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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선교사, 역사적 평가 4
박용규(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8/03/21 [09:27]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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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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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박용규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연구 동향과 사료문제를 통해 과연 그가 선교사인가의 문제를 다룬다. 그의 죽음에 대한 해석들과 그의 순교가 가져다 준 첫 영적인 결실들을 제시하고 있다.


(7) [고종실록] 1866년 9월 3일[음력 7월 25일]-평양 방수성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25일]

7월 18일[8월 27일] 제너널 셔먼호가 이익현을 볼모를 잡아둔 이후 심각한 대치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상호 대치 국면과 발포과정에 대해서도 국내 자료들이 약간씩 다르게 기술되었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중군 이익현을 납치하고 돌려주지 않자 “모든 사람들이 분함을 참지 못하고 돌을 마구 던졌으며, 장교와 나졸들이 혹 활을 쏘아대기도 하고 혹은 총을 쏘아대기도 하며 여러 모로 위세를 보였다.” 먼저 발포하고 활을 쏜 쪽은 조선군 쪽이다. 게일의 “제너럴 셔먼호의 운명”에 보면 중군 이익현이 납치당한 뒤 조선군이 먼저 발포했고, 〈패강록〉에도 퇴교 박춘권이 중군 이익현을 구출하려고 제너널 셔먼호에 접근했을 때 조선군이 셔먼호를 향해 먼저 발포하였다. 그리고〈평양지〉도 중군 이현익이 납치를 당한 뒤 소청선이 강변에 접근할 때 조선군이 먼저 발포했다고 기록하였다. 〈고종실록〉, 게일의 〈제너럴 셔먼호의 운명〉,〈패강록〉 그리고 〈평양지〉 모두 제너널 셔먼호와 조선군 사이의 대치 국면에서 먼저 발포한 쪽은 조선군 쪽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단 시작된 양측의 치열한 대치와 싸움은 강도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얼마나 심각하게 대치국면이 전개되었는지는 9월 3일[음 7월 25일] 〈고종실록〉의 기록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평안 감사(平安監司) 박규수(朴珪壽)의 장계(狀啓)를 보니, ‘평양 방수성(防水城)에 정박한 이양선(異樣船)이 상선을 약탈하며 총을 쏘아대는 통에 우리 사람 7인(人)이 피살되었고 부상자 또한 5인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감영 (監營)과 평양부(平壤府)에 신칙하여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대처하게 해서 곧 소멸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번에 멀리 있는 나라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는 의리로써 좋은 뜻으로 타이르고 식량을 넉넉히 주어 그들을 도왔는데, 도리어 갈수록 더욱 더 포악한 짓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중군(中軍)을 잡아다가 억류하였고, 나중에는 또 백성들에게 까지 상해를 입혔으니 어떻게 제멋대로 날뛰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군사(軍事)와 관련된 모든 일은 도신(道臣)에게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좋을 대로 처리하게 하여 모두 무찔려 없애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우리는 여기 〈고종실록〉에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제너럴 셔먼호가 상선을 약탈하고 총을 쏘아 7명이 피살되고 부상자가 5명이 발생했다. 정확히 언제 이 사건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이것은 〈고종실록〉의 제너럴 셔먼호와 관군의 대치과정을 면밀히 검토하다보면 이익현을 볼모로 붙잡아 둔 사건으로 인해 민관과 제너럴 셔먼호 사이에 전투를 벌이면서 생겨난 일인 것이 분명하다. 서윤 (庶尹)의 간절한 요구도 무시하고 백성들의 석방 요구도 무시한 상황에서 박춘권이 중군을 구출해 오자 관군들의 사기가 대단히 높아졌고, 음력 7월 19일부터 7월 25일까지 제너럴 셔먼호와 민군관의 싸움이 강도 높게 진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급한 박규수는 제너럴 셔먼호를 무찔러 없애기로 결심하고 대원군에게 이를 윤허해 줄 것을 요청해 음력 7월 25일 [9월 3일]에 윤허가 떨어졌다. 이 사건이 발생하고 불과 13년 후 존 로스는 〈한국, 역사, 예절, 관습〉(Corea, Its History, Manners, and Customs)에서 “유럽인들은 며칠 동안[얼마 동안]은 친절한 대접을 받았으나 수도 서울로부터 전갈이 온 후에는 승무원들이 해변으로 유인되어 죽임을 당했으며, 배[셔먼호]는 포위되어 불탔다”고 증언한다. 수도 서울로부터 대원군의 전갈이 온 후 제너럴 셔먼호를 대하는 군관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누가 먼저 공격을 했는가 하는 것과도 맞물려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감사의 습격”으로 토마스가 순교했다는 초기 평양교회 지도자들의 기록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피스는 그의 책 〈한국, 은둔의 나라〉에서 셔먼호와 조선군관의 대치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는 대포로 무장한 셔먼호 “무장범선이 프랑스 배로 분명히 인식되었을 수 있으며 따라서 애국적 복수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제너널셔먼호가 평양까지 입국한 것을 천주교 박해에 대한 프랑스 함대의 공격으로 자연스럽게 인식되어 조선 군관이 제너럴셔먼호를 공격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관련 기록들은 분명히 제너널셔먼호를 대하는 조선군관 측의 태도가 처음과 나중이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8) [고종실록] 1866년 9월 5일[음력 7월 27일]-평양 양각도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27일]

음력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제너럴 셔먼호와 민관군 사이에 더욱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식량도 충분하지 않고 훈련된 군인들을 데리고 온 것도 아닌데다 전투요원으로 동원할 수 있는 사람도 불과 20명도 채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또 그 즈음에는 주변지역은 물론 조선 전역에서 훈련된 활사수와 포수까지 착출되어 온 상황에서 조선군관과 맞서는 것은 아무리 중무장을 한 범선이라고 해도 역부족이었다. 그런데다 홍수로 물이 불어 대동강을 거슬러 양각도까지 올라 갈 수 있었던 제너널 셔먼호가 급격하게 물이 빠지는 바람에 양각도 모래사장에 그만 좌초하여 배가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군관의 대치 속에 배라도 기동성이 있어야 할 텐데 제너럴 셔먼호는 젼혀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미 제너럴 셔먼호를 무찔러 없애기로 결정한 박규수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화공전술을 통해 제너널 셔먼호에 불길이 번져가게 만들었다. 제너럴 셔먼호의 최후가 어떠했는지를 1866년 음력 7월 27일[9월 5일] 고종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박규수(朴珪壽)의 장계(狀啓)에, “평양부에 와서 정박한 이양선(異樣船)에서 더욱 미쳐 날뛰면서 포를 쏘고 총을 쏘아대어 우리 쪽 사람들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들을 제압하고 이기는 방책으로는 화공전술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므로 일제히 불을 질러서 그 불길이 저들의 배에 번져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쪽 사람들인 촤난헌(崔蘭軒)과 조능봉(趙凌奉)이 뱃머리로 뛰어나와 비로소 목숨을 살려달라고 청하므로 즉시 사로잡아 묶어서 강안으로 데려왔습니다. 이것을 본 군민(軍民)들이 울분을 참지 못해 일제히 모여들어 그들을 때려죽였으며 그 나머지 사람들도 남김없이 죽여버렸습니다. 그제야 온 성안의 소요가 비로소 진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1866년 음력 7월 27일[ 9월 5일]) 〈고종실록〉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조선군과의 대치 속에서 제너럴 셔먼호가 포를 쏘고 총을 쏴서 조선 사람들을 살해했다. 둘째, 양각도에 좌초를 당해 움직이지 못하는 제너럴 셔먼호가 화공전술의 공격으로 인해 불타올랐다. 셋째, 셔먼호에 타고 있는 이들이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지를 묘사해주고 있다. 〈고종실록〉은 “저쪽 사람들인 최난헌(崔蘭軒)과 조능봉(趙凌奉)이 뱃머리로 뛰어나와 비로소 목숨을 살려달라고 청하므로 즉시 사로잡아 묶어서 강안으로 데려왔다.”고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이 눈에 정확히 들어오지 않는다. 케이블(E. M. Cable)은 〈고종실록〉 해당부분을 시각적으로 잘 번역하였다.

“평양에 정박한 외국 범선이 무자비하게 우리 백성에게 총을 쏘고 죽이고 부상을 입혔습니다. 범선을 파괴시킬 수 있는 책략을 숙고한 후 최종적으로 불타는 나룻배들을 사용하여 불을 지르는 시도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불타는 배가 그 범선에 닿아 불이 번지자 최난헌과 조능봉이 범선 뱃머리로 나와 거의 동시에 강물에 뛰어들어서는 자신들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들 모두는 체포되어 묶여져 강변으로 끌려왔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곧 성난 백성들과 군인들에 의해 매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 후 그들은 이어 제너널 셔먼호 승무원 나머지 사람들도 죽여버렸습니다. 제너럴 셔먼호의 마지막 사람이 처형되었을 때 백성들의 분노와 흥분이 진정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너럴 셔먼호와 그 배에 승선한 외국인 5명, 청국인과 말레이시아 인 19명 합 24명이 살해당했다. 조정에서는 셔먼호를 물리친 노고에 대해 관련자들에게 포상을 내렸다. 〈고종실록〉은 자세한 상황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고 이양선[셔먼호]이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지 보고 형식으로 간단하게 기록했다. 배에 승선한 사람들의 처형 순서가 토마스와 조능봉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로 기술하였다. 최난헌[토마스]이 조능봉과 함께 제너럴 셔먼호에서 먼저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훗날 그 현장의 증언자들의 증언과 어느 정도 연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토마스의 순교 상황 문제는 본 논문 후반부에 좀 더 상세하게 기술하려고 한다.

2. 〈고종실록〉에 실린 제너널 셔먼호 선교관련 기록 문제

토마스의 제 2차 내한과 선교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종실록〉에 담긴 선교 관련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종실록〉은 조선 측의 입장을 중심으로 기술했기 때문에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한 토마스의 선교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선교와 관련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고종실록〉은 음력 7월 12일[8월 21일] 문정관에게 최난헌이 종교적인 질문을 던진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

“최난헌〔崔蘭軒 : Thomas, Robert Jermain〕가 말하기를, 『귀국은 무엇 때문에 천주교인들을 쫓아내는가? 지금 우리 예수성교[耶蘇聖敎]는 천도(天道)를 체험하고 인심(人心)을 바르게 하여 나쁜 풍속을 교화시키기 때문에 인의충효(仁義忠孝)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종교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법으로 금하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감히 마음대로 익히지 못한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위 간단한 기록에서 매우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최난헌은 매우 민감한 사항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문정관에게 서양종교에 대해 질문을 제기했다. 둘째, 최난헌은 조선에서 천주교가 강한 박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잘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최난헌은 야소교가 천주교와 다르다는 사실을 문정관들에게 주지시키려고 했다. 특별히 야소교(개신교)가 동양사상이나 유교문화 그리고 심지어 동양의 정치질서와도 배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 사실은 “지금 우리 예수교[耶蘇聖敎]는 천도(天道)를 체험하고 인심(人心)을 바르게 하여 나쁜 풍속을 교화시키기 때문에 인의충효(仁義忠孝)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기록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고종실록〉은 최난헌이 천주교에 대한 질문을 하고 야소교에 대해 설명한 인물로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문맥에서 볼 때 최난헌이 국가, 지방관리, 백성들이 천주교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인지하고 야소교가 천주교와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다분하게 느껴진다.

제너럴 셔먼호의 입국이 선교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제너럴 셔먼호의 행방과 관련하여 미국 정부가 중국을 통해 진상을 조선에 요구하자 조선정부는 중국 예부에 다음과 같은 답변을 보냈다.

“중국 예부(禮部)에 회답한 자문(咨文)에, … 7월에 평양부(平壤府)에 와서 정박하고는 장변(將弁)을 붙잡아가고, 백성들을 살해하며, 재물을 약탈해가고, 총포를 마구 쏘아대다가 얕은 물에 걸려 불에 타 침몰된 것은 곧 자칭 영국인 최난헌〔崔蘭軒 : Tomas, Robert Jermain〕, 덴마크인 리바항〔李八行〕과 오귀자〔吳鬼子〕 등입니다. 원래 미국인과 돛을 두 개 단 배 1척이 얕은 물에 걸려서 불에 타버렸거나 선주와 배군 24인이 붙잡힌 일은 없는데, 이 번에 윌리엄스〔衛廉士 :Williams, S. W.〕로부터 온 편지는 평양부에서 영국 배가 침몰된 사실이 와전된 것을 근본을 잘 따져보지 못한데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영국, 프랑스 양국과 본래 교섭도 없었는데 어찌 화의를 잃을 수 있겠습니까? 통상과 선교의 문제는 나라의 법에 의하여 거절하였고, 선교사의 문제는 다른 나라의 나쁜 사람이 변복하고 사람들을 현혹시켰기 때문에 배척하고 제거한 것일 뿐입니다. … 이것은 곧 약탈을 일삼는 포악한 도적 무리와 한가지입니다. 통상이 과연 이와 같은 것입니까? 선교라는 것이 과연 이와 같은 것입니까?

우리는 위 보고서에서 2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제너럴 셔먼호 탑승객 가운데 2사람을 언급하면서 최난헌과 리바항을 언급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리바항을 덴마크 인이라고 기술한 점이다. 셋째, 제너럴 셔먼호 입국 목적이 통상과 선교였다고 밝히고 있는 점이다. 특히 세 번째는 불란서를 염두에 둔 언급이지만 제너널 셔먼호 관련하여 이를 언급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3. 〈고종실록〉에 실린 제너럴 셔먼호 관련 기록의 문제

우리는 국내 관련 사료들을 살펴보면서 국내 사료들이 제너럴 셔먼호에 대한 기술에서 일관성과 통일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많은 오류들을 담고 있다. 〈고종실록〉에 실린 제너럴 셔먼호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서 이양선[제너럴 셔먼호]과 첫 문정을 기록한 1866년 음력 7월 15일자(첫 문정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됨) 내용부터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객관적인 기록이라기보다 보고자가 유리하도록 자의적으로 보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먼저 7월 8일[8월 17일] 제너럴 셔먼호를 문정하면서 배에 승선할 때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쪽 사람들 수십 명(名)이 각기 총칼을 지니고서 뱃머리에 정렬해 선 다음 비로소 배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 ”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한 사람은 외국인 5명과 청국인과 말레이시아인 19명 등 전체 24명이다. 뱃머리에 정렬해 섰다는 것은 위협을 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외국의 관리를 맞을 때 수행하는 일종의 사열의식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가 하는 것인다. 그 같은 해석적 여지는 외국과 통상을 금하고 국교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셔먼호 관계자들이 조선의 관료들과 첫 만남을 가지면서 일종의 의식을 가질 수도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여기 〈고종실록〉에 있는 “그쪽 사람들 수십 명”이라는 내용은 정확한 기록이 아니다. 19명이 사열하고 5명이 그를 맞았다고 볼 때 문정관들이 위협감 속에서 수십 명으로 느껴졌는지 몰라도 수십 명이라고 상부에 보고한 것은 보고자가 제너럴 셔먼호가 상당한 세력을 가진 이양선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려고 한 의도가 있다고 느껴진다. 사실 20명을 수십 명이라고 표현한 것은 분명히 과장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큰 〈고종실록〉의 오류는 셔먼호 서양 승무원들의 수자와 국적이다.

“우리들은 서양의 세 나라 사람들입니다. 윗자리에 앉은 최난헌[崔蘭軒 :Thomas, Robert Jermain]와 호가스[何噶特]이 다같이 영국 사람이며, 프레스톤[普來屯]은 미국 사람이며, 뻬지[巴使]는 덴마크 사람입니다. … 이른바 이팔행(李八行)과 조반량(趙半良)은 중국인들로서 영국인이 데려다가 자기 막료로 삼은 사람들이었으며 그 나머지 24명(名)은 혹 태국인이거나 광동(廣東) 상해현(上海縣) 사람들로서 길안내를 하거나 품팔이를 하거나 뱃사람 일을 하거나 하였는데, 모두가 종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지하듯이 제너럴 셔먼호에 탄 외국인은 미국과 영국 국적의 5명이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고종실록〉에는 외국인을 4명으로 기록하고 있고, 이들 4명의 외국인들의 국적도 미국 영국 덴마크 세 국가의 사람들로 기술하고 있다. 자신들이 미국과 영국 사람들이라고 국적을 분명히 밝혔을 텐데 왜 3개국으로 기술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분명히 〈고종실록〉에 서면으로 문정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말이다. 〈고종실록〉의 기록상의 오류 문제는 이것만 아니다. 〈고종실록〉 음력 7월 15일자에는 이팔행이 두 번이나 청국인이라고 기록했다가 음 11월 5일자 기록에서는 덴마크 인으로 기록되었다. 〈고종실록〉은 문정 첫날부터 기록상의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고종실록〉은 이들 서양인의 생김새를 기록하면서도 5명 중 4명만 언급하고 있다.

“최난헌은 나이가 36살, …그는 문직(文職)의 4품 관리로서 영국인이었습니다. 호가스는 나이가 37살, 키는 7척, …그는 무직(武職)의 1품 관리로서 영국인이었다. 프레스톤은 나이가 48살 …그는 무직(武職)의 1품 관리로 미국 사람이었습니다. 뻬지는 나이가 45살, …그는 덴마크 사람이었습니다. 이팔행(李八行)의 나이는 30살이었고, 조반량(趙半良)의 나이는 28살이었는데, … 그들은 다 같이 청나라 사람이었습니다. 24명의 이름과 나이에 대하여 물어보니 토마스가 하인으로 범칭하면서 자세히 묻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에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얼굴 생김새와 옷차림, 머리칼과 수염은 모두 청나라 사람과 같은 모양이었습니다.”

〈고종실록〉의 위 기록에서도 서양인으로는 4명만 기술하고 있고 이들 4명의 서양인들의 나이도 틀리다. 최난헌이 토마스와 동일 인물이라면 그의 나이는 입국할 때 27세였다. 수염을 길렀기 때문에 36살로 보였는지 모르지만 보고와 문정은 대충 적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고종실록〉의 서양인들의 연령에 대한 기록도 신뢰하기 힘들다. 게다가 흥미로운 사실은 최난헌, 호가스, 프레스톤 모두 국가관리로 보고 무직, 문직으로 구분하고 직책서열까지 매겨 최난헌은 문직 4품으로, 호가스는 무직 1품으로, 프레스톤은 무직 1품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름대로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그렇게 기술한 것이다.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한 이들은 주지하듯이 관리들이 아닌 민간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공직에 해당하는 어떤 서열도 갖고 있지 않았다. 서양의 모든 기록도 프레스톤이 민간 상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들 다섯 명의 서양인들은 무직도 문직도 아니고 1품 관리도 4품 관리도 아니었다.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한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거짓으로 그렇게 밝혔을리 없다. 보고자가 “이양선”이 침략선이라는 의심을 하고 자의적으로 그렇게 평가를 내린 것이다. 보고의 생명은 객관성인데 〈고종실록〉은 보고자의 주관이 아주 강하게 나타난다.

지금까지 〈고종실록〉에 있는 제너럴 셔먼호 관련 기록을 살펴보았듯이 몇 가지 점에서 제너럴 셔먼호의 실제 사실과 차이가 있다. 첫째,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한 전체 승선자들의 숫자가 다르다.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한 사람이 외국인 5명과 승무원 19명 등 전체 24명인데 고종실록은 외국인 4명, 이팔행과 조반량, 그리고 24명의 승무원 등 모두 3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제너럴 셔먼호 출항 기록에 있는 탑승자들과 〈고종실록〉에 있는 셔먼호 탑승자 수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둘째는 외국인 4명의 국적도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24명 종복들의 국적도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는 미국과 영국 국적의 사람들인데 고종실록은 미국, 영국, 덴마크 3개국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셋째, 5명의 서양인들 외에도 일반 승객들의 국적과 숫자도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제너럴 셔먼호에는 서양인 5명 외에 청국인과 말레이시아인 합 19명이 승선했는데 이들 ‘하인’의 수를 24명으로 기록하고 있고, 이들의 국적도 중국 광동 사람과 태국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넷째, 게다가 4명의 외국인들에 대한 연령이 다르다. 제너럴 셔먼호에 대한 〈고종실록〉의 기록의 문제점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종실록에 실린 제너럴 셔먼호 관련기록 문제점

<고조실록〉 제너럴 셔먼호 기록 문제 실제 고종실록 오류

1 상선의 국적 미국 영국
2 제너럴 셔먼호 전체 탑승자 24명 30명
3 탑승 서양인들 수 5명 4명
4 탑승 서양인 5명의 국적 미국 영국 미국 영국 덴마크
5 탑승자 신분 민간인 문관과 무관, 1품,4품
6 탑승 아시아인들 수 19명 24명
7 탑승 아시아인들 국적 청국, 말레이시아 청국, 태국
8 탑승 서양인 나이 (예, 토마스) 27세 38세
9 토마스[崔蘭軒] 민간인 문직 4품
10 호가스[何噶特] 민간인 무직 1품
11 프레스톤[普來屯] 민간인 무직 1품
12 뻬지[巴使] 미국인 덴마크
13 덴마크 위치 1500리
14 리바항〔李八行〕중국인 덴마크 인

확실히 〈고종실록〉의 제너럴 셔먼호 관련 기록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고종실록〉의 셔먼호 관련 기록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기록의 부정확성은 국내 다른 관련 기록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종교의 〈대한계산사 권1〉에는 활자본에는 1866년 9월에 일어난 사건을 고종 5년 1868년으로 기술하고 있고 영국인 토마스 선교사(최난헌)도 프랑스 선교사로 기술하고 있다. 동일한 문제가 구한말 매천 황현이 1864년부터 1910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매천야록〉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매천야록〉은 제너널 셔먼호사건을 기술하면서 이 사건이 무진년(고종 5년, 1868)에 박규수가 평양감사로 있을 때 일어난 사건이라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무진년(고종 5. 1868) 박규수가 평안감사로 있을 때 미국인 최난헌이 군함 1척을 이끌고 밀물을 따라 대동강에 들어왔다가 조수로 밀려 나가나가자 움직이지 못했다. 박규수는 능히 그들을 체포할 수 있는 사람을 돈을 주고 구했는데, 한 교졸이 지원했다. 어호의 파피선 수백 척을 동원해서 섶 묶은 것을 가득실어 불을 지르게 하고 또한 노수를 뽑아서 배에 주살을 매고 일제히 화살을 당겼다. 쇠뇌는 맹렬하고 배는 가벼운지라 미국 군함을 쉽게 위집하고 군함 안에 있는 인화물에 불이 붙어 군함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한명의 적이 불길 속에서 뛰어나오면서 나는 듯 개펄을 밟고 달아나므로 4,5차례 포를 쏘아서 쓰러뜨렸다. 이 일이 조정에 전해지자 박규수는 승자하고 그 교졸은 공을 높이 사 진장으로 삼았다.”

여기 한 교졸이 박춘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고종실록〉은 그에게 “오위장”을 특전했는데 〈매천야록〉에는 “진장”을 삼았다고 말한다. 그는 평양지역 초기 신자 가운데 한명이었다.

무슨 기록이던 기록의 의도와 성격이 반영되게 마련이다. 〈고종실록〉은 보고의 생명인 객관성을 상실하고 보고자가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보고한 부분과 사실적 오류를 상당히 담고 있으며 〈고종실록〉 외 〈매천야록〉은 소문에 근거해서 기록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사건의 전후관계와 가장 기본적인 그 사건이 일어난 발생연도마저 틀리다. 그것도 실제 보다 2년이나 늦은 1868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고종실록〉과 기타 국내 자료들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관련하여 많은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