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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잠언 11장에 대한 목회상담적 주석 1
이관직(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기사입력: 2017/11/08 [10:14]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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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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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관직 교수     © 리폼드뉴스

이 논문은 이관직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잠언 11장에 대한 목회상담적 주석을 하며 그 의미를 목회상담적 관점에서 해석, 적용해 주고 있다.

I. 들어가는 말

상담 과정에서 성경을 어떻게 사용하며, 어떤 상황에서 연결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목회상담학자들과 기독상담학자들이 관심을 가져왔다. 필자는 『개혁주의 목회상담학』 제 13장 “상담과정에서 성경 사용 방법”에서 미국 목회상담 역사에 있어서 Cabot과 Dicks(1936)는 그들이 공저한 책 The Art of Ministering to the Sick에서 한 장을 할애해서 다룬 성경사용 방법을 필두로 Hiltner의 원리, Capps의 접근, 그리고 성경적 상담학자인 Adams에 이르는 접근은 간략하게 다룬바 있다.

성경을 상담에 연결할 때 크게 두 가지 접근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는데 하나는 ‘위로부터’(From Above) 접근이며 다른 하나는 ‘아래로부터’(From Below)의 접근이다. 위로부터의 접근은 성경말씀으로부터 출발해서 상담의 컨텍스트에 연결짓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아래로부터의 접근은 상담의 컨텍스트로부터 특정 성경 텍스트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며 접목하려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접근은 나름대로의 장단점을 갖고 있다. 필자는 위로부터의 접근을 사용하여 갖고 이 논문을 썼다.

이 연구와 관련해서 「한국기독교상담학회지」에 게재된 논문들 중에서 선행 연구로서 성경과 관련된 논문으로는 세편의 논문만 실렸다는 점에서 그동안 성경 텍스트 자체가 기독교상담에서 어떻게 연결되며 접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적었다고 보여진다. 서우경(2011)의 논문은 모세와 요셉의 삶을 정신역동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었고, 이호선(2004)은 노년기의 부부성 갈등을 해결해가는 화해 모델로서의 성경적 접근을 하였다. 그리고 홍기칠(2003)의 논문은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상담에서 성경과 기도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다루었다.

필자는 이미 잠언 1장부터 10장에 걸치는 말씀을 네 편의 논문(이관직, 2014a, 2014b, 2015a, 2015b)으로 나누어 「신학지남」에 게재한바 있다. 이 논문은 선행하는 네 편의 논문과 같은 연구방법을 사용하여 쓰여졌다. 필자의 논문 “잠언에 나타난 상담자의 자질과 상담기술”(2013)도 같은 연구방법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것은 현상학적인 글쓰기 연구방법이다.

필자는 잠언 11장을 한절씩, 또는 두세 절씩 읽어가면서 필자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인식된 부분을 다른 자료의 도움 없이 일단 글을 썼다. 사용한 성경은 개역개정판 한글성경과 NIV(New International Version) 성경이다. 히브리어 성경은 참고하지 않았음이 해석상에 있어서 한계로서 인정한다. 목회상담학자로서 필자는 각 본문을 상담현장과 접목시키는 적용점을 찾아내어 글을 썼다. 글쓰기를 마친 후에는 각 절에 대한 글 내용을 요약하는 제목을 필자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붙였다. 마지막으로는, 잠언관련 주석들을 세 권 참조하여 필자의 주관적인 해석과 주석에 대조하며 비교하면서 최종적으로 글을 정리하였다. 필자가 사용한 대표적인 주석들의 저자들은 박윤선(1976), 김정우(2007), 그리고 Bridges(2001)이다.

II. 잠언 11장에 대한 목회상담적 주석

김정우(2007, 365-67))는 잠언 11장에 대해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전체적인 구조분석을 포기하고 각 절별로 주석하는 접근을 하고 있지만 크게 다섯부분으로 이루어진 통일된 장으로 이해하였다: 1) 정직과 안전(1-8절), 2) 언어생활과 안전(9-15절), 3) 덕행과 안전(16-22절), 4) 소원과 그 역설적 성취(23-27절), 5) 인생의 승패와 선악의 보응(28-31절). 필자는 이와 같은 큰 주제를 염두에 두면서도 각 절별로 주석하는 방법을 택하여 주석하였다.

1. 속이는 저울과 공평한 추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11:1).

박윤선(1976, 154)은 “하나님은 어떤 예배하는 곳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고 상업과 기타 실업계에도 계셔서 화복을 주장하신다”고 1절 본문에 대해서 주석하였다. 은밀한 중에 계시며, 은밀한 중에 보시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을 깨닫게 하는 주석이다. 예수님은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4)고 말씀하시며 적극적인 구제활동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보응하심을 잘 말씀하셨다. 아무도 모르게 속이는 저울눈을 사용하는 자의 마음을 하나님은 보고 계시며,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지만 공정한 저울눈을 사용하는 자의 행동도 하나님이 보고 계시며 보상하신다. Bridges(2001, 77)는 이 절을 주석하면서 이 잠언은 이미 신명기 25:13-16절에서 주어진 율법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음을 밝혔다: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신 25:15).

Bunyan(2004)의 신앙소설 『지옥역정』에서 그는 지옥으로 가는 여정에 있는 ‘배드맨’(Bad Man)이라는 주인공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배드맨이 보인 악한 행동들 중의 하나는 불의한 경제 활동이었다. 배드맨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2004, 162; 이관직, 2012, 280 재인용):

먼저 무게와 길이를 속였습니다. 즉 자기가 물건을 사들일 때와 팔 때 각각 다른 저울과 자를 사용했습니다... 거짓 장부를 작성하는 기술도 뛰어났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거래 영수증을 도용하기도 했습니다... 허위 회계 장부를 작성하는 기술이 뛰어나서 물건의 양과 금액을 교묘히 속였습니다. 따라서 배드맨의 부당 이득은 곧 고객들의 손실로 이어졌지요... 이것이 바로 배드맨이 살아가는 방식이지요.

Bunyan(2004, 166; 이관직 2012, 280 재인용)은 불의하게 재물을 취하는 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취하는 사람들을 얼마니 미워하시는지 개의치 않는 이들은 재물을 손에 넣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거듭 동일한 악을 행하지요. 그렇듯 쉬임[쉼]없이 남을 속이나 결국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을 모르니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김정우(2007, 368)는 본문을 주석하면서 “경제생활과 신앙생활과 분리되지 않으며, 우리가 사용하는 저울과 추에 대해 주님께서는 확실한 감정적-의지적 태도를 취하신다”고 강조하였다.

상담적용 1: 성도들 중에 불의한 경제활동을 하는 이들이 내담자로 왔을 때 목회상담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듣든지 듣지 않든지 지혜롭게 직면할 필요가 있다. 직면의 수위와 방법은 지혜롭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것이다. 이 악습은 치명적인 죄 중의 하나인 “탐욕”과 관련되어 있으며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는 말씀이 진리임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2. 교만하며 사악한자 vs. 겸손하고 정직한 자의 결과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11:2-3).

교만의 결과는 수치와 치욕이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낮추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잔칫집에서 상석에 앉았다가 더 높은 자가 올 때 낮은 자리로 내려가 앉게 되는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눅 14:7-11 참조). 교만한 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대인관계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올 때 도와주는 사람이 주변에 없다. 수치를 가려줄 사람이 없다.

반면에 지혜로운 자는 겸손하다. 겸손한 자는 넘어질 일이 거의 없다. 겸손한 자는 대인관계에서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기 때문에 넘어질 때에도 도움과 공감을 받는다. 넘어지더라도 크게 무너지지 않으며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겸손한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그를 높여 주신다. 겸손한 자는 높은 위치에서도 인격이 변하지 않으며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

박윤선(1976, 155)은 본문의 겸손의 의미를 물과 연결하여 다음과 같이 노자의 도덕경을 인용하였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모든 생물에게 이로움을 주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즐겨 있다. 그런 까닭에 물은 도(道)에 거의 가까운 것이다.”

NIV 성경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를 “신실하지 못한 자들은 그들의 표리부동 때문에 망하게 된다”고 번역하였다. 김정우(2007, 239)는 “겉으로 볼 때 정직한 사람과 속이는 사람은 잘 구별이 안 되겠지만, 그들의 내면생활은 확실하게 구별된다”라고 사악하고 신실하지 못한 자들의 표리부동함을 잘 주석하였다. 일반 세상에서도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은 인정받지 못한다. 곧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파악하고 경계하기 때문이다. 사업을 해도 그런 사람은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신뢰감을 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표리부동한 사람,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 자신이 그런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기 때문에 여러 번 대인관계에서나 직장생활, 또는 사업에서 실패를 반복할 것이라는 점에 있다. 이런 사람들은 문제가 자신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을 탓하거나 환경 탓을 하거나 운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즉 실수를 통해서도 배우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망하게 될 것이다.

3. 공의의 효과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완전한 자의 공의는 자기의 길을 곧게 하려니와 악한 자는 자기의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리라 정직한 자의 공의는 자기를 건지려니와 사악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으나 악인은 자기의 길로 가느니라(11:4-8).

진노하시는 날은 종말의 날이다. 개인적인 종말과 우주적인 종말에 재물은 가치가 없다. 재물은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유익한 ‘잠정적 대상’(transitory object)일 뿐이다. 재물은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구원할 수 없다. 재물만 아니라 권력과 명예와 건강도 마찬가지이다. 살아 있는 동안 최고의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금은 보석과 돈은 죽음의 날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빈손으로 온 인생은 빈손으로 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의로운 자는 죽음과 진노로부터 건짐을 받는다. 그의 의는 영원한 가치가 있다. 이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이 의로운 자를 본문은 완전한 자, NIV 성경은 ‘무흠한 자’(the blameless)라고 표현했다.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자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흠도 티도 없는 자가 된 성도는 그 길이 곧게 펼쳐져 있다. 도덕적으로 조금도 흠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무흠한 자로 간주되었다는 말이다. 그 길을 순종하면서 걸어가면 영생을 얻는다. 그러나 악한 자, 즉 자신의 악한 본성으로만 살아온 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게 되지 않은 자는 넘어지며 자빠지고 영원히 일어서지 못하는 멸망을 받는다. Bridges(2001, 78)는 홍해에서 이스라엘은 구원을 얻는 반면 애굽 사람들은 물에 익사한 대조적인 사건과 모르드개는 장대에 교수형으로부터 구원받는 반면 대신 하만이 교수형 당한 사건을 8절에 대한 주석에서 예로 소개하였다.

신실하지 못한 자, 여호와 신앙이 없는 자는 자신의 악한 욕구, 육체적인 욕구를 좇다가 ‘덫에 걸린’(trapped) 삶을 산다. 김정우(2007, 371)는 이 ‘덫에 걸린’이라는 동사의 모습이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모습을 부각”시킨다고 하면서 자기 욕심에 사로잡힌 자는 결국 망하게 될 것이라고 주석했다. 이들은 악에 중독되며, 악한 습관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산다. 문제는 그런 삶을 반복하면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이다.

본문의 악한 자는 반드시 사악한 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며,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지 않는 삶을 사는 자를 말한다.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추구하던 사람이 죽으면 그가 바라고 추구하던 것들은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모든 능력의 근원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자신이 가진 지력, 체력, 재력, 인맥 등을 의지하면서 살던 사람은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는 자이다. 자신이 심장이 단 몇 초라도 멎거나 호흡이 정지되면 식물인간이 되거나 영영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영원한 사망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에 대해서 실존적인 불안조차 느끼지 않고 사는 어리석은 자이다. “재상 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들이 줄을 서지만 재상이 죽으면 찾는 이가 없다”는 속담은 슬픈 현실이다.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4. 악인과 의인의 말의 결과

악인은 입으로 그의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11:9).

하나님이 인간에게 수많은 단어를 구사하며 대화할 수 있는 입을 지으신 것은 놀라운 은총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생각을 말로 표현하며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는 중요한 지체이다. 그런데 이 입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인 가족에게 상처를 주며 친척들과 친구들, 더 나아가 타인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은 악인이다. 사람을 말로 죽이는 사람이다. 기를 꺾어놓는 사람이다. 거짓 증거하며 험담하며 욕설을 함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 사람이다. 심한 사람은 자신이 그런 공격적인 말을 해서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실 조차 모르며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차라리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더라면, 차라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람이었더라면 나았을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혀의 역기능적인 권세를 잘 지적하였다(약 3:8-10 참조).

역으로 지식이 있는 자,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는 자들은 구원을 받으며 남도 구원하게 된다. 박윤선(2007, 157)은 Bridges의 주석을 그의 주석에서 인용하면서 그의 주석이 탁월하다고 평가하였다. Bridges는 본문의 지식이 “단지 이론적인 지식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과 함께 한 진리 지식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생명 있는 지식’(The lively knowledge of God’s word)이라고 보았는데, 그것은 참으로 영적 체험이 깊은 해석”(박윤선 2007, 157)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5. 의인이 사회시스템에 미치는 선한 영향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느니라(11:10-11).

이 본문에서 의인과 악인은 왕과 같은 지도자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여진다. 지도자를 잘 만난 공동체는 샬롬과 기쁨이 있다. 좋은 목사를 만난 교회는 부흥하며 그 성도들은 행복하다. 좋은 부모를 만난 자녀들과 가족은 사는 것이 즐겁다. 좋은 사장, 지혜로운 사장을 만난 직원들은 행복하고 보람을 느낀다. 선한 왕, 지혜로운 왕이 등극하면 충신이 몰리며 백성들이 환호한다. 그러나 악한 왕, 어리석은 왕이 등장하며 간신이 들끓고 백성들은 슬퍼하며 고통한다.

군사독재 정권이 물러가고 민주 정권이 들어섰을 때 대한민국 백성들은 환호했다. 민주 정권 속에서도 대통령이 지혜 없이 행동할 때 백성들은 안타까워했고 불안해했다. 본문을 개역개정판에서는 “악한 자의 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느니라”고 번역했지만 NIV성경은 “악한 자가 망할 때 거기에는 기쁨의 환성이 있느니라”라고 번역하였다. 교단 정치에서도 지혜롭지 못하고 악한 자가 득세하게 될 때 목사들과 장로들을 비롯한 성도들의 마음은 한숨과 눈물로 얼룩지게 된다. 그러나 그런 자들이 물러갈 때 기쁨과 감사의 소리가 메아리칠 것이다.

의롭고 지혜로운 지도자는 물가에 심긴 나무처럼 사시사철 잎이 푸르며 열매를 맺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늘과 휴식을 제공할 것이다. 불의하며 어리석으며 탐욕스러운 지도자는 광야에 있는 나무와 같아서 그늘도 제공할 수 없으며 오히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찌르는 가시나무가 될 것이다.

6. 이웃을 멸시하는 자는 지혜 없는 자

지혜 없는 자는 그의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11:12).

주변 사람들을 비웃으며 무시하는 자는 판단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NIV 성경은 번역하였다. 이런 사람은 가까이 사는 사람들이 똑똑하거나 부유한 사람이면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며 사람들에게도 자랑할 것이다.

대조적으로 삶의 경험이 풍부하며 인간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자신의 혀를 절제한다”고 본문은 말한다. 함부로 이웃을 평가하지 않으며 충동적으로 말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무시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김정우(2007, 375)는 평행법의 관점에서 볼 때 1행의 ‘이웃’은 2행에도 걸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면서 그렇다면 1행의 이웃이 “멸시받을 만한 행동이나 말을 하였을 것”이라고 주석하였다. 비록 멸시받을 수 있는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혜로운 자는 침묵을 지키며 충동적으로 말하지 않는 자라는 것이다. 해야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별하는 능력이 있다.

상담적용 2: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여러 면에서 자신보다 못하거나 약한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다. 똑똑하고 우월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사람은 사실상 사람을 제대로 보는 판단력이 떨어지는 미성숙한 자이다. 외모나 학벌로 사람을 판단하는 자는 속임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사람의 내면을 제대로 보며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안타까울 정도로 미숙한 자이다.

7. 신실한 자의 비밀보장 능력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11:13).

박윤선(1976, 158)은 이 잠언 본문을 바울이 디모데에게 젊은 과부들을 경계하며 한 권면 말씀과 연결하였다: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 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딤전 5:13). 본문에서 “남의 비밀을 누설하는 것”(betrays a confidence)과 “숨기는 것”(keeps a secret)은 대조적인 행동이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a gossip)와 “마음이 신실한 자”(a trustworthy man)는 대조적인 모습을 이룬다. 김정우(2007, 375)는 이 본문에서의 ‘비밀’은 “가까운 친구 사이의 우정이며(시 55:14),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모략’이다(시 83:3; 잠 25:9)”라고 주석하면서 “비밀을 누설하는 자는 친구 사이의 우정과 약속을 파기하는 자이다”라고 보았다.

상담적용 3: Southard(1989)는 기독교상담을 “친구관계라는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 친구관계라는 맥락에서 공유된 비밀은 누설하는 것은 우정과 약속을 파기하는 행위이며 배신 행위이다.

목회상담사는 내담자의 삶의 이야기에 대해서 법에 저촉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비밀보장을 잘 지키는 자질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13절에 대한 목회상담적 의미에 대해서는 이관직(2013, 264-66)에서 상세하게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생략한다.

8. 지혜자가 백성에게 미치는 선한 영향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11:14).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전략가의 전략이 매우 중요하다.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전략과 관련된 말이다. 대통령이나 왕을 돕는 참모들이 똑똑하고 지혜가 있어야 국가가 든든히 설 수 있다. 상황을 제대로 분석하며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지혜자들이 많은 나라나 기업은 흥왕할 것이다. 그릇이 안되는 자들이 지혜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가정이나 교회, 사회와 국가는 불안해진다. 존립이 위태로울 수 있다.

전쟁을 하려면 이기는 전쟁을 해야 한다. 요행을 바라고 전쟁을 하는 것은 어리석다. 인생행로에서도 구체적인 계획과 방법을 구상하여 진행하는 것이 지혜롭다. 그냥 어떻게 되겠지 하고 일을 진행하는 것은 게으르며 실패의 위험성을 높이는 것이다.

상담적용 4: 상담을 할 때에도 상담 목표와 구체적인 치료 방법과 계획을 세우는 것을 선호하는 현실요법은 단기 상담에서 효과가 있다. 마냥 상담하는 것보다는 회기별로 전략을 세우고 내담자도 상담의 목표들을 성취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방법들은 세우고 구체적인 평가방법을 세우는 것이 문제를 명료화하며 해결하는데 더 효과가 있다.

9. 보증의 위험성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11:15).

보증이 필요한 이웃을 위하여 보증을 하는 것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는 사랑과 비견하는 행동일 수 있다. 박윤선(1976, 158-59)은 이 본문이 “남을 동정하는 의미에서 담당할 수 있는 보증을 일률적으로 금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사람아 자기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보증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라고 주석하였다. “감당할 힘이 없으면서 보증이 되는 자는 실상 허위를 행하는 자니, 그것은 금지되어야 한다”고 이어서 주석하였다. 그는 오히려 “우리가 남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필요한 보증을 하는 것이 선한 일이다”라고 잠언 기자의 관점과 달리 보증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까지 했다.

이 근거를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하여 그들의 죄짐을 담당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보증이 되신 사실(히 7:22 참조)에서 찾았다. Bridges(2001, 80)도 이기적인 동기 때문에 또는 긍휼심을 베풀지 않으려는 동기 때문에 보증하지 않는 것을 의도한 말씀은 아니라고 주석한 점에서 박윤선의 주석과 비슷한 입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증을 했던 사람이 문제가 생겨 보증해주었던 사람과 그의 가족이 졸지에 차압을 당하고 거리에 내쳐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균형있게 그리고 신중하게 고려하는 것이 잠언 기자가 주고자한 지혜일 것이다. 재정적인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의 인생에서 보증을 결코 다시 서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을 겪은 자녀들은 억울하게 파산 지경에 이른 자신의 부모를 보면서 분노와 억울함을 경험하면서 그들 자신이 보증을 서는 일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솔로몬 당시에도 보증과 담보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빌려주는 입장에서는 확실하게 돈을 찾기 위해서 보증해주는 사람을 요구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러나 시스템적으로 보증을 요구하는 사회는 결국에는 선의의 피해자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보증제도 자체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전 보다는 불필요한 보증은 요구하지 않는 시스템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혜자는 단호하게 보증하는 부분에 대해서 입장을 취한다. 보증하게 될 때에는 분명하게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보증하는 것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안전하게 살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따르면서 성경적 근거로 제시하면서 보증을 거절한다면 회피하는 것은 아닐까? 김서택(2012)은 그의 잠언 설교집에서 보증을 하지 않아야 될 이유로서 타인과 자신의 미래에 관한 것은 하나님의 영역인데 타인을 위하여 자신이 재정적으로 전적으로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영역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아무튼 지혜자는 처음 거절할 때 약간의 불안과 미안함을 느끼더라도 장기적인 파멸을 피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거절 의사를 밝히는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지혜로운 행동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균형을 이루며 적용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겉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속옷까지 내어주며 오리를 억지로 가자고 하는 자에게 십리까지는 동행해주라고 말씀하신 말씀을 통해 어느 정도의 자기희생을 각오하는 이웃사랑이 기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전하게 분별하여 각 경우에 따라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악한 사람들 중에는 친구처럼 대했다가 고의적으로 사기를 치는 이들도 있고 상대방이 거절하지 못하는 성품이라는 것을 알고 조종하듯이 보증을 요구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원칙적인 것은 보증을 거절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점에서 보증 여부에서 믿는 자들은 자유가 있다. 즉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속임을 당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보증을 서도 죄는 아니며 거절한다고 해서 죄를 짓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상담적용 5: 보증을 부탁하는 입장도 힘들겠지만 보증을 거절해야 하는 입장도 쉽지 않다. 특히 거절을 잘 하지 못하는 의존성 성격이나 회피성 성격 장애적 특성을 지닌 사람들은 ‘이중 구속’ 상황을 경험한다. 거절하자니 친분 관계에 손상이 갈 것 같고, 들어주자니 배우자에게 욕을 먹어가면서 설득을 해야 하고 혹시라도 보증 때문에 집이 망할 수도 있다는 불안 때문에 찜찜한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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