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개혁신학
[논문]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선교사, 역사적 평가 5
박용규(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8/03/28 [09:46]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김순정
배너
이 글은 박용규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연구 동향과 사료문제를 통해 과연 그가 선교사인가의 문제를 다룬다. 그의 죽음에 대한 해석들과 그의 순교가 가져다 준 첫 영적인 결실들을 제시하고 있다.

IV.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을 통해 조명한 토마스의 2차 선교 문제

그렇다면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은 어떤가. 지금까지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을 순교라고 하지 않는 주장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60년이 지난 뒤 증언들을 모아 기록했다는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이 신뢰할 수 없고 반면 〈고종실록〉에 실린 제너럴 셔먼호 관련 기록은 신뢰할 수 있는 논리를 저변에 깔고 논점을 전개했다면 오문환의 기록을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도마스 목사전〉을 통한 제너널 셔먼호 입국과 토마스 선교문제

〈고종실록〉이 보고서이기 때문에 셔먼호의 입국과정을 잘 기술해준다면 오문환의 기록은 토마스의 선교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문환에 따르면 8월 9일 지푸를 떠난 셔먼호는 하루 이틀 황해바다를 휭단해 진남포 항만을 바라보게 되었고, 토마스는 제일먼저 백령도 서단연화동에서 성경 얼마를 반포하였으며, 그리고 진남포 항구에서 1년 전 자신을 한국에 데려다 준 중국인 수부 유원태(Yu Won Tai)와 그의 일행을 만나 평양까지 인도해주길 요청했다. 유원태가 수락해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강서 보산까지 항해를 계속해 8월 20일 제너널 셔몬호가 대동강 하류인 보산에 정박했다. 조선군이 제너럴 셔먼호를 처음 목격한 장소와 시점이 〈고종실록〉은 8월 17일 삼전면 송산리라고 밝히고 있는 반면 오문환은 8월 20일 보산이라고 밝히고 있다. 처음 셔먼호가 조선군 측에 노출된 날짜에 대한 오문환의 기록은 〈고종실록〉의 기록과 3일간의 차이가 난다. 송산과 보산이 같은 지역인지, 과연 첫 만남이 8월 17일인지 8월 20일인지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3일이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오문환은 이 때 낯선 배를 목도한 별장이 병졸을 통해 제너럴 셔먼호에 먼저 사격을 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처음 낮선 배를 목도하고 즉시 조선군측이 먼저 사격을 가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국내 어떤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문환에 의하면 중국인 수부가 “동선의 목적이 순전한 상업임을 설명”하였으나 조선군측은 제너럴 셔먼호가 무기를 적재한 것을 보고 여전히 의심을 했다. 이것은 〈고종실록〉의 기록과 비교할 때 일치는 보는 내용이다.

오문환은 보산에서 중국인 수부가 더 이상 진행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중국으로 귀환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고종실록〉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으나 메도우 회사가 벌릴게임에게 보낸 서신에 언급된 것을 보면 사실로 보인다. 토마스의 보산에서의 선교사역과 관련하여 오문환은 중요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오문환에 의하면 8월 20일 토마스는 자신을 찾아온 천주교 신자 지달수. 지달호, 지달유, 지달제 등 10여인을 만났으며 이들은 훗날 토마스 선교사에게서 자신들이 성경을 전해받았다는 사실을 증언하였다. 제너럴 셔먼호가 보산에 나타났을 때 19세의 홍신길이 시장에 갔다 제너럴셔먼호 입국 소식을 듣고 해안에 나가 일행과 함께 셔먼호에 올라 토마스를 만나 그에게서 성경을 전해 받고 훗날 기독교인이 되었다. 훗날 홍신길은 81세의 고령의 나이에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목도한 것을 오문환에게 다음과 같이 증언해 주었다.

내가 정식으로 신자가 되기는 지난 을미년이엿슴니다. 그러나 복음의 종자를 밧기는 지금으로부터 육십 삼년 전 병인년 포리에서 잇슬 때 도마스 목사의게셔 밧엇습니다. 81세의 늙은 것을 아직도 하님께셔 세상에 남겨두신 것은 아마 도마스 목사의 전도사적을 증거하라하심인가 보외다.

홍신길의 증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그가 직접 토마스에게서 성경을 전해 받았고 먼 훗날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그가 살아 있을 때 직접 오문환에게 그 사실을 증언해주었기 때문이다. 오문환의 기록에 의하면 이 때 토마스가 그 곳에서 성경 약 500여권을 반포했다. 500여권의 수치가 어떤 기준에 의해 산술되었는지 몰라도 이 수치는 과장일 수도 있다. 아마도 증언자가 추론적으로 한 말에 기초하여 기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토마스가 전해준 중국어 문리 성경은 쪽복음이 아니라 신약전서라는 점을 고려하면 500권의 신약전서는 분량이나 부피로 대단한 것이다. 그가 가지고 온 성경을 여기서 전부 반포했다면 몰라도 그 수치는 적어도 어느 정도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오문환의 기록에 의하면 포리에서 1박을 보낸 후 8월 21일[음력 7월 12일] 제너럴 셔먼호는 평양을 향해 항해를 계속해서 수심이 깊은 석정호에 잠시 정박하였다. 석정호에서 토마스는 육지에 상륙하여 다수의 성경과 전도문서를 반포하였다.

“포리에서 1일 간 정박하엿든 제네날 셔만호는 발진하야 다시 평양방편으로 올나가기를 시작하엿다. … 토마스 목사는 … 정박키에 양호한 석정호에 잠시 정박한 후에 상륙하야 다수의 성경과 전도문서를 분급하엿다. 그 때에 대동군 남조면 원암리에 거주하는 김영섭씨라는 1청년이 유하엿는데 거기 구경하려고 나아갓다가 도마스 목사의게 약 45권의 서적을 엇어가지고 귀가하엿다. 그는 본래 한학자인지라 기 서적이 비범함을 발견하고 매일 심독하는 중에 기교훈이 참으로 신종할만한 것으로 알고 기후 천도교에 입교한 자기의 자제 종기씨를 권하야 천도교를 중지하고 그리로 귀화하라고 하엿다한다. 불행히 정식의 신자가는 되지 뫃하고 별세하엿스나 그의 권면으로 인하야 종섭씨도 신자가되고 기친척되는 김성집씨도 신자가 되엿는데 종권씨는 다년간 대동군남조면 대송리교회와 평양서성리교회의 조사로 시무하엿스며 김성집은 다년간 강서사천교회의 장로로 열심시무하다가 기년전에 별세하엿다. 그 때에 밧은 서적중에는 성경외에 진리역지와 여한 전도서적도 잇섯다고 한다 김종권씨는 부친의 별세후에도 시시로 기서적을 열람하든 중 불행히 오년전 대홍수로 전부 유실하고 말엇다. 석정호셔 약 백여권의 성서와 전도서적을 분급한 후에 제너랄셔만호는 다시 발진하야 8월 이십일일[음 7월 12일 화요일] 만경대에 도착하엿다.”

오문환의 이와 같은 기록은 한국선교에 대한 토마스의 열정을 잘 보여준다. 8월 21일 제너럴 셔먼호는 평양만경대에 도착했다. 오문환의 만경대 정박 부분 기록에서는 〈고종실록〉의 기록과 하루 차이가 난다. 관리들이 여러 차례 돌아갈 것을 요구했는데도 불구하고 셔먼호는 평양을 향해 항해를 계속했다. 조정이나 지방 관리들이 볼 때 이것은 분명 “양선침입”이었다. 포리와 석정호에서는 배에 올라 성경을 밧기도 했으나 만경대에서는 경비가 삼엄해 어느 누구도 제너럴 셔먼호에 오를 수 없었다. 서윤은 문정을 하면서 “산천구 경겸견찰리”는 임의에 맡겨 권한이 있지만 교역물화는 지방관리가 허락할 사항이 아니라고 밝혔다.

〈도마스 목사전〉에 의하면 제너럴 셔먼호는 4일간 만경대에 머물다 8월 25일[음 7월 15일, 토]에 다시 발진해 거기서 조금 상류인 봉황진에 정박했다. 바로 이날 중군 이익현이 제너럴 셔먼호를 경계하기 위해 배를 타고 계속해 제너럴 셔먼호를 따라 가며 순찰 감시하다 붙잡혔다.

중군 이익현을 볼모로 잡은 사건에 대한 오문환의 기록은 〈고종실록〉과 약간 차이가 있다. 〈고종실록〉은 이익현을 나포해서 제너럴 셔먼호로 끌고 갔다고 기록한 반면 오문환은 상의할 것이 있다고 청해 제너럴 셔먼호로 데리고 갔다가 볼모로 잡았다고 말한다. 오문환은 중군 이익현을 붙잡아 둔 날이 “8월25일[음 7월 15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종실록〉은 양력 8월 27일[음력7월 18일]이라고 말한다. 둘 사이에 양력으로는 이틀 그리고 음력으로는 3일이나 차이가 있다. 음력의 차이가 더 나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오문환이 음력 일을 하루 당겨 일관되게 오기했기 때문이다. 중군 이익현을 볼모로 잡아두는 행위는 당시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고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구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관을 자극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 사실을 오문환도 인정하고 있다. 상업을 목적으로 입국했다고 하지만 중무장을 한 상황에서 중군을 볼모를 잡아두자 “상하제관원은 적기심이 흥구되야 전투준비를 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평양양란의 전단이다.”

〈고종실록〉에서 보았듯이 이 사건은 평양양란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왜 중군을 볼모로 잡아 놓았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볼모로 잡았는지, 그 과정에서 대치와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오문환의 기록은 이 사건의 전후와 이유 그리고 과정을 상술하지 않았다. 반면 〈고종실록〉에 의하면 셔먼호는 중군을 태우고 무모하게 총을 난사하면서 항해를 시작, 황강정(黃江亭)에 정박했고, 이어 5명의 외국인들이 작은 초록색 보트를 타고 강을 관찰하기 위해 마탄(馬灘)으로 이동하자 마을 사람들이 강에 모여 그들을 향해 “우리의 중군 이현익을 돌려주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으며 점점 흥분하기 시작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고 그들 중 몇이 화살을 쏘았고 몇몇은 그들을 향해 총을 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대치국면에서 조선군 측이 먼저 공격했다. 셔먼호는 다시 이동을 시작, 양각도 하단으로 기수를 돌려서는 그곳에 정박했다. 양각도에서 박춘권(朴春權)이 이현익을 구하기 위해 용기를 내어 작은 배를 타고 셔먼호에 올라 그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오문환은 <도마스 목사전〉에서 중군 이익현을 볼모로 가둔 그 사건 자체보다도 그를 구출한 박춘권이 훗날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면서 믿음의 목격자들과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나 토마스 선교사역을 연결시켜 자신의 기록의 신뢰성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 느껴진다. 그렇더라도 이익현을 구출하는데 앞장선 주인공 박춘권이 훗날 평양장로교회 최초의 교인 중의 한 명이 되었고 안주교회 영수가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가 많은 사실들을 가족들 친지들 그리고 출석하는 교회나 선교사들에게 증언해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마스 목사전〉에 따르면 1866년 9월 2일에 제너럴 셔먼호는 한사정 상편 모래에 좌초하고 말았다. 오문환은 여기서 〈고종실록〉이 밝히지 않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좌초로 인해 제너럴 셔먼호가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더욱 치렬한 전투가 벌어지자 사태의 심각성과 위기를 느낀 제너럴 셔먼호 대표와 통역이 9월 3일 상륙해서 탈취한 중군 이익현의 인신을 돌려주고 서류를 가지고 생환을 보장해 줄 것을 애걸하자 조선군 군관들이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한 모든 사람들이 상륙해서 항복하면 허락하겠다고 답했다. 셔먼호 대표가 이 사실을 셔먼호에 있는 다른 승무원들에게 알리자 셔먼호에서 갑자기 포를 쏘기 시작했다. 오문환은 셔먼호가 왜 발포했는지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정상적이라면 분명히 계속전투를 벌인다면 죽을 텐데 무모하게 포를 쏘며 맞서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어느 기록에 보니 조선군측은 셔먼호의 포탄이 고갈되고 있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평양감사 박규수는 이현익 대신 중군에 임명된 백낙연과 평양서윤 신태정을 독려해 “한사정 상편 사상”(閑似亭 上便 砂上)에 좌초한 셔먼호와 접전을 벌여 셔먼호를 침몰시키는데 성공했다. 조선군과 셔먼호간 대치 국면에서 조선군 측 누가 전투를 진두지휘했는지에 대해서도 국내자료는 통일성이 없다. 게일의 기록에 의하면 박춘권이 동일한 화공전법을 3번을 시도했고, 세 번째 성공을 거두었다. 양각도 모래 위에 좌초된 셔먼호는 돌을 던지고 활과 화승포를 쏘며 공격하는 군졸과 관민들을 더 이상 당할 수 없었다. 이를 이용해 관민들이 작은 배들을 연결하고 그 위에 솔가지를 가득 쌓아놓은 후 유황을 뿌린 다음 불을 붙여 셔먼호로 떠내려 보냈고, 불타는 이들 배가 셔먼호에 닿자 셔먼호는 곧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오문환에 의하면 배에 승선한 모든 사람들은 자살하거나 분노한 관민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오문환은 제너럴 셔먼호가 불타고 승선했던 이들 모두가 죽임을 당한 날이 1866년 9월 3일이며 음력으로 7월 24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2년 앞서 출간된 “조선기독교회사의 일대 분수령인 평양양란” 소책자에서도 제너럴셔먼호 소실이 음력 7월 24일이라고 밝힌바 있다. 그러나 9월 3일은 음력으로 7월 25일이고, 토마스가 탄 제너럴 셔먼호가 소실된 것이 〈고종실록〉에는 음력 7월 27일, 양력 9월 5일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문환의 기록이 〈고종실록〉의 기록과 2일의 차이가 있다. 서문에서 “오기된 년대를 정정”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그 자신이 발생연도도 음력 역월(曆月) 환산도 착각한 것이다.

오문환의 기록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토마스의 마지막 선교활동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토마스 목사 전에서 “백기투장과 성경분급”이라는 소제목 하에 토마스의 마지막 극적인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마침내는 포연탄우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손에는 백기를 잡고 한 손에는 성경 들어 강변에 잇는 군중을 향하야 성경을 뿌리기 시작하엿다. … 총성포성의 뒤끌는 소래가 천지를 진동할 때 이 23인의 등승자 중에는 1인도 감히 엄두를 봇하는데 용감하게 홀로 야소라고 고성을 치며 무수한 성경을 선두에서 뿌려주엇스니 이 장절쾌절한 극적 광경은 당시 근 이십의 청년으로 외성에 거주하면서 강변성상에서 이 광경을 친히 목격하고 후에 평양부근장로교회 초대신자가 되야 80고령인 금일에도 충실학 대동군 대동강면 조왕리교회에 출석하는 황명대 씨가 증명하고 잇다.”

증언을 종합하여 재구성한 오문환의 기록에 의하면 군관과 제너럴 셔먼호가 서로 격전을 벌이는 그 사이에 토마스는 “예수”라고 갑판에서 외쳤고 한 손에 백기를 들고 [셔먼호에서 나와] 성경을 반포했다. 토마스의 선교활동이나 마지막 순간까지 셔먼호에서 “예수”를 외치며 성경을 반포한 사실을 목도한 많은 증인들을 실명으로 밝혔다. 박춘권, 황명대, 김연필, 한석진, 최치량, 이신행, 박영식, 마포삼열 등을 거론하였다. 이들은 자신이 직접 눈으로 목도한 사람들이거나 그들의 자녀들 혹은 가까운 지인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증언은 비록 60년이 지난 뒤에 일이지만 목격자들의 증언, 그것도 동일한 사건에 대한 여러 명의 증언이라 사료적 가치가 높다.

2.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에 실린 내용과 역사서술 문제

주지하듯이 〈도마스 목사전〉은 많은 증언과 사료들을 발굴하고 찾아내고 정리하여 기술한 책으로 토마스 선교사 내한과 선교사역을 이해하는 매우 소중한 사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에는 다음 몇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 제너럴 셔먼호 입국 일정에 대한 기록의 부정확성이다. 셔먼호 입국과정과 입국활동과 관련하여 이동장소와 일자가 〈고종실록〉과 다르다. 조선군에 의해 처음 목격된 장소가 〈고종실록〉은 8월 17일 삼전면 송산리라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 〈도마스 목사전〉은 8월 20일 보산이라고 되어 있다. 발견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3일간이나 차이가 난다. 3일간의 차이는 무시하기에는 큰 차이다. 이동과정과 정박에 있어서도 그의 기록은 〈고종실록〉과 비교할 때 전반적으로 2일간이 차이가 난다. 그런데다 양력과 음력을 병기하면서 양력에 해당하는 음력일이 양력일보다 하루 앞서 전체가 오기되었다.

둘째, 오문환의 기록은 제너럴 셔먼호의 입국과정에서의 정박지도 〈고종실록〉과 차이가 많다. 이 때문에 〈도마스 목사전〉으로는 입국과정을 일자별로 이동경로를 재구성하기가 쉽지 않다. 이것은 오문환이 제너럴 셔먼호 입국과정이나 활동 자체보다 토마스의 선교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성경과 책자를 반포한 것을 무게 있게 서술하다보니 생긴 문제라고 고려할 수 있지만 일자와 정박지가 통일성이 없는 것은 역사적 기술에서 큰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정박지역의 부정확성 역시 일제에 의해 일부지역이 편제되거나 이름이 바뀐 경우가 없지 않지만 주요지역은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했을 때와 오문환이 〈도마스 목사전〉을 기록할 1928년경과 비교할 때 큰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셋째, 〈도마스 목사전〉은 한 개인의 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지 몰라도 변증적으로 때로는 지나치게 변호적으로 사건을 기술해 나갔다. 한 사건에 대한 기술을 할 때 인과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서술이 역사기술에서는 생명이다. 그런데 오문환의 책은 토마스 목사나 제너럴 셔먼호에 대한 의도적 변호가 눈에 띠게 나타난다.

넷째, 앞서 언급한 입국일정과 이동경로가 〈고종실록〉 기록과 다를 뿐만 아니라 중요 사건이 일어난 날짜도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제너럴 셔먼호가 불타올라 탑승자 전원이 죽은 날자가 오문환은 9월 3일[음력 7월 24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종실록〉은 9월 5일로 기록하고 있고, 음력으로는 오문환이 주장하는 7월 24일이 아니라 7월 27일이다.

다섯째, 오문환은 〈도마스 목사전〉 부록에서 몇 가지 연구결과물을 제시하면서 〈고종실록〉에 기록된 최난헌이 토마스가 아니고, 어느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한 다른 인물이거나 더 확신하기는 제너럴 셔먼호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한다. 오문환은 토마스와 최난헌이 동일 인물임을 부정하면서도 만약 동일인물이 아니라면 토마스가 〈고종실록〉에 기록된 서양인물 중 누구인가는 언급하지 않았다. 필자가 볼 때 최난헌이 탐승자가 아닌 셔먼호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의 큰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고종실록에 탑승자들을 언급하면서 최난헌을 탑승자 명단에 언급하면서 제일먼저 언급했고 또 나이까지 명시했기 때문이다.

여섯째,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은 많은 사료를 동원하고 증인들의 고증을 거쳐 기록한 것임을 높이 사면서도 인용된 것 중에서 자료의 출처가 정확하지 않은 것도 있다. 다만 1867년 2월 〈런던선교회 잡지〉에 실렸다는 “북경 토마스의 죽음”에 대한 기사는 실제로 The Chronicle of the London Missionary Society, 1867년 2월호 36 쪽에 실린 것이 확인되었다. 오문환이 사실 확인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을 알 수 있다.

일곱째, 오문환은 토마스의 죽음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런던선교회가 토마스의 죽음을 기록한 기사도 “순교전말을 상세히 알지 못하고” 기록한 기사라고 단정했고, 〈고종실록〉의 제너럴 셔먼호의 관련기록도 부분적으로만 수납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마도 가장 비판을 받는 부분이라고 보는데 토마스를 지나치게 순교적 영웅으로 미화시키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전기라는 것이 그럴 가능성이 늘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오문환은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가 당대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영웅열전”(hagiology)과 “전기”(biography)는 다르다. 앞으로 토마스 연구를 위해서는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이 지닌 중요한 증언들의 가치와 연구 업적들을 존중하면서도 그의 기록을 기타 자료들과 면밀하게 비평적으로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

V. 그의 죽음과 관련된 해석

이제 남은 문제는 토마스의 죽음에 대한 서술과 해석 문제이다. 토마스의 마지막 순간의 진실을 재구성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그것은 단순히 지금부터 150년 전의 일이라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죽음과 관련하여 남겨진 1차 사료가 거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제너럴 셔먼호의 생존자가 한 명도 없기 때문에 온전한 재구성에는 한계가 있다. 제너럴 셔먼호 측 자료와 조선군관측 자료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정보는 조선군관측 기록, 증언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한쪽의 입장이 반영된 자료라는 한계를 전제하고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한 1차 자료로 〈고종실록〉과 기타국내자료들, 지푸 주재 미 영사 샌포드가 북경 미국 공관 벌링게임에게 보낸 보고서, 제임스 게일의 “제너럴 셔먼호의 운명,” 해밀톤의 “한국의 첫 개신교 순교자,”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 그리고 1934년 〈북장로교 선교회 역사 1884-1934〉이 있다. 문제는 여러 기록들이 토마스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서술에서 통일성이 상당히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고종실록〉은 전투를 벌인 당사자의 입장에서의 기록이고, 샌포드의 보고서도 두 명의 불란서 신부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에 근거한 것이며, 게일의 “제너럴 셔먼호의 운명”은 30년이 지난 후 사건 당시 18세의 한 목격자의 증언에 기초한 것이고, 오문환의 경우는 여러 증언에 기초한 기록이며, 그리고 1934년의 〈한국북장로교선교사〉의 기록은 선교사들의 증언과 오문환과 기타 여러 자료들을 종합하여 기록한 것이다. 각기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그 내용을 검토하면 토마스의 죽음과 관련된 특징들을 어느 정도 도출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이들 사료들을 중심으로 토마스의 죽음을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고종실록의 기록(1866)

1866년 9월 5일[음력 7월 27일] 고종실록에 있는 대로 평양감사 박규수는 제너럴 셔먼호가 어떻게 마지막을 맞이했는가를 이렇게 기록해서 보고했다.

“평양에 정박한 외국 범선[제너널셔먼호]이 무자비하게 우리 백성에게 총을 쏘고 죽이고 부상을 입혔습니다. 범선[제너럴셔먼호]을 파괴시킬 수 있는 책략을 숙고한 후 최종적으로 불타는 나룻배들을 사용하여 불을 지르는 시도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불타는 배가 그 범선에 닿아 불이 번지자 최난헌과 조능봉이 범선 뱃 머리로 나와 거의 동시에 강물에 뛰어들어서는 자신들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들 모두는 체포되어 묶여져 강변으로 끌려왔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곧 성난 백성들과 군인들에 의해 매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 후 그들은 이어 제너널 셔먼호 나머지 승무원들도 죽여버렸습니다. 제너럴 셔먼호의 마지막 사람이 처형되었을 때 백성들의 분노와 흥분이 진정되었습니다.”

〈고종실록〉에는 전혀 선교적 활동은 명기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최난헌과 조능봉이 뱃머리로 나와 강물에 뛰어들어 강변으로 나와 살려달라고 간청했고, 그들이 체포되어 묶여져 강변으로 끌려와서 죽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토마스와 조능봉 그리고 그 외 승무원 모두가 비참하게 관민들에 의해 살해를 당한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2. 지푸주재 미영사 Mr. E. Sanford가 북경주재 미공사 Mr. Anson Burlingame에 보낸 보고서(1866)
 
“…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그 지방 수도 평양에 도달했는데 … 곧 지방 장관[박규수]은 대원군에게 배에 탄 승무원들을 죽일 것인지 그들과 배를 같이 불태울 것인지 지시해 줄 것을 요청했다. 대원군은 그 배와 탑승객 모두를 불태우라고 답했다. 이 잔혹한 명령은 집행되었다.’ … 1866년 10월 7일 두 중국 정크선이 한국에서 도착해 한 외국 범선의 좌초와 소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토마스가 그를 이전부터 알고 있던 중국인들 가운데 한 명에게 토마스가 평양까지 배 안내를 해 달라고 중재했고 그가 그러겠다고 하고 그 배를 4번의 조류 동안 안내했다. 이 때까지 이양선에 대한 경고가 조선 본토인들에게 널리 확산되었고, 길 안내를 맡은 중국인이 그들[문정관]에게 그 배가 평화적인 무역거래선이라고 말했지만 해적으로 여겨 그를 믿지 않았다. (제너널 셔먼호는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 27일 밤에 한국의 산간에서 숨어 있던 두 명의 불란서 선교사들이 이 지역에 도착했다. 그들은 진술하기를 한 외국 범선이 평양 반대편에 좌초를 당했으며, 본국인들과 그 범선에 타고 있는 이들 사이에 얼마동안 전투가 벌어진 후에 본토인들이 [화공]전략을 써서 그 사람들을 강변으로 끌어오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본토인들에 의해 둘러싸인 후 손이 뒤로 묶여 포박되었으며 그런 후 강변에 무릎이 꿇려져 참수를 당했다. 선교사들은 20명이 죽임을 당했고 보고했다.

셔먼호 승무원들이 포박되어 무릎을 꿇린 상태에서 참수를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수를 당했다는 기록은 그리피스도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토마스의 마지막 순간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라고 본다.

3. 게일, “제너럴 셔먼호의 운명”(The Fate of the General Sherman, 1895)

제임스 게일은 당시 목격자의 증언에 기초하여 기술한 “제너럴 셔먼호의 운명”이라는 한 글에서 서양인들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승무원들은 셔먼호 화재로 인해 연기를 피해 셔먼호 양측에서 물로 뛰어들었다. 그들 중 몇 사람은 병을 가지고 뛰어들었는데 열어보니 그 병에는 한국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짙은 브라운 색 기름이 담겨진 듯했다. … 그 불쌍한 외국인들은 이제 성난 군중들에 의해 난자를 당했다. 백기를 가지고 강변에 이른 한 두 명은 계속해서 절을 하면서 백기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용서를 받지 못한 채 결박되어 난자당했고, 그 남은 자들은 더욱 정교하게 난자를 당했으며, 신체의 어떤 부분들은 의약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도려내졌고, 나머지 부분들은 긁어모아져서 불에 태워졌다.

게일은 위에 있듯이 강변에 백기를 들고 한 두 명이 접근했다는 사실, 백기를 흔들며 계속 절을 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토마스가 한 손에는 백기를 들고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예수”라고 외치며 성경을 반포했다는 오문환의 증언과 맥을 같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백기는 항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투항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해서 백기투항을 했을 텐데 오문환은 조선군관들이 그 백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는데 과연 그랬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는 사실은 토마스가 자기를 죽이려는 군인에게 성경을 받으라고 하며 최후의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기록과도 어떤 면에서 상응하는 유사성을 담지하는 내용이다.

4. F. E. Hamilton, “The First Protestant Martyr in Korea”(1927)

해밀턴은 1927년 9월에 발표한 토마스 관련 논고에서 그가 “한국의 첫 개신교 순교자”라고 분명히 명명하고 그 제목으로 자신의 글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토마스의 죽음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솔가지를 잔뜩 실은 한 큰 강배에 불이 붙었다. 이 배가 제너널셔먼호에 맞닿게 낮게 묶여져 있어 그 불길이 번져 셔먼호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그 배에 남아 있던 22명의 사람들은 그 배가 최후를 맞는 것을 목도하고는 대부분의 승무원들이 물로 뛰어들어 강변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나 가는 도중 그들 모두는 검과 창으로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몇 사람은 물에서 살육 당했고 다른 사람들은 강변에서 살육 당했으며 그리고 적어도 한 사람은 물에 뛰어들기를 거부하다 화염 속에서 최후를 맞았다. 2주간 동안 여러 차례 성경 한권을 손에 쥐고는 강변에 모인 군중들에게 소리치며 전도하려고 시도하였지만 그들을 이해시킬 수 없었던 토마스는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을 보고, 남은 성경을 강가에 운집한 군중들에게 던졌다. 그리고는 자기 손에 마지막 남은 한 두권의 성경을 가지고 물에 뛰어들어 강가로 걸어갔다. 토마스가 그를 죽이려는 한 군인을 만나 그에게 성경을 건네주며 받으라고 간청했으나 그 사람이 거절하였다. 토마스는 모래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분명하게 하나님께 기도했다. 후에 그 군인은 비록 토마스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고 진술했다. 그런 후 토마스는 눈을 뜨고 군인에게 미소를 머금고 그 책을 받기를 다시 간청했다. 감히 용기를 내서 무릎을 꿇은 그 사람을 죽이려 했던 군인은 드디어 토마스의 심장을 찔러 그를 살해했다. 그가 후에 자신의 가족에게 말한 것처럼 그는 한 선한 사람을 살해했다고 느끼고 그가 죽인 그 사람이 떨어트린 성경을 집어 자기 집에 가지고 왔다. 토마스를 살해한 그 사람은 지난해 평양숭실대학을 졸업한 졸업생 중의 한 명인 이영태 모친의 삼촌이었다. 이영태는 지금 성경개정위원 가운데 한명인 레이놀즈 박사의 비서로 현재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해밀턴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소상하게 제너널셔먼호와 토마스의 마지막 장면을 생생하게 그렸다. 이 기록은 토마스의 죽음과 제너럴셔먼호의 최후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다.

5.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 1928〉

오문환은 자신의 〈도마스 목사전〉에서 “최후기도와 순교”라는 소 제목 하에 토마스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도마스 목사의 전도 상황을 기록하려고 한다. … 한 손에는 백기잡고 한 손에는 성경들어 강변에 잇는 군중을 향하야 성경을 뿌리기 시작하엿다. … [도마스는] 용감하게도 홀로 야소라고 고성을 치며 무수한 성경을 선두에서 뿌려주엇스니 이 장절쾌절한 극적광경은 당시 근 20세의 청년으로 …후에 평양부근장로교회 초대 신자가 되야 팔십고령인데 금일에도 충실하게 대옹군 대동강면 조왕리교회에 출석하는 황명대씨가 증명하고 잇다 …도마스 牧師는 殘餘의 聖經과 傳道書類를 힘이 밋는데 지는 全部 傳播코저 努力하엿스나 그만 다 맛초지 못하고 火焰에 기여 나리게 되엿다. 나려가면 軍人의게 被殺될 것은 事實인데 最後로 自己의 生命을 빼앗는 軍人의게지도 福音을 傳하리라 하고 一券의 聖經을 手中에 잡은 後 배에서 나려 언덕으로 나아가니 企待리고 잇든 軍人은 어느 듯 달녀든다. 임의 朝鮮으로 날 때부터 豫測하고 決心한 것이 매 무삼 意外의 일이 되며 무삼 무서움이 잇섯스랴! 도로혀 仁慈한 態度로 죽이려는 軍人의게 聖經 밧기를 勸하매 某軍人도 赤是人이 잇는지라. 들엇든 칼을 暫間멈추엇다. 그 동안 도마스 牧師는 두 무릅을 沙場에 고 머리를 숙여 에 대인後 얼마 동안 最後의 祈禱를 올니고 다시 니러나서 軍人의게 聖經밧기를 勸하엿스나 某軍人은 그의 말을 充分히 理解치 못하엿슬거도 事實이려니와 環境이 그것을 許諾지 안는지라. 맛침내 칼을 그 가삼에 대여 하나님의 忠僕 도마스 牧師의 貴여운 生命을 빼앗고 말엇다. … 이 얼마나 의로운 죽엄이며 이 얼마나 고상한 최후이엿는가! … 이것이 복음의 위대한 힘이 아니며 복음을 전하는 사자의 타인과 상이한 점이 아닌가! 순교자의 혈이 교회의 종자라는 말과 갓치 복음을 위하야 흘닌 도마스 목사의 순교한 혈이 멀지 안은 장래에 다시 소래를 칠날이 잇슬 것은 의심업는 바이다.

6. 해리 로즈 편집, 〈북장로교 선교 역사 1884∼1934〉

한국인들이 이제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기로 결정하고 1866년 9월 3일 마른 소나무 가치를 잔뜩 실은 큰 나룻배에 불을 붙여 제너널 셔먼호로 떠내려 보냈다. 피신하려는 승무원들이 물에 뛰어들었고 그들이 강변에 도착하자 살해당했다. 그들은 24명(19명의 말레이시아인과 중국인, 그리고 5명의 서양인들)이었다. …강변에 나온 토마스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에게 성경을 건네주었으나 거절당했다. 그런 후 토마스는 무릎을 꿇고 기도드렸다.

관련 내용을 종합하면 몇 가지 공통적인 사실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본토인들과 셔먼호 탑승자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둘째, 셔먼호가 좌초를 당했고, 조선군의 화공전법에 의해 셔먼호가 불타올랐다. 셋째, 조선인들이 셔먼호 탑승자들을 강변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넷째, 몇 명이 백기를 들고 투항했고 백기를 흔들며 절을 했다. 다섯째, 이들 셔먼호 탑승자들이 묶여져 참수를 당했다.

셔먼호의 승무원들의 최후 장면의 기술들 가운데 화공전법에 의한 셔먼호의 화재, 승무원들의 탈출, 이들의 백기 투항여부, 강변에 올라오거나 끌려온 여부, 포박여부, 무릎을 꿇었는지 여부, 기도여부, 그리고 참수여부를 담고 있는가 여부를 면밀하게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건의 통일성을 도출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에 의하면 토마스는 제너럴 셔먼호가 불타는 가운데서 “예수”라고 외쳤고, 한 손에 백기를 들고 강변에 나와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기도를 하고 자기를 죽이려는 한 군인에게 성경을 전해주려고 시도했다. 토마스의 마지막 순간의 사건 묘사와 관련하여 위 도표에서 보듯이 화공전법에 의한 제너럴 셔먼호 화재, 승무원의 셔먼호 탈출, 백기투항, 강변 도달, 포박, 무릎, 기도 그리고 참수 가운데 적어도 셋 혹은 그 이상의 다른 자료들이 〈도마스목사전〉의 기록을 지지하고 있다. 토마스가 포박되었는데 어떻게 성경을 전해줄 수 있느냐는 문제 제기는 그가 셔먼호에서 나와 바로 포박되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너널 셔먼호 측이 남긴 직접적인 자료가 없어 완전한 재구성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관련 여러 자료들을 종합할 때 토마스는 한손에 백기를 가지고 한 손에 성경을 가지고 불타는 제너럴셔먼호에서 강변으로 나와 절을 하며 성경을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선교사 제임스 게일이 증언을 토대로 “셔먼호 운명”에서 밝힌대로 “백기를 가지고 강변에 이른 한두 명은 계속해서 절을 하면서 백기를 흔들었다.” 이것은 토마스가 바로 포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중요한 사건 맥락에서 셔먼호의 운명과 〈도마스목사전〉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유사성이 있다. 특별히 “셔먼호의 운명”은 사건 발생 30년 후의 목격자의 증언을 기초로 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게일은 “제너럴 셔먼호의 운명”에서 당시 18세 였던 증인의 말을 인용해 강변에 이른 한두 명이 계속 절하면서 백기를 흔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지푸 주재 미국 공사 샌포드의 보고서에 있는 내용 즉 탐승자를 무릎을 꿇게 하고 참수를 했다는 것과 토마스가 강변에서 무릎을 꿇은 채 한 군인에 의해 칼에 맞아 죽었다는 오문환의 증언 사이에는 상호 유사성이 존재한다. 심지어 〈고종실록〉의 기록도 면밀히 살펴보면 이 정황을 뒷받침해 준다.

불타는 배가 그 범선에 닿아 불이 번지자 최난헌과 조능봉이 범선 뱃머리로 나와 거의 동시에 강물에 뛰어들어서는 자신들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들 모두는 체포되어 묶여져 강변으로 끌려왔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곧 성난 백성들과 군인들에 의해 매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 후 그들은 이어 제너널 셔먼호 나머지 승무원들도 죽여버렸습니다.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이 비록 토마스가 세상을 떠나고 60년이 지난 뒤에 토마스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지만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토마스에게서 성경을 전해 받은 이들이 당시까지 생존해 있었고, 이들이 거의 동일한 내용을 증언했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들 목격자들이 아직 생존했을 때 그 증언에 기초해 책이 출판되었다고 한다면 그 책의 사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러 비판적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증언과 여러 연구 자료들을 통해 저술한 〈도마스 목사전〉의 내용이 허구였다면 게일, 마펫, 헐버트 등 국내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해 온 선교사들로부터 또 심지어 토마스의 선교와 순교를 목도한 증언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했을 것이고, 토마스 기념사업회 역시 그토록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했을 것이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