으며, 대부분이 Donald McGavran과 같은 풀러신학교의 잘 알려진 혁신적 선교학자들과 강력한 연대를 확보하고 있다. 이러한 풀러의 기반은 내부자운동에 너무나 필수적인 것이어서, 우리는 내부자운동의 해석학적 윤곽을 말하기 전에 그러한 윤곽들을 역사적이고 개념상으로 형성하는 데에 큰 공을 세운 McGavran과 그 동료들의 문화인류학과 선교학을 이해해야만 한다.

1.2. 선교의 새로운지도

McGavran은 그의 영향력 있는 삶 말미에, 매우 진지하게 “아직 끝나지 않은 세계복음화 과업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개척선교사 협의회들의 독실한 배치(prayerful deployment)라는 “거대한 발걸음”을 소원하며 부르짖었다. 이렇게 강력한 호소에서 McGavran은 미전도 대중들을 향한 선교적 열정이 신중하며, 전술적인 선교 총동원과 결합될 때에만 성공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전략 없는 감정은 알맹이가 없는 것이며, 그가 평가하기로는 그 당시 현존하던 선교 구조들은 이 엄청난 과업에 턱없이 부족한 것처럼 보였다. “미국에서 대다수교회(교단)의 수천의 지교회들이 문자 그대로 수천 개의 새로운 개척선교 협의회를 설립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미전도 종족들’에게까지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세계 선교의 성공이 미국에 달려있는 양 과장하는 면은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전 세계적 복음 전도에 대한 McGavran의 비전과 열심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McGavran은 자신이 겁 없는 독립사상가이자 전략가임을 증명했고, 창조적 문화 분석의 영원한 옹호자이자 선교학적 혁신의 수행원임을 증명했다. 풀러신학교의 동료교수인 Charles Kraft의 논쟁의 여지가 있는 공식들에 대해 McGavran은 긍정적이며, 또 Kraft 비슷하게 McGavran도 그의 이론을 세우는데 있어서 문화 인류적이며 사회학적인 연구에 의존하였다.

그의 열정과 분석을 평가하면서, 우리는 또한 여기서 미전도 종족들에 대한 그의 선구자적인 정의에 주목해야 한다. 선교동원을 촉구하는 그의 말 속에는 접근 가능 종족과 미전도 종족에 대한 주목할 만한 구별이 존재하며, 이 저변에 깔린 사회학적 개념은 바로 내부자운동의 태동에 강력한 촉진제 역할을 해왔다.

McGavran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미전도” 종족 혹은 사회는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그들의 동료들에 의해 “자신들의 원래 민족을 남겨 둔 채 반역적으로 다른 백성에게 합류하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로 인식되는 사회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인이 된 그 사람들이 동료들에 의해 “그들은 여전히 우리 사람들이며, 그들은 우리 모두가 따를 만한 좋은 길을 가리키고 있다”고 인식되었을 때, 그 동료들은 접근 가능하다고 하겠다.

McGavran이 이미 1955년 The Bridges of God에서 한탄하였던, 소위 그리스도인들의 반역적 떠남은 선교학적 재검토를 위한 초기의 근거가 되었다. 개종자들이 그들의 가족과 사회적 정체성을 떠나는 “문제”에 정조준하면서, 그리고 McGavran의 세계에 대한 비전을 계승함에 따라, 복음을 반대하는 문화들에서 관측된 선교실패에 대한 불안을 느끼면서, Charles Kraft, Ralph Winter, Kevin Higgins, John Travis, Anna Travis, Dudley Woodberry, 그리고 Rebecca Lewis 같은 선교학자들은 내부자운동지도를 그려왔다.

McGavran의 “종족집단”의 범위를 확장함으로써, 그들은 보다 광범위하게 종교적, 문화적 중립성을 긍정할 방법들을 발견해왔다. McGavran이 서구개인주의에 의해 조성된 선교학에 지속적으로 반대함에 따라, 내부자운동의 주창자들은 그러한 “종족집단”과 “종족운동”을 확고한 관념으로 승격시켜서 종족의 비기독교적 종교 정체성 관습들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수용을 주장하고, “믿는 가족들……이 그들의 사회 종교적 공동체들 내부에 머무르도록” 장려해왔다. 내부자운동 옹호자들은 McGavran의 범주들을 발전시켜서, 기존 사회-종교적 정체성이 역할상의 안정과 중요성을 부여 받는 위치가 된다고 본다. 그럼으로 그들에게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현존하는 종교들의 범위 내에서 그를 전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내부자운동의 선교학적 제도 법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들의 성장하는 집단을 만들어내는데 최선의 경로는 그들이 (1)현존하는 문화적, 사회적, 가족적, 그리고 종교적 연결점들을 유지하며, (2)그들의 고유한 종교적 정체성과 관행들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구인들이 교회로서 구별하는 것들의 많은 부분들은 진정으로 “인간이 만든 교회적 구조”일 뿐이라고 단언하면서, 내부자운동 전략가들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비기독교적 공동체들을 수용하고 증진시킬 것을 촉구한다. 모든 길이 예수께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예수의 영은 분명 비전통적이며, 비기독교적인 방식들로 구속사적 길들을 개척한다고 그들은 주장하는 것이다.

1.3. 하나님과 사도들: 첫 내부자들인가?

자의식적으로 복음주의자인 내부자운동 증진가들의 확신은 확고하다: “정말로 내부자운동 패러다임의 핵심에 있는 것은 각 백성을 자신의 소유로 삼기 위해 열방 가운데, 그들의 종교들을 포함하여 직접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들은 그의 운동이며, 그는 진정한 내부자이시다.” 내부자운동 이론가들과 실행가들에게 있어 이 시대 미전도 종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란 이렇듯 바른 방법으로의 회귀를 요구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른 방법으로의 회귀란 사도들의 행동을 본뜨는 것이다.

내부자운동 선교학자들은 자신들이 효과적으로 성경적 선교를 재개하고 있다고 본다. 그들은 용기 있는 사도적 방법을 본뜨는 것을 목적으로, 예수님은 정말 무엇을 하셨는가, 사도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그리고 초기 교회는 무엇을 하였는가를 묻는다.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이 철저하게 비기독교적인 사람들에게 도달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분들이라면 오늘날 정체성, 관계, 그리고 존재의 중심과 생존이 철저히 비기독교적이거나 심지어 반기독교적인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바울의 선교적 열심을 나타내는 고린도전서 9장의 “내가 ……가 되었노라”를 떠올리면서,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의 이슬람연구 교수인 J. Dudley Woodberry는 사도적 방법의 21세기 모방/적용에 대해 질문을 제기한다.

만약 오늘날 바울이 그의 과거 선교 여행들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그는 “무슬림에게 내가 무슬림이 되었다”라고 덧붙일 것인가?…… 그와 예루살렘 공회는 무슬림들이 이런 식의 신념이 허락하는 범위까지 무슬림의 정체성과 관행들을 유지하면서, 예수를 자유롭게 따르도록 지지할 것인가? 마치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이런 식의 믿음이 허락하는 범위까지 수용하면서, 유대적 정체성과 관행들을 유지하며 예수를 자유롭게 따르도록 지지했던 것처럼 말이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