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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저항운동 재평가 2
박용규(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7/10/18 [09:43]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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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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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박용규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고(故)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저항운동을 연구하여 오늘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도록 교훈하고 있다.

3. 주기철 목사에 대한 1939년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

▲ 주기철 목사     © 리폼드뉴스
경찰이 산정현교회와 관계를 끊을 것을 강하게 요구하는 상황에서 번하이젤이 취할 수 있는 것은 일제의 요구를 무시하고 산정현교회 강단을 계속 지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분명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산정현교회 당회를 소집했을 때 당회는 결의해서 그가 계속 강단을 지켜줄 것을 부탁했다. 평양선교회 동료 선교사들은 그에게 오는 주일에는 강단에 서지 말라고 조언을 주었다. 비록 어느 정도 실망스러웠지만 그는 그들의 조언을 따랐다. 그런 후 그 다음 두 주간 다시 설교를 계속했다. 그러자 경찰은 그를 매번 경찰서로 소환당하여 꾸짖고는 만약 다시 설교한다면 그들이 설교를 금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번하이젤은 1939년 12월 20일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써서 산정현교회에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선교부에 다음과 같이 알렸다:

나는 설교를 계속했지만 금하지는 않았습니다. 지난 주 나는 다시 설교를 했습니다. 비록 몇몇 사복경찰이 참석했지만 내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경찰은 노회를 이용해 주 목사를 물러나게 하고 교회를 폐쇄하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들은 평양노회 노회장을 소환해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교회를 다룰 평양노회 임시회를 소집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는 거절했고, 총 20번이나 소환을 당했지만 아직도 임시노회 소집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마지막에는 경찰이 노회의 네 다섯 노회원들의 소집청원 서명 날인을 받아 노회장에게 임시노회 개최를 요구해, 노회장은 교회 법에 따라 강압에 의해 마지 못해 임시노회 소집 지시를 내렸습니다.

평양 노회장 최지화는 무려 20번이나 소환을 당하면서까지 임시노회 소집 요구를 거부했지만 일부 일경에 편승한 평양노회 소속 목회자들의 서명을 받아 노회 소집을 요구하자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노회장의 임시노회 소집 지시가 내린 후 “경찰은 바삐 움직이며 모든 노회원들을 불러서 그들의 계획이 무엇인지 말해줬다. 그것은 주 목사를 [산정현교회 담임에서] 물러나게 하고 회중이 신사참배한 목사를 초청할 수 있을 때까지 임시로 교회를 폐쇄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노회원들이 그 안에 찬성표를 하도록 지시했고 아니면 적어도 그에 대해 반대표를 던지지 말 것과 신사참배에 불복종하는 경우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려줬다.” 1939년 12월 19일 남문외교회당에서 개최한 제 37회 평양노회 임시노회가 평양시내 고등계 형사들과 25-30명의 사복형사가 경계를 선 가운데 열렸다.

평양노회 임시회가 어제 경찰 본부 가까이에 위치한 남문밖교회에서 개최되었습니다. 평양의 몇몇 경찰 경내에서 온 모든 금줄과 검을 찬 경찰간부들과 약 25명에서 30명의 일반 경찰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최지화] 노회장은 [홍택기] 총회장이 최근 발행한 경고서한을 읽고 우리 노회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사에 가서 참배하라는 총회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거절한 목사가 있는 한 교회가 있다고 진술했습니다. 이것은 인쇄된 문서로 한 쪽에는 일본어로 다른 쪽에는 한 글로 쓰여졌습니다. 이제까지 내가 일본어로 쓰여진 교회에 보내는 공문은 처음 보는 것입니다. 내 개인 생각으로는 그 문서는 경찰이 준비한 후 총회장에게 압력으로 서명하게 하고는 돌린 것입니다. 그 문서에는 신사참배는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요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임을 총회가 인준한 것이라는 진술이 있습니다. 정부가 신사에 가지 않는 시민을 관용할 수 없듯이 신사에 가지 않는 어떤 교인들도 교회가 관용하지 말고 모두를 엄히 권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 노회장은 의제가 이제 노회 앞에 있으니 그들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나는 발언권을 얻어 어떤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교회의 헌법과 법칙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금줄을 찬 경찰간부가 내게 앉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런 후 나는 교회 정치 제 1장 7조를 읽고 교회 법정은 교회의 구성원의 양심을 속박하는 어떤 법도 만들 권한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해 총회의 결정은 많은 총대들의 양심을 속박한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 내가 거기에 이르자 세 명의 경찰이 나를 잡아 채고는 나를 건물 밖으로 밀쳐내 경찰서로 연행했습니다. 그 말을 끝낼 수 없어 유감입니다만 그것은 결코 과거에는 하지 못했던 발언 중의 하나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번하이젤이 인용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정치 제 1장 7조는 상황에 맞는 적절한 내용이었다. “치리권은 전교회로나 그 택립한 대표자로 행사함을 불문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전봉전달하는 것이 뿐이라. 대개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대한 유일한 법칙인즉 어나[어느] 교파의 치리회던지 회원의 양심을 속박할 규칙을 자의로 제정할 권리가 업고 오직 하나님의 묵시하신 의지에 기인할 것이니라.”

번하이젤이 노회에서 경찰서로 강제 연행된 뒤 “의제가 올라왔다.” 노회장 최지화와 평양노회는 주기철 목사에 대해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키기로 결정했다. 1939년 12월 20일자 번하이젤의 편지에 의하면 이날 평양노회 임시회에서는 “목록에 약 10개의 관련 조목들이 일괄투표로 통과되었다.”

그리고 나서 노회장은 임시회를 정회했다. 임시회를 정회한 것은 후속 조치가 있을 때 그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에서 지난 해 홍택기 총회장에 이어 평양노회장 최지화가 너무도 부끄러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날 주기철 목사의 산정현교회 시무 권고사직에 동의한 노회원은 8명이었고 혹자는 다섯, 여섯명이 반대했다고 하고 혹자는 반대한 사람이 단지 한 사람[우성옥(禹成玉)]이었다고 말한다. 그 외 50명이 넘는 노회원들 절대 다수는 침묵을 지켰다. 감히 그 분위기 속에서 반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반대한 사람 우성옥은 정회 후 바로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당했다. 총회에 이의를 제기하겠다며 평양노회 임시회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산정현교회 박정익 장로도 번하이젤이 있던 그 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얼마 후에 풀려났다. 노회장은 안건에 대한 투표가 통과되었다고 선언했고, “주 목사는 산정현교회 시무에서 물러나게 되었음이 선언되었다.” 평양노회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주기철 목사를 평양산정현교회에서 강제로 쫓아 낸 것이다.

일단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후 산하 노회가 그 결정을 거스리며 반대운동을 전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한다고 해도 평양노회가 소속 노회원을 신사참배 문제로 사직시킨 것은 총회의 신사참배결정 못지않게 부끄러운 일이었다. 평양노회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주기철 목사를 독려하지는 못할망정 외롭게 싸우는 목사에게, 강제로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을 사직시킴으로 그를 또 다시 못 박았다. 37회 평양노회 노회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안건 결의: 입석자: 평양서 송본(松本) 고등주임, 평양, 대동, 선교 3서의 고등계 형사대, 전평서 고등계 주임 현 평원 서장 청수천(淸水川) 경부

1. 주기철 목사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와 총회장의 경고문을 무시한 이유로 교회헌법 권징 조례 19조에 의하여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키다.

2. 이인식 목사를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임명하다.

평양노회 촬요는 주기철에 대해 목사 면직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이날 평양노회가 주기철 목사에 대해 결정한 것이 단순히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킨 것인지 아니면 목사 면직을 결정한 것인지에 대해서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평양노회 회의록은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사직시킨 것이지 목사 면직시킨 것으로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기철 목사에 대한 평양노회 임시회의 정확한 징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기철 목사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와 총회장의 경고문을 무시한 이유로 교회헌법 권징 조례 19조에 의하여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키다.”

다음날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을 알리는 1939년 12월 20일, 21일자 〈동아일보〉도 “문제 중의 주 목사, 평양노회서 사임 결의,” “주목사 사직 후 …”라고 기록하고 있고, 같은 날 12월 20일자 〈조선일보〉도 “주목사에 사직 권고”로 되어 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각각 “사임결의,” “사직” 과 “사직권고”로 보도하였다. 〈매일신보〉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비해 좀더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다. “문제(問題)의 목사(牧師)는 파면코,” “신사참배(神社參拜)를 실현(實現)키로,” “평양산정현교회(平讓山亭峴敎會) 사건단락(事件段落)”이라고 보도하였다. “문제의 목사는 파면코”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매일 신보에 보도된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평양부 계리 산정현교회의 신사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평양]장로교노회에서는 드디어 [12월] 19일 오후 O시부터 남문밖교회에서 임시노회를 열고 각 교회의 목사 장로와 교역자 … 서양인 편하설 목사도 참석한 가운데 토의하는 문제가 중대한 것이니 … 평양서의 송본(松本) 고등주임, 평양, 대동, 선교 3서의 고등계 형사대와 … 전 평서 고등계 주임이고 현 평원 서장 청수천(淸水) 경부가 배석하야 삼엄한 경계 가운데 로회장 최지화(崔志化) 목사로부터 신사참배의 전후경과를 보고하고 현재 평양서에 계류 중인 주기철(朱基徹) 목사와 면회하고 조선장로교 총회로부터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과 최근 또 신사에 참배토록 발송하여 온 통첩에 대하야 의론하엿스나 주 목사도 끗끗내 이에 응치 안엇다는 것을 보고하자 서양인의 편 목사가 즉시에 이러나서 장로교 헌법 조문을 드러 량심을 구속운운의 불온한 말을 하다가 림석한 경관에게 발언을 중지당하고 퇴장을 당한 다음 의사를 속행하야 문제 중의 주 목사를 사면식히고 압흐로는 신사에 참배할 교역자를 산정현교회에 임명하기를 결의하엿다. 그리하야 파란만튼 산정현교회 문제는 이로써 해결되였다.

주기철 목사에 대한 파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매일신보〉는 기사에서 밝히고 있다. 위 내용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문제 중의 주 목사를 사면식히고 압흐로는 신사에 참배할 교역자를 산정현교회에 임명하기를 결의하엿다.”라는 말이다. 주목사를 사면시켰다고 〈매일신보〉는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목사를 사면시키고”라는 말은 목사면직이 아니라 위 기록 그대로 산정현교회 담임 목사 사면으로, 평양노회 임시회록에 있는 대로 주기철 목사의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에 더 맞다.

우리는 당시 상황 속에서 1939년 12월 19일자 제 37회 제 1차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결정 곧 “주기철 목사는 …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사직시키다”는 내용이 함축하고 있는 것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풀어야 할 우선되어야 할 과제는 권고사직과 면직이 같은 징계이냐 하는 것이다. 권고사직과 면직은 각각 그 징계 내용과 적용되는 것이 다르다. 목사 면직과 사직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로교 헌법에 있는 면직, 사면, 사직에 대한 내규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권징조례 42조는 “목사가 이단을 주창하거나 불법으로 교회를 분립하는 행동을 할시에 그 안건이 중대하면 면직할 것이니라(그 행동이 교리를 방해하랴하야 전력으로 타인을 권유하는 형편이 잇는지 지식이 부족한 중에 발생하고 도에 별로 해되지 아니할 것인지 심사후에 처단함이 가하니라)”고 되어 있다. 면직된 자는 목사직이 해직되고 평교인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그것은 권징조례 45조를 보면 알 수 있다.

“[권징조례] 제 45조 지교회에 담임 목사된 자가 면직을 당하고 출교는 되지아니하엿스면 노회는 그 해직됨을 선언할 것이오. 이런 경우에는 그의게 평교인의 이명서를 주어 원하는 지교회로 보내대 이명서에는 그 정형을 상기할 것이니라. 담임목사를 정직할 시는 그 담임[까]지 해제할 수 잇스나 상소한다는 통지가 잇스면 그 담임을 해제하지 못하나니라.”

권징조례 44조는 면직으로 인해 목사직이 해직된 자는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시 그를 목사로 임직한 후에 사역을 다시 시작하도록 명시하였다. “제 44조 악행을 인하야 목사직 해제를 당한 자가 깁히 회개할지라도 오래동안 특별히 모범될만한 겸손과 덕을 세우는 행위가 현저하야 그 소재지 치리회의 관찰에 교역에 종사함이 도에 방해가 되지 아니할 줄노 확인할시는 목사로 임직하되 당초 면직한 치리회가 직접행사하던지 그 회의 결의대로 위탁밧은 치리회가 행사할 것이니라.”

위 권징조례의 내용에 있는 대로 면직은 반드시 다시 임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명문화시키고 있다. 1934년에 개정된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 제 17장제 1조부터 제5조까지에는 “목사사면과 사직”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제 1조 자유사면. 목사가 본교회에 대하야 난편한 사정이 잇서 사면원을 로회에 제출하면 노회는 해 교회 대표를 청하야 해목사의 사면리유를 채문할 것이니 해 교회 대표가 오지 아니하던지 혹 그 설명하는 리유가 불충분하면 사면을 승낙하고 회록에 상기할 것이오. 해 교회는 허위교회가 되나니라.

제 2조 권고사면. 지교회가 목사를 환영치하니하야 해약코저 할 시는 로회가 목사급 교회대자의 설명을 청취후 처리할 것이니라.

제 3조 자유사직. 목사가 그 시무로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할 줄노 각오할 시는 사직원을 로회에 제출할 것이오 로회는 이를 협의결정할 것이니라.

제 4조 권고사직. 목사가 성직에 상당한 자격과 성적이 업던지 심신이 건강하고 사역할 처소가 잇서도 오년간 무임으로 잇스면 로회는 사직을 권고할 것이니라.

제 5조 목사의 휴양 근무중에 잇는목사가 신체섭양이나 신학연구나 기타 사정으로 본교회를 나게 되는 경우에는 본당회와 협의하며 2개월이상 흠근하게 될 시는 로회의 승락지 요할 것이니라.

위에 있는 대로 권고사직에 해당하는 내용은 “목사가 성직에 상당한 자격과 성적이 업던지 심신이 건강하고 사역할 처소가 잇서도 오년간 무임으로 잇스면 로회는 사직을 권고할 것이니라.”이다. 권고사직은 성직에 상당한 자격상 문제가 발생하고 성직의 결과가 심각하게 문제되거나 건강하다고 할지라도 5년간 무임목사로 지낸 자에게 적용할 수 있는 규칙이다. 주기철 목사에 대한 1939년 12월 19일자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이 과연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냐는 하는 것은 상당한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주기철 목사의 경우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권징조례와 장로회 정치에 있는 규칙을 살펴볼 때 목사 면직과 “시무를 권고사직시키다”는 것은 다르다.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을 다시 확인하면 다음과 같다:

“주기철 목사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와 총회장의 경고문을 무시한 이유로 교회헌법 권징 조례 19조에 의하여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키다.”

“주기철 목사는 …. 산정현교회 시무[담임목사직을 포함]를 권고 사직시키다”는 주기철 목사를 산정현교회 담임 목사직에서 “권고사직시키다”는 의미로 봐야 할 것이다. 만약 권고사직과 면직이 같은 의미라고 한다면 평양노회 임시회는 면직시킨다고 결의해야하고 또 임시회록에도 그렇게 기록되었어야 맞다. 그것은 면직과 시무 사직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 몇가지 점에서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 결정을 목사 면직으로 보기 힘들다고 본다.

첫째, 1939년 12월 19일 제 37회 제 1차 평양노회 임시회의 노회록이 면직이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

둘째, 장로회 권징조례와 정치에 따르면 면직과 사직은 분명히 다르다.

셋째, 주기철 목사의 경우 권징조례와 정치규례를 고려할 때 면직에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다.

넷째,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을 그 다음날 1939년 12월 20일 보도한 당시 권위 있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그리고 〈매일신보〉도 면직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평양노회 임시회가 산정현교회 시무 권고사직이 아니라 주기철 목사에 대해 목사면직을 결정했다는 기록은 해당 노회록도, 당시 권징조례 조문(면직과 권고 사직을 구분하고 있어)도, 그리고 당시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을 보도한 일간신문도 지지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노회록도, 당시 장로교 권징조례와 정치규례도 그리고 신문보도 다 목사면직이 아니라 권고사직을 지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과제는 과연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를 “목사면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는가 하는 것과 “주기철 목사는 …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사직시키다”는 징계조문이 담고 있는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다.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에 대한 징계를 “목사면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 한 가지는 1940년 1월 24일자 <장로회보〉 7면에 있는 관련기록이다.

“평양노회구내 산정현교회 목사 주기철씨가 신사참배에 순응치 아니함은 소화 삼십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장로회 제 27회 총회 개회 모두에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요 종교가 아니므로 국민된 의무상 의당히 참배하기로 함’ 하고 결의한 신사에 위반이므로 작년말 즉 소화 14년 십이월 십오일[십구일] 평양노회 임시노회를 남문외 예배당에서 회집하고 노회장 최지화 목사의 사회하에 주목사에게 준열히 면직처분의 결의를 하였다.”

평양노회 임시회가 주기철에 대한 징계를 내린 약 1개월 후 일제의 어용 기관지 〈장로회보〉는 평양노회가 주기철에 대해 “노회장 최지화 목사의 사회 하에 주목사에게 준열히 면직처분”을 내렸다고 보도하고 있다. “면직처분”이라는 말이 〈장로회보〉에 처음 등장하고 있다. 징계 1달이 지난 뒤 〈장로회보〉가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을 “면직처분”으로 보도한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하는 것은 해석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것은 당시 평양노회 임시회록의 기록이나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의 기록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사임”으로 〈조선일보〉는 “사직권고”로 〈매일신보〉는 “파면”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장로회보〉는 “면직처분”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징계를 게재한 〈장로회보〉는 1940년 1월 24일 제 1호 창간호로 발행한 어용 신문이다. 바로 이 창간호에 평양노회의 주기철 징계 기사가 실린 것이다. 교단의 소식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보다 일제의 식민지배의 도구로 쓰기 위해 만든 관제신문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당시 일제에 편승한 기독교 문필가 오문환이 저작자로 발행한 〈장로회보>창간호에는 제 1면에 “황기 2천 6백년”이 사설 형식으로 헤드에 게재되었고 그 옆에 “국민정신총동원 총회연맹” 결성 소식을 알렸다. 8면으로 구성된 전체 신문 내용이 일제의 신사참배에 순응하는 장로교회를 만들기 위한 것임을 한 눈에 읽을 수 있다. 제 38회 평양노회에서 “〈장로회보〉를 의무로 구독하기로 함”을 결정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기사는 7면 “교계뉴쓰”란에 “교역자로 총회국가의식불응은 총회결의 정신위반, 평양노회 축 면직 결의”라는 소제목하에 실렸다.

우리는 다음 몇가지 점에서 객관적으로 〈장로회보〉의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사료의 정확성 문제다. 〈장로회보〉는 불과 1개월 전에 열린 평양노회 임시회의 날자를 12월 15일로 오기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평양노회 임시회는 1939년 12월 19일에 열렸다. 불과 1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사건인데 주기철에 대한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을 다루면서 중요한 평양노회 임시회의 날짜를 오기한 것이다. 이것은 〈장로회보〉가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소식을 듣고 사실을 확인하고 기록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문이 강하게 제기된다. 자기가 듣거나 알고 있는 것에 기초해서 쓴 글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저작자 오문환이 쓴 것이라고 사료된다. 둘째, 위 글 중 제 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을 기록한 내용에서도 의도적으로 편집한듯한 인상을 준다. 〈장로회보〉는 27회 총회의 결의를 “신사참배는 국민의식이요 종교가 아니므로 국민된 의무상 의당히 참배하기로 함”이라고 직접 인용표시를 하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정확한 기록은 아니다. 이는 아래 결정과 비교하면 분명하게 나타난다.

我等은 神社는 宗敎가 아니오, 基督敎의 敎理에 違反하지 않는 本 意를 理解하고 神社參拜가 愛國的 國家儀式임을 自覺하며, 또 이 에 神社參拜를 獨先勵行하고 追히 國民精神 總動員에 參加하여 非 常時局 下에서 통 후 皇國臣民으로서 赤誠을 다하기로 기함.

昭和 十三年 九月 十日 朝鮮예수敎長老會 總會長 洪澤麒

〈장로회보〉는 ‘종교가 아니다’는 말보다 국가의식을 앞세워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 내용의 순서도 바꾸었다. 게다가 “국민된 의무상”도 총회 결정 내용에는 없는 말이다.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로 기함”을 풀어서 그렇게 쓴 것으로 보인다. 함축적인 표현이라고 이해하더라도 〈장로회보〉의 총회 결정보도는 의도적으로 편집한 글이라는 인상을 준다. 불과 1개월 전에 일어난 평양노회 임시회의 개회 일자도 오기한데다 총회의 결의라고 직접 인용표시를 하고 인용 하면서도 정작 총회 결의내용을 변형하여 실고 있다.

셋째, 따라서 여기 〈장로회보〉가 “면직처분의 결의를 하였다”고 한 것은 노회록을 참고하여 기록했다기보다 다른 보도 내용이나 〈장로회보〉 기자[오문환] 자신이 이해하는 차원에서 기술한 것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에 순복하지 않는 자들은 앞으로 주기철 목사처럼 혹독한 징계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장로교 목사들이 신사참배에 순응하도록 기자[오문환]가 일제의 입맛에 맞게 의도적으로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징계내용을 편집한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면직처분”이라는 〈장로회보〉의 기록의 신뢰성 문제는 더 연구를 통해 밝혀져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평양노회 임시회록도, 그 다음날 임시 노회의 결정을 보도한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도 주기철 목사에 대해 “목사면직”으로 보도하거나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관련 기록을 종합적으로 살펴할 때 여기 〈장로회보〉의 “면직처분”이라는 말이 주기철 목사의 목사직자체를 면직시킨 것이라기 보다 산정현교회 담임 목사직에서 파면시켰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사료된다. 그러므로 〈장로회보〉의 “주목사에게 준열히 면직처분의 결의를 하였다”는 기록 자체 만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확대하여 이에 근거하여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 결의(‘주기철목사는 …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사직시키다’)가 ‘주기철 목사는 … 산정현교회 시무 권고사직시키다’가 아니라 주기철 목사에 대한 목사면직 결정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주지하듯이 총회와 노회의 결정이 무엇인가는 총회록과 노회록에 근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기철 목사에 대한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 내용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당시 산정현교회를 섬겼던 번하이젤 선교사의 편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번하이젤 선교사야 말로 노회, 교회, 일제당국(평양경찰서), 그리고 주기철에 대해 그만큼 깊이 관심을 가지고 이 문제를 고민한 사람도 드물기 때문이다. 1940년 1월 27일 번하이젤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경찰은 평양산정현교회 목사 시무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해 얼마전 강압적으로 임시노회(special meeting) 소집을 요청했습니다. 임시노회에 앞서 모든 노회원들이 경찰서로 불려가 임시노회가 무엇 때문에 열리는지를 말해주고 그것을 반대하는 표를 던지지 말도록 경고위협했습니다. 그래서 12월 19일 임시노회가 모였을 때 산정현교회 목사 시무에서 주 목사를 물러나게 하려는 의제가 올라왔습니다. 내가 일어나 그를 변호하였는데 금장을 하고 검을 찬 그곳에 참석한 여러 경찰 간부들과 30명 혹은 그보다 더 많은 경찰 간부들이 내게 앉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내가 계속 항의하자 세 명의 경찰이 나를 잡아채고는 나를 그 건물 밖으로 끌어내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경찰서로 연행했습니다. 그후 그 안건이 상정되었고 참석한 50명 혹은 그 이상되는 노회원들 가운데 8명이 찬성 표를 던졌고 한 명이 반대했습니다. 그 안건은 통과되었다고 노회장이 선언했고 주 목사는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반대표를 던진 한 사람은 곧 체포되었고 감옥에서 18일 동안 구류되었습니다. 그런 후 경찰은 산정현교회 당회원들을 불러 주기철 목사를 석방하면 그들이 삼개월 안에 그 목사를 산정현교회에서 물러나도록 동의해줄 것을 강요했습니다.”

번하이젤은 12월 19일에 열린 평양노회 임시회에서 주기철 목사가 산정현교회 시무에서 물러나도록 결정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번하이젤의 편지에 있는 대로 참석자 약 50여명 가운데 8명이 찬성표를 던졌고 1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그로부터 다시 3개월이 지난 1940년 3월 19일에서 22일까지 연화동교회에서 제38회 평양노회 정기노회가 열렸다. 선교사 4명, 목사 67명 그리고 장로 112명 합계 183명이 참석했다. 임원 개선이 있어 최지화가 노회장에 장운경이 부노회장에 피선되었다. 제 38회 평양노회 정기노회 주요안건 가운데는 18번째가 “산정현교회 전권위원”(장운경, 김선환, 심익현, 박응률, 이용직, 김취성 장로, 변경환 장로)이었다. 이들 일곱명의 전권위원들은 말 그대로 산정현교회 전반에 대한 전권을 위임 받았다. 번하이젤이 1940년 3월 26일자 편지에서 밝힌 것처럼 “이 전권위원회는 경찰서에서 신사참배와 신사복종의 탁월한 지지자들로 인정 받는 일곱명의 목회자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의 전적인 염원은 산정현교회가 정부의 신사참배의 시책을 따르게 하고 신사참배를 하는 목사를 임직시켜 산정현교회가 용기 있게 행하고 있는 일들을 못하게 막으려는 것이다.”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가 주기철 목사를 시무에서 권고사직시키고 임명한 당회장으로 임명한 이인식 목사가 여러번 산정현교회 당회를 소집하려고 했지만 장로들이 응하지 않고 만약 필요하면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당회장의 직책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인식 목사는 노회에 이를 보고하였고, 노회가 산정현교회 모든 장로들을 일시적으로 정직시켰다. 참고로 당시 열린 제 38회 노회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면도 “목사직 사면”과 “목사시무사면”을 별개의 항으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우석의 “목사직 사면”과 미림교회 김선환, 서문밖교회 임종순, 하리 황강리 봉래리교회 김의창, 벽지도교회 우성욱의 “목사시무사면”을 38회 평양노회 정기노회의 주요 안건으로 처리하면서 목사직 사면과 목사시무사면을 별개의 항으로 노회록에 기록하고 있어 “목사직 사면”과 “목사시무사면”이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주기철 목사에 대한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과 관련하여 번하이젤 선교사는 1940년 3월 26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미국에 보냈다.

해 [평양] 노회가 위에서 언급된 날짜[1940년 3월 19-22일]에 [연화동교회에서] 소집되었고, 그 회의는 그곳에 있는 경찰에 의해 강제적으로 지배를 당했습니다. 노회원들이 생각하건대, 12월 19일에 열린 평양노회 임시회의에서 경찰이 강제적으로 노회로 하여금 주목사를 산정현교회 목사직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안건을 통과시키게 했습니다. 노회장이 교회 제직들에게 그 되어진 것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그 안건이 주 목사가 그 [산정현교회 담임] 목사직에서 파면된(deposed)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노회 임원들은 순순히 동의했으며, 인쇄된 3월 정기 노회 노회원 명단에는 주 목사 이름이 빠져 있었습니다. 노회는 감히 그 안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그래서 주 목사를 그 목사직에서 파면하는 안은 통과되었습니다.

번하이젤은 목사직에서 파면되었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여기 목사직에서 파면되었다는 말이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에서 파면되었다는 말인지 아니면 주기철 목사의 목사직 자체를 면직시켰다는 말인지 정확하게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파면되었다는 말이 앞서 12월 19일 평양노회 임시회에서의 주기철 목사의 결정과 관련하여 보도된 〈매일신보〉 기사처럼 산정현교회 시무 사면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목사직에서의 면직을 의미하는 것인지하는 것이다. 주기철 목사에 대한 노회의 결정과 관련하여 번하이젤의 편지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위 편지 내용에서의 파면은 바로 그 앞에 언급된 “강제적으로 주목사를 산정현교회 목사직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안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1939년 12월 19일 남문외 교회당에서 열린 제 37회 제 1차 평양노회 임시회의 주기철 목사에 대한 징계는 “목사 면직”이 아니라 당시 평양노회 임시회 촬요에 명시된 그 대로 “주기철 목사는 …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키다”로 이해하는 것이 당시의 신문보도, 번하이젤 선교사의 편지, 그리고 당시의 권징조례나 장로회 정치 규례와도 일치한다. 노회록을 살펴볼 때 1940년 3월 19일-22일까지 연화동교회에서 열린 제 38회 평양노회 정기노회에서는 12월 19일의 평양노회 임시회의 결정에 대한 어떤 평가나 기록도 찾을 수 없다. 총회의 결정이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근거가 총회록이듯이 노회의 결정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근거는 노회록이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그 외 당시 여타 신문 보도들과 기타 자료들을 참고해야 하지만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당시의 평양노회 임시회록이다. 주지하듯이 당시 평양 노회록 임시회록은 주기철의 목사면직이 아니라 “산정현교회 시무를 권고 사직”시킨 것이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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