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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아르미니우스의 예정론:『정서의 선언』을 중심으로 1
라은성 (총신대학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7/09/13 [09:09]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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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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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총신대학교 라은성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칼빈주의의 5대 교리에 반대한 알미니우스의 예정론을 연구하여 칼빈주의와 어떻게 다른가를 제시하고 있다.

1. 들어가면서

개혁신학 내에 일어난 아르미니우스파 논쟁은 교회 역사 속에 일어난 그 어떤 논쟁보다 큰 관심을 끈다. 영국의 청교도는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대해 강력한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그 이유는 개혁신학에 많은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아르미니우스파 논쟁의 정점은 1618년 11월 13일∼1619년 4월 23일에 있었던 돌드레히트 종교회의(Synode van Dordrecht)에서 였다. 아르미니우스파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 즉 80년 전쟁(1566∼1648년)과 맞물리면서 정치화된 면이 없지 않다. 아르미니우스파의 대부분은 당시 수상격인 올덴바르네펠트(Johan van Oldenbarnevelt, 1547∼1619년)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면에서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아르미니우스파는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사상에 근거를 둔다. 아르미니우스의 작품은 대체적으로 논쟁 속에서 이뤄졌다. 그의 작품은 그가 죽은 후인 1610년에 출판되었는데 이 작품은 헤리트 얀 훈더달(Gerrit Jan Hoenderdahl)에 의해 서론과 주석이 딸려 출판되었다. 또 라틴어 역은 1629년 Opera theologica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9가지 질문의 답변』(Answers to Nine Question)과 함께 『정서의 선언』(Declaration of Sentiments)은 영어로 첫판이 나왔다. 아르미니우스를 지지하는 주석가인 제임스 니콜(James Nichol)은 1825년 라틴어에서 영어로 출판했으며 우리는 이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아르미니우스는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그의 말년에 세 편의 글을 썼는데, 이 글들은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어 좋은 글이라 생각한다. 첫 번째는 덴 하흐에 있는 팔츠 대사 히폴리투스 아 콜리부스(Hippolytus à Collibus)에게 보낸 서신이다. 두 번째는 세상을 떠날 즈음에 이르러 쓴 『9가지 질문의 답변』이다. 이것은 자신과 아드리안 판 더 보렌(Adrian Van der Borren)에 반대한 이단의 억지주장에 대한 반응의 글이다. 세 번째는 아르미니우스가 그의 인생 하반기 종말에 가장 무게 있는 변증서를 쓴 것인데 그것이 바로 『정서의 선언』이다.

이 소논문은 마지막 작품인 『정서의 선언』에 초점을 맞출 뿐만 아니라 아르미니우스파 논쟁의 핵심인 예정론에 제한을 두려고 한다. 짧은 글에서 그의 모든 신학사상을 다룰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예정론, 특별히 『정서의 선언』에 나타난 예정론을 원문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는 먼저 『정서의 선언』이 쓰인 배경을 먼저 살필 것이다. 또 대체적으로 아르미니우스 신학사상에 대한 한국교회에서의 연구는 칼빈주의와 비교하는데 제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돌드레히트 종교회의에서 내려진 ‘5대 교리’를 중심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번 글에선 원자료에서 그가 말한 것의 중심사상을 분석하고 살피는데 주안점을 뒀다. 그리고 그의 생애에 관해선 나의 다른 글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사료된다.

2. 배경

『정서의 선언』은 1608년 10월 30일 덴 하흐(Den Haag)에서 군주들의 총회가 개최된 홀 또는 비넨호프(Binnenhof)에서 홀런트 국가들 앞에 전달된 것이다. 아르미니우스는 먼저 네덜란드 언어로 자유롭고 온전한 자세에서 상황 설명을 진술하기 시작한다. 간교하게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필요한 것 외엔 일체 말하지 않았다. 후에 12월 암스테르담의 주요 관료 중 한 명인 세바스티안 에그벌즈(Sebastian Egberts)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자신이 칼을 사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부인했지만 확고하게 반응해야겠다는 결심을 피력한 적이 있다.

“국가들 앞에 내가 방패만 아니라 칼을 갖췄다고 들었다. 칼은 온건한 모든 것을 뛰어 넘어 있는 것이라 여긴다. 내가 오류의 혐의를 받고 있는 일부 교의들에 관해 내 견해를 말해야 하기에 칼을 사용하라고 나는 요구를 받았다. 우리 가운데 현재 가르쳐지고 있는 것처럼 나는 예정론에 대한 나의 진지한 반대 의견을 표현했다. 그 이유는 내 양심이 나에게 그 교리가 논의 주제로 드러났을 때 침묵하지 말라 명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더라도 감행했다. 하지만 나는 매우 온건한 자세를 유지했다. 내가 자세히 상술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억눌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고귀한 모임은 나의 주장에 관해 유사한 판결을 내릴 것이라 확신하는 바이다. 내가 완전히 침묵했으면 하는 자들에게는 내 연설이 온건의 한계를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당연하리라 여긴다.”

레이던 노회

『정서의 선언』이 쓰이기 전에 연대별로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그 이면에 놓인 그의 의도를 자세히 알 수 있으리라 여긴다. 그러니까 시작은 이렇게 되었다. 1605년 7월 28일 레이던 교회 노회는 그가 고백서와 교리문답서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혐의를 물어 아르미니우스를 소환하고자 레이던의 장로 2명이 그에게 가서 올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5명의 대리자와 함께

본래 예정론 논쟁은 레이던 노회에서 제기했던 1605년 7월 30일로 거슬러 가야 한다. 아르미니우스는 자위트(남부) 홀런트의 종교회의 대표자 3명과 노르트(북부) 홀런트의 종교회의 대표자 두 명을 그 해 6월 30일 레이던 대학교에서 만났다. 그들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의 노회에서 거룩한 수임을 받을 목회 후보자들이 교회 사역을 허용받기 전에 제출해야 하는 조사에서 레이던 대학교 몇몇 학생들이 교회가 일반적으로 수용하는 교리와는 정반대이고 기발한 설명처럼 그들에게 제의된 질문에 그것과 같은 답변을 제출했다는 것이다. 그 기발한 것은 나[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을 받아 갖게 되었다고 젊은이들이 확언했다는 것이다.”

위의 글에서 보다시피 그에 대한 혐의는 「벨지카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를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아르미니우스는 강력하게 반발했고 아무리 멀어도 가서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밝히겠다고 했다. 하지만 랑스베르기에스가 회의를 개최하여 그의 참석을 청원하자 아르미니우스는 거절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선배들의 권면을 따라 응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핑계를 대면서 “레이던이나 암스테르담에서 하나님의 말씀 또는 저국가들의 교회들의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에 모순되는 단 하나의 교리를 설명했던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변명을 틀어 놓았다.

그런 후 아르미니우스는 5명의 목회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대리자의 칭호를 취소하고 나와 함께 회의에 개인 자격으로 들어간다면 임할 용의가 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⑴ 그들이 각 항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설명한다면, 나는 나의 견해를 설명할 것이다.

⑵ 그들이 증거를 제시한다면 나는 나의 증거를 제시할 것이다.

⑶ 나의 정서와 이유에 대해 논박하려고 마침내 시도한다면, 나는 그들의 것을 논박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⑷ 이런 방법으로 각자는 다른 자에게 완전히 만족스런 답변을 얻을 수 있고 그 결과는 일치에 이를 것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 개인 만남에서 논의된 어떤 주제에 대해서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 국가 회의에 모든 문제가 거론되기 전까지 어느 장소든 누구와도 행해져선 안된다.

이와 같은 억지 주장에 대해 그들은 당연히 거절될 수밖에 없었다.

9가지 질문

1605년 11월 9일 자위트 홀런트의 2명의 대리자와 비서들은 레이던 대학교의 평의원장에게 청원서와 함께 9가지 질문을 제시했다.

⑴ 믿음, 즉 이신칭의는 선택된 자에게 특별하지 않다.

⑵ 신자는 믿음과 구원으로부터 최종적으로 쇠퇴하여 떨어질 수 있다.

⑶ 아브라함을 의롭다 여기게 하는 믿음이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의심이 든다. 그분이 세상의 후사여야 한다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그가 이해했다는 어떤 증거도 찾아볼 수 없다.

⑷ 믿음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고 선택되어야하는 자들 안에 하나님께서 예견한 필수불가결적인 것이다. 그래서 믿음을 베푸는 것에 관한 작정은 선택의 작정보다 앞선다.

⑸ 우발적인 것 가운데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작정에 관련하여 필연적으로 행해진다고 말할 수 없다.

⑹ 모든 것은 우발적으로 행해진다.

⑺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작정으로 미래와 우발적인 것을 한 편에서 또는 다른 편에 일어나도록 결정하지 않았다.

⑻ 성령의 충만한 은혜는 복음이 선포된 자에게 부어지는데 그들이 누군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기만 한다면 믿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인류를 조롱하는 것이 되고 만다.

⑼ 신자의 일시적 환난은 “응징”이라기보다 죄들에 대한 벌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벌을 위해서만 만족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의원장은 “진리와 정확성에 모순된 것을 대학에서 가르쳐진다면 국가 회의에 청원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이런 답변을 들은 대리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신학교수들에게 9가지 질문을 제안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국가회의는 개최되지 않았다. 위의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면 알겠지만 아르미니우스 자신은 고백서와 개혁신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억지 주장하나 개혁신학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네 번째 요구(1607년)

델프트에서 자위트 홀런트 종교회의 모임 직전 1607년 재세례파의 논박에 대해 아르미니우스에게 질문했다. 본래 이 문제는 1600년 자위트 홀런트 종교회의 사회를 맡았던 아르미니우스에게 재세례파 처형에 관련된 견해를 피력해야만 했던 때 일어났다. 그들과 관련된 논박서에서 칼빈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는 견해를 밝힌 바 있었다. 아무튼 이때 상황을 아르미니우스는 1600년 1월 26일 친구 비텐보할트(Johannes Wtenbogaert, 1557∼1644년)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보냈다.

“종교회의에서 나에게 맡긴 그 일에 관해 어떤 것도 결정 못하고 있다. 진지하게 나에게 맡겼다고 확신이 들면 몇몇 이유로 그 일을 맡으려고 한다. 몇 사람이 나에 관해 빙퉁 그리고 그릇된 판단을 내리고 있으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노력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이 이단이 학문적이고 확고한 방법으로 논박당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논박이 새로운 독자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전의 나의 연구 과정에서 재세례파 이단들과 그 기반들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한 유익한 논의에서 요구하는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를 주저하게 만드는 유일한 것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답변서를 받아 든 종교회의는 만족하지 못했다. 아르미니우스는 만족스런 견해를 원할 시 국가 회의에서 밝히겠다고 말했다. 예정론에 관한 그의 모든 정서를 드러내기를 강요받았지만 아직 자신의 견해를 위한 소논문이 완성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준비 위원회

1607년 6월 국가 회의를 위한 준비총회가 덴 하흐에서 개최되었다. 그 모임은 기독교 신앙에 관한 그의 견해를 피력하라고 요구하였지만 아르미니우스는 가능한 한 노력하겠다고 할 뿐 거절했다. 레이던을 떠나 덴 하흐로 향하기 전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에 관한 5가지 항목을 몇몇 지역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이미 읽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내용은 예정, 아담의 타락, 자유의지, 원죄 및 유아의 영원한 구원 등이었다. 이것들을 알게 된 후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에 대해 그 항목을 제시한 자에게 말을 건넸고 그 내용이 레이던의 학생들이 논쟁했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튼 그 5가지 항목은 총회에 제시되었다. 이에 대해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의 견해라는 내용을 읽어보았으나 “내 것도 아니며 내 정서가 포함되지도 않은 것”이라고 강력하게 변명했다. 그러자 총회 위원 중 한 명은 “어느 항목이 네가 동의하는 것이고 어느 항목이 네가 동의하지 않은 것인지 서명하라”고 했지만 한편에서는 본 총회가 그런 질문의 답변을 듣기 위해 개최된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며 질문을 부정했다. 이렇게 위원들의 의견은 더 듣기 원하는 견해와 그럴 필요 없다는 견해로 양분되었다.

회의를 거절한 이유

형제들이 권유했던 대화와 회의를 거절하는 이유를 아르미니우스는 세 가지로 밝히면서 요구하는 방법에 관해 먼저 언급한다.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에 대한 선언이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또는 「벨지카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와는 반대로 자신이 가르쳤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방법에 관해선 공개적으로 이뤄지는 것에 반대했는데 종교회의가 이미 자신에 대해 편협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 후 자신이 그릇되지도 않았고 불법적이지도 않은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하며 회의를 거절하는 이유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첫째, 종교회의의 사법권 하에 없다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의 종교회의에 응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나는 노르트 홀런트 종교회의 또는 자위트 홀런트 종교회의의 사법권 하에 속해있지 않고 나의 모은 관한 것을 관할하는 단체는 다른 권위자들에게 있기 때문에 나는 대리자들과의 회의에 동의할 수 없다. 예외가 있는 것은 그 권위자들의 충고와 그들이 명할 때이다. 특별히 이와 같은 회의가 정규적인 임무로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종교회의에 불참하거나 순응하지 않은 것은 권위자들의 충고를 받은 것이고 들을 수밖에 없었다고 핑계를 댔다. “어떤 권위자라도 자신의 사법권 내에 있는 사역자가 교회들의 대리자들과 회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둘째, 불공정하다
 
아르미니우스는 종교회의의 참석을 거절하는 두 번째 이유로서 불공정을 언급했다.

⑴ 그들은 공적 권위를 가지고 찾아왔는데 나는 개인의 자격으로 임했다. 이 문제에 대해 그렇게 무지하지 않았기에 공적 권위 하에 어떤 문제를 처리하는 자가 즐기는 권력의 지지를 인식하고 있었다.

⑵ 그들은 수적으로 세 명이었을 뿐만 아니라 노르트 홀런트 종교회의의 대표자 두 명과 함께 했다. 이에 반해 나는 혼자였다. 어떤 후원자도 없었을 뿐 아니라 시작된 절차의 과정을 지켜볼 증인조차도 두지 못했다.

⑶ 그들은 자신들의 제안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위자들의 판단에 의존해야 했다. 또 자신들의 권위자들이 주장하라고 맡긴 종교적 정서를 외고집적으로 주장했다.

두 번째 이유는 수적으로 자신이 불리하거나 그가 직면한 대리자들은 그야말로 대리자에 불과했고 모든 결정과 판단은 후에 권위자들이 행한다는 것에 아르미니우스는 불만을 표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셋째, 불리한 진술

세 번째 이유는 회의 후 권위자들에게 보고할 내용은 아르미니우스에게 불리하게 진술할 것이라고 한다. 그들에게 보고할 땐 아르미니우스 자신이 없는 가운데 이뤄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⑴ 내가 만일 없었다면, 어떤 단어들을 더하거나 생략하는 일이 쉽게 일어날 것이다. 또는 자신들의 감정이나 명령에 따라 수정하여 어떤 사실이나 주장이 실제로 일어난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전달될 것이다.

⑵ 내가 만일 있었다면, 이런 불편을 피하거나 수정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대리자들의 지지자들이 많은 가운데 판단은 그들에게 유리하고 나에겐 불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낱 개인이기 때문이다.

지역 종교회의(Provincial Synod)에 자신의 특권과 같은 것을 줬어야만 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자신의 정서가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대리자들이 자신이 제안한 개인적 회의를 수용했더라면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에 대한 모든 항목에 대한 자신의 정서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을 것이라고 핑계를 댄다. 이것을 볼 때 아르미니우스는 공식적 모임이나 대중적 모임보다 항상 개인적이고 공개적으로 밝혀지는 회의를 피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견해가 밝혀지는 것을 꺼렸음이 분명하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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