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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선교사, 역사적 평가 6
박용규(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8/04/04 [10:10]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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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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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박용규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연구 동향과 사료문제를 통해 과연 그가 선교사인가의 문제를 다룬다. 그의 죽음에 대한 해석들과 그의 순교가 가져다 준 첫 영적인 결실들을 제시하고 있다.


VI. 토마스의 순교가 가져다 준 첫 영적 결실들

그렇다면 토마스 선교사 순교 조명이 왜 늦었는가? 어느 한 사람의 죽음이 순교냐 하는 것은 한 개인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평가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토마스는 개신교 공동체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던 대원군의 쇄국통치 하인 1866년 8월에 선교사로 입국해 9월 5일 세상을 떠났다. 미국이나 외국 정부가 조선 정부를 통해 얻은 것은 제너널 셔먼호의 입국일정과 최후 사실은 그 배가 불법으로 입국했고 그 배를 타고 입국했던 승무원들이 불법을 자행하고 조선군과 전투를 벌이고 민관에 의해 살해당해 죽었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정부가 줄 수 있는 정보는 그 외에는 없었다. 1866년 이후 조선은 한동안 열강들과 대치국면을 이어갔고 1876년 강화도조약, 1882년 조미수호조약에 이어 1884년 9월 20일 첫 개신교 선교사 알렌이 입국했다. 이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고 20년이 가까이 지나서이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한 평양지역에 선교가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다시 거의 10년이 지난 1893년으로 제너럴 셔먼호 사건 발생 27년 후다. 토마스 선교사가 세상을 떠나고 30년 동안은 교회가 그의 죽음을 순교로 논할 수 있는 장도 없었고 기회도 없었으며 그런 환경도 주어지지 않았다. 마포삼열이 고백하는 대로 1893년 평양에서 서양종교가 “외국 귀신”의 종교로 여전히 인식되고 배척을 당했던 상황을 고려할 때 더 더욱 그랬다. 그런 가운데서도 마펫은 1893년 10월 22명의 학습반 신자 가운데 토마스로부터 성경을 전해 받은 사람 1명이 있다고 증언했고, “중국어 한문성경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을 만났다”고 증언했다. 제너럴 셔먼호-토마스-성경반포를 사실로 실증해 준 것이다. 사건 당시 12살의 소년으로 토마스에게서 성경을 전해 받은 최치량이 훗날 평양지역 초기 교인이되었고,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박춘권이 평양지역의 초기 교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제임스 게일에게 생생한 증언을 전해주어 게일이 “제너널 셔먼호의 운명”을 쓸 수 있도록 도와준 18세[증언당시 약 48세]의 증언자도 신앙인으로 여겨진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토마스를 순교자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의 순교로 한국교회가 놀랍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상〉은 토마스 선교사 순교는 “예수교의 파종한 의혈”이라며 그의 순교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1865년(一八六五年) 을축(乙丑)에 북미합중국(北美合衆國) 목사(牧師) 도마스가 중국(中國)으로부터 풍범선(風帆船)을 탑승(搭乘)하고 황해도연안(黃海道沿岸)에 잠박(潛泊)하야 한문복음(漢文福音)을 전파(傳播)하고 익년(翌年) 즉(卽) 1866년(一八六六年) 병인(丙寅) 천주교도(天主敎徒) 학살(虐殺) 시(時)에 미국상선(美國商船)을 편승(更乘)하고 한문성경(漢文聖經)을 다재(多載)하고 평양(平壤) 대동강(大同江)에 래박(來泊)하엿더니 관찰사(觀察使)의 습격(襲擊)을 조(遭)하야 해상민(該商民) 등(等)과 도마스가 불행(不幸)히 동시병사(同時並死)하니 합도군(盖도君)은 당시(當時)에 국금(國禁)을 명지(明知)하되 사(死)를 모(冒)하고 도(道)를 전(傳)하엿나니 시(是)난 아(我) 예수교(敎)의 파종(播種)한 의혈(義血)이라 위(謂)하리로다. 이후(爾後) 평양교회(平壤敎會) 성립(成立)시(時)에 도군(君)의 휴전(携傳)한 성경(聖經)을 득견(得見)하고 신교(信敎)한 자(者)가 잇셧다 운(云)하니라.

위 글이 “예수교의 유래”라는 제목 하에 실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한다. 한국선교 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 깊은 저술 〈미국북장로교선교역사 1884∼1934년〉에서도 초기 서양선교사들은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의 사역을 “개신교 선교사역의 출발”로 인식하고, 그를 “한국의 첫 개신교 순교자” 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 8월 한 국에 도착했으며,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갔다. 강서포산에서 토마스는 강변에 있는 얼마의 한국인들에 성경을 건네주었다. 여러 해가 지나 마포삼열에 의해 학습문답을 받은 한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가 이들 전도 책자 성경 가운데 하나를 받았다고 말했다. … 한국인들이 이제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기로 결정하고 1866년 9월 3일 마른 소나무 가치를 잔뜩 실은 큰 나룻배에 불을 붙여 제너럴 셔먼호로 떠내려 보냈다. 피신하려는 승무원들이 물에 뛰어들었고 그들이 강변에 도착하자 살해당했다. 그들은 24명(19명의 말레이시아인과 중국인, 그리고 5명의 서양인들)이었다. … 강변에 나온 토마스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에게 성경을 거주었으나 그가 거절했다. 그런 후 토마스는 무릎을 꿇고 기도드렸다. 그를 죽인 그 사람은 자신이 죽인 사람이 선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는 성경을 가지고 집에 왔다. 이 사람의 조카, 이영태는 몇 년 전 평양숭실대학을 졸업하고 후에 선경번역 사역을 하는 레이놀즈 선교사를 도왔다. 제너럴 셔먼호의 파멸을 목격한 군중들 가운데는 토마스가 건네준 3권의 성경을 받은 12살 먹은 최치량이라는 이름의 소년도 있었다. 그는 이들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두려워 그것들을 한 군인에게 주었는데 그는 낱낱이 찢어서 그것으로 자신의 집의 방을 도배했다. 기독교인 된 후 최치량은 그 집에 가서 그 벽에 성경으로 도배한 것을 보았다. 토마스는 한국의 “첫 개신교 순교자”였다. 그의 사역은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였으나 아무 성과 없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토마스가 최치량에게 전해준 3권의 성경으로 한 군인이 자신의 집 방을 도배했고 최치량이 그 집에 가서 성경으로 도배한 것을 보았다는 증언은 바로 선교사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오문환은 최치량이 박영식에게서 이집을 사가지고 여관을 경영했고 언더우드, 마포삼열, 한석진 등이 처음 평양에서 그 여관에 투숙했다고 증언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토마스에게서 성경을 전해 받은 최치량과 중군 이익현을 구출해 낸 박춘권은 초기 평양지역 첫 개신교 열매 가운데 하나였다. 1934년 한국선교 50주년을 맞으면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한국선교의 기원과 발전 그 출발점에 토마스의 방문과 선교사역 그리고 순교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에게서 성경을 전해 받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초기 신자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하였다. 오문환의 서적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토마스로부터 전해 받은 복음의 씨앗은 선교의 결실로 이어져 한국교회 초석이 되었다. 초기 서양서적이나 국내서적을 막론하고 한국선교나 역사를 거론할 때 반드시 그 출발점으로 삼는 사건은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입국해 성경을 반포하다 세상을 떠난 토마스 선교사 선교활동과 순교였다. 이처럼 토마스를 순교자로 먼저 평가한 사람들은 오문환이 아니라 이 땅에 복음을 전하러 온 서양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객관적인 고증과 증언을 토대로 토마스에 관심을 갖고 그를 연구하고 그를 순교자로 인식하고 평가하고 그를 한국기독교 출발점에 위치시켰다.

맺는 말

제너럴 셔먼호와 토마스 관련 〈고종실록〉의 기록과 오문환의 저술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면서 이들 모두 사료적 가치로 중요하다는 사실과 더불어 각자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동시에 고찰하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토마스가 1차, 2차에 걸쳐 한국에 입국한 동기가 선교라는 사실은 여러 사료가 뒷받침하고 있다. 토마스가 남긴 편지들, 토마스에게 보낸 런던선교회 편지들, 그리고 메도우 회사가 제너럴 셔먼호와 관련하여 남긴 기록들과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작성한 보고서 등이 그것이다.

둘째,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입국했을 때 토마스가 성경을 반포하며 선교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수많은 증언자들이 증언하고 있다. 물론 이들 증언자들이 주로 오문환의 기록을 통해서 나온 것이 사실이지만 오문환 외에도 여러 증언들이 선교사들과 한국인들 쪽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고종실록〉에도 토마스[최난헌]가 “야소교”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이에 대해 문정관에게 질문하고 답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셋째, 사료의 신뢰성 문제이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제너럴 셔먼호 관련〈고종실록〉의 기록들 가운데 적지 않은 오류들이 나타나 〈고종실록〉의 내용을 무조건 다 신뢰할 수 없다. 심지어 적지 않은 조선측 자료들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년도조차 오기하고 있다. 〈고종실록〉과 오문환의 기록을 면밀하게 비교 검토하면 증언에 기초한 오문환의 기록은 토마스를 순교영웅으로 미화시키는 약점이 있지만 사실 규명을 위한 증거 자료 수집 과정을 거친 노력이 책에 잘 배어난다. 이와는 달리 〈고종실록〉은 1차 자료이긴 하지만 때로는 보고자에게 유리하도록 보고한 부분도 눈에 띠게 나타나고 가장 기본적인 사실(fact)조차 제대로 기술되어 있지 않다. 필자가 볼 때 오문환의 기록은 신뢰할 수 없고 〈고종실록〉과 조선측 사료들은 신뢰할 수 있다는 논리는 토마스를 연구하는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토마스는 순교자가 아니다’는 이미 설정된 비판적 논제를 가지고 제기되고 있는 지금의 편향적사료 비평은 제고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관련하여 아직 풀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언제 최후를 맞았는지에 대해 통일성이 없다. 해밀턴(F. E. Hamilton), 오문환은 1866년 9월 3일로, 백낙준, 김경창, 한국기독교의 역사는 9월 2일로 그리고 고종실록과 민경배는 9월 5일로 기술하고 있다. 최근 옥성득은 그 사건이 1866년 9월 2일에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기록은 이 사건이 1866년 9월 2일에서 9월 5일 사이에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고종실록〉에 근거할 때 9월 3일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박춘권이 이익현을 구출해 난 사건과 제너럴 셔먼호의 최후가 동일한 날에 발생했느냐 하는 것이다. 옥성득은 게일의 〈제너럴 셔먼호의 운명〉에 근거한 것인지 몰라도 동일한 날에 일어난 것으로 주장하지만 〈고종실록〉의 기록이나 기타 기록들은 분명히 두 사건을 구분하고 있다. 필자가 볼 때도 두 사건은 일자를 달리하여 일어난 분명히 구분되는 사건이다.

다섯째, 토마스를 순교로 보지 않는 비평자들은 토마스의 죽음의 극적 장면의 역사성을 문제 삼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표면적인 이유다. 토마스를 침략적 제국주의를 배경으로 한 힘의 선교의 전형으로 이해하는 이만열-한규무-옥성득의 시각은 공교롭게도 제너럴 셔먼호를 바라보는 진보주의 국사학계의 시각, 심지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전형적인 제국주의 침략으로 간주하는 북한의 시각과 상당히 일치한다. 필자 역시 알렉산더 윌리엄슨에게서 찾아 볼 수 있듯이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이 제국주의적 사고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런 제국주의적 영향 때문에 토마스의 입국이 선교적 동기가 아니라거나 그의 활동이 선교활동이 아니었다거나 그의 죽음이 순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상당히 주관적 평가이며 또 다른 비약이다. 순교에 대한 판단도 상당히 주관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한규무는 토마스만 아니라 병으로 죽은 헨리 데이비스도 성경번역차 목포로 가다 난파당해 죽은 아펜젤러도 순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규무는 사고로 죽었다면 순교가 아니라고 단정한다. 이런 시각에서 한규무는 설령 토마스가 성경을 반포하다 마지막 죽음을 맞았다고 해도 순교라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최근 진보주의 노선에서 그의 죽음을 둘러싼 논의가 있지만 필자는 지금까지 연구를 통해 살펴볼 때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해석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오문환의 기록을 다른 사료들과 비교 검토할 때 제너럴 셔먼호 승무원들의 최후 기록과 토마스의 순교장면이 상호 본질적으로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상당한 유사성을 지닌다. 토마스의 죽음에 대한 오문환의 설명은 다른 사료들과 비교 검토해 볼 때 단순히 존재하지 않은 사실을 신화적으로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접한다고 판단된다.

그 순교 장면이 사실이 아닌 허구냐 아니면 사실에 가까운 기록이냐 할 때 필자는 후자라고 확신한다. 토마스 전기를 쓰면서 그를 미화시킨 점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했듯이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의 큰 약점이지만 이는 증언에 기초하여 순교 장면을 극적으로 기술하다보니 생긴 문제라고 판단된다.

필자가 그의 죽음을 순교로 평가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한국교회와 많은 연구가들이 그렇게 평가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필자가 볼 때 〈고종실록〉의 내용과 오문환의 기록 그리고 수많은 증언자들의 증언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그렇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언어습득과 선교를 위해 1차 내한했고, 지푸에서 한국인들에게 복음전파를 위해 조선어를 배웠고,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로 입국했고, 실제로 성경을 반포하는 등 많은 선교적 노력을 기울인 이상 그의 죽음을 순교로 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의 죽음은 많은 결실을 가져다주었다. 고무성이 지적했듯이 제너럴 셔먼호의 사건과 토마스의 죽음을 계기로 외국과 국교관계가 수립되었고,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입국하게 되었으며, 토마스에게서 성경을 전해 받은 이들이 훗날 평양지역의 신앙공동체의 초석들이 되었다. 한국교회가 그의 피가 이 땅의 예수교 파종의 씨가 되었다고 믿었다면 비약인지 몰라도 ‘순교는 교회의 씨’라고 말했던 초대교회 라틴 교부 터툴리안의 기록을 가장 한국적 상황에서 실증해준 인물이 바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였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