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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교회와 신앙고백서 3
김길성(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7/09/06 [09:48]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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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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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김길성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미합중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의 채택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신앙고백서, 기타 장로교단들의 신앙고백서를 연구하여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제언을 한다.

A. 성경관의 차이

1986년 통합의 신앙고백서는 제1장에서 “성경”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데, 모두 7개 절로 그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 그 첫 번째 것은, 성경을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 신앙고백서는 1장 1절에서 “우리는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대한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는다.”라고 언급하고 있고, 3절에서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 바로 다음에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제1장 성경]

3.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 성경은 인간의 말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요, 따라서 거기에는 인간적 요소와 신적인 요소가 함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자가 지니고 있던 시대적이며, 문화적인 배경 등 인간적인 요소들을 그의 섭리를 성취하기 위하여 사용하셨으므로 성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신앙고백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인간적 요소”와 “신적인 요소”가 함께 있음을 분명하게 밝혀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신적인 계시가 인간을 통하여 기록되었다는 것과 다른 의미이다. 더 나아가서 이 신앙고백서는 성경 “안에” 신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 신앙고백서가 표현하고 있는 “성경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과 “성경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분명 다른 표현이다. 이 고백서는 이와 같이 성경 안에 “신적인 요소”와는 구별되는 “인간적 요소”가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고등비평(Higher Criticism)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오히려 비평을 해야 성경의 원래 진리를 밝혀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 매우 낯선 것들이다.

우리는 이 고백서에서 성경에 대해 말하는 것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성경관”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된 말씀’과 ‘기록된 말씀’으로 나누어 이해하였다. 그는 계시는 ‘행동’인 반면, 성경은 ‘기록’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러기에 계시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성경은 “인간의 말”이라고 여겼다. 즉 계시는 신적인 요소로 보고 있는 것이고, 이 계시가 기록된 것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에는 ‘신적인 요소’와 ‘인간적 요소’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 전에 우리가 함께 본 “제2장 3절”의 내용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에서 본다면, 계시는 성경을 낳게 되고, 그러기에 계시는 성경보다 궁극적 우월성을 갖는 것이 된다. 바르트는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 자신의 『교회교의학』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성경은 따라서 그 자체 그 자체 안에서 하나님의 일어난 계시가 아니니, 실로 교회 선포 그 자체가 그 자체 안에서 대망된 미래의 계시가 아닌 것과 같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또 우리가 듣게 되는 성서는 이미 일어난 계시를 증언한다. … 다시 말하거니와 성경 그 자체는 그 자체 안에서는 하나님의 일어난 계시가 아니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됨으로써 성경은 하나님의 일어난 계시를 증언하고 또 성경은 증언의 형태 안에서의 하나님의 일어난 계시이다.

“제2장 성경”은 이러한 바르트의 성경관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필요와 그 의미’에 대해서도 그 접근 방법이 다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필요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본성의 빛과 또 창조의 섭리의 일들이 하나님의 선과 지혜와 권능을 나타내어 사람이 핑계 할 수 없게 하나, 그것들이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과 그의 뜻에 관한 지식을 충분히 주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언급한다.

그러나 1986년 통합의 신앙고백서는 인간의 본성과 피조 세계를 통해서 어느 정도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지만,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기 때문에 “확실한 계시서”라고 표현한다. 즉 이 고백서는 기독론적 관점으로 그 내용을 전개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모습은 신앙고백서 제1장 5절의 구약과 신약에 대한 설명에서도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도 통합의 신앙고백서는 신약과 구약을 기독론적 관점으로 설명해 나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장 성경]

5. 구약성경은 천지창조에서 시작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성공과 실패의 자취를 따르면서 오실 메시야에게 초점을 두고 있다. 즉 구약성경의 모든 사건은 직접 또는 간접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준비와 예언이다. 신약성경은 이미 오신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과 사도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과 가르침을 수록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다. 그러므로 신약은 구약의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구약을 떠나 신약을 바로 이해할 수가 없고, 신약을 떠나서는 구약의 참 뜻을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성경의 필요성에 대해서, 신약과 구약의 내용에 대해서 설명해 나가면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별반 특별하지 않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와같이 일관된 기독론적 사고는 칼 바르트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의 자신의 『교회교의학』 1권 하나님의 말씀론, 『교회교의학』 2권 신론, 『교회교의학』 3권 창조론, 『교회교의학』 4권 화해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정되었던 구속론(종말론)을 기독론적 사고를 가지고 일관되게 전개해 나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전개를 하게 되면 “창조-타락-구속”의 내용 전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화해론”으로서의 그리스도 사건이 전체의 중심이며, 이것에 모든 다른 것들이 모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 신학은 “기독론적인 보편주의”(Christologischer Universalismus)라고 불리게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그리고 화해론적으로 이해하는 바르트의 신학은 우리가 살피고 있는 신앙고백서에 매우 잘 드러나고 있다.

[제3장 예수 그리스도]

2.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신 그리스도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다. 이 계시는 자연에 나타난 계시나(시 19:1-4, 롬 1:20), 구약성경의 예언적 계시(히 1:2)이상이요, 모든 계시의 완성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므로 사람은 그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없고(요1:18, 14:9), 그가 보여 주신 이상의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 … 그리스도교는 그와 같은 요소를 가지면서도 그 신앙의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에 두는 계시종교이다.

3. …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대속의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드린 화목제물이었으며, 범죄로 인해 멀어졌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케 하셨다.

바르트의 신학을 파악한 이후에, 1986년 통합측 신앙고백서를 보게 되면, 그 전개 순서와 내용이 “기독론적인 보편주의”와 “화해론”에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이제 언급할 구원론에 이르러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B. 구원론의 차이

통합의 1986년 신앙고백서에 있어서 구원론의 부분은 “제6장 구원”에서 다루고 있고, 총 7개 절로 그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집중하려고 하는 것은 5절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6장 구원]

5. 구원은 우주지배를 포함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자발적인 노력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경륜에 의한 선행적(先行的)인 은총에 의한다. 선행은총 안에는 하나님의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예정섭리(롬 8:29-30, 엡 1:4-6)가 있다. 예정섭리는 인간의 자유나 선행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예정신앙과 자유의지는 모순되거나 배타적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보완한다.

이 내용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말하는 것 같지만, 진리의 한 면 만을 강조함으로써, 진리를 왜곡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중 예정을 말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 부분을 “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부분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구원을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시작하여 고백해 나간다. 그러나 1986년 통합의 신앙고백서에서는 구원을 “그리스도의 화목케 하심”에서 시작한다. 또한 이 고백서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구원”이나 “하나님의 유기하심”의 개념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다음 내용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3.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의 작정으로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생을 얻도록 예정하시고, 다른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선정하셨다.

6.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신 것처럼 그의 뜻의 영원하여 지극히 자유로운 경영에 의해 그들로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데, 있어야 할 모든 방편들을 먼저 정하셨다. … 그러나 택함을 받은 자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을 받지 못하고, 유효적 부름을 받지 못하고, 칭의, 양자, 성화, 구원 되지 못한다.

통합의 신앙고백서는 이와 같이 유기와 관련된 내용을 버리고 있으며,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한 내용을 약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칼 바르트에게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는 점이다. 바르트는 기독론의 두 본성을 예정론에 적용시킨다. 그는 여기에서 ‘선택’과 ‘유기’의 대칭 구조로 구원을 설명하지 않고, 일원론적으로 설명하였다. 즉 그리스도만 선택과 유기를 당하시며, 그러기에 모든 사람은 유기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예정론은 비록 스스로 보편예정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여도, 보편예정을 암시하고 있다. 바르트는 예정 교리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명제로 표현하였다.

예정교리는 그러므로 단순하고도 포괄적으로 다음과 같은 명제로 표현된다. : 하나님의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이다. 선택 개념은 그러나 이중적인 것에 대해 말한다. : 선택하는 자와 선택받는 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이중적인 것을 내포한다. : 그렇게 불리는 자가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참 인간이다. 이에 따라서 예정 교리의 저 단순한 양식은 우선 두 명제로 구분된다. :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는 하나님’이며, ‘선택받은 인간’이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을 영역한 브로밀리(Geoffery W. Bromiley)의 설명과 같이, 바르트는 이중 예정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선택 받았고, 다른 이들은 버림 받았다고 이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버림을 위해’ 자신을 택하시고, ‘선택을 위해’ 인간을 택하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르트는 하나님의 예정을 시간 이전의 영원한 영역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본다.

즉 영원 전에 타락한 인간을 의로운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 스스로 저주와 죽음, 그리고 지옥을 맛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예정론은 “타락전 예정론”(supralapsalismus)에 속하며, 철저히 기독론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인 이중 예정론을 수용하기는 하지만, 이것을 다시 일원론적인 것으로 수정하고 있다.

구원과 관련된 바르트의 인식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그는 “창조-타락-구속”의 질서를 “타락-은총-창조”의 순서로 바꾸어 놓고 있다. 또한 더 나아가서 그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만인이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만인 화해론(Allversoehnungslehre)과 만인 구원론(Allerloesungslehre)를 구분한다. 그러나 바르트가 명시적으로 보편구원론을 주장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은총의 선택론은 낙관주의적이며, 그러기에 필연적으로 보편 구원론으로 추론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통합의 경우, 주로 1986년 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통합이 신앙고백서의 일부로 채택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미합중국장로교회의 1903년 개정판을 채택하여 제34장과 제35장을 첨가하여 받았고, 또한 1903년 개정판이 제정한 선언문(Declaratory Statement)을 제35장 뒤에 위치하게 했다.

통합이 채택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첫째, 신앙고백서의 칼빈주의적 개혁주의 내용을 수정하거나 삭제했다는 것이며, 둘째, 제34장과 제35장을 추가하여 성령과 화해에 기초한 Missio Dei 선교를 강조한 것이며, 셋째, 미합중국장로교회의 1903년 개정판과 유사한 선언문(Declaratory Statement) 첨가와 기타 개정으로, 이후에 새로 작성된 신앙고백서 이해와 해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또한 통합의 1986년 신앙고백서는 미합중국연합장로교회의 1967년 새 신앙고백서의 기본 사상인 칼 바르트의 신학과 1952년 빌링겐에서 모인 I.M.C. 대회에서 채용되어 1961년 W.C.C.와 병합된 후 W.C.C.의 선교방향의 중심 개념이 된 Missio Dei 개념을 포함하는 신학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 새 신앙고백서는 과거의 신앙고백서들뿐만 아니라 이후의 신학선언문들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IV. 한국교회의 장래를 위한 제언

1. 강단의 설교가 바뀌어야 한다.

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동일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상호 신뢰하고 인정할 수 있는 교회의 신앙고백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같은 장로교회 안에서도 신앙고백의 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합동과 고신은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그대로 교단의 신앙고백으로 수납하고 있다. 합동의 경우는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미국의 보수장로교회들(PCA, OPC 등)이 그러하듯이 1903년 이전에 수정된 일부 수정 외에 1647년에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대회에서 채택되고 같은 해에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채택된 그대로,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고 있으며 특히 고신의 경우 신앙고백서 전체 33장외에 제34장과 제35장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 다른 점이지만 전체적으로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고 있다는 점이 합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기장은 이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버리고, 새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것이 확인되었고, 신학적으로도 바르트적이며 현대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통합의 경우에는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외관상으로 부인하지 않고 교회의 신앙고백서 안에 두었으나 (대요리문답은 제외됨), 1903년 개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채택하여 본래의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입장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변질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채택하고 있으며 또한 미합중국연합장로교회의 1967년 새 신앙고백서에 기초하여 1986년 새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고 채택함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그 새 신앙고백서의 내용에 따라 과거의 문서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표준이 되고 말았다는 점에서 바르트 신학과 성경비평학을 수용하는 교단의 정체성을 살펴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이유 때문에 장로교회 또는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교단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신학적 차이가 있음을 각 교단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인식하게 되었다. 동시에 이 땅에 전래된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인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에 대한 입장의 차이로 말미암아 장차 장로교회 안에서도 성경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에 심각한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중요한 교회의 신앙고백서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속한 교회에서 1년에 몇 번쯤 장로교회 교리와 관계된 설교를 듣게 되는가? 신학교에서 과연 장로교회 목사를 길러내고 있는가? 적어도 임직 시에 서약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읽어보았는가? 아니면 소요리문답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더라도 그래도 목회자를 위해 준비한 대요리문답은 적어도 한번은 신학생이나 목사후보생 또는 목사들이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2. 내가 장로교회 교인임을 또는 장로교회 목사임을 자랑스러워하는가?

한편, 신앙고백서는 매우 큰 가치와 필요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언제나 성경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것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유익이 되어야만 하고 또한 옳지 않은 교리와 그것에 대한 실행에 반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에 신앙 고백서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그들의 시대 속에서 매우 귀중한 역할을 해 왔으며 지금도 하고 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에 대한 것을 언급함에 있어서 지난 1967년 미합중국연합장로교회(UPCUSA, 또는 북장로교회)가 새 신앙고백서를 발표하였을 때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때에 우리는 미합중국장로교회가 발표한 신앙고백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한국 장로교회를 세웠고, 여전히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결정을 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신앙고백서의 내용이 성경의 진리와 반대되는 것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신앙고백서라고 하는 것은 많은 교단이 모여서 하나의 문서를 만들어 낸다고 하여 그것으로 이상적인 신앙고백서가 되는 것이 아니며 그 시대의 다양한 문제를 모두 다루었다고 해서 더 훌륭한 신앙고백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신앙고백서는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을 고려해야 하지만 언제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또한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성경의 내용이 더욱 건강하게 이해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가장 근본적인 전제를 상실하게 된다면 신앙고백서는 그 근본적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한국의 장로교회들은 대체로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그리고 성경 대소요리문답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고 있다. 헌법에는 목사, 강도사, 장로 집사 임직을 할 때 행하는 서약 중에서 두 번째 서약은 다음과 같이 질문하도록 정해두고 있다:

본 장로회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 문답은 신구약 성경의 교훈한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 순종하느뇨?

이 질문이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 나를 위한 질문이 되기를 바란다. 신앙고백서가 목사인 나의 삶과 나의 목회를 지배해야 강단의 설교가 바뀌고 가르치는 것이 바뀌고 성도들이 변화된다. 우리는 교회의 신앙고백서가 성경에 근거한 것이기에 그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 서있는 우리가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작성해 내는 이들의 신앙고백서 내용을 비판하는 것은 자칫 우리를 수구적인 태도로 고착화시킬 우려가 있다. 그러나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는 것과 시대적인 요구에 따라서 대사회적이고 대국민적인 신학선언서를 그때그때 발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고 생각된다.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요구에 따라서 교회의 입장을 발표하는 신학선언서의 경우는 신자들뿐만 아니라 비신자들을 위해서도 기독교회의 성경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기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를 위해 교회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의 기도와 지혜가 필요하다.

나가는 말

한국의 장로교회는 초창기부터 보수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해서 자라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한국의 장로교회가 주로 영미계통의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인데, 초창기에 와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은 일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보수주의적 신앙을 가진 분들이었다.

특히 유일한 장로교신학교였던 평양신학교의 보수주의적인 성격은 설립자인 마포삼열(Samuel Austin Maffet, 1864-1939) 박사의 희년 기념 연설 가운데 “나는 사도 바울이 결심하였던 바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이외는 다른 것은 전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는 말 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보수주의 신학의 근저에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철저하게 강조하는 성경관이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초대 평양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이눌서(Willaim David Reynolds, 1867-1951)) 박사는 “기독교가 성경을 버리거나 성경을 믿지 아니하면 그 때부터 기독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의 문자나 절구를 고친다든지 그 정신을 덮어놓는다든지 그 의미를 굽힌다든지 해서는 안 된다. 그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그 정신을 그대로 발휘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고 하면서 성경의 무오와 권위에 대하여 강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통 보수주의 신학 위에 세워진 장로교회는 점차로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주의 신학에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이것은 초기 선교사들이 전수해 온 보수적인 성경관과는 상당히 다른 서구의 현대적 성경해석이나 관점이 한국장로 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김의환 박사는 한국의 장로교회에 자유주의 신학이 침투하게 된 경위를 (1) 잠복기, (2) 발아기, (3) 성장기 등 3단계로 설명 한다: 첫째로 잠복기는 1934년에 있었던 「신학지남」 권두언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를 말하며, 둘째로 발아기는 1934년에서 1940년까지 즉 조선신학원이 설립될 때까지를 의미하고, 셋째로 성장기는 조선신학원이 생긴 뒤에 조선신학교 출신들이 한국 신학계에 진출한 이후를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나라 잃은 슬픔을 맛보았고, 다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이를 거부하여 폐교한 1938년까지 평양신학교는 칼빈주의 보수정통신학을 가르쳤고, 평양신학교가 폐교한 후 일제의 허락을 받아 설립된 조선신학교(1940년)의 신학적 노선에 반대하여 고려신학교(1946년)가 독자노선을 취하고 교단에서 분리(1952년)된 것은 역사적인 아픔으로 남게 되었으나 장로회신학교의 설립(1948년)으로 폐교 전 평양신학교의 신학전통을 이어가게 되었고, 다시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가 해체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가 정식으로 총회직영신학교로 출범하게 되었으며, 조선신학교는 끝내 자유주의 노선을 고집하여 기장을 세우기에 이르렀다(1953년).

기장과의 분열이 신학적인 문제에 기인된 것이라면 그것은 단연 자유주의신학이 문제의 핵심에 놓여 있다. 결국 선교사로부터 자립을 강조하던 기장이 1955년에 이미 장로회의 성격을 떠나버린 캐나다 선교회와 협력관계를 수립한 사실이 기장 측의 문제가 신학적인 문제였음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그 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세계 교회 협의회(W.C.C.)에 대한 범 교단적인 입장의 차이로 말미암아 W.C.C.에 찬동하는 통합측이 분열(1959년)하는 아픔을 맛보았고, 이 분열로 합동 교단은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교세도 통합에 비해 매우 열악했고, 교회도 매우 미약하게 출발했다.

이후의 분열에서는 신학적, 교리적 문제보다는 오히려 행정적, 교권적 문제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후학들에게 남겨진 커다란 짐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이런 중에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은 2005년에 그동안 26년 동안 헤어져 있었던 구 개혁 측 가족들을 다시 맞아들여 하나가 되었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지남」 1976년 가을호에 실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라는 논문에서 한국장로교회의 출발에 대하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청교도적인 영미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선교를 받아 출발하고 웨스트민스터표준문서들을 교의와 규례의 표준으로 채용하여 수행함으로 한국에서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의 교회가 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신학교와 교단 신학의 특징에 대하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신학적 전통은 청교도적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그것이다. 그것은 구주 대륙의 칼빈 개혁주의 신학에 영미의 청교도적 특징을 가미한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다.”라고 제시한다. 박형룡 박사는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 칼빈주의 신학이 교대 적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말하고, 여기에 청교도 장로교 신학을 덧붙여서 한국장로교회의 특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제 한국의 장로교회 교인들은 조국 근대화와 경제성장의 터널을 지나면서 통일된 조국을 염원하며 세계 속에 자리한 민주국가로 정착하는 대한민국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우리의 선배들이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을 따라서 오직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목회를 지향해온 그 신학과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되돌아보며, 우리가 속한 교회가 고백하고 있는 신앙고백서와 또한 우리 교회 또는 우리가 속한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과 방향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이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