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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저항운동 재평가 4
박용규(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7/11/01 [08:49]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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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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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박용규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고(故)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저항운동을 연구하여 오늘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도록 교훈하고 있다.

4. 산정현교회 폐쇄와 신사참배 저항운동

이후 상황은 급속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주기철 목사에 대한 권고 사직을 결정한 평양노회는 그 정도의 배도에서 멈추지 않았다. 1940년 3월 제 38회 평양노회는 일제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가지며 주기철과 산정현교회를 더 한층 강하게 압박했다. 평양노회는 산정현교회 모든 장로들을 정직시키고 전권위원 7인을 임명하여 산정현교회 전권을 위임 번하이젤을 더 한층 강하게 압박했다. 노회의 결정은 번하이젤이 산정현교회와 완전히 손을 끊도록 하려는 강한 의도였다. 번하이젤은 교회 제직들과 논의하고 1940년 3월 24일 부활주일 강단에 서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는 더 이상 산정현교회와 관계를 가질 수 없게 되었고 그 이후 전권위원회가 교회의 모든 책임을 맡았습니다. 나는 산정현교회 제직 몇 사람과 그 문제를 이야기하고 … 나는 내가 부활주일 강단에 서지 않고 그 일을 전적으로 7인 전권위원회에 맡겨야 할 것 같다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밝고 맑고 영광스런 부활주일이 도래했고,” 번하이젤은 그로부터 이틀 후 1940년 3월 26자 편지에서 이날 일어난 상황을 소상하게 적어서 미국해외선교부에 보냈다. 바로 이날 부활주일 오전 11시 일제의 꼭두각시 역할을 한 평양노회가 파송한 7인 전권위원들이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마치 행진을 하듯 산정현교회당 안으로 들이닥쳤다. 이들이 교회당 안으로 들어와 잠시동안 앉아 있을 때 양재연(梁在演) 집사가 단으로 올라가 찬송 한 장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곳에 모인 600명 혹은 그 이상의 산정현교회 교인들이 그 찬송을 불렀다. 찬송 마지막 절이 끝나자 양재연 집사는 회중들에게 찬송 20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부르자고 요청했고, 전체 성도들이 양 집사를 따라 그 찬송을 온 힘을 다해 불렀다. 회중이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 마지막 절을 끝내면 양 집사는 1절부터 다시 부르기 시작하였고 교인들은 따라 불렀다. 그런 식으로 양재연 집사와 온 교우들은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불렀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은 1529년 2월 신성로마제국 칼 5세가 프러시아 제후국들이 로마 가톨릭 식으로 예배를 드릴 것을 강요하자 독일종교개혁의 선구자 마르틴 루터가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담대히 나가 싸울 것을 독려하기 위해 만든 찬송이었다. 이날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소리가 계속해서 산정현교회당 안에 메아리쳤다.

루터가 개혁의 기치를 높이며 불렀던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은 돌이켜 보면 폐쇄 위기에 처한 산정현교회 상황에서 너무도 적절한 찬송이었다. 마치 성령께서 온 회중들을 인도하신 것 같았다. 회중은 세상의 권력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두려움도 잊은 채 오직 하늘 아버지만 바라보고 그만 섬기겠다는 결단을 찬송으로 승화시켜 표현했다. 타락한 교권에 맞서고 그 교권을 앞세워 민중을 농락하는 중세 로마가톨릭의 부패에 맞서 절대권력에 전혀 아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담대하게 나갔던 마틴 루터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날 온 교우들은 찬송소리와 함께 신사참배반대의 봉화불을 하늘 높이 올려 보냈다.

양집사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 1절을 부를 때 3명의 전권위원들이 강단에 올라가 설교단 뒤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양집사를 따라 온 교우들이 찬송을 계속부르자 약 20분이 지났을 때 그 중의 한 사람이 이제 예배를 드릴 시간이니 찬송을 중단하라고 양집사에게 요청했다. 그런데도 양집사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해서 찬송을 인도했다. 그러자 잠시 후 한 경찰이 단에 올라가 양집사에게 그만하라고 강하게 명령했다. 그런데도 그가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찬송을 부르자 그 경찰이 다른 경찰을 불렀고 두 사람이 단에 올라 양집사를 단에서 끌어내려 후문을 통해 교회 건물 밖으로 데리고 나가 경찰서로 연행했다. 그후에 평양노회장이 일어나 손을 흔들며 조용히 하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온 회중은 그가 손을 흔들면 흔들수록 더 큰 소리로 찬송을 불렀다. 그런 후 또 다른 전권 위원 목사가 조용히 하라고 손짓하고는 그와 다른 전권위원들이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지만 산정현교회 온 회중들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계속해서 큰 소리로 불렀다. 그리고 이어 또 다른 전권위원과 다른 전권위원들이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교인들은 계속해서 찬송을 불렀다.

그런 후 다른 목사가 일어나 그 성경을 읽고 팔을 격렬하게 흔들며 조용히 할 것을 주문했지만 찬송소리에 뭍혀져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설교도 시도했지만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 소리에 잠겨 버렸다. 필자는 인류 역사상 이런 저항이 있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필자의 상식으로는 이런 용기와 저항은 기독교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당황한 일경들은 병력지원을 긴급 요청했고 곧 바로 경찰들이 산정현교회당으로 들이닥쳐 교인들에게서 찬송가를 강제로 빼앗고 닥치는 대로 그들을 구타했다. 그런데도 극렬하게 대들거나 찬송을 부르는 교인들의 이름과 주소를 조사하고 명단을 작성했다. 시간이 지나 이렇게 예배는 마쳤다. 단에 올라갔던 3명의 목회자들은 전혀 예배를 인도할 수도 자신들의 의도대로 진행할 수 없었다. 이들은 예배가 끝날 즈음 “부끄럽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강단 아래로 내려왔고 청중들은 해산하기 시작했다.

번하이젤 여사 헬렌은 너무도 소중하고 거룩한 부활주일이 평양노회와 경찰들의 방해로 인해 제대로 예배도 드리지 못하고 혼란스럽게 끝난 것과 그 과정에서 진행된 일련의 충격으로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한 경찰이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경찰이 왜 여기에 앉아 있으냐고 그녀에게 말하자 헬렌은 “당신은 나를 감시하러 여기 왔느냐?” “나는 지난 35년 동안 내가 이곳에서 행한 대로 예배를 드리러 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경찰은 “예배가 이제 끝났다, 그러니 너는 가야 한다.”고 경고했다. 내가 주일학교 교장으로 여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화가 난 경찰이 2-3명의 동료 경찰들을 불러서는 그녀를 강제적으로 잡아채고는 바닥에 쓰러트리고 발로 차고 발로 짓누른 후 교회당 정문 쪽으로 끌어냈다. 그녀는 허리를 다쳤고 어깨에 찰과상을 입었고 신경이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날 남자장년주일학교는 모이지 못했고 여자들도 평소의 3분의 1 정도인 약 100만 참석했지만 정상적으로 가질 수 없었다. 교회를 나오면서 그녀는 노회가 파송한 전권위원 가운데 2명을 만났을 때 그 부끄러운 행동을 노회 이름으로 할 수 있었는지 그들이 한 행위를 나무랐다. 반하이젤이 3월 26일 자 편지에서 밝힌 것처럼 24일 부활절날 오후 장로 한 사람과 5명의 남자, 여자 6, 7명이 체포되었고 주기철 사모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번하이젤이 편지를 쓰던 26일까지 풀려나지 못했다고 편지에서 밝히고 있다. 연행된 숫자가〈동아일보〉는 30명이라고 보도했다. 산정현교회당이 폐쇄당한 것은 바로 1940년 3월 24일 부활절 오후였다. 번하이젤은 이렇게 편지에서 밝혔다:

[부활절] 주일 오후 4시 전권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 경찰 한 명을 대동하고 산정현교회에 나타나서는 교회당 열쇠를 확보하고는 모든 교회문을 잠그고는 산정현교회 집회는 노회 전권위원회의 명령에 의해 당분간 정지한다는 경고장(“금반형편에 의하여 당분간 산정현교회 집회를 정지함”)을 붙였습니다. 경찰은 평양노회를 통해 모든 일들을 집행하고는 그에 대해서 자신들은 전혀 책임이 없다고 공언했습니다. 확실히 일경과 그 하속들, 일곱명의 전권위원회는 교회를 괴멸하고 혼란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들을 강제적으로 배도의 과정으로 이끌려는 시도에 순복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진리와 신앙의 자유에 대한 간절한 열망에 대한 그들의 증언이 공개적으로 아주 분명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셈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된 신앙을 타협하기 보다 새로 지은 자신들의 아름다운 교회 건물을 폐쇄하도록 하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평양노회와 주기철의 산정현교회가 너무도 극명하게 다른 노선을 걷고 있었다. 하나님과 역사 앞에 선 이들과 자신들의 보신을 생각하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순응하며 타협의 길을 걸어간 한국교회가 극적인 대비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1938년 신사참배를 결정한 한국장로교회가 신앙의 정통성을 상실한 차원을 넘어 얼마나 배도의 길을 걸어갔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1907년 사도행전 이후 가장 놀라운 성령의 역사라고 평가하는 평양대부흥운동이 임했던 평양이 이제는 배도의 성, 바벨성으로 변한 것이다. 평양노회가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주기철 목사의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사직”시키더니 이제는 그가 담임목사로 섬겨온 산정현교회마저 폐쇄한 것이다. 평양지역을 대변하는 평양노회가 평양대부흥운동의 그 놀라운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은혜를 배도로 갚은 것이다. 오늘날 평양이 지구상의 가장 어두운 곳, 세상이 조롱하는 곳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평양노회의 배도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교회가 폐쇄된지 약 2주 후 아버지 주기철 목사와 어머니 오정모 사모가 투옥된 상태에서 평양노회 소속 두 사람의 목사와 열 다섯명의 형사가 주기철 목사 사택에 들이닥쳐 주광조, 주영해, 노모를 집밖으로 끌어냈다. 주광조는 훗날 이렇게 증언했다:

두 목사님은 주머니에 쪽지를 하나 끄집어내어 읽고서는 그것을 두 아들에게 주었다. 그 쪽지는 ‘주기철 목사가 산정현교회에서 파면당해 이제 목사도 아니니 목사관에 있을 자격도 없고 평양노회에서 이 목사관을 평양신학교 교수 사택으로 전용하기로 했으니 오늘 당장 나가 달라.’는 이른바 ‘목사관 전도 명령서’였다.

노모가 ‘하나님이 주신 집인데 주 목사가 와서 같이 나가자고 하기 전에는 절대 나갈 수 없다.’고 소리치자 형사 한 사람이 노모를 번쩍 안아다가 대문 밖에다 내팽겨쳤다. 그 추운 겨울, 집을 잃어버린 노모와 두 아들은 헛간에서 사흘을 보내고 길거리로 쫓겨나고 말았다. 주기철의 가족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13번이나 집을 옮겨 다녀야 했고, 영진은 염전과 탄광을 전전해야만 했고, 영해와 광조는 동방요배 거부로 숭덕학교에서 쫓겨나 킨슬러 목사가 경영하는 성경구락부에 다녀야 했다.

이런 혹독한 시련 가운데서도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산정현교회 폐쇄] 그 후 교인들은 지하교회를 형성하여 낮이면 채정민 목사의 집에서, 밤이면 이인재 전도사의 집에 모여 예배를 계속하였다. 또한 유년부 어린이들은 정낙선 집사의 집에 모여 주일학교 교육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일경은 이러한 지하교회도 단속을 늦추지 않았고 소규모의 모임조차 허용치 않았다. 이러한 상황 중에 백인숙 전도사는 계속해서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였고 전교인을 거주 구역별로 일곱 구역을 나누어 매일 한 구역씩 돌아가며 예배를 인도하였다.” 방계성 장로의 아내 박분옥과 백인숙 전도사, 오정모 사모는 매일 심방하며 교인들을 독려했다. 매주일 20-40명이 오정모 사모와 함께 집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다.

주기철의 타협하지 않는 신앙과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저항소식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1940년 이기선은 철산용산교회 박신근 집사로부터 “평양산정현교회에서도 신사참배 반대하는 이들은 교회에 안 나가고 자택에서 예배를 본다. 우리도 끝까지 성경대로, 신앙은 계속하여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는 절대로 배격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해 4월 한상동은 채정민에게서 “평양산정현교회가 신사불참배로 목사 주기철은 검속당했으나, 남은 신도들이 적시 굴복하지 않고 완강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 최근에는 당국도 이들 불참배교도들의 완강한 태도에 약간 굴복한 감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5. 마지막 검속과 주기철의 순교

번하이젤 선교사는 그 고난 길, 십자가의 길, 가장 힘든 그 길을 산정현교회와 함께 걸어가던 그 시절 한 통의 편지를 써서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보냈다. 평양노회 임시회가 주기철과 한국교회 앞에 부끄러운 결정을 내린 후 번하이젤은 참찹한 심정으로 “우리는 결코 이 죄악의 옛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며 이렇게 썼다.

당신은 한국교회를 이교화시키고 한국교회를 정부의 완전한 통제 하에 두려는 일본정부의 노력을 어느 정도 잘 알고 있으리라고 봅니다. 모든 외관상으로는 그들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전반적으로, 그리고 크리스천 대중들은 이따금씩 일정한 간극으로 신사에 가서 참배할 것을 요청받습니다. 물론 일본 정부는 신사참배 행위가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고 단지 애국적인 행위라고 말하며 국민을 속이고 있습니다. … 처음에 목사들과 다른 교회 사역자들은 거절하고 투옥을 당하고 심하게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지가 꺾였고 굴복한 많은 사람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입장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목사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시무를 사면하고 개인 생활로 은퇴하였습니다. 다른 이들은 시무를 사면하거나 교회를 목자 없이 버려두기보다는 신사에 가서 참배를 하는 데 동의하였습니다. 경찰은 그 문제에 대해 신앙적 고집을 버리지 않고 양심의 자유를 유지하려는 어떤 이들에게는 강제로 목회를 그만 두게 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아마도 이 나라에는 신사참배 명령에 순복하지 않는 현직 목사들은 없고 신사참배 하라는 지시가 내려올 때마다 신사에 갑니다. 그러나 여기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주기철]와 산정현교회 부목사와 전도사 모두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체포를 당해 8개월 동안이나 옥중에 보내졌습니다.

주기철과 산정현교회는 신사참배강요에 저항하며 길고 긴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었다. 일제는 1940년 4월 20일 잠시 주기철을 가석방 했다가 6월에 다시 검속했다. 한상동, 주남선 등 10여 명을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주동자로 구속하면서 함께 주기철을 구속한 것이다. 반대운동의 중심 그 배후에 주기철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3개월 후 9월 25일 애양원에서 신사참배강요에 저항하던 손양원 목사가 여수 경찰서에 검속되었다. 주기철과 뜻을 같이하던 방계성, 한상동, 이기선, 손양원이 투옥된 것이다.

1940년 10월 감리교 역시 “외국인들은 교회와 기관에서 리더십의 직분 혹은 대표직을 맡지 않는다.”고 결의했다. 그 다음달 11월 10일 장로교도 동일한 결정을 내렸다. 주기철 목사 권고 사직을 결정한 평양노회장 최지화는 제30회 평양노회에서 “비상시국을 당하여 본 노회 각 시찰구역 내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을 노회로부터 손을 떼게 하고” 더 이상 관여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1940년 10월 주한 미영사 마치는 미국 선교사들의 철수를 결정했고, 전체 9분의 5에 해당하는 160명의 선교사와 49명의 자녀들을 포함 모두 219명이 다음달 11월 16일 마리포사(S. S. Mariposa) 호를 타고 한국을 떠나 11월 29일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했다.

1941년 9월 6일 번하이셀 부부는 힐, 버츠와 함께 한국을 떠났다. 1900년 10월 18일 26살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 도착해 41년 동안 한결같이 한국교회를 섬겼던 버하이젤이 산정현교회를 뒤로 하고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의 한국사역과 산정현교회는 분리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국 사역 41년 가운데 35년을 산정현교회를 위해 바쳤으니 말이다. 남아 있던 선교사들도 한국을 떠났고 그래도 끝까지 버티며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40명의 선교사들도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2년 4월 모두 한국을 떠났다.

그로부터 2년 후 1944년 4월 21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주기철은 자기와 힘든 싸움을 계속했다. 이 기간 그가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냈는지 그가 얼마나 조국교회를 위해 생명을 담보로 기도를 드렸는지, 그리고 얼마나 그가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를 했는지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이 기간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주기철에 대해 남긴 기록들을 통해 단편적이나마 그의 모습을 유추해 볼 뿐이다. 그를 지켜본 이들은 주기철이 유치장 안에서도 믿음의 용사답게 신앙의 절도를 지키며 주변의 사람들에게 싶은 인상을 남겼다고 증언한다. 4차 수감되었을 때 주기철과 같은 감옥에서 지낸 〈죽으면 죽으리라〉 저자 안이숙은 투옥 중에 옥중에서 그를 만나고는 “주기철 목사를 가까이 보니 참으로 거룩해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이숙은 1942년 경 그 혹독하게 추운 날 재판소를 향하는 과정에서 주기철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받은 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그(최권능) 뒤에 나오시는 주기철목사를 보았다. 그야 말로 목자를 따라가는 어린 양의 모습 같았다. 얼마나 거룩해 보이고 그 얼마나 고상한지, 햇빛을 못 본 그의 조각상 같은 미모의 얼굴은 맑고 희며, 발산되는 듯이 느껴지는 그의 순교열은 뜨거운 인상을 내 마음 속에 새겨주었다.

주기철과 안이숙은 같은 날 검거되어 평양경찰서 유치장에 마주보는 감방에서 1년을 같이 보냈다. 안이숙은 주기철을 잘알고 있고 그를 신앙적으로 흠모하고 있었지만 주기철은 안이숙을 몰랐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자신의 감방이 주기철의 감방과 맞은 편에 서로 있게 되어 손가락으로 주목사와 처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후 주기철은 안이숙과 손가락 회화로 여러 번 대화를 나누었다. 안이숙이 일본에 가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주기철은 그녀에게 격려했다.

그는 안이숙에게 어느 날에는 쑥갓을 실컷 흰밥과 함께 마음껏 먹고 싶다는 의사도 피력했다. 주기철 그는 순교자이기 전에 평범한 한 인간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강인한 정신력과 신앙을 소유했지만 이 땅을 살았던 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주기철의 고난이 더욱 아름답고 값진 것이다.

1944년에 접어들자 주기철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고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까지 도래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감한 듯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여보 나는 아무래도 몸이 견디지 못할 것 같소. 나는 주님이 맡긴 짐을 지고 가느라고 어머님 봉양을 못해드려서 송구스럽소. 나를 대신해서 어머님을 부탁하오. 나는 하나님 품에 가서 주님의 한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겠소. 교회에 이 말을 전해주시오. 나를 웅천에 가져가지 말고 평양 돌박산에 뭍어주오. 내 어머님도 세상 떠나시거든 내 곁에 뭍어주오. … 우리 한국교회 장래는 어찌될 것인가? 한국교회에 닥쳐 올 시험은 오늘의 신사참배 문제 뿐 아니라 이 문제가 지나가면 또 다른 시험이 오고 점점 더 어려운 시험이 닥쳐 올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 한국교회가 진리에 바로 서야 하겠는데 양떼를 잘 먹일 참 목자는 누구일까? … 산정현교회 교우들이 보고 싶소. 진리의 교회가 돼야지 … 내가 생명 보험에 든 것 찾아다가 영진이 장가 보내주고 어머님 세상 뜨시면 장례 치러주시오.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감한 주기철이 마지막 유언을 남긴 것이다.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도 그는 조국교회의 미래를 깊이 염려한 한국교회 참 목자였다. 자신의 죽음을 정확히 예견한대로 8일 후 21일 오후 9시 30분 주기철은 마지막 온 힘을 다해 “내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드시옵소서!”라고 기도 드린 후 잠시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간수들이 보니 운명하는 순간에도 주목사의 얼굴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주기철은 순교자 반열에 올랐다. 김인서의 말대로 “주님께서 순교자의 면류관”을 그의 머리에 씌워 주셨다. 주기철이 옥중에서 순교하던 날 그의 온 식구들은 그를 위해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그가 순교한 그 다음날 4월 22일 토요일 12시 경 산정현교회 교우들 유계준 장로, 김경진 집사, 양재연 집사, 송소영 집사, 정인복 교우가 손수레를 가지고 와서 주목사의 시신을 인수받아 평양 상수리에 있는 초라한 두칸 방으로 옮겼다. 자신을 웅천에 가져가지 말고 평양 돌박산에 묻어달라는 그의 마지막 유언대로 그는 돌박산에 잠들어 있다. 자신의 마지막 생애를 혼신을 다해 섬겼던 평양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한 가지 역사 앞에 진실을 기록할 것이 남아 있다. 그것은 주기철의 죽음이 단순히 옥중병사였느냐 타살이었느냐 하는 문제다. 신사참배 반대라는 동일한 죄로 주기철과 같은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안이숙 여사는 1968년 한국을 떠난지 20년만에 고국 땅을 밟고 주기철 목사의 사인이 병사가 아니라 살인 주사를 맞고 타살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혔다. 1968년 7월 20일 〈기독신보〉 변순재 기자가 안이숙 여사의 인터뷰한 기사가 “밝혀진 주기철 목사의 사인,” “안이숙 여사가 25년만에 사실을 폭로,” “아프다에 살인용 주사,” “한인 의무과장 돌연 출장 보내고”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약 2개월 전에 귀국한 바 있는 안이숙 여사(로스앤젤스 한인교회 담임 김동명 목사 부인)는 지난 15일 오후 본사 변순재 취재부장과 만난 자리에서 일정 말 신사참배 반대로 옥에 갇혔다고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죽음이 병사가 아니라 일본경찰이 살인용 주사를 놓아 죽였음을 폭로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사실은 당시 평양감옥에 병감방에 갇혀 있던 안여사가 동 형무소 의무과장(한국인)으로부터 듣은 사실이라고 한다. 특히 병약한 안 여사에게 친절을 베풀던 의무과장이 하루는 안 여사에게 주기철 목사의 주검을 알려주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귀뜸해 주었다고 한다. 즉 의무과장이 하루는 상부로부터 갑자기 출장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령대로 평양에서 해주에 갔다오니 조수(일본인)가 “주기철 목사의 사망”을 보고하기에 시기적으로 생각밖이라 눈을 부릅뜨고 “무슨 말이냐?”고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일본인 조수의 답변이 “몸이 아프다기에 주사를 놓았으나 죽었습니다.”고 말하기에 빈주사통을 자세히 보니 살인용 주사였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을 듣고 안여사는 삼일간 울었다고 한다.

김충남 목사도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생애〉에서 안이숙 여사의 증언을 인용하면서 주기철이 병사한 것이 아니라 타살된 것이라고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 교계에선 평소 몸이 허약했던 주 목사의 건강 상태와 옥고에 시달리면서 더욱 악화된 병으로 인한 옥중사로 단정하고 믿어 오는데 이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 1968년에 〈죽으면 죽으리라〉의 옥중 수기를 간행키 위하여 20년 만에 일시 귀국했던 안이숙 여사에 의해 병사로만 알아오던 주 목사의 사인이 비로소 베일을 벗게 되었다. 안이숙 여사는 필자와의 대담에서 주 목사는 병사가 아니라 타살이라고 증언했다. 안이숙 여사가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형무소 의무과장에게 들은 극비의 사실로 의무과장을 출장 보내고 그 조수에게 시켜서 주사로 타살케 했는지 그 조수가 또 다른 사람에게 시켰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타살이었다고 했다.
 
주 목사가 병감에 있을 때 주사에 물을 넣었는지 공기를 넣었는지 혹은 어떤 독약을 넣었는지 모르지만 주사로 인한 타살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그 때 어느 간수를 통하여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안여사는 식음을 전폐하고 사흘을 계속 흐느꼈다는 것이다. 육체적인 인정 때문이 아니고 분하고 억울해서 그토록 슬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규명되지 못하고 지금까지 의문시된 것은 그 때 오정모 집사가 시신 인수시 주사자국을 확인하여 검진하지 못했기 때문에 타살이었다는 사실이 감추어지고 만 것이다.

안이숙 여사가 일본 간수를 통해 주기철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되었고, 그녀는 김충남 목사에게 이 사실을 들려 준 것이다. 필자 역시 주기철이 독살되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접하는 내용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내 심장이 너무도 박동치는 것이 느껴진다. 그만큼 충격을 받은 셈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제의 행위는 천인공로할 일이며,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만행이다. 일제는 지속적으로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주기철을 아예 앞당겨 저 세상으로 보내고 싶어 그에게 우호적인 한인 의무과장을 갑자기 출장 보내고 일본인을 시켜 타살한 것이다. 한 조수가 임의로 그런 행동을 실행에 옮겼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제가 독극물을 놓아 그를 죽였다면 일제는 주기철 목사를 두 번 죽인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이 진실을 역사에 기록으로 남기지 않을 수 없다. 이것으로 일제가 얼마나 이 민족에게 못된 짓을 했는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어쩌면 주기철의 순교는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진행형이다. 그가 마지막 유언에서 우려한 대로 그 이후에도 한국교회에는 계속해서 제 2, 제 3의 새로운 도전의 바람이 불어왔다. 공산주의 도전, 이단의 도전, 자유주의 도전, 세속화 도전, 물질만능주의와 배금주의, 성적타락, 서구로부터 밀려드는 동성애 문제는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시대마다 도전의 주제는 달랐지만 세월이 가도 변함 없는 한 가지는 사실은 그 투쟁의 본질이 진리에 대한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6. 맺는 말

필자는 1996년 제 1회 소양 주기철 기념강좌 발표를 하면서 생면부지의 주기철을 역사를 통해 처음 만났다. 나는 그를 한번도 만난 적도 없지만 그는 나의 신앙에 너무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91년 총신의 교수로 부임해 흐트러진 나의 신앙의 옷깃을 여미게 해준 주인공이 바로 주기철 목사였기 때문이다.

평범한 한 인간이 얼마나 비범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 인물이 바로 주기철이었다. 그가 남긴 족적과 설교와 사상과 대쪽 같은 신앙의 절개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오고 가는 세대에 귀감과 사표가 될 것이다. 주기철이 더욱 빛나는 것은 그가 지극히 인간적인 너무도 평범한 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그가 마지막으로 던진 말은 ‘여보 나 슝늉 한 그릇 먹고 싶소’였다.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 기둥을 부여잡고 엉엉 울며 일경 앞에 자신의 구속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노모와 처자를 염려했던 한 인물이 바로 주기철이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께 ‘아버지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했던 인간 예수가 자신의 뜻을 뒤로 하고 아버지의 뜻에 순복했기 때문에 그의 십자가가 더욱 위대한 것처럼 주기철에게도 인간 주기철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순교가 더욱 빛나는 것이다.

여자와 돈과 명예에 깊숙이 물들어 버리고 돈을 하나님 삼으며 세속화와 온갖 우상에 깊이 물들어 버린 한국교회는 주기철의 순교 신앙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총회장 홍택기와 평양노회장 최지화만 배도의 길을 걸어간 것이 아니라 총회와 전국 노회 산하 전교회와 목회자가 배도의 길에 동참했고, 온 교우들도 배도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순교자 주기철의 목사 사직을 결정한 것은 평양노회지만 평양노회만 그 결정에 동참한 것이 아니라 당시 모든 교회가 동참한 것이고 그 교단에 속한 우리 모두도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1954년 제 39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정을 취소하는 결정을 내리고 참회를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1952년 고신의 분열, 1953년 기장의 분열 이후의 결정이기 때문에 반쪽만의 결정이었다. 게다가 각 노회와 개교회의 회개운동이 동반되지 않은 단순히 총대들의 총대 기간 동안만의 회개로 그친 형식적인 결정이었다.

우리 모두는 총회가 교회만 아니라 사회와 민족 앞에 부끄러운 일을 결정하고 온 교우들을 배도로 몰아넣은 선조들의 죄과를 깊이 회개해야 할 것이다. 늦었지만 과거 평양노회의 역사성을 계승한 예장 합동 동평양노회를 비롯한 몇몇 노회에서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결정을 취소하고 회개하는 기회를 갖는 것은 참으로 감사하고 다행한 일이다. 한국교회는 민족적 죄과에 대한 깊은 자기 반성의 기회를 갖고 이를 한국교회 갱신과 회복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정치권은 당시와 같은 부끄러운 결정을 다시는 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신앙의 순결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를 돕지는 못할 망정 그를 또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야 말로 그를 두 번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해서 한국교회 전체를 배도의 길로 걷게 만들었다면 평양노회는 신사참배에 맞서며 신앙의 순결을 지키는 주기철 목사를 정죄함으로 그 배도의 길의 선봉에 선 것이다. 돌이켜 보면 당시 감리교와 장로교 모두 한국교회 총회와 노회 모두 하나님과 주기철 목사와 한국교회 앞에 너무도 못할 짓을 저질렀다. 그러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 공범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진심으로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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