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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저항운동 재평가 1
박용규(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7/10/11 [09:47]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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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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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박용규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고(故)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저항운동을 연구하여 오늘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도록 교훈하고 있다.

▲  주기철 목사   ©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얼마 전 주기철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 “일사각오” 영상이 공영방송 KBS에서 방영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공영방송이 주기철을 순교자나 신앙의 지도자로서 보다는 민족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주기철의 족적을 추적하기는 했지만 손양원 목사에 이어 근래 기독교 인물을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연속해서 방영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주기철이 한국교회사에 차지하는 위치는 말 그대로 독보적이었다. 하나님과 역사 앞에 살았던 한 인물이 얼마나 교회와 신앙의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너무도 잘 보여준 인물이 바로 주기철 목사였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주기철에게 걸맞은 자리를 제공하지 못했다. 노회가 주도해서 주기철의 산정현교회 담임 목사직 파면을 결정했고, 그가 섬기던 교회를 폐쇄하고, 아버지 주기철과 어머니 오정모가 투옥 중일 때 사택을 강탈하여 어린 자녀들과 노모를 집에서 쫓아냈다. 그런데도 해방 후 신사참배 죄과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채 신사참배에 앞장선 친일파들이 교권을 장악했고, 순교자의 자식들을 광야로 내 몰았다. 한국교회는 주기철을 이중 삼중으로 못 박은 것이다.

주기철이 구속된 상태에서 1938년 9월 9일 제 27회 총회가 서문밖교회에서 열렸고, 그 다음날 총회는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해마다 총대였지만 그해 주기철의 이름은 아예 총대 명단에서 조차 빠져 있었다. 신사참배를 결정한 제 27회 총회는 김인서의 말대로 “비극의 27회 총회”였다. 총회 기간 선교사들이 신사참배 가결 무효를 주장하는 안을 제출하려고 했지만 총회가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이듬해부터 총회는 천황이 있는 궁성을 향해 궁성요배를 하고 총회를 시작했다. 이후 한국교회는 정통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교권은 타락하고 배도의 길을 걸어갔지만 하나님은 이 땅의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당신의 거룩한 종들을 세워주셔서 신앙의 정통의 맥을 이어가셨던 것이다.

필자는 1938년 한국장로교 제 27차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후 주기철이 순교하던 1944년까지 신사참배 강요가 교단 차원을 넘어 한국교회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을 때 그 거대한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저항운동을 전개했던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교회를 일차적인 자료를 가지고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하려고 한다.

1. 1938년 총회 결정 전후 주기철과 평양산정현교회 저항

1938년 9월 7일 산정현교회 설립자 번하이젤 선교사가 안식년에서 돌아왔을 때 담임목사 주기철이 보이지 않았다. 총회를 앞두고 일제가 그를 두 번째로 검속해 투옥 중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1년 전 지난 [1938년] 9월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교회 담임목사와 부목사, 그리고 교회가 지원하는 전도사 모두 정부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투옥되었습니다. 당회는 내게 주목사가 돌아올 때까지 강단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첫 번째 검속 때는 주기철 목사만 검속되었으나 두 번째 검속 때는 부목사 송영길과 전도사로 섬기는 장로, 그리고 집사 한원준도 검속되어 산정현교회는 위기를 만났다. 주기철을 농우회 사건으로 엮어 송영길과 함께 주기철을 검속하고 의성으로 압송한 것이다. 농우회 활동에 참여한 송영길과 한원준이 산정현교회 부목사와 집사였다. 주기철, 송영길, 한원준 이들 세 사람이 총회농촌부에서 함께 활동했는데 일제가 총회 자금 일부를 정치적인 목적에 사용했다는 혐의를 내세우며 구속한 것이다. 1939년 2월 20일 번하이젤은 이 사실을 편지로 알렸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세 사람 모두가 총회의 농촌부원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었지만 경찰은 농촌부원들이 총회 자금 얼마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유용했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행실을 조사해왔던 것입니다. 많은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한국의 동남부 해안에 위치한 의성으로 압송되어 그곳 감옥에 갇혔습니다. 지난 [1938년] 12월 같이 체포되었던 동행자 평양출신의 집사 한 사람은 풀려났습니다. 그는 그들의 혐의가 경찰에 의해 풀려져 만약 신사에 가겠다는 동의만 한다면 모두 풀려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집사는 동의했고, 그래서 풀려났습니다. 신사참배 요구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목사들은 계속 투옥되었습니다. 전체 사실로 볼 때 본래 적용한 혐의가 단지 속임수에 불과하고 그들을 체포한 실제 이유는 신사에 가서 참배하는 것을 그들이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총회가 열리기 바로 직전에 그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의성 경찰서에서 이들 세 사람에게 일제는 심한 고문을 가했다. 증거 자료를 찾으려고 했지만 일제는 총회 자금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한 적도 없는 이들에게서 혐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들이 얼마나 가혹한 고문을 당했는지 권중하 전도사는 세상을 떠났고 박학진 목사는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 이들은 몽둥이로 심하게 맞았고, 몸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코에 물을 붓는 물고문을 당했다. 많은 다른 목사들과 장로들이 지난 몇 년간 동일한 고문을 당했으며, 경찰은 죽음 직전까지 가서야 고문을 멈추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이들은 매주일 아침 11시에 주일 예배를 드렸고, 주기철은 매주일 오후 죄수들을 대상으로 말씀도 전했다.

일제는 완강한 이들의 신사참배반대 입장을 회유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검속 5개월 만인 1939년 1월 29일 출옥시켰다. 번하이젤은 1939년 2월 20일 이렇게 기술했다:

“지난해[1938년] 8월 말에 산정재교회 두 명의 목회자와 평양산정재교회 담임목사가 체포되었다가 출옥해서 성도 무리에 합류하였습니다. 이들 중 한 사람은 지난 토요일, 1월 28일에 집에 도착했고 나머지 두 사람은 그 이튿날 주일 아침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출옥하는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역까지 나가 이들은 교인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각기 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했지만 회중들에게 몇 마디 인사말만 하고 예배는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주기철이 출옥한 이날 “오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유언적 설교를 했다고 알려진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일단 풀려나긴 했지만 일제가 이들을 회유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세 사람이 풀려난 직후 평양경찰서에서 이들을 재 소환하여 조사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평양경찰서는 이들을 소환하고는 신사는 국가에 대한 예의라는 정부측 자료를 주고 읽고 다시 와서 교육을 받으라고 요구했다:

“최근 감옥에서 석방된 세 명의 평양 목사들은 월요일 아침 경찰서에 소환되어 신사에 대한 태도에 대하여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담대히 자신들의 입장을 천명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은 그들 각자에게 신사에 대한 정부 측 가르침을 설명한 책을 주고는 그것들을 읽은 후 며칠 후에 다시 와서 더 교육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목사로서 자신들의 사역을 계속하도록 허락을 받지 못할 것 같아 염려됩니다.

비록 잠시 풀려나기는 했지만 주기철 목사가 산정현교회 목회를 계속할 수 있을지 번하이젤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일제는 지속적으로 주기철과 산정현교회를 압박한 것이다. 이런 일제의 강압 속에서도 주기철과 송영길 그리고 온 교우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번하이셀의 말을 직접 빌린다면 “교회는 신사 문제에 관한한 그[주기철 목사]와 전적으로 뜻을 같이했다.”

주기철의 산정현교회 목회는 험난한 길이었다. 매주일 수십 명의 사복 경찰들이 예배 시간에 청중들 가운데 끼어 앉아 있는 상황에서 주기철 목사가 단독으로 단에 올라가 예배를 인도했다. 그는 행여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볼까봐 홀로 단에 올라갔다. 당시 주기철 목사가 풍기는 인상은 뭐라 형언할 수 없었다. 구금은 물론 죽음을 각오하고 단에서 담대히 외치는 그의 설교 모습은 회중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고, 참석한 이들에게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만들었다. 당시 산정현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한 안이숙은 그의 설교 모습을 훗날 회상하며 마치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그 자리에 서신 것 같은 큰 감동을 일으키며 섰는 것이 그렇게도 신비스러웠다.”고 이렇게 증언했다.

이처럼 진지하고 박력을 가진 설교에 나는 황홀해지며 내 심부를 꿰뚫는 것 같은 영력이 막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나를 극도로 긴장을 시키면서 온 신경을 예민케 하고 흥분케 했다. 그는 자기도 흥분케 했다. 그는 자기도 흥분이 되어서 주먹으로 꽝 하고 강대를 쳤다. 동시에 벼락같은 웅장한 소리로, “이같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상이 무서워 배반하는 행동을 하자는 모독배들은 모두 이 자리에서 떠나가라” 하고 고함을 질렀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가증스럽고 있을 수 없는 모독이다” 하고 또 고함을 쳤다. 그 소리는 벽력 소리였다.

보통 사람 같으면 견디기 힘들텐데 주기철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일에 소명을 받은 사람처럼 흔들리지 않고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했다. 수많은 회유와 협박이 있었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주일 강단에 서지 못하도록 일경이 설교를 금했지만 그는 설교권을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면 그만둘 것이라고 맞섰다. 산정현교회 안에 신사참배를 한 성도들도 있었지만 주기철의 신사참배 저항에 자신들의 모습이 부끄러웠고 주기철에 대해 여전히 존경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주일에 일본(日本) 경찰대는 또 산정재 예배당을 포위하고 주(朱) 목사에게 “오늘부터 설교하지 마라.” 엄명한 즉 주(朱) 목사는 나는 설교권을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시면 그만둘 것이오. 내 설교권은 경찰서에서 받은 것이 아닌 즉 경찰서에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소. 경찰관이 금지함에도 불구하고 설교하면 체포하겠소. 주(朱) 목사. 설교하는 것은 내 할 일이오. 체포하는 것은 경관이 할 일이오. 나는 내 할 일을 하겠고, 경찰관.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 경찰관의 명령에 불복하는가? 고 노호(怒號)함에 대하여 주(朱) 목사는 일본의 헌법은 예배 자유를 허락한 것이오. 당신들은 지금 예배 방해요, 헌법 위반이오. 단판의 말을 끊고 강단에 올라서는 주 목사의 기세는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이 엄엄숙숙 비장하였다.”

사실 이렇게 당당하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일제라는 무서운 공권력을 가진 국가권력이 힘없는 한 생명을 빼앗으려면 얼마든지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은 고난을 각오하지 않으면 가기 힘든 길이었다. 한두 번 신사참배를 반대할 수는 있어도, 정해진 어느 기간 동안 그럴 수 있어도, 지속적으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실제로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타협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심지어 산정현교회 당회원 안에서도 신사참배를 한 이들이 있었다. 일제는 신사는 국가에 대한 예의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며 흔들리는 이들에게 명분을 주었다. 신사참배는 점점 더 대세가 되었다. 더구나 1936년 한국천주교, 1937년 한국감리교, 1938년 한국장로교 총회마저 신사참배를 수용한 상황에서 어느 개교회와 개인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것은 고난을 각오하지 않는다면 가기 힘든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너무도 많은 이들이 타협의 길을 걸어갔다. 그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이미 제시했듯이 대부분 장로교 목사들은 지속적인 경찰의 압력에 견딜 수 없고 또 감옥에 가서 그들이 어떤 고문으로 고통을 당해야 할지를 잘 알기 때문에 감옥에 가기를 꺼리고 신사에 굴복하고 가서 그곳에 참배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들은 신사가 애국적 행위이지 종교적 의미가 없다는 정부 측 해석을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지만 일제의 압력에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배반하고 양들의 거짓 목자가 되었으며, 많은 교인들을 대단히 실망시켰습니다. 신사참배를 인준한 총회와 또한 여러 많은 노회들의 사례, 감리교나 천주교, 일본 그리스도인들 사례가 보여주듯 많은 교인들은 저항하는 것이 소용없고 그들 모두가 기꺼이 신사참배 대열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그들은 ‘한국 사람들이 현재의 상황에서는 신사에 가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재난의 절정은 최근 장로교 총회장과 부총회장, 감리교 총리사와 그의 직전 전임자, 그리고 한국성결교 교단장 모두 그곳에 있는 유명한 국가신사에 참배하기 위해 일본에 갔을 때 도래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한 교회로부터 가도록 임명을 받은 것이 아니고 정부에 의해 압력을 받아 갔으며, 그들 각 사람들에게 각기 100엔의 경비가 지급되었다고 보고되었습니다. 정부 당국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교회를 통제하기로 결정한 듯하며, 외형적으로는 거의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미 남궁혁과 박형룡은 망명의 길을 떠났고,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정하고 적극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분위기였으며, 평양신학교 마저 폐교된 상황에서 산정현교회가 신사참배반대운동의 중심에 선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길이었다. 한 때 주기철의 든든한 후원자들이었고 신사참배반대운동을 함께 했던 이들마저 하나둘씩 주기철의 곁을 떠나기 시작했다. 김인서는 싸움은 남았는데 친구가 주기철을 떠나갔다며 이렇게 안타까움을 글로 남겼다:

주(朱) 목사 박해받던 초기에는 결사(決死)의 전우(戰友)도 적지 않았고 추종자도 많았지만 날이 갈수록 한 사람 두 사람 이별이 되었다. 권련호(權連鎬) 목사 기양교회에서 자주 찾아다니다가 철산(鐵山)교회에 옮겼고 김상권(金尙權) 목사 신암교회 있어 급한 때 강단을 돕다가 원산(元山)에 가고 박병훈(朴柄勳) 목사 신학교에서 추종하다가 일본(日本) 중(中) 앙신학교(央神學校)에 전학하였다. 김명집(金明執) 목사는 주 목사가 “피신하라” 권하여 북지(北支)에 보내였다. 싸움은 남았는데 친구는 떠나갔다.

엘리야 시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자가 칠천이었다고 하지만 당시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고난의 길을 걸은 목회자들은 소수였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그 주변의 인물로는 채정민(蔡廷敏), 최봉석(崔鳳奭) 목사, 이인재(李仁宰) 전도사, 산정현교회 방계성 전도사, 백인숙(白仁淑) 전도사가 여전히 신사참배반대운동의 선봉에 서서 주기철과 뜻을 같이했을 뿐이다.

2. 주기철의 세 번 째 검속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가 일제의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담대히 주일강단을 지켜나가자 일제는 평양노회를 통해 주기철과 평양산정현교회를 제재할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번하이젤이 편지에서 밝힌대로 주기철 목사는 1939년 10월 초에 세 번째로 또 다시 검속되었다.

주기철이 검속되어 주일 강단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서 강단을 맡은 사람은 번하이젤 선교사였다. 일제는 그에게 설교를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한편 두 명의 선임장로들을 불러 먼저 솔선수범해서 신사참배 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면 교인들이 따라하지 않겠느냐고 회유한 것이다. 한편으로 설교를 하지 못하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전체 교우들이 신사참배를 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러나 번하이젤도 장로들도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번하이젤은 삼일운동 때도 그랬지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때도 사명을 가지고 담임목사 투옥 중에 산정현 강단을 지키며 교인들을 독려했다. 1939년 12월 20일 그는 자신의 편지에서 이 사실을 밝혔다:

한 동안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그 주제[신사참배문제]에 관한 마지막 편지를 보낸 이후 지난 40일 동안 상당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경고를 받고도 산정현교회 강단에서 설교를 한 후 경찰서에 다시 소환을 받았으며, 만약 내가 다시 설교한다면 내가 벌을 받거나 추방을 당할 것이며 모든 선교사들의 장래사역도 제고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평양선교부와 여기 회기 중에 있는 실행위원회의 사람들과 상의를 하면서 특별히 나와 함께 같이 교회 사역을 감당하던 전도사 방[계성] 장로가 지금 체포된 상황에서 산정현교회 교인들을 광야에 내버려 둘 수 없다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실행위원회 위원들 뿐만 아니라 선교부 사람들은 산정현교회 사역을 계속하겠다는 나의 결심을 지지했습니다.

여기 장로회 선교부 실행위원회는 북장로교선교회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 일이 있기 몇 년 전인 1935년 북장로교 선교회 실행위원회 홀트그로프트(허대전), 솔터(소열도), 해리 로즈(노해리)는 조지 매큔이 신사참배문제로 추방당할 때도 한 결 같이 호흡을 같이 했던 이들이었다. 평양의 선교사들은 번하이젤과 뜻을 같이 했다. 교회도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한 뜻으로 뭉쳤다. 지도적인 인물들만 아니라 교인들 하나하나까지 예의주시하며 감시하는 상황에서 이들이 흩어지지 않고 하나로 뭉쳤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담임 목사가 구속된 상황에서 번하이젤 선교사와 당회 그리고 교우들이 하나되어 신사참배 반대 입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노회도 이들을 회유할 수 없었다. 일제는 물리적인 방법을 쓰기로 결정하고 1939년 10월 21일 아침 산정현교회 장로와 집사 18명을 평양경찰서로 소환했다. 1939년 10월 22일자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이 사실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평양부내 산정현 예배당에서는 작년 봄 동 교회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절하여 평양 경찰서에 피검되어 지금까지 오는 중인데 그 동안 주 목사 대신 편하설(片夏卨)이란 서양 선교사가 교회 일을 맡어 보아 오는 동시에 동 교회에서는 몇 사람을 빼노코는 신사참배를 불이행하여 왔다. 그런데 이십일(二十一)일 아침 돌연 평양 경찰서에서 동 교회 장로, 집사 등 십팔(十八) 명을 호출하고, 일(一), 교회 위원은 전부 매 주일 한 번씩 신사참배를 이행할 것. 이(二), 설교 또는 기타 교회 사무는 위원들만이 집행하고 서양인과 기타인은 교회 일에 관여하지 말 것. 삼(三), 금일 오후 삼(三)시까지 회답할 일. 세 가지 항목을 지시하고 만일 불응하는 대에는 내일부터 교회를 폐쇄한다는 강경한 방침을 보였다. 동 교회에서는 타개책을 강구 중이며 경찰서에서 지시한 기간 내로는 회답이 어려울 것 같다고 한다.

당시 〈동아일보〉가 주기철 목사와 평양산정현교회 상황을 상세히 보도한 것이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것처럼 기록했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동아일보〉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먼저 산정현교회 교우들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신사불참배를 이행하여 왔다는 사실과 경찰서에서 요구하는 사항이 무엇인지를 그 내용을 지상에서 밝힌 것이다. 이것은 당시 전국 곳곳에서 신사참배반대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격려와 용기를 제공했을 것이다. 마지막에 회답이 어려울 것 같다는 것도 교회가 신사참배문제에 있어서 쉽게 타협의 길을 걸어갈 것 같지는 않다는 평가를 덧붙인 것이다.

번하이젤은 최근 진행되고 있는 산정현교회의 소식을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소상하게 알렸다. 이 편지에서 번하이젤은 평양경찰서의 요구를 산정현교회 교인들이 거절하고 교회가 폐쇄되는 한이 있더라고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했고, 적당한 목사를 새로 물색해 보라는 요구에 대해서도 장로교는 교인들이 자기 목사를 선택한다는 사실을 들어 거절했음을 밝히고 있다.

18명의 교회 제직들이 일제에 단호하게 맞선 것이다. 1939년 10월 24일 〈동아일보〉 보도에 의하면 산정현교회 “제직회원의 대부분은 참배를 찬성치 아니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일제는 주기철 목사가 구속된 상황에서도 번하이젤 선교사와 방계성 전도사가 설교를 맡으며 당회와의 협력 속에 교회를 계속 안정되게 이끌어 가자 방 전도사를 불러 의도적으로 수요설교를 못하게 방해했다. 방 전도사는 번하이셀에게 다음과 같이 소상하게 이 일을 전해주었다:

수요일 오후, 그날 저녁 수요 기도회를 인도해야 할 교회 전도사 방장로가 내게 와서는 그가 저녁 전에 체포될 것 같다고 말하면서 내게 수요 기도회를 인도할 준비를 하고 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물론 나는 그렇게 하겠노라 약속했습니다. 수요 기도회 시작 45분쯤 전에 경찰 한 사람이 찾아와 나에게 그들이 나를 보기를 원하니 잠시 경찰서로 와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내 아내와 나는 차를 타고 경찰서에 가서 바로 교회로 갈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경찰서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 그녀는 차에 앉아 기다렸습니다. 나는 경찰 간부가 올 때까지 20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는 왜 그들이 주목사를 체포했는지 긴 설명을 늘어놓고는 산정현교회와 내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교회 제직들에게 지시가 내려졌다고 말하고는 중앙정부가 선언한 대로 신사는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애국적인 행위라는 지난 수년 동안 지겹도록 반복해온 그것들을 말하면서 신사참배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회에 갈 수 없도록 하려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여 그가 말을 중단할 때까지 참고 들었습니다. 그는 내가 교회에 지시를 내린 것들을 이해하고 동의해 주기를 희망했습니다. 나는 혹 그가 내가 그 교회에서 설교를 하지 않기를 말하려고 하는 의도는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말했습니다. “전혀 아니요, 당신은 그곳에서 어느 때든지 설교할 완전한 자유가 있습니다. 단지 나는 그 상황을 당신이 이해하기를 희망합니다.” … 8시 30분에 그는 말을 끝냈고 나는 경찰서를 나왔습니다.

일제는 번하이젤이 정곡을 찌르자 얼버무려 대답했지만 번하이젤과 방계성이 더 이상 산정현교회 설교를 하지 않기를 바랬다. 또 노골적으로 못하게 지속적으로 협박하며 강요했다. 번하이젤은 제직 중에 대신 설교할 사람을 뽑을 것을 요구했고, 1939년 11월 4일 토요일 저녁에 열린 당회에서 오윤선 장로가 설교하도록 협의했다. 그 다음날 신사참배반대에 대해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는 오윤선 장로가 단에 올라 “예배를 인도하게 되자 교당 내는 긴장한 공기에 휩싸인 채 예배가 끝났다.”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신사참배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을 강단에 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그 주일 오후 산정현교회는 “전체 제직들이 모여 어떠한 경우에도 신사참배한 사람은 강단에 세우지 않겠다고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그들은 심지어 작년에 단 한 번 신사참배를 했던 장로 세 사람마저 설교자에서 제외시켰다. 왜냐하면 그들 중 한 명이라도 강단에 오르면 경찰은 신문에다 산정현교회가 마침내 굴복하고 신사참배자를 강단에 세웠다고 선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세 장로들도 교회가 곤경에 처하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런 결정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런 결정 사항은 곧 바로 경찰에 알려졌다.”

1939년 10월 중순 주기철 목사가 구속될 즈음부터 산정현교회는 매일 새벽 5시 30분에 모여 간절히 기도드렸다. 1939년 11월 14일 번하이젤은 지난 6주간 동안 매일 아내와 함께 새벽기도에 참석했다며 이 사실을 담담히 밝혔다:

지난 6주가 넘게 매일 새벽 5시 반에 교회에서 기도회가 모였습니다. 교인들이 잘 참석했고,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사자의 발톱에서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열심히 간구했습니다. 아내와 나도 거의 모든 기도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단지 매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한다는 것이 육신적으로는 부담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교회가 집에서 불과 1마일 가량 떨어져 있어 차로 가면 어려움 없이 새벽기도회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노회에 신사에 가서 참배를 하라고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모든 노회원들이 어느 때에 가야 한다는 안내가 있었습니다. 140명의 노회원 가운데 단지 12사람만이 신사에 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 동안에 들은 가장 고무적인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산정현교회는 길고 긴 어두운 터널을 계속해서 통과해야 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산정현교회 교우들이 하나되어 거대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섰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흔들리지 않고 말이다. 일제는 소속 노회를 통해 주기철 목사를 산정현교회 당회장 직에서 사면시키기로 발 빠르게 움직였다. 평양노회장에게 임시노회 소집을 요청했고, 노회 소집통보경찰이 번하이셀과 방전도사, 장로, 제직회원들을 소환하여 협박했지만 산정현교회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경찰은 노회를 이용하여 주기철 목사를 사면시키고 예배당을 폐쇄시킬 음모를 꾸몄다. 일제가 용의주도하게 선교사들과 한국교회를 떼어 놓으려고 시도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일제는 1938년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후부터 더욱 강하게 이 일을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한국장로교단은 일제의 요구에 순응하며 타협과 배도의 길을 가고 있었고, 일제는 한국교회 총회 지도자들을 이용해 선교사들과 한국교회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고 노회가 이를 수용하는 상황에서 교회의 순결에서 참으로 중요한 성례집행과 치리를 집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일을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넘겼다. 선교사들이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정부의 시책에 순응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목회자들은 선교사들과 접촉하면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선교사들과의 접촉을 꺼렸다. 자연히 선교사들과 한국교회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말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많은 목사들과 장로들이 이미 신사에 가서 참배하라는 명령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 투옥 당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어려움과 협박과 고문으로 굴복을 했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그들이 굴복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방향으로 호도하는 일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후에 우리 지역 노회가 열렸는데 노회장은 총회의 결정을 단지 발표하고 교회가 이에 순종해야 한다고 천명했습니다. 의사 결정 묻는 투표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결과로 우리 선교사들은 우리가 책임을 맡아오던 교회에 대한 모든 당회장 권한을 사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꺼이 교회들을 순회하고 복음을 전하고 사경회를 개최하지만 성례를 집례하고 치리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노회에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당회장 권은 한국인 목사들에게 넘어갔습니다. 총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목사는 경찰이 금할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교회들을 순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작금의 상태입니다. 선한 많은 교회들이 선교사들의 방문을 여전히 환영하고 있습니다만 다른 많은 교회들은 선교사가 그들을 방문하게 되면 그 후에 경찰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초대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총회와 교단은 신사참배를 수용했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분명한 반기류가 강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회나 총회와 관련된 직책을 계속해서 수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모든 관련 직책을 내려 놓았다. 신사를 찬성하는 한국교회와 이를 반대하는 선교사들 사이가 점점 더 멀어졌다. 1939년 2월 번하이셀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는 이를 단적으로 증거해 준다:

경찰은 선교사들과 한국 목사들이나 다른 교회 사람들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모든 가진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집을 방문하지도 말고 우리와 아무런 관계도 갖지 말라고 지시 받았습니다. 선교사들과 한국인 목사들이 상호도움과 교제를 위해 한 달에 한번씩 모여 오던 평양의 목사회도 아마도 마지막 모임이 될 것 같습니다. 목사들은 목사회에서 멀어지라고 경고를 받았습니다. 오늘 한 목사가 업무차 필자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어두어진 뒤에야 돌아갔습니다. 그는 내게 명함을 주고는 다시 되돌려 달라고 내게 요청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나를 방문했다는 사실이 경찰에게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경찰이 싫어하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상태는 그 나라 전역에서 동일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일제는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총회는 신사참배를 했고 선교회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상황에서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와 교인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차단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용기있는 선교사들의 행동과 신앙을 물리적으로 막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특별히 산정현교회, 번하이젤, 그리고 주기철은 혹독한 시련을 감수하면서도 전체가 하나 되어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온 몸으로 저항했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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