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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인물/탐방
김포시, 언더우드 선교사 기념비 제막
김포시 근대역사문화 상징조형물 건립 준공 기념식
기사입력: 2018/04/01 [06:48]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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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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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폼드뉴스
  

김포시 걸포동 걸포중앙공원 내에 김포시 근대역사문화 상징조형물인 언더우드 선교사 기념비를 건립하고 준공식을 가졌다.


330일 오후 1:30분에 김포시 유영록 시장을 비롯하여 관계자 및 김포시기독교총연합회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진행됐다.

 

2017. 12. 27.에 시작된 공사는 총 사업비 18379680원이 소요되었다. 공사비는 김포시에 소속된 교회들과 시민의 성금으로 충당했다.

▲ 김포시 기독남성합창단     © 리폼드뉴스


이날 기념비 준공식은 정대용 김포시 역사문화유산보존회 기획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는 제막식으로부터 시작됐다. 이어서 김포시 기독교총연합회 강신진 총무의 경과보고와 추진위원장 김진수 목사의 기념사가 있었다.

▲ 추진위원장 김진수 목사가 기념사를 낭독하고 있다.     © 리폼드뉴스


이어서 축사로 김포시 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인 김재호 목사, 최영철 김포시 역사문화유산보존회 회장, 유영록 김포시장 등이 축하했으며, 김포시 기독남성충창단의 찬양이 있었다.

 

식전행사로 소리나래, 꼬꾸메 풍물패의 축하행사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33년 전인 188545일 부활주일 아침, 최초의 장로교 소속 목사 선교사인 언더우드 선교사와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하여 개신교 복음을 전했다.


▲ 김포시 유영록 시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 리폼드뉴스

 

1884. 9. 20.에 알렌 의료선교사가 입국한 다음해 미국 북장로회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미국 북감리회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목사 부부가 188545일 부활주일에 입국했다.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 내외도 '내가 먼저 한국 땅을 밟으리라'는 욕망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 사람은 손을 서로 붙잡고 동시에 뛰어 내리니 셋이 다 그 영광의 첫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후의 사람들도 장로교와 감리교 중의 어느 것이 먼저 한국에 들어왔다고 논란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여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어쨌든 레디 퍼스트를 예의로 삼는 미국인들이니까 아펜젤러 부인이 제일 먼저 배에서 내렸을 것이다.”(Allen D. Clark, History of the Korean Church, 1961, 심재원 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61, 42)


▲ 김포시 기독교총연합회 임재호 대표회장이 축사하고 있다.     © 리폼드뉴스

아펜젤러 부부가 인천에 상륙한 당시의 한국 정정(政情)은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 12)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청일 간의 군사적 대립을 격화하게 만들었고 수도 서울은 불안이 감돌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외국인부녀자의 입경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단신인 언더우드만 입경하고 아펜젤러 부부는 인천에 있는 호텔에서 약 일주간 체류하면서 서울 입경의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413일에 부인과 함께 일본으로 되돌아 갔다가 한국 정세가 안정되기를 기다려 620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여 한 달간 지내다가 719일에 서울에 도착하게 되었다(R. S. Hall, The Life of Rev. William James Hall, M. D., 1897, p. 218).

 

언더우드 선교사가 내한한 두 달 후인 18856월에는 의사 헤론이 내한하였고, 북장로교 한국선교부가 조직되었다. 북장로교 선교부는 서울을 중심으로 개척전도, 의료, 교육사업을 전개했다.

▲ 언더우드 기념비     © 리폼드뉴스
 

북장로교 선교지역은 광범위했다.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지역인 고양, 파주, 교하, 양근, 광주일부, 과천, 용인, 양지, 진위, 양성, 안성, 시흥, 김포, 죽산, 통진, 지평, 양주일부 지역을 선교지역으로 삼았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제물포를 통해 내한한 이후 72일 서울 정동에서 첫 주일예배를 시작했다. 그 교회가 현재 새문안교회이다. 1897년 당시 새문안교회 교인은 531명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언더우드 선교사는 김포 파주 시흥에 여러 교회를 세웠다. 김포지역에 새문안교회 교인들을 보내어 전도하게 했고 1897년에 이르러 선교사 공의회(1893-1900) 시대에 정식으로 교회 설립을 하게 됐다. 그 최초의 교회가 김포읍교회로서 현재 김포제일교회이다.

 

학자로서의 어더우드는 신구약 성경을 번역할 때 가장 고심한 어휘가 하나님이었다. 처음엔 신<>을 택할까? 천주<天主>나 상제<上帝>로 할까? 교계의 변론이 많았으나 하느님으로 하다가 최종 하나님으로 택한 것은 모두 그의 공적이었다.

 

그는 교육가로서 광혜원의 의과학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조선교육의 문을 열었다. 그 후 고아원(경신학교 전신)과 예수교학교를 세웠으며 새문안교회 부속 협성소학교를 설립, 에비슨 박사와 협력 세브란스 의학교를 조직했다.

 

이런 언더우드 선교사를 김포시 근대역사문화의 선구자로 인정하며 그와 함께 했던 당시 많은 전도인들을 기념하기 위한 상징조형물이 건립되었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라 생각된다.

▲     © 리폼드뉴스

이 조형물은 아트인스페이스 대표 왕광현 작가가 제작 시공했다. 기념 조형물은 중앙에 두 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 개의 기둥은 동반, 동행을 상징하며, 여기서 동반은 선구자와 그를 따르고 함께 했던 한국민이며, 한국문화와 서양문화의 융합의 형태를 의미하고 있다.

 

두 기둥 위에 가시관은 언더우드가 근대화를 위해 행했던 봉사와 희생을 상징있다. 그리고 나무가 엮어진 전통 싸리문으로서 상징적 의미는 개항도시 김포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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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인 김포의 근대화 정신을 정감있는 싸리문 형태로 한국의 미감으로서 석조 기둥이 가지는 서구적 미감과 잘 어울리고 있다. 6개 기둥의 표면의 거친 질감은 평탄치 않았던 역경에 역사의 흔적이자 불굴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