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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명절에] 내 고향 거금도
거금도의 조선시대 이름인 절이도(折爾島)였다.
기사입력: 2017/10/04 [08:51]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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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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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금도의 거금 문학회가 거금도 해변도로 공원에 설치한 설치문   ©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거금도는 우리나라에서 열 번째로 큰 섬이다. 고흥군에서는 첫 번째로 큰 섬이다. 거금도는 고흥반도 도양읍에서 남쪽으로 2.3km 떨어진 해상에 있으며, 소록도 바로 아래 위치한 섬으로 소록도에서 1.6떨어져 있으며 면적은 63.57이다. 현재 인구는 4661명으로 65세 이상이 2068명으로 44% 정도다(면사무소 자료).


▲거금도에서 소록도를 바라본 거금 연륙교      © 리폼드뉴스

녹동항에서 소록도 통해 거금도 까지 거금대교가 개통하여 육지와 연결돼 있다. 길이 1,160m, 왕복 2차로의 다리로 연결도로를 포함하면 3,460m에 이른다. 전라남도가 20016월 착공해 20093월에야 완전 개통되었다. 자정 모노케이블 현수교로, 12개 교각이 있고 중앙부분에 주탑 2개가 케이블로 연결되어 있다.

 

녹동항에서 거금도 사이에 소록대교로 소록도와 연결되어 있다. 소록도는 섬 전체가 국립소록도 병원으로 지정되어 있고 한센병 환자와 병원 직원, 자원봉사자 등 6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한 해 30만 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 거금도의 적대봉     © 리폼드뉴스

 

거금도는 제2의 제주도라 할 만큼 오염되지 않은 자연과 청정 바다, 그리고 익금 해수욕장이 있다. 그리고 거금도 출신 프로 레스링 김일 선수의 기념관이 있다. 프로 레스링에서 박치기 왕으로 알려진 김일 선수는 거금도 출신이다.

 

그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힘에 스승 역도산으로 부터 전수받은 기술로 1년이 지난 195812월 첫 데뷔전을 가진 이후 제5년이 지나지 않은 1963, 미국 LA에서 열린 WWA 세계레슬링 챔피언쉽 대회에서 세계챔피언이 오른 이후 3천 회가 넘는 경기에 20여 차례에 챔피언 방어전을 치른 당시 레슬링계의 영웅이었다(김일 선수 기념 체육관 역사 자료실 참조).

 

거금도의 조선시대 이름인 절이도(折爾島)는 고고학적으로 볼 때 대흥리에 100여개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청동기시대부터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추정한다.

 

문헌상으로 <세종실록>에 그 이름이 처음 나오는데 내용은 세종 13(1431) 6월에 전라도 처치사가 절이도 등에서 얻은 청낭간(靑琅: 산호와 비슷하고 빛깔이 푸른 보석)을 국왕에게 올렸다고 기록된다.


▲적대봉에서 바라본 오천리에 설치된 저수지      © 리폼드뉴스
  

세조 12(1466) 전라도 전마절감 박식(朴植)이 물과 풀이 풍족한 절이도에 말 8백여 필을 방목할 수 있으니 목장성(牧場城)을 쌓을 수 있도록 의정부에 청하였다. 그러자 회령포, 돌산포 등 여러 포구의 선군(船軍)을 동원하여 석성(石城)으로 목장성을 수축하였으며, 실제로 1470년에 364두의 말을 방목하고 있었다.

 

한편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해(선조 31, 1598)에 절이도에서 왜군들과 전투를 벌여 왜적의 머리 71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는데 이 전투를 절이도 전투라고 한다.

 

절이도는 조선시대 이후 강진군에 편입되었다가 1897년 돌산군 금산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고흥군 금산면이 되었다(이하, 거금도면사무소, 군청 자료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음백과, 위키백과, 대한민국 구석구석 참조).

▲ 거금도 출신인 김일 기념 체관관     © 리폼드뉴스
  

섬에 큰 금맥이 있다고 거억금도(巨億金島)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행정구역상 거금도 전체가 금산면으로 구성돼 있다. 필자의 고향 마을 뒤산인 적대봉(積台峰, 592m)은 거금도에 솟아 있는 적대봉(592.2m)은 마치 바다에 떠 있는 고래 등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섬에 솟은 산이면서도 고흥군에서는 팔영산(608.6m) 다음으로 높은 적대봉은 펑퍼짐한 산세와 달리 전망이 매우 뛰어난 산이다. 정상에 서면 서쪽으로 완도, 남쪽으로 거문도, 동쪽으로 여수 일원의 바다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날씨가 좋으면 멀리 제주도가 바라보인다 할 정도로 전망이 좋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적대봉 정상에는 조선시대 때 왜적의 침입 등 비상사태를 전달해주던 둘레 34미터, 지름 7미터의 큰 봉수대가 정상에 있다.

▲   거금도 해안도로에서 기념사진(필자)   © 리폼드뉴스
  

거금도 드라이브 코스는 고흥읍에서 국도를 따라 녹동에서 거금도를 잇는 거금대교를 지나 거금도 일주도로를 돌아볼 수 있다. 해안선 길이는 54.0이다. 주변에는 연홍도오동도형제도죽도소취도대취도 등 많은 부속 섬들이 있다.

 

거금도 주변에 소록도 공원과 녹동항, 고흥우주발사센터, 미술관 등이 위치하고 있어 소록 거금대교를 경유하는 해상관광 코스로 명성이 높다.

▲   대한민국 구석구석 에서 캡쳐  © 리폼드뉴스


필자의 고향은 거금도에서 섬중앙에 위치한, 섬이면서 바다를 접하지 않는 홍연이란 산골마을이다. 뒤산이 바로 적대봉이다. 거금도이면서 바다를 바라보지 못하고 자란 그런 환경이었다. 거금도 들어온 최초의 소씨 조상은 오룡도와 홍연에 자리잡았다.


소씨 집안 종손 집안으로 어머니는 필자의 위로 누나 두 분이 태아났다. 종손 집안에서 딸을 둘이나 낳은 어머니의 학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필자가 태어났으니 얼마나 귀한 존재였겠는가?


어렸을 때부터 홍연에서 생활하면서 동네에 우뚝 서 있는 커다른 고목나무를 바라보고 자랐다. 그 고목 나무를 우리는 고산(孤山)목이라 불렀다. 이 나무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가 심었다고 전해오는 나무다.


고산이 1643년 보길도에서 머물고 있던 고산 윤선도는 인근에 있는 거금도의 아름다운 풍성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이곳을 잠시 찾아 오게 되는데, 그는 거금도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둘러 보고는 이를 8경으로 비유한 글귀를 남기게 된다.


그리고 잠시나마 이곳에 마물렀던 기억들을 추억으로 남기고 싶었는지, 이를 기념하기 위한 나무 한 그루를 심게 되는데, 당시에 그가 심은 나무는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홍연마을에 우뚝 서 있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기리기 위한 마음으로 고산목(孤山木)이라 부르고 있다.


▲ 거금도 홍연 마을에 있는 고산목     © 리폼드뉴스

필자는 그 소씨 집안의 종손이다. 부친은 필자를 거금도에 있는 중학교보다 녹동으로 중학교를 보내 소씨 문중을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견문을 높이기 위해 녹동초등학교로 전학을 하여 녹동중학교를 다니게 했다.


▲ 장효문 선생님이 1974년에 <시문학>에 등단한 <들쥐떼의 울음> 표지     © 리폼드뉴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거금도에서 녹동으로 유학을 간 셈이다. 녹동중학교 1학년 때인 1974년 '들쥐떼의 울음'으로 <시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장효문 선생님을 만났다. 그는 <들쥐떼의 울음> 외에 <서사시 정봉준>, <아버지 저 무지개가 보입니다>, <신의 눈물> 등을 발표했으며, 고흥고와 고흥여고에서 30여년 동안 시인으로, 교편생활을 하다가 2009년 3월 4일에 지병으로 향년 69세로 타계했다.

장효문 선생님이 녹동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봉직하면서 1974년에 <들쥐떼의 울음>이라는 시를 발표할 때 그의 제자였으니 그 선생님으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우리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은 일명 용팔이었다. 필자의 일기장에서는 용팔이 선생님인 장효문 선생님이 필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깨알처럼 기록돼 있다.

고향은 어머니와 같은 포근함, 아버지와 같은 든든함이 있다. 필자에게 고향은 남다르다. 호를 <거금>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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