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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 소고: 성경과 신조의 관계, 웨스트민스터대소요리문답 제1문을 중심으로 2
서요한(총신대학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7/10/05 [21:11]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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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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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총신대 서요한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성경과 신조의 관계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표준문서들, 대소요리문답을 연구하여 교회로 하여금 이단들의 사상에 빠지지 않도록 교훈을 주고 있다.

5.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답):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중에 대요리문답은 일반 성도들을 위해 작성되었고, 소요리문답은 젊은이 교육, 주일학교 학생들을 위해 작성되었다. 두 문답서는 채택 후 지금까지 놀랍게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유는 성경의 교훈을 체계적이고 간결하게 제시하며, 가장 정확한 말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두 문서 중 후자는 총 107문으로 구성되었고, 1문-38문: 하나님에 대해 믿어야 할 내용을 가르치고, 39-107문: 믿음으로 행할 내용을 핵심적인 언어와 함께 조직적으로 제시한다. 이는 칼빈의 제네바 요리문답(1542년)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에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기록된 표현을 교회 역사의 중요한 시점에서 적절히 사용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두 문서의 전체 질문 중에 첫 번째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고 함축하는지, 이는 대소요리문답서 전체 196문과 107문의 이해의 열쇠요 관건인바, 첫 질문은 세 가지 깊은 의미를 갖는다. (1) 신학적 이해-하나님의 신적 통치, (2) 인간론적 이해-인간의 실존적 위치, (3) 역사적 이해-성공적 인생을 위한 참된 가치관의 형성이다. 이는 다시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와 피조물인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 정리된다.

(1) 신학적 이해-하나님의 신적 통치: 성경에 의하면 역사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선과 악, 빛과 어둠, 어거스틴에 따르면 아벨과 가인의 후손 간의 갈등과 대립, 반목과 죽음의 권력과 통치의 역사이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이후 구약 시대의 전개 속에, 애굽,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그리고 예수님이 태어나 사역하신 로마시대, 제국 황제들을 통해 구현 되었다. 고대 제국의 통치자들이 그렇지만 당시 로마 황제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주인인 듯 마치 살아있는 신으로 행세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수호신을 자처하며 국민들로부터 모든 영광을 받았다. 제국의 통치아래 분봉 왕 헤롯은 당시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마침내 2살 이하의 사내 아이들을 죽였다. 이는 크던 작던 통치권을 둘러싼 문제였다.

예수님 승천 후 약 500년 동안 초대교회의 전통은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로마 황제의 통치 속에서 핍박받던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끝까지 신앙으로 맞서 투쟁하였다. 500년 이후 1500년까지 1,000년 동안 중세 교회는 교황권, 즉 교권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였다.

역사적으로 중세는 초대교회의 신앙과 전통위에 건축되었다. 모든 것은 완벽하게 준비되었다. 하지만 교황은 소위 신권(神權),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우셨음을 빙자하여 부의 축적, 낭비와 사치로 권한을 남용하였다. 대표적인 남용은 십자군 전쟁의 촉발과 마녀사냥이었다. 그리고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을 위해 면죄부를 발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534년 영국의 헨리 8세의 수장령 선포로 태동한 영국의 국교, 성공회(Anglicanism)는 일부 개혁의 불충분 내지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달리 독자적으로 정착하였다. 같은 시기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아일랜드 교회는 영국과 달리 아직은 로마 교황청의 간섭을 받았다. 그런데 1547년 헨리 8세의 사망으로 에드워드 6세가 국왕에 오르면서 모든 상황은 급변하였다. 존 낙스와 토마스 크랜머 중심의 개혁운동이 급속히 전개된 것이다. 하지만 에드워드 6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1553년 이복 누이 메리(캐서린의 딸)가 왕위에 오르면서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메리는 가톨릭의 신앙 전통과 의식을 복원하였다.
 
하지만 메리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엘리자베스 1세(앤 볼린의 딸)가 왕위에 올랐다. 그 후 제임스 6세(영국 제임스 1세), 찰스 1세와 2세의 통치를 거치는 동안 영국과 스코틀랜드 교회는 혼란에 빠졌다. 특별히 제임스 1세는 자신의 왕권에 관한 두 편의 중요한 글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자유로운 군주제의 진정한 법과 바실리콘 도론(왕의 선물)이었다. 이 두 편의 글은 왕권 강화에 맞선 그룹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으나 비판자들은 왕권신수설을 막지 못하였다. 결국 군주 혁명, 왕권신수설은 종래의 전통을 체계화하고 공식화하였다. 하늘의 승인은 그러므로 군주를 단순히 무력 때문이 아니라 이성에 부합되기 때문에 정당한 존재로, 군주의 권력은 아무리 보아도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왕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백성의 어버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신학적 쟁점은 누가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인가가 부각되었다. 이는 중세 1,000년의 가톨릭의 통치 이념으로, 영국의 성공회, 즉 감독교회는 하나님의 위탁을 받은 국왕이 통치자임을 주장하였다. 한편 스코틀랜드 개혁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통치자임을 천명하였다.

당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채택된 17세기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소위 절대왕정 시대였다. 당시 유럽의 왕 중에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자칭 태양왕 루이 14세는 절대왕정의 상징이었다. 그는 1638년부터 1715년, 4살 때부터 모친과 재상들의 섭정아래 죽기까지 72년 동안 당시 최대 강국 프랑스를 통치하며, 지금까지 전 세계 역사 속에 가장 오래 왕권을 누렸다. 그는 “내가 친정하는 동안 나는 절대왕정을 이루리라, 나는 태양왕이며 곧 국가이니라”(짐이 곧 국가)고 천명하였다. 같은 시기 영국은 찰스 1세와 찰스 2세가 다스리던 절대 왕정 시대였다. 찰스 1세는 부친 제임스 6세(1세)의 뒤를 이어 1625년부터 1649년까지 통치했으나 올리버 크롬웰의 주도아래 화이트 홀(현재 우리나라 청와대)에 있는 런던 탑(Tower)과 교각(bridge)이 있는 자리의 단두대에 올라 목 베임을 당한 폭악한 왕이었다.
 
찰스 1세는 24년 통치 동안 자신의 부와 권력, 명예를 위해 산 자였다. 그리고 아들 찰스 2세는 1660년 왕정복고를 통해 스튜어트 왕가를 부활시킨 후 1685년까지 절대 왕권을 행사하였다. 이 기간 동안 수많은 개혁자들이(스코틀랜드의 언약도들과 영국의 청교도들) 예배 의식의 개혁과 갱신을 위해 투쟁하며 신앙으로 통치권에 맞섰다. 이러한 교회와 국가 간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청교도들은 영국도 유럽의 국가들, 특별히 그리스도의 통치와 왕권을 주창한 칼빈의 제네바,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의 장로교처럼 개혁되기를 소원하였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누가 영국의 실제적인 주권자인가를 논의하며, 오직 그리스도와 언약, 하나님의 말씀과 영광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분은 영이시며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존재에 변함과 지혜와 능력과 거룩과 공의와 선하심과 진리에 변함이 없으시다. 대상 29:10-11,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가로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 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주지하듯이 이 세상은 하나님이 주권적인 지혜와 능력의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출 19:1-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사 44:24,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조성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거짓말하는 자의 징조를 폐하며 점치는 자를 미치게 하며 지혜로운 자들을 물리쳐 그 지식을 어리석게하며...” 사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란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그밖에 롬 11:36, 고전 10:31, 시 73:24-28, 요 17:4, 21-23, 고후 5:14-15이 대표적이다.

한편 하이델베르크 신조 제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변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보혈로 나의 모든 죄 값을 완전히 치르사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로부터 구원하셨고 또한 나를 보호하시사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협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하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성령으로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나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2) 인간론적 이해-인간의 실존적 위치: 이는 다른 말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 실존을 묻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들 각자, 자신의 존재를 올바로 인식하라는 것이다. 성경에 첫 사람 아담은 (히) “붉다”라는 뜻이다. 아담은 붉은 흙에서 왔다. 왜 우리의 얼굴이 붉은가, 그것은 흙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흙의 재료는 아무것도 아닌 티끌이다. 티끌은 가장 흔하고 천한, 무가치한 것이다. 이렇게 지음 받은 인간은 아침 안개요 바람 같은, 하루살이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가치한 존재, 붉은 흙덩어리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셨다. 왜 이렇게 하셨는가?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44:21-23,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찌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찌어다 산들아 삼림과 그 가운데 모든 나무들아 소리 내어 노래할찌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로 자기를 영화롭게 하실 것임이로다”.

따라서 인간 실존의 의미, 즉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창조하신 자를 기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천성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말씀을 받아도 망각에 사로잡혀 그릇 행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 욕망을 위해 살아간다. 이는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실로 순간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문답은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독립적이 아닌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은 피동적인 존재, 지음을 받은, 지으신 이, 소유주가 따로 있다. 그분께서 값을 지불하여 거룩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소유주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도,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나를 잘 아시며 사랑하신다. 나를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며 살피신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괴롭게 한다. 사울은 회심 전 다메섹 도상에서 행 9:5, 예수님께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다. 이치오피아의 내시는 행 8:34, 선지자가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키느냐, 즉 인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두 질문은 하나님에 의해 설명되며 그 분과의 대면으로 깨닫게 된다. 따라서 그 분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되고 존경을 받으시며, 순종과 복종으로 무릎을 꿇어야 한다.

(3)역사적 이해-행복의조건: 이는 추구해야 할 가치관이 무엇인지 가르친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창조물과 피조물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물 떠난 고기 살 수 없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살았어도 의미가 없다. 하나님 없이는 결코 자신의 존재를 올바로 인식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 얍복강의 야곱처럼 그분과 대면하면 철저히 자기 자신을 부정하게 된다. 모세처럼, 이사야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존재, 그 분만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가 된다. 겸손한 존재, 자기 부정을 통한 하나님 섬김과 높임, 경배와 찬양, 영광스런 존재를 천명한다. 그러므로 제1문,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답,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언제 우리가 은혜를 받는가? 그것은 계획한 일들이 잘 되고, 성공하고, 승진하고, 건강하고... 모든 것이 좋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은혜는, 구원의 은혜는 자기 부정을 통해, 가슴을 치며 통회 자복할 때 받는다. 오직 십자가만을 내세우며 자랑할 때,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높일 때 주어지는 것이다.

갈 6:17, 바울의 고백처럼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라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좋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 한 사람이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마음을 강팍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살아 숨쉬는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6. 결론

고찰한바와 같이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서를 작성한 신학자들(The Westminster Divines)은 혼란의 와중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확고한 신앙, 그리스도의 왕권과 언약(For Christ’s Crown and Covenant)을 믿었다.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주권과 돌보심 아래에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자연의 인과응보 법칙에 따르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천명한 노력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칼빈주의적 확신을 반영하였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 제1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앙’(Coram Deo)과 ‘오직 믿음’(Sola Fide),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일관된 신앙을 보여 준다.
 
종교개혁이 교리 문제로 주로 교회의 신앙과 구원이었다면 17세기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작성기에 청교도들은 절대 왕정에 맞서 유일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주창하였다. 전자, 즉 종교 개혁의 신앙은 ‘순수한 신앙고백을 철저하게 추구하는 신앙’이다. 로마 가톨릭의 비성경적 가르침과 세상과 결탁한 변질된 기독교 사상에 맞서 종교 개혁을 성취한 개혁자들의 신앙을 추구한 것이다. 이는 신앙의 올바른 목표와 대상에 대한 바르고 참된 믿음과 지식의 추구를 가리킨다. 한편 후자는 거시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전개 과정에서 그분의 통치가 어떻게 성취되는지, 누가 진정한 통치자인지, 왕권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통치인지를 역동적으로 주장하였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교회가 완전히 부패했을 경우를 제외하고 신앙고백은 결코 포기된 적이 없는 기독교의 전통”이라고 하였다. 실로 신앙고백은 성도의 신앙을 하나로 묶어 주는 진정한 교회 일치의 첨병이며, 세상과 이단과 거짓 복음으로부터 참된 신앙과 참된 교회의 영역을 표시하는 지계석이다. 교회의 존재 의무, 구원받은 성도들의 책무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궁극적인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고백을 힘써 배워 성경의 본의를 바르게 해석하며 또한 성경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적용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참된 신앙고백을 통해 우리의 교회와 신앙을 바르게 세워나가는 일은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추구하는 진실한 교회와 성도에게 주어진 숭고한 책임이며 사명이다. 오늘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온갖 시련과 역경 중에도 교회의 올바른 전통을 세우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