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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아르미니우스의 예정론:『정서의 선언』을 중심으로 2
라은성 (총신대학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7/09/24 [07:09]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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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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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미니우스      © 리폼드뉴스



이 글은 총신대학교 라은성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칼빈주의의 5대 교리에 반대한 알미니우스의 예정론을 연구하여 칼빈주의와 어떻게 다른가를 제시하고 있다.

소문에 대한 불만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의 정서를 선언하는데 있어 거절하는 불만을 말한다. 그는 자신에 대한 터무니없는 두 가지 소문을 이렇게 밝혔다.

⑴ 나는 정서를 고백하고 싶지 않다.

⑵ 외국과 자국 내에 나에 대한 악담, 즉 교회와 기독교 종교에 기발하고 불순한 거짓 교리들을 소개하려고 했다.

밝히지 못하는 주요한 이유

이처럼 아르미니우스는 항상 자신의 정서를 어떤 핑계를 내밀어서 숨겼다. 여러 사람들이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종교의 모든 주제에 관한 그의 정서를 밝히는 것이 좋고, 바른 원리로 교훈을 주기 위해서도 좋고, 서로의 담화를 위해서라도 좋다고 하며 권했다. 그렇지만 아르미니우스는 또 다시 응하지 않았다.

『정서의 선언』에 이르다

루벨터스의 서신

아르미니우스는 “모든 자가 자신의 견해를 표현할 때, 즉 가장 적절하고 알맞은 때가 되었다고 생각이 들고 총회 앞에서 발표했을 때가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실제 이유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앞에서도 언급한 프라네커 대학교 교수인 루벨터스가 1607년 7월 1일 아르미니우스에 대한 불평을 스코틀랜드 지도자며 존 낙스의 후계자인 앤드루 멜빌에게 서신을 보냈다. 아쉽게도 그가 런던 타워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수령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 서신이 올덴바르네펠트가 은밀하게 영국에 스파이로 심은 자의 수중에 들어갔고, 서신을 받은 올덴바르네펠트는 아르미니우스의 친구 비텐보할트에게 건넸다. 마침내 서신이 아르미니우스에게 보여졌다.

히폴리투스에게 보낸 서신

또 아르미니우스에게 『정서의 선언』을 쓰게 한 직접적인 동기가 있었다. 1608년 초 루벨터스는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다비드 파라에우스(David Paraeus)에게 서신을 보내 아르미니우스에 대한 5가지로 이단성 있는 주제를 보냈다. 그 주제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아우토테오스([αὐτόθεος] 문제), 하나님의 섭리(죄의 필연성의 문제), 예정론, 은혜와 자유의지 및 칭의(전가의 문제) 등”이었다. 근데 덴 하흐에 있는 팔츠 대사인 히폴리투스 아 콜리부스(Hippolytus à Collibus)는 이 사실을 하이델베르크에서 다비드 뱅글러(David Wängler)로부터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에 대한 반대 견해를 보고 받았다. 다비드는 프리슬란트의 프라네커 대학교의 교수인 시브란더스 루벨터스(Sibrand Libbertus)로부터 그 내용을 간략하게 들은 자였다. 히폴리투스는 이 사실을 좀 더 자세하기 알고자 하여 자신이 있는 덴 하흐로 아르미니우스를 초청하고자 했다. 그의 초청에 응하지 않고 아르미니우스는 1608년 4월 5일 서신을 써서 보낸다. 여기서 줄곧 “비난들의 더러운 찌꺼기와 같은 중상을 받는데 지쳤다”고 변명을 틀어냈다. 또 4월 2일 루벨터스에게도 긴 답장의 서신을 보냈다. 그러자 아르미니우스와 베텐보할트는 더 이상 외국의 압박과 오해를 받는 마당에 참을 수 없었다. 1608년 4월 두 사람은 국가 총회를 요청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3. 예정론

아르미니우스가 다루는 주된 주제는 예정론이었다. 들어가는 첫 문장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종교에서 내 견해를 제안해야 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항목이고 지난 수년 동안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하나님의 예정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인간의 선택과 파멸로 이르게 하는 유기이다.”

첫 번째 예정론

아르미니우스는 타락전선택론(Supralapsarianism)을 지지하지 않고 거절하지만 먼저 이 이론을 9가지로 나누어 분석한다. 이 작정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은 수단을 사용하시는데 어떤 수단은 선택과 유기에 나타나지만 각각 세 가지로 분류된다.

⑴ 원의의 올바른 상태에서 인간 창조 또는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른 인간

⑵ 아담의 타락의 허용 또는 인간이 죄를 범해야 하고 부패하거나 타락하게 되도록 하는 하나님의 계율

⑶ 원의와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 또는 제거 그리고 죄와 정죄 하에 있게 된 존재

다른 수단은 선택의 작정을 위한 것인데 세 가지로 나타난다.

⑴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와 구세주로 미리 정하시거나 주신다.

⑵ 외적으로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부르시지만 내적으로 성령으로 인해 마음, 애정 및 의지에 역사한다.

⑶ 믿음, 거룩함 및 선행의 열정으로 선택된 자를 지키고 보존하거나 견인의 은혜로 믿고 선택된 자는 완전하고 온전한 의지로 죄를 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전적으로 믿음과 은혜로부터 떨어지지도 않는다.

지금까지 선택된 자들을 위한 수단을 설명했다면 이제는 유기된 자에 대한 수단을 설명한다. 성인에 이르든지 아니면 그전에 세상을 떠나든지 간에 거절되고 유기된 모든 자에게 속한 것이 유기이다. 유기된 자는 죄로 버림(desertion)이다. 구원에 충족하고 필연적인 구원하는 은혜를 그들은 받지 못한다. 이런 취소(negation) 또는 부인은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해 죽지 않거나 그들의 구세주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우선적 의지”도 아니고 “그분의 충족한 의지”도 아니다. 화해의 대가로 인한 것인데 그 대가는 유기된 자에게는 제안되지 않는다. ② 취소 또는 부인의 다른 부분은 하나님께서 유기된 자에게 그리스도의 영을 교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교통 없이 그들은 그리스도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그분의 혜택에 참여하지도 못한다.

성인에 이를 때에 임하게 되는 유기된 자 중 일부에게만 내려진 수단은 냉혹한 것(obduration)이라 평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거나 복음의 은혜를 거절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⑴ 완고함(induration)이란 첫 번째 종류의 집행은 지식이란 수단으로 양심을 조명하는 것이고 율법의 의를 확신하는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이 율법이 핑계할 수 없게 되는 불의한 자들을 그대로 두지 말아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⑵ 완고한 두 번째 종류의 집행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자신의 작정과 그 문제나 사건에 관련하여 비효과적이고 불만족스런 부르심을 복음의 선포로 택한다. 이 부르심은 외적인 것으로 복종하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이나 능력이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또는 그들 중 일부가 들은 것을 수용하고 믿도록 그들의 오성을 흥분시키는 내적 부르심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믿고 두려워할 때 마귀가 받게 되는 것과 같은 믿음을 동반한다. 나머지는 흥분되고 격상되어 어느 정도 하늘의 은사를 맛보도록 열망을 갖게 된다. 그 나머지는 무거운 타락으로 떨어지기 위해 높은 곳까지 이르기 때문에 가장 불행한 자들이다.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이유는 토한 것으로 돌아가야 하고 믿음에서 떠나거나 떨어졌기 때문이다.

아르미니우스는 유기를 완고하고 유기된 자에겐 너무나 냉혹한 처사라고 평한다. 높은 곳까지 올렸다고 한없이 떨어뜨리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며 인류애를 마음껏 뽐낸다.

끝으로 선택된 자는 반드시 구원 받아야 하고, 유기된 자는 반드시 지옥에 떨어져야 하는데 이것은 만사와 모든 이유보다 앞서 있는 하나님의 목적이나 결정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4가지 원리

이렇게 타락전선택론을 나름대로 분석한 후 이제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자신의 견해는 모순되고 적절하지 못한 과격한 선택론과는 다른 4가지 원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아래와 같이 제안한다.

⑴ 하나님은 자신의 자비함 또는 은혜로 일부 특별한 자를 구원하시기로 또 자신의 공의로 나머지를 저주하시기로 절대적으로 또 엄밀하게 작정했다. 인간의 한 부류나 다른 부류에 있을 수 있는 의 또는 죄, 순종 또는 불순종과 같은 작정 없이 이 모든 것을 행하신다.

⑵ 앞의 작정을 집행함에 있어 하나님은 아담과 그 안에 모든 인간을 원의의 올바른 상태로 창조하기로 작정했다. 게다가 그분은 그들에게 죄를 범하도록 정했다. 그 결과 그들은 영원한 저주의 죄악을 범하게 되었고 원의로부터 제거되었다.

⑶ 구원을 긍정적으로 원하는 자들은 구원만 아니라 그것에 속한 수단까지도 작정되었다(이 수단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도록 하고 그 믿음으로 보존되도록 한다). 또 저항할 수 없는 은혜와 능력으로 이런 결과가 일어나도록 실제로 이끌기 때문에 믿고 믿음으로 보존되고 구원받을 수밖에 없다.

⑷ 절대적 의지로 하나님은 지옥에 떨어뜨리기로 미리 정한 자에게 구원에 필연적이고 충분한 은혜를 부인하도록 작정했고 실제로 그런 것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가능한 조건이나 믿을 수 있거나 구원 받을 수 있을 수도 없게 된다.

거절하는 20가지 이유

⑴ 기독교, 구원 또는 그 확실성의 기반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후 하나씩 반박한다. ① 하나님께서 구원의 후사가 될 자들의 구세주, 머리 및 기반으로서 그리스도를 임명한 그분의 작정은 예정론과 다르다. 하지만 작정은 기독교의 유일한 기반이라고 한다. 또 예정론은 우리가 산돌로서 유일한 모퉁이 돌인 그리스도께로 지어지고, 몸의 지체들이 자신들의 머리에 결합되는 것처럼 그분에게 접붙임이 되는 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② 예정론은 구원의 기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먼저 우리의 구원이 의존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한 기쁨의 작정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③ 예정론은 구원의 확실성의 기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작정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정론은 삼단논법, 즉 나는 믿는다. 그런고로 나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논법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⑵ 예정론은 전체 복음이나 부분적 복음에 속해있지 않다. 요한과 그리스도의 강론, 복음전도자들의 진술, 사도와 승천 후 그리스도의 교리에 따르면 부분적으로 복음은 회개하고, 믿으라는 훈령이고, 부분적으로 죄들의 용서, 성령의 은혜 및 영생을 베푼다는 약속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정론은 이와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억지 주장을 펼친다. 구체적으로 어떤 자를 예정하였는지도 알리지 않고 하나님만 아는 비밀적이고, 특별한 자에게만 알려지고, 얼마나 구원받는지 유기되는지 알 수도 없다고 불평한다. 그래서 예정론은 구원에 불필요한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특별한 자에게만 아니라 모든 자에게 명시되고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칼빈주의 예정론을 신랄하게 반박한다.

⑶ 예정론은 범종교회의든 지역 종교회의든 그리스도 후 600년 동안 인정되거나 선포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에 어느 교회 교부들이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도 예정론에 대해 그렇게 폭넓게 해석하지 않았다고 했다.

⑷ 교회의 박사 또는 신학자 중 누구도 예정론을 제시하지도 인준하지도 않았다. 펠라기우스에 반대하여 은혜론을 변호하고 방어하기 위한 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풀젠티우스(Fulgentius) 및 오로시우스(Orosius)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⑸ 개혁교회들과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의 이름으로68 쥬네브에서 한 권으로 인쇄되고 출판된 고백서들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만일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같은 방법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⑹ 심지어 「벨지카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와도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며 ① 「벨지카 신앙고백서」의 14항에서 진술하는 ‘인간 창조와 타락한 인간’에 대한 반론으로 인간은 예정의 선행하는 작정의 어떤 필연적인 이유로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또 16항에서 진술하는 ‘선택론’에 대한 반론으로 예정론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어서 ②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서」의 7째 주간 20문을 비판하는데 여기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는지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다. 대답은 ‘아니다!’이다.

⑺ 예정론은 하나님의 본성에 일치하지 않고 만사를 수행하고 다루는 그분의 속성, 즉 그분의 지혜, 공의 및 선하심에도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님의 세 가지 속성에 모순되는 이유를 하나씩 밝힌다. 그분의 지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① 하나님을 선하지도 않고 선할 수도 없는 특별한 목적을 위한 어떤 것을 작정하신 분으로 나타내가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가 찬양받기 위해 영원한 멸망을 위한 어떤 것을 창조했다.

② 예정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한 목적은 자비함과 공의의 영광을 명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비함과 공의에 반대되는 행위로선 이 영광이 명시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이 죄를 범해야 하고 비참하다고 여겨져야 함을 결정한 하나님의 작정임을 말한다.

③ 성경에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이중적 지혜의 순서를 역행한다. 예견하지도 않은 채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교리에 포함되지 않는 자비함과 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미리 결정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율법에 계시되고 창조의 시기에 그에게 주입된 지혜로 구원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반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⑻ 예정론은 인간의 본성과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세 가지 상황으로 창조되었는데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의로 그분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자유의지를 가진 채로 창조되었고 그리고 영생을 즐기는 성향을 가진 채로 창조되었다. ① 하나님의 지식과 거룩함을 형성하는 그분의 형상에 모순되는 이유는 이 지식과 의에 따라 인간은 능력을 갖추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그분에게 예배를 드리고 그분을 섬길 수 있다. 근데 예정론이 이것과는 다르게 가르친다는 것이다. ② 의지의 자유와 모순되는 이유는 의지를 한 대상에 묶거나 결정하므로 행하고자 하는 자유의 실행을 막기 때문이다. ③ 창조 때에 받은 구원의 영원한 열매를 위한 성향과 능력에 편견을 준다는 것이다. 인류의 대부분이 구원에 참여자가 되지 못하고 영원한 저주에 빠지게 하는 것이 바로 예정론이라는 것이다.

⑼ 예정론은 창조 행위에 대립각을 세운다고 한다. ① 창조는 선의 교통인데 유기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② 창조와는 달리 유기는 증오에서 나온 행위이기 때문이다. ③ 창조는 하나님의 완전한 행위로서 그분의 지혜, 선하심 및 전능하심을 명시하는데 미리 행할 것이라고 작정했으니 모순된다고 한다. ④ 피조물에게 저주를 내리는 하나님의 모든 행동은 그분께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⑤ 만일 창조가 유기의 작정을 집행하려고 하는 수단이라면 창조보다 유기에 더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⑥ 창조는 하나님의 절대적 목적에 따라 유기의 수단이 될 수 없다. 창조가 완성된 후 인간에게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 죄를 범치 않을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⑽ 예정론은 영생의 성격과 칭호에 적의를 갖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딛3:7)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이고(요 1:12), 사랑의 수고를 하는 자이고(히 6:10), 그리고 선한 싸움을 싸운 후 의의 면류관을 쓰게 되는 자이다(계 2:10; 딤후 4:7-8). 결국 하나님의 절대적 작정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⑾ 예정론은 영원한 죽음의 성격과 칭호와도 반대 된다. “죄의 삯”(롬 6:23)은 영원한 파멸이고 그분께 순종하지 않은 것이고(살후 1:8-9), 마귀와 그의 천사를 위해 준비된 불 못이다(마 25:41). 죄와 불순종으로 영원한 죽음이 임한 것이지 그분의 절대적 작정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⑿ 예정론은 두 가지로 죄의 성격과 특성과 모순된다. ① 죄가 불순종과 모반이라 불리는데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② 죄는 저주의 원인이 되지만 하나님의 의지를 움직이는 원인은 공의이다. 이 공의로 인해 유기토록 하지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⒀ 예정론은 하나님의 은혜의 성격에 모순된다. 예정론은 은혜를 세우는데 꼭 필요한 것이지만 세 가지 방법으로 은혜를 전멸시키고 있다. ① 은혜가 인간의 성품을 완화시키기 때문에 의지의 자유를 전멸시키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타락성을 수정하고 합당하게 살도록 이끈다. 이에 반해 예정론은 자유의지를 제거한다. ② 성경적 은혜는 저항 받을 수 있고(행 7:51), 헛되게 받을 수 있고(고후 6:1), 인간이 동의하지 않을 수 있고 협조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히 12:15; 마 23:37; 눅 7:30). ③ 하나님의 제 일 의도와 계획에 따르면 은혜는 인간의 선을 이루도록 하는데 있다. 그런데 예정론은 어떤 유기된 자에게 제안되더라도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고 파멸로 이끈다고 한다는 것이다.

⒁ 예정론은 하나님의 영광에 해를 끼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죄의 저자가 되기 때문에 이에 대해 아르미니우스는 4가지를 주장한다. ① 예정론은 일부를 구원하고 나머지에게 저주를 내리기 위해 형벌적 공의와 자비함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명시하기로 절대적으로 작정했다. ② 예정론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이 죄를 범하도록 정했고 범죄자로 여긴다고 한다. 필연적으로 죄를 범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③ 죄를 피할 수 있도록 충족하고 필연적인 은혜를 거둔다. 그 결과 인간은 죄를 범하게 된다. ④ 인간이 필연적으로 죄를 범하는데 하나님은 직접이든 간접적이든 관련을 맺고 있다. 여기서 그의 결론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인간이 죄를 범하는 것이기에 결국 그분이 실제로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나님이 유일한 죄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⒂ 예정론은 우리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불명예를 끼친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하기로 예정되기 전에 예정되었다면 그리스도는 선택의 기반이 되지 못할 수 있다.

⒃예정론은 인간 구원에 해를 끼친다. ① 죄들에 대한 경건한 슬픔을 앗아간다. ② 죄로부터 하나님께 돌이키려는 모든 경건한 갈망을 제거한다. 죽은 자처럼 수동적이기에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지하지도 못하고 그것에 순종하지도 않게 된다. ③ 선행에 대한 열정을 개종한 자에게 억제시킨다. ④ 기도의 열정을 식게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종류의 복을 간구하고 얻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효과적인 수단인 기도를 등한시 한다. ⑤ 구원을 일으키도록 하는 가장 건전한 두려움과 떨림을 빼앗는다. ⑥ 신자의 임무 수행에 게을리 한다. 결국 인간 의지의 활동을 저해시킨다고 아르미니우스는 보았다. 이런 억지 주장은 그가 예정론을 숙명론과 혼동하여 생긴 억지 주장이라 여긴다.

⒄예정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질서를 뒤집는다. 복음에서 하나님은 영원한 삶을 약속하시면서 인간이 개종하고 믿는데 동의한다면 인간 편에서의 회개와 믿음을 요구한다(막 1:15, 16:6). 하지만 타락전선택론은 어떤 특별한 자에게 구원을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의지이고, 동시에 불가항력 세력을 수단으로 개인에게 회개와 믿음을 절대적으로 주기를 그분이 원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이 그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했고 원했다는 것이다.

⒅예정론은 복음 사역에 공개적 적개심을 갖는다. 이것에 관한 이유 5가지를 아르미니우스는 서술한다. ① 범죄와 죄로 죽은 자를 불가항력 권능으로 하나님께서 일으킨다면, 누구도 사역자가 될 수 없고, 하나님과 협력할 수 없고, 인간이 선포한 말씀이 은혜와 성령의 도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② 복음 사역은 듣는 모든 대다수에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악취가 되고(고후 2:14-16),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원 의도에 따라 이전의 모반을 고려하지 않고 정죄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③ 유기된 많은 자녀들에게 세례가 집행될 때, (하지만 믿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부모의 후손인 그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보증이 되지 못하고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④ 듣는 자에게 유익하게 되는 공개적 기도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⑤ 목회자와 교사이 자신의 사역을 태만하게 하고 소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⒆예정론은 일반적으로 종교의 기반을 전복시키고 특별히 기독교의 기반을 전복시킨다. 아르미니우스가 말하는 종교의 기반은 하나님의 이중적(twofold)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것 없이 어떤 것도 어떤 종교가 될 수 없다고 한다.

⒇예정론은 이전 시대와 우리 시대에 거절되어야 하는 교리이다. 그러면서 6가지 증거를 제시한다. ① 루터파, 재세례파 및 로마 가톨릭은 이 예정론이 유해한 교리라고 선언했다. ② 루터와 멜랑히톤이 이 교리를 인정했지만 후에 버렸다고 한다. ③ 모든 덴마크 교회가 예정론과 반대되는 교리를 수용하며 우주적 은혜를 채택했다. ④ 네덜란드의 많은 자들은 이 교리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⑤ 교황주의자, 재세례파 및 루터파는 예정론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다. ⑥ 종교개혁 이후 교회들에서 일어난 모든 논쟁과 어려움 가운데 예정론만큼 혼란을 준 교리가 없다.

간략하게 말하면, 지금까지의 견해는 예정론에 대한 기발한 교리에 대한 생각을 밝힌 것이다. 저자들이 말한 것에 따라 성심성의를 다하여 설명했기에 내가 그들의 작품에서 분명하게 밝히지 못한 어떤 것을 고안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기인시키는 바이다.

두 번째 예정론

아르미니우스는 예정론의 다른 측면에서 다룬다. 어떻게 보면 그 다른 면을 타락론(lapsarian)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예정론은 선택된 자에게 해당된 것이고 유기는 비선택된 자의 경우에서 필연적인 것이지만 특별하게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불신자는 단순하게 무력한 가운데 내려진 것이라는 것이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이다.

⑴ 하나님은 대중에서 일부를 은혜와 영광의 참여자로 결정하여 영광의 은혜를 찬양토록 했지만 자신의 기쁨에 따라 인류의 대다수를 간과하여 그들의 본성에 내버려 두므로 초자연적인 것을 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⑵ 예정론은 그 목적과 수단에 관련하여 숙고되어야 한다. 선택을 특별히 수용하는 면에서 예정이라 하고 그것을 반대하는 면에서 유기라고 불러야 한다.

⑶ 목적은 두 단계로 나눠지는데 ① 하나님께서 예정한 자들을 미리 아시는 전지 ② 미리 안자들의 구원을 미리 정하신 하나님의 미리 결정함(prefinition 또는 predetermination)이다. 영원부터 그들을 선택하므로 이생에서 은혜를 수용하도록 준비시키므로 도래할 세상에서 영광을 얻도록 하신다.

⑷ 이 예정론의 실행하는 수단은 ① 그리스도 자신이다. ②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효과적인 부르심이다. 이것의 기원은 칭의이다. ③ 견인의 선물이다.

⑸ 유기엔 두 가지 행동이 있는데 간과(preterition)와 ‘미리 정죄’(predamnation)이다.

⑹ 간과의 실행에는 본성의 상태에서의 태만(dereliction) 또는 포기(abandoning)를 의미하고, 초자연적 은혜의 비교통 또는 부정을 포함한다.

⑺ 미리 정죄는 모든 것보다 앞서지만 정죄의 원인에 대한 예지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을 죄인으로 본다.

⑻ 이런 미리 정죄를 실행하는 수단은 ① 공정한 버림(desertion)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를 베풀지 않거나 구원하는 모든 은사를 인간에게서 빼앗는 벌을 의미하고 사탄의 권세에 그를 넘겨주는 것을 의미한다. ② 완고함 또는 강퍅함으로 유기된 자의 실제적인 저주에 따른 결과이다.

세 번째 예정론

세 번째 예정론은 아르미니우스가 암스테르담에서 목회자였을 때 경력 상 초기에 직면한 선택이었다. 또 델프트(Delft)에서 사역하는 두 명의 목회자, 즉 아른 코렌리스(Arent Corenlisz)와 레니어 돈터클록(Reynier Donteklok)이 인문주의자 디륵 콘헬트(Dirck Volckertsz Coornhert)와 예정론에 대해 논쟁할 때 베즈의 극단적 칼빈주의 신학의 측면을 안정하도록 했을 때였다. 아르미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설명한다.

⑴ 영원 전부터 스스로 일부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유기할 작정을 세우길 원했기 때문에 인류를 피조물만 아니라 유기된 자로 여겼다. 몹시 불쾌한 저주가 아닐 수 없다. 이런 타락한 상태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자비함의 선언을 위해 은혜로 일부 개인을 자유케 하고 구원하시기로 결정했다. 나머지는 공의를 선언하시기 위해 공정한 판단으로 저주 하에 내버려두기로 결심했다.

⑵ 선택과 유기와 관련된 실행에 관련된 특별한 수단은 예정론의 작정을 위한 고정된 경우 또는 목적을 마무리 하고자 하는 인간의 타락을 정했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이미 앞에서 세심하게 설명한 내용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여기지 않으려고 하는 그의 노력이 여기서 실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타락전선택론을 비판하기 위해 시작한 그의 논박은 결국 같은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아르미니우스 예정론

지금까지 설명한 예정론에 대해 간략하게 평가해보자. 첫 번째는 예정론의 선행적 작정을 실행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한 중간 원인으로 창조 또는 타락을 설명하지 않고 있다. 두 번째는 타락 전에 목적과 관련된 선택을 둔다. 또 유기의 첫 번째 부분인 간과를 타락 전에 둔다. 세 번째는 인간의 타락 후까지 어떠한 선택과 유기의 부분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평가를 내린다.

4. 나가면서

나는 지금까지 아르미니우스의 대표적인 작품, 『정서의 선언』이 쓰이게 된 배경을 역사적으로 살핀 후 그의 주된 주장인 예정론을 자신의 글에서 발췌하며 소개했다. 그는 철저하게 신학자의 입장에 서서가 아니라 자신을 논박하는 자에 대해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고 정치적 기구인 국가 총회에 의존했다. 자신이 목회자이며 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세속 사법권에 의존하는 것은 그른 자세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정서의 선언』에 나타난 아르미니우스의 예정론은 자신의 주장을 밝히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논박에 대한 분석에 일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의 예정론을 간략하게 정리해본다면,

1. 아르미니우스가 선택과 유기를 작정의 수단으로 본다. 하나님은 그 수단 중 그리스도를 중보자, 구속자, 구세주 등으로 임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볼 때 아르미니우스의 예정론은 그리스도 중심이라 평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했기에 타락전선택론이 불가능하고 타락후선택론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타락을 전제했다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과 유기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2. 그 작정은 일부 사람에게 영원한 운명을 부여하는데 회개하고 믿는 이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와 그분을 통해서만 영생으로 정해지고, 회개와 믿는 것을 거절하는 자들은 진노 하에 있게 되고 저주로 정해진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이란 말을 좋아 한다. 이 의미는 하나님께서 호의로 수용하기로 작정했고 그분을 위해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끝까지 보존되는 고백자와 신자와 같은 자의 구원을 낳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그 작정은 하나님의 지혜와 공의에 따라 회개와 믿음을 위한 충분한 수단이 된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비함과 엄격성에 적당하고 알맞은 것이 무엇임을 아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행하고, 자신의 지혜가 묘사될 수 있는 것을 채택하고 결과를 낳게 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행한다.

4. 그 작정은 세 번째의 결과로서 구원하거나 저주내리기로 한 특별한 자들을 작정하는 것으로 실제로 믿고 견인할 자인지, 믿지 않고 견인하지 않는 자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기초되어 있다. 선행적이고, 구속하고 그리고 견인하는 은혜에 대한 강조는 그들 안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기초한 것이 틀림없음을 의미하고, 신자가 자신에 따라 선택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결국 아르미니우스는 20가지의 논박에 대한 답변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정리할 수 있을 뿐 무엇이라고 꼭 꼬집어 말할 수 없다. 성경적이라면 자신의 예정론을 성경구절을 통해 밝히고 교부들의 구체적인 부분들을 인용하면서 제시해야하지만 정확하지도 않고 분명하지도 않다. 더욱이 사변적이다. 인간 중심적 설명으로 일관하며 신비롭지 말아야 하고 모든 자에게 명시되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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