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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설교비평을 통한 개혁주의 설교실습교육에 관한 연구: 종교개혁과 청교도의 전통을 따라서 2
박태현(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설교학)
기사입력: 2017/12/13 [09:42]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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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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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현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리폼드뉴스

이 글은 박태현 교수가 개혁신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이다. 저자는 설교비평을 통한 개혁주의의 설교실습교육에 대해 연구하였다. 이는 종교개혁과 청교도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이 교육이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설교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2.2.3 설교 비평은 가능한가?

그렇다면 설교 비평이란 과연 불가능한 일인가? 설교 분석과 평가란 과연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현재 각 교단의 신학교에서 시행되는 설교실습 과정에서 속한 모든 설교 분석과 비평은 필요 없는 일이요 쓸모없는 일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앞서 말한 그토록 필요하고도 유익한 자기 비평과 엄격한 자기반성은 설교 비평의 영역에서 면제되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설교 비평을 위해 우리는 먼저 설교에 대한 바른 견해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불링거와 칼빈의 설교 이해를 기초로 하여 우리는 설교 가운데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첫째, 영적인 측면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중들에게 가르치시고 적용하신다. 둘째, 육적인 측면에서, 공적으로 임명받은 교회의 설교자가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회중들에게 가르치고 선포한다. 칼빈은 설교에서 사역하는 두 설교자를 언급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의 말씀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에 의해 설교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실 강단에서 외치는 이는 한 인간이고 우리는 그 가르침이 요구하는 정도의 감동을 받지 못한다. 그곳에는 하늘의 위엄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너무도 우둔하고 어리석어서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영국의 청교도들 역시 설교 사역에 구원을 위한 성령 하나님의 효과적 사역을 지적한다. 즉 육적인 설교자가 회중들의 육신의 귀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고 선포할 때, 성령 하나님께서 그 복음의 내용을 성도들의 영혼의 귀에 들려주어 적용하고 인(印)을 치신다. 인간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강해하고 선포할 때, 성령 하나님께서 회중들의 영적인 귀를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영적인 눈을 열어 천국의 보화를 바라보게 하시어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신다. 따라서 설교란 두 개의 다른 차원이 만나는 자리이다. 수평적 차원의 인간 설교자의 사역과 수직적 차원의 하나님의 성령을 통한 사역이 만나는 역동적 사건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 설교자의 섬김과 봉사를 통해 자신의 신성과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신다. 이런 방식으로 설교 가운데 인간적 의사소통의 수평적 차원은 신적 의사소통의 수직적 차원과 만나게 된다. 이것이 청교도들의 설교 이해였다.

18세기 대부흥 운동을 선도했던 조오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역시 칼빈과 같은 정신을 따라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하여 설교에서의 두 종류의 음성을 고려한다: 인간 설교자의 목소리와 하나님의 아들의 목소리. 이처럼 칼빈을 비롯한 16, 17세기 영국 청교도들, 그리고 휫필드는 설교 사역에 있어서 두 종류의 사역자가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학교의 설교 훈련을 위한 실습 과정에는 이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한 설교 비평 혹은 설교 분석과 평가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설교 실습에 임하는 사람은 누구나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설교를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뢰아 사람들의 태도에서 이러한 설교 비평의 성경적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행 17:11, 참조. 살전 5:20-21). 이 구절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분별력 있는 설교 청취를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설교를 분석하고 평가해야 할 의무가 주어져 있다. 성도들이 설교를 들을 때 맹목적인 순종이 아닌 분별력 있는 청취가 요청된다.

이러한 분별력 있는 설교 청취의 가능성은 영적인 측면과 육적인 측면 모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 영적인 측면에서,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할 수 있는 영적 지각력을 갖고 있다. 사도 요한은 양들이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한다고 기록한다(요 10:3-5). 동일한 맥락에서 사도 바울 역시 오직 성령을 소유한 성도들만이 영적 분별력을 지닌다고 가르친다(고전 2:10-14). 물론 어떤 사람이 아직 영적으로 성숙한 상태에 이르지 못했는데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비평한다는 것에는 심리적 부담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사실이요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가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는데 전적으로 귀머거리가 아니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둘째, 육적인 측면에서 성도가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비평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사람만이 지닌 이성적(理性的) 특성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으로서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비록 사람마다 이성적 능력의 정도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사람은 일반적으로 이성의 판단, 감정, 그리고 의지에 관련된 문제들을 검토하고 반성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 사고능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설교 비평은 단순히 영적 이슈로만 치부될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인간의 인격, 지정의(知情意)와 관계된 문제들을 취급한다.

셋째, 설교 비평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대한 수용과 거부를 말하는 비평이 아니다. 우리가 목적하는 설교 비평은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전달하는 태도와 방식에 관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가르치거나 모호하게 가르치는 설교자의 태도와 방식 -설교문 구성, 본문의 주해, 언어적 표현, 적용의 적실성 등-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 비평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비평의 대상으로 겨냥하지 않는다.

2.2.4 설교 비평은 필요한가?

독일의 설교학자 루돌프 보렌(Rudolf Bohren, 1920-2010)에게 있어서, 설교비평은 그의 책, 『설교론』(Predigtlehre)의 마지막 장(章)을 장식하며, 설교비평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숙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가 이해하는 설교비평은 청중이 설교를 듣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적으로 아는 정열의 공감을 표현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설교비평은 설교를 해석하는 것으로서, 좋은 설교든 나쁜 설교든 설교 가운데 숨어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수용하고 더욱 전개한다는 의미에서 ‘설교의 찬미’이다. ‘설교의 찬미’로서의 설교비평은 궁극적으로 비평에 노출된 설교자뿐만 아니라 비평의 기회를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청중 모두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설교비평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설교자와 설교비평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청중은 말씀 안에서 성숙의 기회를 놓치고, 또한 하나님 말씀 자체의 진전이 방해를 받게 된다.

회중에게 비평의 기회를 주는 것이 제도로서 정해지지 않는 동안에는(XXIV 참조), 설교비평은 잠재적인 채로 있게 되며, 거기서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파괴적인 작용을 하게 될 것이다. 설교비평이 회중의 생활 가운데서 아무런 위치도 가지지 않는 동안에는 근본적으로 말해서 말씀은 회중에게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회중은 설교의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 설교비평이 교회 안에서 전혀 위치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이 거의 전진을 못하는 것이다. 설교비평이 방해를 받고 있기 때문에 말씀의 진행도 방해를 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보렌에게 있어서, 설교비평은 “설교에의 추가 부록은 아니라는 것이며, 본질적으로 말해서 설교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설교비평은 설교 찬미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설교자와 회중의 성숙을 요청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오로지 성숙한 교회만이 설교비평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고 보렌은 지적한다. “설교의 찬미로서 이해할 수 있는 설교비평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성숙한 교회뿐이다. 그리고 신학과의 대화를 통하여 설교비평을 행할 때에 그 교회는 성숙해 가는 것이다(XXIV, 2 참조). 설교비평에 있어서 교회의 성숙도가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깊은 숙고가 빠진 성급한 비평이나 설교자의 노고를 무시한 채 경솔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그 비평 자체가 통례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설교비평은 설교 자체의 단편적 성격을 존중해야 하며, 동시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하나의 관점에서 행하는 설교비평 역시 단편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성숙한 교회는 설교비평을 통해 더욱 성숙의 자리로 나아간다. 동일한 맥락에서 류응렬은 설교비평을 통해 설교 발전에 기여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설교비평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설교자의 용기와 겸손은 자신을 더욱 성숙한 자리로 인도할 것이다.

설교비평은 그것이 어디서 오거나 설교자의 신학과 그 사람 자체를 물으며, 설교자를 시련 가운데로 인도하는 일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더욱 비평의 여지를 주며, 바로 그 비평에 의한 시련을 받는 가운데서 말씀에만 주목하는 것을 배운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비평은 설교자를 돕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와 청중의 만남에 있어서 신학적인 학습과정에 들어간다. 거기서는 설교자도 청중도 배울 수 있다. … 말할 나위도 없이 비평에 자신을 노출시킴으로써 설교자 자신이 성숙의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성숙하다는 것, 진정 거기서 설교자의 자유는 생길 것이다. - 그리고 또 정열적으로 기쁘게 설교하는 자유도!

2.2.5 설교 비평의 목적

설교 비평의 과제들을 살피기 전에 다시 한 번 설교 비평의 고유한, 그리고 궁극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설교 비평의 목적은 ‘오이코도메’에 있다. 즉 비평은 다른 사람의 영적 성숙과 믿음의 강화를 위해 돕는 방편이다. 따라서 정당하고 합당한 설교 비평이란 다른 설교자의 장점은 칭찬하되 단점은 개선하도록 지적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이유 없는 칭찬은 아첨이요 근거 없는 비난은 험담이다! 이유 없이 칭찬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허영을 키워주는 아첨에 지나지 않는다. 근거 없이 비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는 험담이요 악담이다. 그러므로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비평하는 사람은 매우 신중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동시에 솔직하게 표현하도록 한다.

2.2.6 설교 비평의 자세와 그 비평에 대한 수용 태도

테리 쿠퍼(Terry D. Cooper)는 자신의 책, 『비판의 기술』에서 비판할 때 지녀야 할 핵심적 마음 자세를 바르게 지적한다. “특정 문제에 대해 비판할 때 우리는 사랑과 보호라는 폭넓은 맥락에서 그 문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면에서 설교 비평은 위험스러운 시도이기도 하다. 설교 비평은 용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설교에 나타난 실수를 언급하는 일이 때때로 용기 없이는 수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 비평은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고 확장하는 고귀한 사역이다. 다른 설교자의 설교에 대한 분석과 비평은 궁극적으로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앞에서 행하는 사역이다.

다른 한편, 자신의 설교에 대한 비평을 받는 당사자는 지혜롭고 온유한 마음으로,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설교 분석과 평가를 수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설교자 자신이 스스로 볼 수 없었던 요소들을 다른 비평가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나라와 설교자의 건덕을 위하여 용기를 갖고 솔직하게 그리고 신중하게 분석하고 평가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악의적 비평에 대해서는 분별력 있는 자세로 거부해야 함은 당연하다. 따라서 설교 비평은 비평을 하는 사람이나 비평을 수용하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성숙한 자세를 기본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런 성숙한 자세 위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즉 성도들은 이렇게 서로의 건덕을 위하여 일할 수 있다.

2.3 설교 비평의 과제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앞서 설교비평의 제반 이슈들, 즉 비평의 정의와 그 의의, 설교 비평의 가능성과 그 근거들,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목적, 그리고 설교 비평에 임하는 자세와 그 비평을 수용하는 자세에 대해 차례로 살펴보았다.

이제 신학교에서의 설교실습 교실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설교 비평에 대한 과제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설교 비평의 과제들은 크게 설교 비평의 두 가지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 ‘설교문’(sermon)의 영역과 ‘설교 행위’(preaching)의 영역.

2.3.1 설교문(sermon)에 대한 비평

설교문의 영역에서 설교 비평의 과제들은 성경 해석의 정확성, 적실성 있는 적용, 설교문 구조의 평가가 논의될 수 있다.

2.3.1.1 해석 비평

성경 해석학의 최종 목적은 다름 아닌 설교다. 따라서 설교자의 본문 해석은 설교의 핵심을 차지한다. 본문을 바르게 강해하여 그 가르침을 성도들의 삶과 연관시켜 적용하는 것이 강해설교다. 해돈 로빈슨(Haddon W. Robinson)은 강해설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강해설교는 어떤 본문의 문맥에 맞는 역사적, 문법적, 문학적 연구를 통하여 얻어지고 전달되는 성서적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다. 성령은 그것을 먼저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시키고 그 다음에 그를 통하여 그의 청중에게 적용시킨다.” 따라서 아무리 감동적인 설교라 할지라도 성경 본문에서 떠난 가르침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일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B. Ferguson)은 설교자는 성경을 통해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메시지를 설명하고 해설하는 사명을 갖는다고 바르게 지적하였다.

“설교자는 (sermon)을 창조하되 메시지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받은 메시지를 선포하고 해설한다. 그의 메시지는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다(고후 5:19).”

신약학자인 리펠트(W. L. Liefeld) 역시 강해설교의 특징으로서 하나의 기본적인 성경 본문을 다루되 ‘해석의 성실성’ (hermeneutical integrity)을 갖는다고 지적한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종이 아니라 주인으로 오신다. 설교는 어디까지나 본문을 섬긴다. 즉 설교는 본문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일 어떤 설교가 본문 자체를 깨닫지 못하고 본문을 존중하지 못하고, 또 본문의 문학적 장르, 본래의 목적, 기사나 논증의 방향, 그리고 본문의 의도된 의미와 적용을 알지 못한다면 그 설교는 강해설교가 아니다. 아무리 많은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언급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설교가의 자기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설교문 비평의 일차적 과제는 선택된 본문을 충실하게 해석하였는지 살피는 일이다. 비평자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의도와 뜻이 잘 드러나는 ‘주해’(Exegesis)가 설교문에 반영되었는지 아니면 설교자가 원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 본문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대입해석’(Eisegesis)이 주도적인지 분석하고 평가해야 한다.

개혁주의 관점에서 『성경해석학』(Principles of Biblical Interpretation) 을 저술한 벌코프(L. Berkhof, 1873-1957)는 본문의 의미와 의도를 찾기 위한 성경해석의 세 가지 원리를 지적한다: 문법적, 역사적, 그리고 신학적 해석. 첫째, 문법적 해석에는 본문에 나타난 핵심 단어 연구, 문맥 연구, 장르 연구 등이 뒤따라야 한다. 특히 본문의 장르(genre) 연구는 중요하다.

둘째, 역사적 해석이 필요한 까닭은 성경 기록자가 기록한 내용들은 모두 기록자 자신이 처한 역사적 환경을 배경으로 하여 기록된 글이므로 역사적 해석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설교자는 본문 주해에 있어서 성경 기록자에 대한 연구, 성경에 소개되는 화자(話者)와 본래의 독자들에 대한 연구, 그리고 책이 기록된 시대 상황에 관한 연구도 필요하다. 성경의 역사적 해석을 위해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한 본문 연구도 필요하다. 혹은 성경에 기록된 관습들을 연구하는 일도 필요하다.

셋째, 성경 주해에 있어서 신학적 해석이 필요한 구체적인 까닭은 성경의 독특성과 연관된다. 성경은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전체 66권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내용상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다. 예수께서는 영생을 소개하는 구약성경이 자신을 증거한다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참조, 눅 24:27, 24:44). 따라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짝을 이루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명백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 반드시 신구약 성경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구약과 신약은 구분될 수 있을지라도 결코 분리될 수는 없다. 더 나아가, 구약이 장차 오실 메시야를 증거한다면, 신약은 성육신하신 메시야를 보여준다. 구약이 구세주의 모형과 그림자를 보여주는 반면, 신약은 구세주의 실체를 보여준다.

구약이 옛 언약이라면 신약은 새 언약이다. 따라서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배경 열쇠를 제공한다. 동시에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 대한 주석책으로서 예언의 성취를 보여준다.

이러한 세 가지의 개혁주의 성경해석학의 엄밀한 과학적 해석원리의 바탕 위에 연구자는 ‘경험적 해석’을 덧붙이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설교자 개인이 성경 본문의 가르침을 순종을 통해 몸으로 직접 ‘경험적으로’ 알아야 한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몸소 고난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경험적으로’ 배웠다고 고백한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동방의 의인 욥도 역시 많은 고난을 통해 주님을 경험적으로 배웠다고 고백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아는 길은 오로지 우리의 손과 발의 순종을 통해 경험적으로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런 성경 해석을 ‘경험적 해석학’ 혹은 ‘순종의 해석학’이라 일컬어도 좋을 것이다.

경험적 깨달음은 단지 머리만의 지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으로 온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아니 목숨까지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게 된다. 주님께서 먼저 십자가 위에서 친히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2.3.1.2 적용 비평

약 150년 전에 미국의 설교학자 존 브로더스(John A. Broadus, 1827-1895)는 설교의 적용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설교에서 적용이란 단지 논의에 덧붙이는 하나의 부가물 혹은 그 논의에 부속되는 한 부분이 아니라, 반드시 이행되어져야 할 중요한 것이다. 스펄전은 “적용이 시작되는 곳에서 설교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사람 (before)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to) 말하는 것이며, 우리가 말하는 것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삼도록 진지하게 애써야만 한다.

따라서 적용이 빠진 설교란 상상할 수 없다. 존 베틀러(John F. Bettler)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설교는 적용이다”고 지적하며, 적용이란 결코 하나의 “첨가물”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다른 한편, 설교란 회중들의 삶과 무관한 단순한 서술이 아니다. 따라서 설교는 언제나 회중들의 삶과 연관된 실제적인 적용을 담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리펠트는 강해설교란 ‘적용된 설명’(explanation applied)라고 바르게 지적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존 스토트(John R. W. Stott, 1921-2011)는 성경이 기록된 고대 세계와 회중이 살아가는 현대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놓기로서의 설교’(preaching as bridge-building)를 주장한다.

적용이 설교에 필수임을 충분히 인식한 리펠트는 적용이란 성경 본문에 기록된 삶의 정황과 회중의 현재적 필요가 만나야 한다고 보다 구체적으로 주장한다. 왜냐하면 회중의 실제적 필요를 고려하지 않는 적용은 부적절한 설교이며, 본문의 본래적인 기능을 고려하지 않는 적용은 본문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설교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설교자는 반드시 본문의 의도를 따라야만 한다고 베틀러는 강조한다.

내가 한 본문의 목적을 곡해하여 성경의 완전성을 손상시키려 하지 않는다면 그 본문의 목적을 결정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 본문은 나의 아이디어들을 위한 자원이 아니다. 한 본문의 목적 혹은 의도를 알지 못할 때, 나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설교자의 말이 되고 만다! … 목적은 반드시 성령의 목적이어야 한다. 목표는 반드시 그의 것이어야 한다. … 적용은 반드시 본문의 적용이라야 한다. 그것은 반드시 성령께서 의도하신 변화를 겨냥해야만 한다.

따라서 적용 비평에서는 무엇보다도 본문의 본래적 기능을 따라 회중들에게 바르게 적용되었는지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본문의 ‘주해’(exegesis) 주제와 의도가 왜곡되지 않고 오늘의 청중들의 삶의 정황에 바르게 적용되어야 한다. 리펠트는 적용에 있어서 본문의 문맥적 기능이 중요하다고 바르게 지적한다. “한 본문이 가진 문맥적인 기능을 결정하는 훈련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강해와 적용을 연결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고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성경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적용해야 하는가? 물론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설교의 적용 대상이다. 청중들은 다양한 범주로 나뉘어진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틴 부써(Martin Bucer, 1491-1551)는 에스겔 34장 16절에 근거하여 영적 기준에 따른 다섯 가지 종류의 양으로 구분한다: (1) 잃어버린 양, (2) 길 잃은 양. (3) 상처입고 깨어진 양 (4) 병든 양, (5) 살찌고 강한 양. 퍼킨스는 적용 대상으로서 일곱 가지 종류의 회중들로 구분한다. (1) 무지하고 가르침을 받지 않으려는 불신자들, (2) 가르침을 받으려 하되 무지한 자들, (3) 지식은 있으나 아직 겸손하지 않은 자들, (4) 겸손한 자들, (5) 신자들, (6) 믿음에서 실족한 자들, (7) 신자와 불신자가 섞여 있는 공동체. 그 외에도 회중들은 사회적 신분이나 영적 상태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될 수 있다: 남자와 여자, 노인과 젊은이,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지식이 많은 유식한 사람과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 성숙한 사람과 미숙한 사람, 정직한 사람과 거짓말하는 사람,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 등등. 여기서 우리는 회중의 삶의 정황을 분석하여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트림프(C. Trimp) 교수는 “설교자는 이 교인들을 항상 생각 속에서 자신의 앞에 두어야 하고, 계속해서 책상 앞에서 설교를 기록할 때 이 회중에게 말해야 한다”고 지혜롭게 조언한다.

적용의 대상이 다양한 것처럼 설교에서 적용의 내용도 다양하다. 개혁파 설교학의 아버지인 히페리우스(A. G. Hyperius)는 고대 수사학의 사용을 거부하고 성경에 기초하여 -딤후 3:16, 롬 15:4- 구체적인 적용의 다섯 가지 영역들을 제시하였다. 즉 바른 교리를 가르치고, 거짓 교리를 반박하고 책망하며, 악을 꾸짖어 바르게 함, 기독교의 덕성을 배양하는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성경으로 안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단 한 가지 목표를 지향하는데, 곧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다.

적용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행될 수 있다. 첫째, 적용은 창조적이어야 한다. 창조적 적용이란 진부하고 구태의연한 옛 방식의 뻔한 적용의 반대말이다. 따라서 회중이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적용점을 언급하는 것은 적용의 힘을 잃고 만다. 창조적 적용을 한다는 것은 성경의 옛 진리를 오늘날 새로운 모습으로 성도들의 삶에 연결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창조적 적용이란 명분으로 옛 진리마저 바꾸는 어리석음은 피해야 할 것이다. 창조적 적용은 청중들에게 긍정적인 면에서 신선한 충격을 주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할 것이며, 실천에 옮기도록 격려할 것이다.

둘째, 적용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추상적 적용은 회중 개인들에게 모호하기 때문에 그 효과가 미미할 수밖에 없다. 구체적 적용이란 청중으로 하여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말해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청중들에게 성경 읽기를 권면할 경우, “성경을 읽으세요”라고 하기보다는 “하루 세 장씩 성경을 읽으세요”라든가 “하루 세 끼 밥을 먹듯이 식사 후에는 영적 건강을 위해 성경 한 장을 읽으세요”라고 구체적으로 권면하는 것이 좋다.

셋째, 적용은 실천 가능해야 한다. 성도들의 삶에 구체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적용은 언제나 실천 가능해야 하고 또한 측정 가능해야 한다. 막연한 적용은 막연한 행동을 낳고 또한 막연한 행동은 행동의 변화를 측정할 수 없다. (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