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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논설
총회와 총신대 이사회, 교단분열 징후가 아니기를
총회는 총신대학교 법인 이사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기사입력: 2017/11/12 [17:37]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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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 전계헌 목사)가 지금 위태롭다. 이유는 총회의 직영신학교인 총신대학교를 설치 경영하는 총신대학교 재단이사회가 총회와 상관없는 법인 정관으로 변경하여 총회와 무관한 재단이사회의 독자적인 학교 운영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과연 이 일이 가능한 일인가? 재단이사들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총회 측 인사들은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총회 측 인사들은 한결 같이 총신대학교는 총회의 직영신학교로 역사가 이를 증명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로 총회와 직영신학교와의 관계를 설정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사립학교법과 법인 정관에 따른 법률로 관계를 설정한다.

총회가 국가로부터 인가와 상관없이(무인가) 교단의 신학교를 운영하여 목사를 배출할 경우 신학교의 운영이사회는 철저히 총회가 이사회 이사 임명권을 갖게 된다. 이 경우 신학교 운영이사회는 총회를 배척하고는 운영할 수 없다. 그러나 총회가 국가 주무관청인 교육부에 인가를 받아 단순 신학교가 아닌 대학교, 신학대학원, 대학원 체제로 운영할 경우 반드시 국가의 사립학교법과 법인 정관에 의해 운영한다.

이 경우 총회는 직영신학교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길은 없어져 버린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단 직영신학교를 국가로부터 인가를 받아 운영할 경우, 학교법인 정관에 총회가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관을 만들어 주무관청인 교육부에 승인을 받아 운영한다.

본 교단 총회의 직영신학교인 총신대학교 법인도 이런 형식의 정관을 만들어 운영했어야 하는데 전혀 이런 안정정치를 마련해 두지 않았다. 필자는 그동안 10년 동안 이를 주장했다. 그동안 은혜로운 이사들이 총신대학교를 운영할 때에는 총회에 적극적으로 순종했다. 총회의 직접적인 지도를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현재 법인 이사들은 은혜롭지를 못하다. 소위 총회를 저항하는 저항세력들이다 보니 총회의 간섭과 지도, 영향력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로지 국가 주무관청인 교육부로부터 승인을 받은 정관대로 운영하겠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사회의 정관변경 권한을 발동하여 총회와의 관계 속에서 운영되는 길을 차단하는 정관으로 변경해 버렸다. 이는 총회와 무관하게 이사들만의 결정으로 학교를 운영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 소위 이사들의 사유화된 학교로 운영하겠다며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런 쿠데타가 가능한 일은 총회의 무능과 총회 내 재단이사회 이사들과 뜻을 같이하여 연대한 세력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사립학교법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장신대, 고신대, 한신대처럼 교단의 법인 정관을 총회와 관계 속에서 정비해 두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현재 총신대는 전혀 이러한 상황을 대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법적으로 총회측이 총신 법인 이사회에 그렇게 쉽게 대항할 수 있는 대항력이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언제나 신학교 문제는 교단 분열과 그 맥을 같이 했다. 1951년, 1953년, 1959년, 1979년의 분열, 2005년 개혁 측과 합병한 후 12년을 맞이했다. 요즘 총신대 사태를 보면서 적극적으로 총회 측을 대변한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단순히 시위만으로는 해결책이 없다. 과연 이 심각한 일을 총회 어떤 인사들과 의논해야 하는지도 모호하다. 심지어 증경총회장들도 침묵하고 있는듯한 사태는 총회의 분열을 예고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토록 총회 소속교회로 등록하려고 할 때 그 과정과 절차는 과히 절망적이다. 타교단에서 본 교단에 등록하고 지도를 받고 싶어도 오로지 총신을 마치지 아니했다는 이유로 등록 자체가 불가능하다. 각 노회에 등록을 하고 싶어도 교회의 대표권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담임인 본인은 등록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누가 교회만을 등록하겠는가?

칼빈대학교, 광신대학교, 대신대학교의 신학대학원 졸업생이 총회의 강도사 고시 응시 자격을 얻지 못한다. 오직 총신을 마쳐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이다. 이제 총회가 그 총신으로부터 왕따를 당한 셈이다. 한 인사는 총회가 교회 소중한 줄을 모르고, 목회자 소중한 줄을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한번은 뒤집혀 져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래서 총회의 저항세력들을 많이 양산했다.

총회 관련 특정 인사의 비리를 총회 비리로 목청껏 소리친다. 총회는 그런 사람들과 언론에 대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총회 70세 정년제에 가까운 목회자들은 총회를 탈퇴하려 한다고들 한다. 그리고 각 노회의 분쟁에 총회 일부 인사들의 간섭은 총회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한다. 이런 모습들이 제101회기와 제102회 총회 개회와 회의 진행에 보여준 모습들이었다.

현재 본 교단은 중세 암흑기와 같은 현실이라고 피를 토하는 듯한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부정과 비리를 특정 개인에게 돌리는 듯한 제102회 총회 때의 모습은 교단의 분열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무서운 일들이 현재 진행되고 있다고들 주장한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가?

총회 때마다 자신들은 거룩한 척 상대를 정죄하고 빌리도식 재판으로 정죄하고 마치 1951년 이전까지 총회에서 출옥성도들이 총회를 인정하지 않는 그 거룩한 고상함의 부르짖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 모습이 바로 총회 때마다 교회 갱신을 부르짖는 모습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 총신대학교로 인하여 교단분열이 예고된 것이라고 판단착오를 하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 한번 나서서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역사적으로 교단분열과 신학교 문제가 어떻게 맥을 같이 했는가를 보면서 현재 총회와 총신대학교 문제가 또 다른 교단 분열을 예고한 것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고신 측의 분열(고려신학교)

부산에 1946년 9월 20일에 설립된 고력신학교(교장 박윤선 목사)에 박형룡 박사는 1947년 10울 14일에 고려신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고려신학교는 개혁주의 보수신학의 확립과 교회 재건의 이상을 가진 몇 명 출옥 목사들의 소명의식에서 시작되었고 장로교 총회의 직접적 요구에 의해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연히 고려신학교는 총회의 치리와 교권 밖의 사립학교로 시작하였다. 총회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총회의 승인 하에 운영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 박형룡 박사가 귀국하여 부산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할 때 취임사를 하고 있다. 뒤에는 박윤선 박사가 보인다     ©리폼드뉴스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독립신학교 설립이념과 경영철학을 따름으로서 교단의 신학노선 변화에 신학교가 영향을 받지 않으려는 결단에 의해서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더라도 박형룡 박사는 고려신학교를 떠나 서울에 올라와 1948년 6월 9일 정로회신학교를 설립하여 개교했다. 박형룡 박사는 사설신학교인 고려신학교를 통해 목사를 양성하기보다 총회적인 신학교로 인준을 받아 신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고려신학교를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김양선 목사와 남영환 목사는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난 것이 분열의 원인으로 말도  안 된 주장으로 설명한다. 교려신학교 측은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나자 일부 교권주의자들이 다시 일어나 교권쟁탈전을 전개하였고, 이들은 고려파 인사들의 교회 갱신운동과 교회 재건운동의 이념을 흐리게 하였고, 장로교회 분열운동에 한 계기는 고려신학교를 떠난 박형룡 박사에게 장로교 분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결국 제34회 총회(1948년)는 고려신학교 지원자에게 추천해 주지 않기로 결의했다. 이같은 결의 후 경남노회는 고려신학교 인정취소와 이를 확인하는 결의를 하는 등 고려신학교는 법적으로 경남노회와 상관없음을 결의했다. 결국 비상정회한 제36회 총회(1950)와 계속회(1951)에서 고신측이 분열되고 말았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최초의 분열은 1951년 고신 측이란 이름으로 분열이 있었다.

기장 측의 분열(조선신학교, 장로회신학교, 총회신학교)

1945년 해방이후 1946년 6월 11일 남부총회(이 총회를 제32회 총회로 한다)에서 1940년 4월 11일에 개교한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가했다. 제34회 총회(1948년 4월 20일)에서 자유주의 신학으로 흐르는 조선신학교를 개혁하려고 시도했으나 완강한 반대로 거부되었다.

그러자 ‘신학교 문제 대책위원회’의 주도하에 1948년 5월 20일에 대안으로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가결하고 이사장에 이정로 목사, 교장에 박형룡 박사를 임명했다. 드디어 1948년 6월 9일에 남산에 장로회신학교(교장 박형룡 박사)가 개교되었다.

전국의 각 노회에서는 개교 다음해인 제35회 총회(1949년)에 장로회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준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총회는 표결로 51:37로 직영하기로 가결했다(회의록 59-60).
 
이제 총회 내에는 직영신학교가 조선신학교, 장로회신학교 두 개가 됐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총회는 두 신학교를 동시에 운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두 신학교를 합병하기 위해 ‘신학교 합동위원회’를 조직하여 합동하려 했으나 신학적인 문제, 이사회의 문제 등으로 합병에 실패했다. 합동이 좌절되자 총회는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제36회 총회(총회장 권연호 목사, 1950. 4. 21)가 대구제일교회에서 회집됐다. 총회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신학교 문제였다. 양 신학교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립의 연속이었다. 결국 총회는 무장경찰관까지 동원되는 난투극의 상황 속에서 총회를 계속 진행할 수 없었다.

결국 비상정회 되고 말았다. 제36회 속회 총회(1951. 5. 25)가 부산중앙교회에서 회집되어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는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총회 직영신학교를 신설하기 위하여 과도 이사를 총회에서 선정하되 과도 이사는 각 노회 대표 2인과 각 선교회 대표로 한 신학위원으로 하기로 가결”했다(회의록 104-105).
 
총회 결의에 따라 장로회신학교는 폐교 되었지만 조선신학교는 총회의 명령에 불복하고 1951년 4년제 신학대학으로 문교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개편하여 한국대학교이란 이름으로 기독교장로회(기장측) 교단 신학교가 되었다. 이 학교를 현재 한국신학대학교이라 한다.

양 신학교에 대해 총회직영인가를 취소한 후 대신 총회신학교를 설립하여 1951년 9월 18일에 대구에서 총회신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했다. 다음해의 총회인 제37회 총회(1952. 4. 29)에서 신학교 문제는 뜨거운 감자였다. 총회에서 조선신학교 측의 반대와 비난은 대단했다. 이때 이북노회 총대권 문제가 제기된다. 양 측은 이북 총대권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보수신학계열에서 숫자적인 우세를 가지므로 조선신학교 측은 숫적 열세를 면치 못하게 하는 결정이었다.

제38회 총회(1953년 4월 25일)에서 김재준 목사의 “목사직 판면(면직)” 결정은 조선신학교를 지지하는 총대들이 전부 퇴장함으로써 분쟁이 일단락됨과 동시에 대한기독교장로회(기장 측)이 분열되었다. 역사는 이를 1953년 기장 측의 분열로 기록한다.

통합 측의 분열(장로회신학교)

제44회 총회(1959년)은 통합측의 분열이 있었다. 이는 WCC라는 신학적인 문제였다. 에큐메니칼(WCC)운동은 각 교파가 지니고 있는 교파 간의 특성이나 교리들의 장벽을 뛰어 넘어서 적어도 그리스도라는 이름 아래 모이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협력하여 세계를 정치적이든, 경제적으로든 또한 인종 갈등에서든, 종교 갈등에서든 해방시켜서 세계교회를 구현하고 화해를 삼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WCC를 찬성하는 측은 연동측이라 하고, 반대하는 측은 승동측이라 했다. 제44회 총회가 대전중앙교회에서 회집되어 비상정회한 후 서울에서 각 연동교회와 승동교회에서 따로 총회를 속회했다. 연동측은 통합측 교단이 됐고 승동측은 합동 교단이 되었다. WCC에 중립적인 측과 통합했다고 해서 통합 측 교단이 됐고, WCC를 반대한 승동 측은 1951년 분열한 고신측과 합동했다고 해서 합동측 교단이 됐다.

제44회 총회 이후 연동측은 남산의 신학교에서 기물을 옮기려 하였으나 승동 측의 입장에 있던 학생들이 제지하여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했다. 나중에 학적부는 승동측의 총신의 김희보 교장 시절에 학교 직원이 학적부를 가져가서 김희보 교장이 매입을 요구했으나 거절하자 통합측에 넘어가고 말았다. 

장신대는 태릉에 토지를 매입했으나 그곳은 서울여자대학교에 매도하고 광장동에 학교를 세웠다. 총신대는 ICC 매킨 타이어에게 10만 불을 기증 받아 한강로에 4층 빌딩을 구입하여 수업을 하다가 5년 후 사당동에 현 총신대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개혁측(광신대학교)

제64회 총회(1979년 9월 20일)가 대구동부교회에서 회집됐다. 원래는 대구서현교회로 소집공고 됐으나 총회의 험악한 분위기를 예상하고 장소제공을 거절하자 재공고하여 동부교회에서 회집됐다. 예장합동 교단 내 이 분열을 주류와 비주류의 분열이라 한다. 비주류로 명명된 교단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개혁측)으로 분류됐다.
 
1979년 분열 이후 26년이 지난 후인 2005년 제90회 총회에서 1979년에 분열된 개혁측과 합동측이 합병하는 합동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합동 이후 광주에 소재한 광신대학교는 합동 총회 내 인준신학교로 광신대학교 신학대학원 학생들 중에 목회자 후보생들은 총신대에서 3주 수업을 거쳐 총회 강도사 고시 응시자격을 부여받는다.(*)

소재열 목사(리폼드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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