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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인물/탐방
존경하는 김명혁 교수님의 간증
김명혁 교수님의 박윤선 교수님에 대한 감사 이야기
기사입력: 2017/09/26 [11:02]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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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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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총신대학원에서 박윤선 목사님에게서 성경신학을 배웠고 김명혁 교수님으로부터 교회사를 공부하였다. 두 분 모두 실천적 모범의 스승님으로서 귀감이 되시는 분들이시다. 박윤선 교수님의 영혼은 소천하셨고 시신은 수원 합동대학원대학교 뒷 동산 모덤에 안치되어 있다. 김명혁 교수님은 연로하신데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을 역임하시는 등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신다. 다음은 뉴스파워에 올린 김명혁 교수님의 존경하는 박윤선 교수님에 대한 감사 이야기다. 우리들 신앙에 도움이 되고 삶의 지혜를 준다고 생각되어서 여기 그 원문을 올린다. 


 

▲ 영음사와 정암문서선교회 주최로 열린 '박윤선 중국어 주석 및 대담집 출판기념회'     ©뉴스파워


 나에게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어주신 박윤선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총신과 합신에서 박윤선 목사님을 만나게 되어 사랑하며 존경하게 되었는데 박윤선 목사님으로부터 기도와 말씀, 진실과 겸손, 단순함과 소박함과 따뜻함의 영성을 보물로 물려 받았다. 박윤선 목사님은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으로 내가 가장 존경하고 가장 좋아하는 목사님들 중의 한 분이 되셨다.

박윤선 목사님은 기도와 말씀에 사로잡힌 분이었다. 총신에 계실 때 역삼동 개나리 아파트에 사셨는데 매일 새벽, 택시를 타고 총신 뒷산에 올라가서 2,3시간씩 기도하시는 모습을 한 6개 월 동안 옆에서 목격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도 박윤선 목사님을 흉내 내며 두 달 동안 새벽에 총신 뒷산에 올라가서 박 목사님 가까이에서 기도하곤 했다. 박윤선 목사님은 어디에 가실 때나 또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에도 간간히 주여! 주여!” 라고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곤 했는데 영혼의 호흡 소리와 같이 들렸다.

박윤선 목사님은 1979년 총신에 학생 소요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도 기도로 일관했다. 학생들이 이사회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서 이사들과 교수들의 자동차를 뒤집어엎기까지 했다. 그런데 학교의 책임자이신 박윤선 목사님께서 학생 대표들을 불러서 타이르거나 사태 수습을 협의하는 대신 특별 기도회를 선포하시고는 밤마다 강당에서 기도회를 인도하셨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 기도회의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저마다 일어나서 내가 누구의 자동차를 뒤집어 엎었습니다!” 라고 소리를 지르며 회개하기 시작했다.

박윤선 목사님은 합신에서 교수하실 때도 기도로 일관했다. 교수 세미나를 주로 기도원에 가서 하시곤 했다. 일부 교수들은 싫어했지만. 그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 가까이 붙어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느 철없는 합신 강사는 합신이 기도원이냐?” 라고 불평과 비판을 하기도 했다.

박윤선 목사님은 미국 유학 시절, 친구 되시는 방지일 목사님에게 편지를 하시곤 했는데 외로움 가운데 강한 우정을 느끼셨던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셨다. “나는 웬일인지요 방제를 생각하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주님께 대한 회개의 고백으로 바뀌었다. “내가 주에게 끌리지 않고 한갓 우정이나 향정에 끌리었던 것입니다. 주를 떠나서 우정으로 주를 떠나서 향정으로, 이는 사단의 유혹이었나이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한 평생 기도와 함께 말씀에 사로잡힌 삶을 사신 분이셨다. 하나님께 붙잡힌 박윤선 목사님의 삶은 평생토록 말씀을 사랑하고 연구하는 주경 신학자의 삶으로 나타났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평생을 신 구약 성경 66권의 주석 집필에 바치셨고 평생을 성경을 가르치는데 바치셨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죽었다가 깨어나 다시 한 세상을 산다고 해도 나는 목사가 되어 성경을 증거하겠노라라고 자주 말씀하셨고 내가 평생에 힘써온 중요한 일은 신학 교육과 성경 주석 저술이었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도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들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며 가까이에 두고 자주 읽는다. 그리고 설교할 때마다 자주 박윤선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했다라고 토를 달곤 한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성경을 하나의 성경 신학적으로 체계화하는데 만족하시지 않고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먹고 말씀의 깊은 뜻을 발견하는 것을 최대의 기쁨으로 삼으셨다. 따라서 그 분의 설교에는 언제나 가슴과 영혼을 움직이는 성령의 감동이 넘치고 있었다.

하나님께 붙잡힌 박윤선 목사님의 삶은 또한 진실과 겸손, 단순함과 소박함과 따뜻함의 인격으로 나타났다. 박윤선 목사님은 가식과 꾸밈이 없는 어린 아이와 같은 단순하고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과 미소를 지닌 분이셨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또한 인간 관계나 교파 또는 문화적 관계에 있어서 폭 넓은 이해와 시야를 가지고 계셨다. 기도와 은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합동측 통합측 인사들은 물론 루터파 인사들까지 교파를 초월해서 친하게 지내셨다. 독일 경건주의 계통의 학자 게르하르트 마이어 박사과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를 초청하여 말씀을 듣고 교제하시면서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시고 매우 만족해 하셨다.

내가 총신
1학년 학생일 때 고 박형룡 박사님은 그때 여의도에서 개최되고 있던 빌리 그래함 전도 집회에 가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19837월 암스텔담에서 개최된 빌리 그래함 국제전도대회에 나와 함께 참석해서 은혜를 사모하면서 설교 말씀을 경청하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폭이 아주 넓은 분이셨다

.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여성 사역에 있어서도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셨다. 여성인 이동주 교수가 합신에서는 물론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셨다. 이와 같은 개방적인 입장을 일부 교수들이 비판하자 박윤선 목사님은 매우 속 상해하셨고 매우 안타까워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특별한 믿음과 사랑과 애정을 나타내 보이신 분이셨다. 나에게 자주자주 전화를 거시곤 했다. 때로는 질문도 하셨지만 주로 자신이 가슴에 지니고 있는 안타까운 생각들을 나에게 말씀하시곤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나에게 말씀하시던 분이었다. 박윤선 목사님 자신이 생각하는 교단과 신학교와 교수들의 삶이 이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시면서 나에게 토로하시는 말씀들이었다. 말씀들 중에는 교수들이 보다 기도에 전념해야 하는데, 강의 준비에 철저해야 하는데, 목회와 선교에 적극적이야 하는데, 타 교단에 대해 포용적이어야 하는데, 여성 목회를 부정하지 말아야 하는데등등이었다.

나는 교수회를 할 때 일부 교수들이 박윤선 목사님의 입장과 다른 입장을 표명할 때 박 목사님이 이렇게 생각하시고 말씀하셨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느냐?” 라고 말하면 박윤선 목사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말했냐고 말씀하시면서도 본인의 안타까운 생각을 계속해서 자주 나에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나는 또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나 박윤선 목사님과 상의하곤 했다
.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소통이 잘 되던 분이셨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박윤선 목사님과 친밀한 교제와 소통을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며 박윤선 목사님의 진솔한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박윤선 목사님께서 부족한 저를 너무 사랑하시고 믿어주시고 격려해주신 이야기 한 마디를 더 한다. 내가 섬기고 있던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 모임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해서 제일 앞자리에 앉으시곤 했는데 박윤선 목사님의 수 제자이신 장경재 목사님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셔서 앞 자리에 앉으시곤 했다. 또한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주관하는 서울 케직 사경회가 1885년부터 2001년까지 8번 개최되었는데 박윤선 목사님께서 네 번 강사로 오셔서 네 번 설교를 해 주셨다.

나는 박윤선 목사님께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계시던 마지막 일주일 동안 거의 매일 찾아 뵙곤 했는데 그때야말로 박윤선 목사님께서 기도로 일관하신 기간이었다.

내가 평생 처음으로 신학교와 교회에서 안식년을 얻어 1988년 여름 8개월 동안 미국 휫튼 대학에 가서 연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꿈속에서 박윤선 목사님께서 피를 토하며 쓰러져져서 병원으로 옮겨져 가시는 모습을 보고 아침에 일어나서 서울에 전화를 했다. 사모님이 박목사님께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말을 듣고는 그러면 그렇지라고 중얼거리고 그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달려왔다.

나는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계시던 박윤선 목사님을 매일 찾아 뵙곤 했는데 그때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산에 가서 기도하다가 죽고 싶다라고 고백하시기도 했다. 목사님을 찾아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일일이 기도해 주시셨다. 그리고 소위 박 목사의 의를 제해 달라라고 호소하시면서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기도를 드리셨다. 그리고 박 목사님의 진솔한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 아주 많이 반가워하시는 분들도 있었고 보통 반가워 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손 박사 보고 싶어, 오라고 해그래서 손 박사에게 전화를 걸고 빨리 오라고 하기도 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결국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부르짖으며 주님 품에 안기셨다.

나는 박윤선 목사님의 장례식에 참석한 후 그 길로 공항으로 달려가서 미국으로 갔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기도와 말씀으로 일관된 삶을 사신 분이셨고 진실과 겸손, 단순함과 소박함과 따뜻함의 영성을 몸에 지니고 사신 분이셨다. 나는 하나님과 기도와 말씀에 붙잡혀서 사신 그리고 진실과 겸손, 단순함과 소박함과 따뜻함의 영성을 몸에 지니고 사신 나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을 만나게 하시고 그 분과 함께 일하게 하시고 그 분으로부터 배우게 하시고 그리고 그 분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음 받게 하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나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께 무한한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한다.

 

이석봉 목사 /
목회학박사요 철학박사이며 신학박사이다. 총회신학교와 총회연합신학교에서 학장을 역임했다. 총회신학교(학장/전 국회부의장 황성수 박사, 현 국제대학원대학교)에서 5년, 샌프란시스코 크리스천 유니버시티 하와이 브렌치(학장/티모씨 한 박사)에서 13년, 수원신학교(학장/이근구 박사)에서 10년간 성경원어교수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가르쳤다. 리폼드뉴스(www.reformednews.co.kr)의 논설위원이며 이석봉 목사 칼럼의 칼럼리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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