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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저항운동 재평가 3
박용규(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7/10/25 [12:22]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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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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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박용규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고(故)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저항운동을 연구하여 오늘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도록 교훈하고 있다.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 결정 기록과 서지학적 검토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 내용에 대한 이해가 후대에 와서 평양노회 임시회록의 기록과 달리 면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는가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기철 목사에 대한 역사사료적, 서지학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저항운동과 순교에 대한 논고와 저술은 1950년부터 꾸준하게 출간되었다. 1950년대 주기철 목사에 대한 두 편의 저술이 출간되었다. 하나는 안용준의 〈태양신과 싸운 이들〉(부산: 칼빈문화사, 1956)이고 다른 하나는 김인서의 〈주기철 목사의 순교사와 설교집〉(부산: 신앙생활사, 1958)이다. 전자는 신사참배를 반대한 이들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그들의 신사참배 저항을 기술하면서 그 첫 번째로 “진리운동의 선구자 주기철 목사와 그 부인”을 다루었다. 여기서 안용준은 평양노회 임시회에서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후 주목사님은 여전하게 여일하게 신앙투쟁을 계속하시니 시국이 자꾸 악화되여 감을 따라 국민지도상 사상통일의 필요가 긴박한 당국은 이제는 더 주목사님을 사회에 둘 수 없었고 또 한편 황민화(황민화) 운동을 인식하여 종교보국에 나선 지도자들은 신앙사수 보담도 교회 사수를 빙자하고 당국에 호응해서 이런 일에 적극 협력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 3차로 검속을 하려는데는 이제부터는 아조 혹독하게 모든 일을 진행시키는 것이었다. 첫째로 주목사님에게 산정현교회 사면을 권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 목사님은 내 입으로는 사면한다는 말은 못하겠다고 강경히 반대하시었다. 둘째로 교회 제직이나 교인들을 유혹해서 주목사님을 파면시키도록 하였으나 이 역시 전체교회 교인이 반대하였다. 그러고 보니 셋째 노회에서 전권위원 7인을 파송해서 주목사가 없으니 노회에서 파송받은 대표가 이 교회를 감독하겠다고 강제 억압을 하는 것이었다. 그 때는 마침 1940년 3월 23일 부활주일이었는데 그들이 와서 말하기를 1) 주목사는 파면시키고, 2) 동사목사 편하설 선교사는 금단시키고, 3) 일곱 장노님들은 정지시키고, 4) 당회장은 노회에서 택하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날 예배를 집행하겠다고 소위 위원장이라는 장모 목사가 등단하는 것을 양재연 집사가 나서서 제 204장 찬송가를 부르자고 하여 예배집행을 반대하였는데 이 까닭에 벌써 포위하고 있던 사복형사들에게 남녀 삼십명이 검속을 당하였으나 이 반대를 진압시키지는 못했다. 그 때 채정민 목사님도 검속을 당하여 사십일동안 구류를 당하셨다는 것이다.

안용준은 1940년 3월 19-22일에 열린 제 38회 평양노회에서 신학계속 허락을 받은 인물이라 평양노회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안용준의 위 기록은 주기철에 대한 2차 자료로 후대 작품들에 많이 인용되어 왔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안용준은 1939년 12월 19일에 열린 평양노회 임시회 결정, 이듬해 3월 19-22일에 열린 제 38회 평양노회 결정,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후에 있었던 부활절 주일날 일어난 사건을 혼돈하고 있다.

둘째, 그가 제시한 4가지 사항 가운데 1항과 4항은 1939년 12월 임시노회에서 결정된 사항이지만 내용이 다르다. 셋째, 2항과 3항은 임시노회 이후에 결정된 것이다. 2년 후 김인서가 기술한 〈주기철 목사의 순교사와 설교집〉는 안용준의 기록과 유사하지만 약간 다르다.

평양노회의 주 목사 파면

악독한 일제 당국은 주목사를 잡아 가두고도 유위부족하여 목사 사면서를 강요하여 두들겼다. 그러나 주목사는 〈나는 목사의 성직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그만 두라기 전에는 절대로 사면할 수 없다〉고 뻗치었다. 이에 궁한 일제 경찰당국은 평양노회장 최지화 목사를 불러 〈주 목사를 파면하라〉고 엄명하니 최 목사는 하는 수 없이 주 목사를 면회하고 〈주 목사가 사면하면 주목사도 평안해지고 산정재교회도 평안해지고 평양노회도 평안해지겠으니 제발 사면해주시오〉 간청하였다. 그러나 주 목사는 〈내 목사의 성직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그만 두라 하시기 전에는 사면 못합니다.〉 평양노회장은 여러 번 주목사를 면회하고 여러번 간청했으나 주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당신들 말을 듣는 것이 어느 것이 옳겠습니까?〉 더 강경하여졌다. 평양노회는 남문외 예배당에 회집하여 1) 주기철 목사는 파면함, 2) 편하설 선교사가 산정재 강단에 서는 것을 금지함, 3) OOO 목사를 산정재교회 당회장으로 택함,
4) 산정재교회 수습위원으로 장운경 목사, 박응률 목사, 이인식 목사 등 7인을 택함.

‘주기철 목사’를 파면 결정할 때 우성옥 목사 〈아니오〉 소리치고 검속당했고 편하설 선교사 불법노회요 소리쳤다. 산정재 박정익 장로 이것은 노회 아니오 하고 퇴장하였다.

주기철 목사에 대한 평양노회의 권징과 관련된 안용준과 김인서의 내용이 1939년 12월 19일 제 37회 제 1차 평양노회 임시회의 기록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들이 제 37회 제 1차 평양노회 임시회의 기록을 근거하지 않고 여러 기록들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전쟁 등 사회적 혼란으로 평양노회록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증언이나 여타 다른 것에 의존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이들 두 사람의 기록을 당시 제 37회 제 1차 평양노회 임시회록이나 이어 열린 제 38회 평양노회록, 그리고 관련 자료들의 기록들을 비교 검토할 때 기록상의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1939년 12월 19일 남문외교회당에서 열린 제 37회 제 1차 평양노회 임시회에서는 당시 노회촬요에 있듯이 안용준이 제시한 4가지 중에서 1항과 4항에 대한 결정만 했다. 게다가 기록상의 오류도 눈에 띤다. 안용준은 “당회장은 노회에서 택하겠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평양노회 임시회록 촬요는 “이인식 목사를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임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인서가 4항에서 말한 수습위원은 전권위원으로 수정해야 한다. 그리고 제 1항의 “주기철은 그 목사직에서 파면함”은 평양노회 임시회록의 내용이 아니라 당시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을 보도한 1939년 1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기사(‘문제의 목사는 파면코)’이다.

안용준이 “주목사는 파면시키고”라고 한 것을 김인서는 “주기철 목사를 파면함”이라고 기록하고 잠시 후 “주기철 목사를 파면한 평양노회”라고 함으로써 주기철에 대한 평양노회의 징계를 목사 파면으로 기록하고 있다. 안용준이나 김인서 모두 “목사 파면”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목사면직이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안용준과 김인서의 책이 출간된 후 이들 서적들은 주기철 목사에 대한 권위있는 글로 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이후 출간된 주기철 목사에 대한 저술의 중요한 방향을 결정했다. 여러 저술들에 나타난 주기철에 대한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 내용은 안용준과 김인서의 책에 있는 내용이 거의 그대로 반복 기술되고 있다.

1968년에 출간된 박용규 목사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전기 〈저 높은 곳을 향하여〉와 그로부터 2년후에 출간된 1970년 김충남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생애〉는 물론 그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 그리고 2000년대에 출간된 주기철 저서에서도 안용준과 김인서의 내용은 거의 반복되어 인용되고 있다. 박용규목사의 〈저 높은 곳을 향하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평양에는 조선 총독부는 물론 내각에까지 직통하는 어머어마한 기독교 친목회라는 단체가 있었다. … 모든 기독교회의 일은 평양기독교 친목회라는 간판을 건 그 장소에서 역사되었던 것이다. 물론 27회 총회 신사참배 가결이라든지 주기철 목사 파면하던 평양노회도 이 간판 밑에서 이루어졌다. … 평양서문외 교회는 노회 개회시부터 어수선하고 살기가 있어 무섭기까지 하였다. 모여든 노회원 가운데는 주목사 파면을 가할 회원과 반대요 할 회원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1941년 3월 20일(?)은 평양노회가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한 불신앙으로 소집된 노회이며 일본 총독부의 앞잡이 노릇하는 평양친목회의 일방적인 처사가 진행된 노회였다. 평양노회가 가결한 4가지 역사적인 사건은, ① 주 목사를 파면함 ② 동역 목사 편하설 선교사는 산정현교회에 금단한다. ③ 칠장로는 장로직 정지함 ④ 당회장은 노회에서 선택하고 수습위원 칠인을 택정함. (장운경 목사, 이인식목사, 박응률 목사, 심익현 목사, 김선한 목사, 변OO 장로와 김OO 장로)

이 4가지 안건이 통과될 때에 노회의 광경은 어떻게 하였는지?! 평양노회에서 통과된 4가지 안건이 결정될 때 회장이 가하면 예하시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시오 하니까, “아니요”한 목사는 우성옥 목사였으니 우 목사는 즉시로 구속당하여 경찰서로 갔고, 편하설 선교사는 “불법이요” 소리 소리 지르면서 울었고, 산정현교회 박정익 장로는 ‘불법노회요, 불법노회“하면서 퇴장하였으며 여기저기서 방청하던 교인 목사들이슬피 울며 자리를 움직일 줄 몰랐으니 마치 옛날 국상이라도 난 것 같이 울음의 바다가 되었다.”

박용규 목사의 〈저 높은 곳을 향하여, 1968〉의 기록은 안용준의 기록과 김인서의 기록을 참고하여 현장감 있게 종합진술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기록은 안용준의 기록과도 약간 다르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에는 “당회장은 노회에서 선택하고”라는 기록은 있지만 이인식 목사를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택했다는 기록이 생략되었다. 또한 박용규 목사는 노회 결정이 있은 후 편하설이 불법이요 소리소리 지르면서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확한 기록은 아니다. 번하이젤이 자신의 편지에서 밝힌 대로 임시노회 석상에서 정치조례 1장 7조를 들어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를 반대하자 경찰들이 강제적으로 경찰서로 끌려가 평양노회 임시회가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를 결정할 때 정작 그 현장에 번하이젤은 없었다.

김충남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생애, 1970〉에 있는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기록은 김인서의 〈주기철 목사의 순교사와 설교집〉에 있는 내용들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1, 주기철 목사는 파면함  2, 편하설 선교사가 산정재 강단에 서는 것을 금지함 3, OOO 목사를 산정재교회 당회장으로 택함 4, 산정재교회 수습위원으로 장운경 목사, 박응률 목사, 이인식 목사 등 7인을 택함.

민경배 교수도 1985년에 간행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에서 “평양노회의 주기철 목사 처결”이라는 제목으로 기술하면서 “일경은 그에게 목사 사면을 자퇴 형식으로 강요하였다…. 이에 일제는 한국교회에 의한 주기철의 목사 파직을 강행하려 하였다. 그래서 주기철이 속한 평양노회의 노회장 최지화를 협박해서 주기철의 목사 해직을 요구하였다. … 그 진리의 파수꾼에게 목사직을 내놓으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민경배는 1939년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으로 5가지를 제시하였다. 1) 주기철은 그 목사직에서 파면함 2) 편하설 선교사가 산정현 강단에 서는 것을 금지함 3) 장운경을 산정재교회 당회장으로 택함 4) 일곱장로들을 정직함 5) 산정재교회 수습위원으로 장운경 목사, 박응률 목사, 심익현, 김선한, 이인식등 7인을 택함.

민경배는 그 출처를 안용준과 김인서에서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1항, 2항, 4항은 안용준에게서 나온 것이고 3항과 5항은 김인서에서 인용한 것으로 두 사람의 것을 종합한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평양노회 임시회에서는 이인식을 당회장으로 택했지 장운경을 산정재교회 당회장으로 택했다는 기록은 어느 기록에서도 찾을 수 없다.

안용준, 김인서, 박용규 목사, 김충남, 민경배 모두 저술에 있는 관련 내용들을 면밀히 살며보면 앞서 기술된 안용준이나 김인서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재진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1939년 12월 19일에 있었던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결정을 기록하면서 이들 가운데 누구도 평양노회 임시회의록의 기록을 직접 인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주목할 사실은 이들 모두가 1939년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를 “파면” “목사해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목사면직”이라는 용어는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주기철 목사에 대한 전기들 가운데 “목사면직”이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와서이다. 그 출발은 1992년 김요나 목사의〈일사각오〉가 출간되면서부터이다. 김요나는 “주목사직”이라는 소제목으로 주기철의 목사면직을 기정사실로 하고 글을 써내려갔다.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주 목사 면직하다. 일제당국은 … 교회법(헌법)을 이용하여 목사 파면을 노회로 하여금 단행하도록 하는 그 방향에서 해결 방법을 모색키로 했다.”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김요나가 처음으로 “목사면직”이라는 말을 언급하면서 이후의 저술들은 거의 다 “목사면직”으로 단정하고 받아들였다. 2002년에 출간된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에서 이덕주는 목사면직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대신 “평양노회의 목사 파면”이라는 소제목으로 주기철 목사에 대한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을 다루었다. 하지만 이덕주는 자신의 논문에서 노회장 최지화 사회 하에서 남문외 교회당에서 개최된 평양노회 임시노회 결정을 보도한 1940년 1월 24일 〈장로회보〉 기사(“주기철에게 준열히 면직처분의 결의를 하였다”)를 인용하였다. 김요나는 직접 “목사면직”이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이덕주는 비록 “목사파면”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임시회록의 결정이 무엇인지 직접인용이나 언급 없이 “면직처분”이라고 명시한 〈장로회보〉를 인용하여 마치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에서 주기철 목사에 대해 목사면직 결정을 내린 것처럼 글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평양노회에서의 주기철에 대한 징계가 김요나와 이덕주를 거쳐오면서 “목사면직”으로 완전히 정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2006년 봄 한국교회에서는 가장 먼저 예장 통합이 소속 평양노회를 통해 주기철 목사 복권을 결정하고 예배를 드릴 때 김인수 교수는 이덕주의 연구를 그대로 수용하여 “평양노회 주기철 목사의 면직 결의”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고 평양노회를 이 사실에 근거하여 절차를 진행했다. 이 때 김인수는 이덕주가 인용한 〈장로회보〉기사를 재인용하여 “파면”과 “면직”을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해서 김요나, 이덕주, 김인수 모두 주기철 목사에 대한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을 목사면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노회가 과연 어떤 결정을 했는가를 판단하기 위해 노회록을 근거로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김요나, 이덕주, 김인수 모두 평양노회 임시회록을 근거하지 않았다.

그동안 한국교회사 연구를 위해 많은 족적을 남긴 동료 교수들이나 선대 목회자들을 폄하하거나 비판할 의도는 전혀 없다. 그것은 그들이 한국교회사 연구에 많은 족적을 남긴 것을 평소 높이 평가하고 감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주기철 목사에 대한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에 대한 부분에서 그동안의 선행연구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또 이 부분의 연구에서 필자도 동일한 실수를 했던 사실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필자 역시 〈한국교회를 깨운 산정현교회〉(서울: 생명의말씀사, 2006)를 저술하면서 노회록을 직접 인용했지만 그 노회의 결정이 과연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킨 것인지 목사직 자체를 면직시킨 것인지를 제 37회 제 1차 평양노회 임시회록을 근거하여 면밀히 살피지 못한 동일한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록의 기록은 물론 당시 관련 기록을 면밀히 검토하면 주기철에 대한 징계 결정이 “목사면직”이 아니라 임시회록에 있는 대로 “주기철 목사는 …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키다”가 맞다고 본다. 당시 1940년 1월 24일자 〈장로회보〉를 제외한 당시의 모든 기록들이나 번하이젤 선교사의 편지도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주기철 목사에 대한 복직과 복권 움직임이 예장통합에 이어 예장합동 교단 안에서도 일고 있는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하면서도 차제에 좀 더 정확성을 기하기위해서 주기철 목사에 대한 1938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이 산정현교회 시무(담임목사직, 당회장)에서의 “권고사직”인지 아니면 목사직 자체에 대한 목사 면직이었는지를 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면밀하게 검토할 것을 겸손히 제언하고 싶다.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이 주기철 목사의 목사면직이 아니라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킨 결정이었다고 해도 과거 평양노회가 범한 행위에 대해 우호적인 자세를 가지거나 동정적인 자세를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 다음을 고려할 때 그 이유는 명백하다.

첫째,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 결정은 1938년 9월 제 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의 연장 선에서 나온 배도의 행위였기 때문이다.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의 근거 사유가 바로 전해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이었고, 그 배도행위의 주범인 홍택기가 총회장의 직권으로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에 따라 전국의 목회자들에게 신사에 참배할 것을 명하는 공문지시에 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평양노회 임시회가 주기철 목사를 징계한 것은 심각한 배도행위가 아닐 수 없다.

둘째, 일제의 압력에 의해 할 수 없이 순복한 것이라고 받아들인다고 해도 직전 부노회장이었던 주기철 목사를 산정현교회 시무를 원천 봉쇄시키고 1938년 제 27회 총회 총대 명단과 이어 열린 제 38회 평양노회 노회 명부에서도 주기철의 이름을 빼버린 것은 같은 노회원 목사, 그것도 순교를 각오하고 진리를 지키려는 목회자를 십자가에 두 번 못박는 너무도 비 신앙적이고 비윤리적인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게다가 평양노회가 이 정도의 결정으로 멈추지 않고 평양산정현교회를 폐쇄시키고 주기철과 오정모가 구속된 상태에서 노모와 어린 자녀들을 밖으로 내 보내고 사택까지 빼앗은 행위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일제의 사주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평양노회가 이 일을 주도했다는 사실, 그것도 1939년 친일 어용신학교로 새로 복교한 평양신학교의 교장 사택(교장 채필근)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면 부끄러워 머리를 들 수 없다.

1939년 12월 20일, 평양노회가 참으로 부끄러운 결정을 한 그 다음날 번하이젤은 “노회의 비겁한 행동은 영원한 수치”라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교회를 폐쇄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결정이 내려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산정현교회 당회장이 새로 임명되었습니다. … 평양노회 임시회가 정회한 후 검을 찬 금줄의 경찰간부와 부하들이 소속 경찰서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내가 노회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영어로 진술서를 쓰라고 요구 받았습니다. 나는 진술서를 썼고 그런 후 집으로 돌아가도 되고, 그들은 그 문제를 숙고하고 며칠 안에 나를 다시 부를 수도 있다고 말해줬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처한 상황입니다. 우리는 교회 폐쇄 명령이 내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교인들이 신사참배를 한 목사를 청빙하도록 온갖 노력들이 진행될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경찰이 원하는 대로 될 것입니다. 주기철 씨는 확실히 대의적으로 순교자입니다. 노회의 비겁한 행동은 영원한 수치입니다. 노회원들은 경찰의 화를 기꺼히 직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의 많은 이들이 개인적인 체험을 했거나 전해 들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교인들이 이 중차대한 신사문제에 굴복하기보다 차라리 예배당 문들을 닫는 쪽을 결정하기를 희망합니다.

평양노회 임시회가 열려 주기철 목사를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에서 쫓아내는 결정을 내린 그 다음날 번하이젤은 자신의 편지를 통해 그의 심정을 솔직하게 밝힌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그는 주기철을 이미 순교자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주기철의 일거수일투족을 온 몸으로 느끼며 지켜본 번하이젤이 살아 있는 주기철에게 순교자의 칭호를 붙였다는 것은 매우 깊은 의미가 있다. 둘째, 반면 평양노회의 비겁한 행동이 영원한 수치라는 사실도 동시에 천명한 것이다. 신사참배가 분명히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행위인데 동조하거나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주기철 목사를 목회 현장에서 쫓아낸다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며 “영원한 수치”라고 본 것이다. 셋째, 앞으로 다가올 시련을 예측할 수 없지만 번하이젤은 산정현교회 교인들이 신사참배를 하는 쪽을 택하기보다 차라리 교회를 폐쇄하는 쪽을 택하기를 희망한 것이다. 순교자 주기철과 온 성도들이 하나되어 진리의 길을 따라 하나님과 역사 앞에 서기를 소망한 것이다.

이미 방계성 전도사도 구속된 상황에서 산정현교회 주일 강단을 맡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번하이젤 뿐이었다. 그는 그런 방향으로 산정현교회를 이끌어갔고 또 산정현교회 당회와 온 성도들은 그의 희망대로 그런 방향으로 움직여 나갔다. 그는 평양경찰서로부터 산정현교회에서 손을 떼라는 요구를 지속적으로 받았지만 산정현교회 강단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당회원들도 번하이젤 선교사가 계속해서 강단을 지키며 교회를 이끌어 주길 원했다. 그는 주일 오전 예배를 인도하고, 그 외 다른 예배는 당회원들에게 맡겼다. 그가 1939년 12월 29일 보낸 편지에는 산정현교회를 향한 그의 사랑과 결심이 얼마나 강렬하고 높았는지를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앞으로의 전망은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어둡습니다. 경찰은 내게 당분간 산정현교회에서 멀리 떨어지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일시적이라는 말은 곧 산정현교회 교인들이 신사참배를 한 목사를 청빙할 때까지 그들이 압력을 가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어제 우리 집에 교회 제직들을 불러서 다시 그들과 함께 현 상황을 점검했습니다. 나는 단지 주일 오전예배만 맡고 나머지 예배는 당회원들이 맡으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때가 오기를 희망합니다만 전혀 하지 못하게 될지로 모르겠습니다. 나는 교회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이런 어려운 곤경의 때, 특별히 목사들과 전도사 모두가 감옥에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내버려 둘 수 없다고 느낍니다. 이제 저들은 경찰의 뜻대로 일이 성취되도록 산정현교회를 무너트리기 위해 나를 제거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주기철은 옥중에서 산정현교회와 조국교회를 위해 생명을 담보로 기도하고, 온 교우들은 그와 하나 되어 일제에 맞섰으며, 번하이젤은 담임목사의 빈자리를 충실하게 메꾸며 산정현교회를 섬기는 것을 일종의 거룩한 소명으로 여겼다. 일제는 그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그를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같은 산정현교회 위기 속에서 번하이젤이 미국시민권자로 한 교회를 맡아 강단을 지키며 교우들을 독려한 것은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였다. 주기철도 대단했지만 번하이젤도 선교사 이전에 참으로 대단한 신앙인이었다. 일제의 회유와 협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한 달이 지난 1940년 1월 번하이셀이 보낸 편지에는 그의 단호한 결단이 여과 없이 담겨있다:

경찰은 목사와 전도사를 체포하고는 나 또한 교회에서 제거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것은 만약 세 사람 모두 교회에서 제거한다면 교회가 강압에 못이겨 신사에 대표자를 파송하고 또한 신사참배를 한 목사를 초청할 것이라고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내가 산정현교회에 있는 한 그들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경찰서로 불러서는 경찰의 뜻대로 산정현교회가 이루어 질 때까지 그 교회와의 관계를 끊어주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경고를 무시하고 평소대로 계속 산정현교회 주일 강단을 섬겼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 주 그들은 다시 나를 불러 만약 내가 또 다시 그 교회에서 설교한다면 나를 벌주거나 추방시키겠다고 경고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 평양선교회의 동료 선교사의 조언에 따라 나는 주일예배 인도를 한국인들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주일 나는 평소대로 말씀을 전했는데 그러자 곧 나를 경찰서로 소환해서는 꾸짖고 경고했습니다. 동일한 일이 그 다음 주일에도 발생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주일 나는 몸이 아파 교회에 갈 수 없어 나의 친구 블레어[William Newton Blair]를 대신 보냈습니다. 이것 또한 경찰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는데 그것은 그들은 어떤 선교사도 그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 때부터 매 주일 강단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다행히 그들은 나를 경찰서로 소환하는 일을 그쳤지만 여러 차례 형사들을 내게 보내서는 내게 불만을 토로하고 경고했습니다.

번하이젤은 그 매섭고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일제의 강압에 굴하지 않고 산정현 교회를 굳굳하게 지켜 나간 것이다. 북장로선교회 평양선교부 회원들 모두가 번하이젤을 전폭지지하고 그와 뜻을 같이했다. 그는 자주 그들과 상의하며 산정현교회가 나갈 방향을 논의했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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