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개혁신학
[논문] 하나님 나라의 성격: 로마서 14:17에 대한 소고 2
이한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신학)
기사입력: 2018/01/03 [12:28]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김순정
배너
▲     ©리폼드뉴스


이 글은 총신대 신학대학원 이한수 교수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로마서 14:17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연구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경적 행복에 대하여 교훈한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

보통 ‘하나님의 나라’라는 술어는 바울서신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다”는 표현 중에서 나타난다(고전 6:9-10; 15:50; 갈 5:21; 엡 5:5). 바울의 하나님 나라 사상은 몇 가지 특징들을 지녔다.

우선 하나님 나라 사상의 기독론적 특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통 “그리스도의 나라”(엡 5:5)이며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골 1:13)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아들 그리스도의 나라로 동일시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지금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대한 그의 왕적 주권을 집행하고 계신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맛볼 수도 없다. 그리스도는 그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을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게”(골 1:13) 되는데, 바울은 그것을 “속량 곧 죄 사함”을 얻는 것으로 정의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나라를 결정적으로 실현하는 중심 구원사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올리심이다.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해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오르실 때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오르셔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세상 만물을 다스리고 계신다(행 2:33).

둘째로, 우리는 또한 하나님 나라 사상의 성령론적 특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공관복음서나 바울서신에서 성령의 사역과 자주 연관되곤 한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 보좌에 오르셨을 때 그는 하나님의 모든 우주권 통치권을 넘겨받으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그의 아들의 나라가 되었고, 하나님의 통치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되셨다.

하늘 보좌에 오르신 예수께서 이렇게 우주권 통치권을 행사하실 때 그는 그것을 항상 성령을 통해서 행사하신다(행 2:33; 5:31-32). 성령은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왕적 통치의 집행능력이시다. 하나님 우편 보좌에 오르신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넘겨받은 우주적 통치권을 성령을 통해서 행사하신다. 때문에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은 “주의 영”(고후 3:17) 또는 “그리스도의 영”(롬 8:9)으로 불린다. 성령은 신자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 또는 예수의 왕적 통치를 실현시키는 능력이시며, 그들의 인격과 성품 속에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재현하도록 만드는 능력이시다. 신자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경험하고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적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롬 8:9-10).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은 성령 안에서 현재화된다. 성령이 신자들에게 충만히 부어지고 역사한다는 것은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임하고 있다는 중요한 징표이다.

셋째로, 하나님 나라 사상은 또한 종말론적인 특징을 지닌다. 신약성경에서 천국은 종종 마지막 때에 가서 최종적으로 완성될 미래의 나라이기도 하지만 좀 더 자주 그것은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갈 때 지금 여기서 맛보고 경험하는 현재적 실재이기도 하다. 바울서신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은 현재적이면서도(고전 4:20; 골 1:13; 롬 14:17) 동시에 미래적 실재(갈 5:21; 엡 5:5; 고전 15:24)이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종말론적 긴장 속에 놓여 있는 나라이다. 신자가 현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때만 그는 장차 완성된 형태로 임하게 될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도 참여할 권한을 얻게 된다. 현재 천국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사후에 들어갈 미래의 나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삶의 현장이나 목회현장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 맛보고 경험할 수 있는지를 강조하는 것이 성경의 균형잡힌 이해를 회복하는 것이다.

넷째로, 하나님의 나라 사상은 또한 윤리적 성격을 지녔다. 바울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공관복음서의 개념보다 상대적으로 윤리적인 성격이 강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적인 기독교인들을 윤리적으로 경고하거나 권면하는 문맥에서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고전 6:9-10; 엡 5: 3-5; 갈 5:19-23). 아마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강조점을 넘겨받되 그것을 ‘의’와 ‘성령’에 대한 자신의 강조점으로 대체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바울에게 특징적인 것은 그의 독자들에게 성령을 좇아 살 것을 권면할 때 그들이 만일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거나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고 경고한다는 사실이다. 누구보다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구원을 강조하는 바울이 범죄하는 역사적 그리스도인들을 경고할 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은 놀랍다. 이것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신자들의 현재적 순종의 삶이 미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리라.

본 논문과 관련하여 우리가 특별히 주목할 본문은 로마서 14:17이다. 바울은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신자의 내면생활에 직접 연관시킨다. 공관복음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귀신축출 사역과(마 12:28; 눅 11:20) 식탁교제(눅 14:12-24; 마 22:1-10) 가운데서 현현되고 있다고 가르치는 것과 달리,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나타난다고 가르친다. 공관복음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때로 ‘잔치’(banquet)로 묘사되지만, 바울서신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부정한 것은 대조적이다. 하지만 공관복음서에서도 잔치는 하나님 나라의 은유로 사용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리새인들은 식탁교제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던 세리와 죄인들을 예수께서는 환영하셨고 그들은 기쁨으로 그를 식사자리에 영접하셨다(눅 19:1-10; 막 2:16). 예수의 잔치비유는 바리새인들이 식탁교제를 위해 부과한 종교적 제한들에 대한 항거로 이해될 수 있다(눅 14:13,21). 이런 맥락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누구나 아무런 제약 없이 회개함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쁨의 잔치로 비유한 셈이다(마 22:2; 25:10; 26:29). 바울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음식법 규정들로 제한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먹은 것과 마시는 것”과 관련하여 이해되는 것을 강하게 부정한다. ‘브로시스’와 ‘포시스’는 각각 음식과 음료를 지칭하지 않고 ‘먹는’ 것과 ‘마시는’ 행위를 지칭한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행위에 있지 않다.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배경은 로마교회에서 음식 먹는 문제와 날짜 준수 문제를 두고 소위 믿음이 강한 자들로 대변되는 이방 기독교인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로 대변되는 유대 기독교인들 사이에 불거진 갈등 위에 놓여 있다. 믿음이 강한 기독교인들은 공동체 식사 때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을 과시함으로 율법의 음식법 규정들을 삼가 준수하는 믿음이 약한 유대 기독교 형제들을 무시하고 배척했으며, 믿음이 약한 유대 기독교인들은 아무 음식이나 먹는 강한 이방 기독교 형제들의 자유분방한 행동에 대해 정죄 판단을 내리고 함께 식사하는 것을 거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 성격을 오해하였다.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어울려 식탁교제를 나누신 것처럼,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공동체 식사에 누구나 –강한 자이든 약한 자이든 상관없이 –제한 없이 환영할 수 있어야 한다. 옛 언약 시대에는 율법이 규정하는 음식법이나 의식법 규정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들이었으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 시대가 도래하였다. 새 언약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들의 삶을 규정하는 요소들은 더 이상 율법의 옛 음식법 규정들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옛 언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의 음식법이나 의식법 규정들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 취급을 하고 배척했지만, 그런 옛 언약시대의 낡은 규정들에 붙들려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근본 성격을 오해한 것이다.

어떤 인종적, 성적, 사회적, 종교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든 간에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나 성령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현재적 실재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교훈이 바울의 가르침에 영향을 미친 것을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지만 형식적인 차원에서보다 그의 사상을 형성하는 심층적 차원의 영향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히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에 있다. 바울서신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과 자주 연결된다. 신자가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경험하는 초자연적인 실재이다.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음식 규정과 같은 비본질적인 문제에 얽매어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동안에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할 때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바울은 무엇보다도 ‘의’(義)가 하나님 나라의 삶에 중심 요소가 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로마서의 중심 주제를 나타내지만, 본문에서 그것은 몇 가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justifying) 행동을 가리킬 수 있다. 또는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기독교인들이 향유하게 된 ‘의의 신분’을 가리킬 수 있다. 또는 그것은 기독교인이 공동체 안에서 나타내는 ‘옳은 행동’을 가리킬 수 있다. 주변문맥은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본문에서 신자들의 의로운 행위를 염두에 두고 있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의로운 삶을 영위하는 모습으로 현현된다. 참된 의는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 아래 살아가는 삶, 또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일치하는 삶을 가리킨다. 신자가 성령 안에서 천국을 경험할 때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변화된 삶이 동반된다. 참된 행복은 변화된 의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천국을 맛볼 때 경험된다.

바울은 또한 ‘평강과 희락’이 하나님 나라의 삶에 중심 요소가 된다고 교훈한다. 그것들 역시 하나님의 행위를 지칭하거나 신자의 신분을 가리키지 않는다. 주변 문맥을 고려할 때 평강과 희락은 모두 일차적으로 수평적인 의미를 지닌다. 한역성경은 첫 번째 단어를 ‘평강’으로 번역함으로써 기독교인이 마음으로 누리는 내적 평안의 상태를 염두에 둔 것 같다. 신약성경에는 이런 의미로 쓰인 용례들이 없지 않다(요 14:27). 하지만 19절이 시사해주듯이 그것은 일차적으로 공동체 구성원들끼리 서로 화목하고 협력하는 덕목을 지칭한다. 만일 바울이 이 술어의 히브리적 개념인 ‘샬롬’(shalom)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백성의 안녕, 복지, 온전함 등의 의미를 내포할 수 있겠지만 바울이 본문에서 그런 히브리적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평강과 희락’이 순서만 바뀌어서 나타나는 곳은 갈라디아서 5:22이다. 이 본문에서 한글 번역자는 ‘희락과 화평’이란 말로 번역함으로써 ‘에이레네’는 신자의 내적 평안보다는 성도들 간의 화목과 일치란 뜻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이점을 고려한다면 바울은 로마서 14:17에서 신자의 내적 마음의 평안보다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화목과 일치를 더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단어는 단순한 즐거움의 느낌이 아니라 환란 중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는데서 솟아나는 기쁨을 가리킨다(롬 5:3-5; 고후 7:4; 살전 1:6). 바울서신에서 기쁨은 자주 적극적인 의미를 띤다. 자신의 신분이나 존재가 외적 환경에 의해 지배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한 손에 의해 지탱되고 있음을 알기에 신자는 주변 환경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과 섭리를 의지하여 환란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성령 안에서”란 문구를 오직 ‘희락’에만 연결시키려고 하지만, 그것을 “의와 평강과 희락” 모두를 수식하는 문구로 간주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자가 생활 속에서 의로운 행동, 이웃과의 화목, 적극적인 기쁨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경험하는 현재적 실재이며, 그러한 삶은 오직 성령의 능력 안에서만 경험될 수 있다. ‘엔’ 전치사는 장소적이고 수단적인 의미를 다 함축한다. 그리스도인은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오직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은 하나님 나라의 중심되는 요소이기 때문에,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는다(18절). 18절 초두의 ‘이로써’란 문구는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그것은 17절에서 묘사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의 방식을 지칭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이다. ‘섬기다’ 동사는 신자가 주되신 그리스도의 명을 따라 섬기는 종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주인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종만이 그의 주인을 기쁘시기 할 수 있다. 특히 종의 언어는 신자의 자유가 어떤 외적 간섭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임의적 자율”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에게 있어서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의존적 존재이다(1:23,25; 6:16). 그들은 사탄과 죄를 주인으로 섬기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존재들이다. 특별히 본문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는 종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방식으로 또는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섬길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할 때 세상 사람들도 인정하고 용납하는 것을 신자의 행동 규범으로 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는 행동을 높이 평가하는 반면, 자신의 이기적인 자유를 확대하려고 남들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비방한다. 만일 외부인이 공동체 예배에 참석해서 “먹고 마시는” 행위로 서로 정죄하고 업신여기는 신자들의 행위를 보았을 때 그들의 행위는 외부인들에게도 비방을 받게 될 것이다(16절). 따라서 신자들은 공동체 안과 밖 어디서나 남들에게 칭찬을 받을만한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한 삶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영적 신분에도 부합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한 토대가 되기도 한다.

본문이 주는 영적 교훈들

역사적으로 ‘행복’은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생의 최고 목표로 간주되어 왔다. 세상 사람들의 통속적인 행복은 외적인 환경과 조건에 좌우되는 개념이다. 행복이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한”상태를 가리킨다면, 그런 만족과 기쁨은 외적인 환경과 조건에 지배를 당할 수밖에 없다. 승진을 했다거나 사업이 번창한다거나 예쁜 여자와 사귀거나 결혼을 할 때 사람들은 흔히 행복감을 갖게 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세상은 험하고 거친 경쟁사회여서 자신에게 만족과 기쁨을 줄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이 조성되기 어렵고, 비록 그런 환경과 조건이 조성되었다고 해도 쉽사리 사라지기 쉬워서 만족과 기쁨은 금방 슬픔과 비애로 바뀌기가 쉽다. 더욱이 인간의 쾌락 감정은 그 속성상 더 큰 외적 자극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어서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한 때 행복한 환경과 조건이 마련되었어도 더 큰 만족과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은 금방 권태와 불만족에 빠져들곤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울 사도가 교훈하는 참된 행복은 철저하게 신중심적개념이다. 타락한 인간 존재는 사탄과 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어서 종국엔 고독과 소외, 비애와 절망, 갈등과 불안, 삶의 무의미와 허무 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사탄의 나라는 서로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도 불사하게 만드는 나라여서 그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언제나 극심한 경쟁과 갈등, 싸움과 다툼, 거기서 파생되는 불안과 불만족을 겪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십자가 희생과 사랑에서 나타나듯이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 속에서 구현되는 나라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려는 것이 사탄의 나라의 속성이라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다. 예수의 잔치비유에서 잘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나라에는 배부름과 행복, 나눔과 기쁨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높은 담벼락을 세우기보다 담을 낮추어 다른 사람들을 집안으로 끌고 들어와 형제자매처럼 환영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바울은 인간이 참된 행복을 추구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공관복음서와 바울서신에서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은 기독론적이고 성령론적이며 종말론적이고 윤리적인 개념이다.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기독론적인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경험하는 자들에게만 경험되기 때문이며, 그것이 성령론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그리스도의 왕적 집행 능력으로서 성령 안에서 현현되기 때문이며, 그것이 종말론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가 그리스도를 통해 지금 실현되고 있지만 그 최종적 완성은 여전히 미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윤리적인 이유는 신자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삶의 거룩한 변화를 경험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14:17은 무엇보다도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요소를 특별히 강조한다. 신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를 맛보게 되고, 하나님의 통치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현현된다. 사람이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대변되는 참 행복을 경험할 때 그는 지금 행복의 나라로서 천국을 경험하는 것이며, 그러한 천국 경험은 인간 자신의 내적 자원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령의 능력 안에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에 붙잡힐 때만 내 삶 속에서 임하는 천국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신분과 삶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 성격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17-18절). 이것은 바울의 권면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신학적 원리이다.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먹고 마시는 비본질적인 문제를 놓고 서로 판단하고 정죄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먹고 마시는 행위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에 있다는 보다 근본적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음식에 관한 옛 율법 규정들의 준수에 의존해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 표현된다. 그것은 공동체의 각 구성원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생활, 하나님 앞에서 상호 간의 화목과 사랑과 일치를 실천하는 삶 가운데서 임재하고 실현된다. 성령의 능력을 통해 지탱되는 그러한 삶을 살 때 신자들은 진정한 만족과 기쁨, 즉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구현은 음식과 날짜에 관한 사소하고 낡은 옛 종교적 규율들에 관한 논쟁으로 결코 희생될 수 없는 궁극적 가치이며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상호 화합과 사랑과 일치를 추구하는 삶을 통해서만 경험될 수 있다.

따라서 믿음이 약한 신자들은 음식법과 날짜 준수가 하나님의 왕적 통치의 본질적 현현인 것처럼 생각하여 그것을 준수할 것을 고집해서도 안 되고, 믿음이 강한 신자들은 그런 것들을 삼가 지키는 자들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해서도 안 된다. 진정한 믿음의 자유는 그런 의식 규정들을 무시할 수 있는 자유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일치와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그런 규정들을 존중할 수 있는 자유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의식 자체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신자의 자유는 창조자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향유하는 자유가 아니라 형제 사랑을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한을 유보할 수 있는 자유일 때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주시는 진정한 자유이며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부합한다.

율법의 옛 종교적 계율들은 더 이상 구력을 갖지 못하는 새로운 시대가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하였다. 하지만 그 종말론적인 함축들을 깨닫고 그것들을 자신의 일상생활에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속도는 개별 그리스도인들마다 서로 다를 수 있다. 믿음이 강한 신자들은 그들이 음식법과 안식일 준수로부터 자유를 얻었다고 확신하고 살았지만, 믿음이 약한 신자들은 여전히 믿음이 강한 자들의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음식법과 안식일을 삼가 지켰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 사도는 강한 신자들이 약한 자들의 양심을 위해 그들의 자유를 행사하는 ‘속도’를 조절해 줄 것을 호소한다. 만일 강한 신자들의 믿음의 자유가 형제 사랑에 의해 지배를 받지 못하고 교만한 방종으로 전락할 때 그것은 오히려 약한 형제들을 실족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거침돌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앞길에 그리스도라는 거침돌을 두셨다. 그를 믿는 자는 결코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치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강한 신자들이 약한 형제들 앞길에 거침돌을 두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성취할 수 있는 신적 역할을 빼앗는 것이며, 강한 자가 최후 심판자로서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라는 긍정적 거침돌 이외에 어떤 다른 부정적 거침돌도 약한 형제들 앞에 두어서는 안된다. 신자들의 믿음의 자유는 형제 사랑과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방식으로 적절히 통제되어야 한다. 신자의 참된 믿음과 진정한 자유는 아무런 목표나 지향점이 없는 공허한 실체가 아니다. 그것들은 항상 “주를 위한” 헌신에 초점을 두어야 하고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관한 바울의 교훈은 음식 먹는 문제나 날짜 준수 문제와 관련하여 믿음이 강한 신자들과 믿음이 약한 신자들 간에 불거진 갈등과 분쟁을 다루는 문맥 속에서 등장한다. 현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행복’이란 술어 자체가 바울서신 가운데서 등장하지 않지만, 그것에 준하는 개념들은 본문에 등장하는 “의와 평강과 희락”과 같은 개념들이다. 이런 개념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표현해주는 중심 요소들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종말론적이고 윤리적인 특징들을 지닌다. 천국이 행복의 나라라고 한다면, 바울 사도가 교훈하는 행복은 그저 단순히 좋은 외적 환경과 조건이 자신에게 주어질 때 주어지는 소극적 만족과 기쁨의 감정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를 받아들일 때 의로운 삶, 이웃과의 화목과 일치, 적극적인 기쁨을 동반하는 신적 은혜의 선물이다. 신자가 진정 행복해지기 원한다면 너무 외적 환경과 조건에 지배를 받지 말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신자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주인 되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길 때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으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을 좇는 신자의 내적인 삶으로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모습으로 현현되거나 경험되는데, 참된 행복을 나타내는 이들 요소는 서로 해석해주는 역할을 한다. 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의 거룩한 뜻에 부합하는 삶을 가리키는데, 신자가 성령 안에서 그러한 삶을 살 때만 하나님과 이웃과 사이에 진정한 샬롬(shalom)을 이룰 수 있고 그의 내면의 삶에 참된 만족과 기쁨, 즉 행복을 맛볼 수 있다. 참된 행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받아들일 때만 맛볼 수 있는 은혜의 선물이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배너
배너
배너
최근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