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개혁신학
[논문] 하나님 나라의 성격: 로마서 14:17에 대한 소고 1
이한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신학)
기사입력: 2017/12/27 [09:42]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김순정
배너
▲     © 리폼드뉴스



이 글은 총신대 신학대학원 이한수 교수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로마서 14:17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연구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경적 행복에 대하여 교훈한다.

사람들은 매우 행복한 순간을 맞을 때 흔히 “여기가 천국이네”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이것은 천국을 가장 행복한 곳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바울 사도는 행복과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연관시켜 생각할까?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은 공관복음서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술어인 반면, 바울서신에서 덜 빈번하게 나타난다. 바울서신에서 하나님 나라는 주로 종말론적인 문맥에서나 윤리적인 문맥에서 나타나지만, 행복이란 술어는 바울서신에서 등장하지 않는 통속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두 개념을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간접적이나마 행복 개념과 비교할 수도 있다. 본 논문의 목적은 로마서 14:17에 초점을 두고 행복의 나라로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밝히는 데 있다.

행복은 어떤 개념인가?

네이버 국어사전이나 표준국어대사전은 행복을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로 정의한다. 그것을 좀 달리 표현한다면 행복이란 생활 속에서 자신을 복되다고 느끼고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상태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언제 자신을 복되다고 느끼고 만족과 기쁨을 경험하는가? 일반적으로 만족과 기쁨은 주로 외적인 환경이나 조건에 많이 의존한다. 건강, 외모, 의식주, 재산, 승진, 사회적 지위, 결혼 등과 같이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환경이나 조건이 조성되었을 때 사람들은 흔히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행복의 조건으로 거론되는 이런 환경이나 조건들은 언제나 변할 수 있고 쉽사리 사라지는 속성을 지닌다. 행복도 일종의 인간 감정이기 때문에 행복을 위한 동일한 조건이 지속되는데도 사람들은 더 이상 만족과 기쁨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인간의 쾌감은 흔히 더 큰 쾌감을 요구하는 속성이 있어서 쾌감이 일정 기간 지속되면 그것은 더 이상 쾌감이 되지 못하곤 한다. 과장으로 승진한 사람은 한동안 기쁘겠지만, 그는 얼마 안있어 더 큰 지위를 구하게 되거나 동료가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하면 기존의 과장 지위는 불만족과 불행으로 여겨지고 만다. 신혼부부가 15평 아파트를 장만할 때 뛸듯이 흡족하고 기쁘겠지만 그들은 조만간 더 넓은 평수를 원하게 되고 자신이 사는 아파트를 비좁고 답답하다고 느끼게 된다. 어쨌든 행복도 기쁨의 감정으로서 오래 지속되지 않고 더 강한 자극이 주어지지 않으면 이전의 행복감은 곧바로 권태로 바뀌기 십상이다.

때문에 고등종교일수록 행복과 만족의 기준을 외적인 조건에 두지 않고 마음의 내적 상태에 두려고 한다. 말하자면 진정한 행복은 집의 평수를 넓히는데 있다기보다 마음의 평수를 넓히는 데 있다. 외적인 환경이나 조건에 휘둘리지 않고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의 마음의 만족과 평온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두는 것, 그것이 고등종교가 보통 지향하는 행복의 목표이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행복은 본질적으로 신중심적 개념이다. 불교는 초월적 존재로서 신의 도움이나 은혜를 바라보는 종교가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중심적 종교이다. 불교의 경전인 ‘행선’(行善)에서 행복은 본래 삼복(三福)의 하나로서 “대승의 행법을 지키며, 도심을 일으키어 인과의 도리를 믿으며, 대승 경전을 읽어서 이해하고, 다시 남에게도 권함으로써 얻는 복을 이른다”(행선03[2])고 정의되었다. 말하자면 인간이 스스로 도를 닦아 마음을 다스릴 때 얻어지는 것이 행복인 셈이다.
 
이와 달리 성경은 진정한 행복이 타락한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고 인간 창조자요, 구속자인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참되게 행복할 수 없고 죄의 노예가 되어 슬픔과 비애와 자기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행복은 창조자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그의 의로운 통치를 받아들이는 데서 발견되는 것이다.

행복의 조건으로서 하나님의 다스림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행복이란 술어는 바울서신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행복을 구성하는 만족과 기쁨 등의 요소들은 바울서신 이곳저곳에서 자주 발견된다. 표준국어대사전이 정의한 대로, 행복이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한” 상태, 또는 달리 표현한다면 자신을 복되다고 느끼고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상태라고 한다면, 그러한 만족과 기쁨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받아들일 때만 생겨난다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이다. 사탄과 죄의 지배를 받을 때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 죄책감, 슬픔, 단절감과 고독, 절망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을 때 경험하는 것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받은 신자의 삶을 “성령 안에서”(롬 14: 17) 또는 “은혜 아래서”(롬 6:14) 살아가는 삶과 동일시한다. 하나님은 그의 왕적통치를 오직 성령 안에서만 행사하신다. 사람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왕적 통치를 받을 때 바울은 비로소 그가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이 통치하는 나라이며 그의 은혜가 다스리는 영역이다. 신자가 외적인 환경이나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지배 아래 살아가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란 개념은 기본적으로 영역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된 신분과 소속을 내포한 개념이다. 하나님의 백성된 신분을 얻고 그에게 속한 백성이 되어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로운 신분과 소속을 얻은 사람은 또한 하나님의 왕적 주권 하에서 그의 백성답게 살아야 할 새로운 의무를 짊어지게 된다. 개인이든 사회이든 하나님의 왕적 지배와 통치 하에 있을 때 거기에는 이미 행복의 나라로서 천국이 임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혹자들은 천국이 사후(死後)에나 들어가는 미래의 장소로만 생각하는데, 이것은 성경의 교훈이 아니다. 성경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말씀 또는 사역을 통해서 천국은 이미 사람들 속에 임했다고 가르친다(마 12:28). 사람들은 성령의 권능을 힘입은 예수의 기적 행위들과 가르침을 ‘보고 들을’ 때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이 그들 가운데 임재하고 있음을 경험했다. 그래서 예수는 천국 비유를 말씀하는 과정에서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고 말씀하셨다. 천국은 예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믿음의 귀를 통해,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 행위들을 볼 줄 아는 믿음의 눈을 통해 경험되는 나라이다. 천국은 예수의 인격과 행위를 통해서 이미 세상에 임했지만, 아직 그것은 ‘비밀’(祕密)에 쌓인 나라이다(마 13:11).
 
그것은 육신의 눈과 귀를 통해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신령한 눈과 귀를 가져야만 비밀에 쌓인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 신자들의 믿음은 ‘천국의 비밀’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특별한 인식의 창문이다. 믿음의 눈을 뜨고 믿음의 귀를 열지 않으면 천국은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초월적 실재이다.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사람들 속에 임할 때 흔히 동반되는 감정은 기쁨과 감격이다. 예수께서는 천국이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마 13:44)와 같다고 비유하셨다. 사람들은 그 속에 무엇이 감추어 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늘상 밟고 지나다니는 밭에 불과했지만, 그 속에 엄청난 보화가 숨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더 이상 예전의 사람일 수가 없었다. 그는 그것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행위를 하였다. 천국을 믿음의 눈으로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만큼 큰 감격과 기쁨을 갖게 되지 않았는가? 천국은 그만큼 자신의 전 생애를 걸만큼 최고의 궁극적 가치이다.

기쁨과 감격의 정서는 예수와 바리새인들 간에 벌어진 금식에 관한 논쟁 가운데서도 잘 나타난다(막 2:18-22).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정기적으로 실천하는 종교심 깊은 사람들이었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가”(18절)라고 질문하였을 때, 예수는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19절)고 답변하셨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예수는 자신의 시대를 혼인 잔치의 때로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말씀은 본래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식탁교제를 나누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했던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문맥에서 등장한다(막 2:13-17).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예수는 ‘메시아 혼인 잔치’(messianic banquet)로 이해한 것이다. 세리와 죄인들과의 식탁교제는 흔히 예수 안에서 임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드러내주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환영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공관복음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용서받고 하나님의 가족이 된 죄인들이 기쁨과 감격으로 맛보거나 들어가는 나라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자주 잔치로 비유되곤 한다. 잔치가 주는 이미지는 기쁨과 행복, 배부름과 만족이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되신 예수는 이렇게 그들에게 행복의 나라로서 천국을 선사하시는 분이시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배너
배너
배너
최근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