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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개혁주의 율법론 1
신현우(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신학)
기사입력: 2017/07/26 [09:53]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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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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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신현우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개혁주의 율법론과 구분과 이해, 그 율법의 기능에 대해 연구하여 오늘 교회가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복음과 율법관을 제시하고 있다.


I. 시작하는 말

▲ 신현우 교수 
슈라이너(Thomas R. Schreiner)의 주장처럼 “신약 성경에서 구약 율법의 역할은 신약신학에서 가장 복잡하고 논란이 많은 주제들 중의 하나다.” 이 복잡한 주제에 관하여 신약학자들은 오늘날도 “예수와 율법,” “바울과 율법”이라는 주제로 토론하고 있으며, 이것은 현대 신약학의 논쟁의 핵심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신학의 세계에서 나오면, 율법은 폐기되었다는 단순한 생각이 매우 널리 퍼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갑자기 생겨난 최근 현상이 아니며, 청교도 신학자 핑크(A. W. Pink)가 이미 20세기 초반에 지적한 현상이다. 그에 의하면, “율법에 대한 순종은 구원에 전혀 필요 없는 것으로서 전혀 관심거리가 아닌 것으로 전락시키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 속에서 율법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가책도 받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많음을 본다. 핑크도 “실로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율법 폐기론주의의 미혹에 빠져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의 시대도 우리 시대와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과연 구약의 모든 율법이 폐지되었는가? 우리는 성경을 토대로 파악할 때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답을 얻을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논문은 개혁주의 신학 전통이 이 문제에 관하여 어떠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는지 우선 파악하고자 한다. 개혁주의 신학 전통은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여 왔으며 성경에 토대하여 해결하기 위해 애써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칼빈이 자신의 율법 연구에 관하여 스스로 평하며 다음처럼 밝힌 데서도 드러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가장 휼륭한 해석자이신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 전통이 수세기 동안에 걸쳐 발견한 값진 유산의 발굴을 배제하고 처음부터 성경본문 연구에 뛰어들면 선각자들이 쏟아 부은 노력과 시간이 남긴 유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이러한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이 논문은 이러한 개혁신학의 율법 연구 전통을 연구하여 파악고자 한다.

II. 개혁주의 율법론

개혁주의 신학은 신약 성경을 해석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율법과 유대인들의 율법 전통을 세밀하게 구분함으로써 반율법주의(율법폐기론)에 빠지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칼빈(J. Calvin), 바빙크(H. Bavinck), 리덜보스(H. Ridderbos) 뿐 아니라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핑크 등에게서도 발견되는 개혁주의 전통의 일관된 흐름이다.

1. 유대인들의 율법 전통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율법의 구분

칼빈은 지적하기를 예수께서는 “옛날 율법에 아무것도 더한 것이 없고 단지 바리새인들의 거짓말에 의해 모호해지고 그들의 누룩에 의해 더럽혀진 율법을 정화시키고 재천명했던 것뿐이었다.”고 한다. 칼빈은 마태복음 5:34(“도무지 맹세하지 말라”)을 해석하며 이러한 주장을 구체적으로 입증한다. 칼빈은 여기서 맹세 자체가 금지된 것이 아니라 하늘이나 땅 등으로 맹세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지적한다.

이상원은 “예수님이 본문을 통하여 반대하신 것은 레위기 19장12절, 민수기 30장2절, 신명기23장23절에 명시된 거짓된 서약”이라고 지적하며 칼빈의 해석을 지지한다. 이러한 해석을 따르면 예수께서는 율법을 반대하시지 않았고, 율법을 오용한 당시 유대인들을 비판하셨다.

바빙크도 예수께서 비판하신 것은 율법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율법 해석이었음을 지적한다. 그는 마태복음 5:38에서 비판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가 구약 성경에서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이것이 구약에서 인용되었으면 ‘기록되었으되’라는 문구를 통하며 인용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바빙크는 예수께서 “옛날부터 유대인들의 학교에서 가르치고 해설했던 것처럼 그것을 인용하였다.”고 지적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가 ‘너희가 읽었으나’가 아니라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문구로 인용된 것으로 보아 이러한 지적은 타당하다. 바빙크는 예수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가 개인적인 복수와 증오를 위해 오용되는 것을 반대하시고 “사랑과 인내의 원칙”을 제시하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은 이미 칼빈이 제시한 해석을 계승한 것이다. 구약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의 원리는 복수의 원리가 아니라 재판의 원리로 제시되었으며(출 21:24; 레 24:20; 신 19:21), 레위기 19:18은 복수를 금한다. 그러므로 바빙크의 지적대로 예수께서 복수를 금하시면서 반대하신 것은 구약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율법해석과 적용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핑크도 같은 입장을 취한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본래 그 율법의 순수한 목적에 맞게 회복시키셨다. 유대인들이 타락시킨 것에서부터 건지신 것이다.” 핑크는 예수께서 율법의 요구들을 약화시켜 가르친 유대인들을 비판하셨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은 살인죄는 짓지 말아야 하지만 분노나 원한은 괜찮다고 가르쳤고(마 5:21-26), 음욕을 품는 것은 괜찮다고 가르쳤으며(마 5:27-30),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괜찮다고 가르쳤다(마 5:43-47). 예수의 비판은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비판이며 구약 성경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리덜보스(H. Ridderbos)도 이러한 개혁신학 전통 위에 서서 산상설교의 반제들을 율법과 예수의 가르침의 대조로 보지 않고 유대인들의 할라카(율법 적용) 전통과 예수의 가르침이 대조된 것으로 본다.

산상설교의 여섯 반제를 통하여 예수께서 당시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율법해석을 바로잡으신 것으로 보는 정훈택의 주해도 이러한 개혁신학적 주해 전통 위에 서 있다. 정훈택은 마태복음 5:17이 말하는 율법의 완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반제 모두에서 발견되는 율법의 완성은 예수님이 율법 아래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시고 이것을 자기 백성에게 믿음의 의로 주셨다는 교훈은 산상설교 어디에도 잘 들어맞지 않는다. 예수님은 자신의 교훈을 구약의 규범적 부분 즉 율법을 완성하는 것으로 제시하신 것이라는 해석이 가장 적합하다.”

이처럼 개혁주의 전통은 일관되게 구약 율법과 유대인들의 율법 전통을 명확하게 구분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두 가지에 관한 혼동은 여전히 교회 속에 널리 퍼져 있다. 이것은 속히 극복되어야 하는 현실이다.

2. 반율법주의에 대한 개혁주의의 응전

개혁신학은 반율법주의의 도전에 응전하면서 발전해 왔다. 반율법주의는 이미 영지주의자들에 의해 선포되었던 생각이었는데, 그 후 재세례파, 하템파등에서 계속 이어져 온 생각이다. 바빙크에 의하면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가능한 한 단호하게 이러한 반율법주의를 거부했다.” 칼빈은 당시의 율법폐기론자들인 리버틴파(the Libertines)를 비판하면서 그 기원이 말시온(Marcion)과 마니교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공로주의적 해석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동시에 율법폐기론에 반대하여 율법이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효력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칼빈은 “바울은 우리가 마땅히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여전히 가르치고 있다.”고 지적하며, “바울의 편지 중에서 그가 율법에 대하여 성도들이 여전히 따라야 할 올바른 삶에 대한 기준이라고 쓰지 않았던 적이 없다.”고 강조한다. 칼빈은 반율법주의자들을 심지어 ‘개’라고 부르며, 반율법주의적 태도를 “율법이나 규율 없이 살도록 자신들에게 허락하면서 점차적으로 어떠한 멍에도 지기를 거부하는 이 개들의 뻔뻔스러움”이라고 비판한다.

반율법주의에 관하여 바빙크는 “구원의 적용을 구원의 획득으로 축소하여 거의 전적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이다.”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경향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하셨으므로 “사람이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뉘우침, 회개, 참회, 용서를 위한 기도, 선한 일들을 행함, 이 모든 것은 불필요”하다. 반율법주의에 의하면, “사람은 단지 믿기만 하면 된다.” 반율법주의는 구약의 백성들에게는 율법이 가치가 있었지만, 신약의 백성들의 삶에는 율법이 무용지물이라고 본다. 서철원이 잘 지적한 바와 같이 구약 시대에도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라 언약 백성들의 생활 법칙”이었기에, 반율법주의자들은 신약만이 아니라 구약도 오해한 것이다.

반율법주의자들은 신약시대에 율법이 더 이상 무용지물이라고 보는 점에서 율법폐기론을 취한다. 바빙크에 의하면 신자의 행함을 강조하는 새율법주의(신율법주의)자들마저도 율법이 새로운 법으로 대치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율법폐기론에 빠져 있다.

반율법주의 율법폐기론은 미국에서도 나타났다. 17세기 미국 뉴잉글랜드에서 앤 헛친슨(Anne Hutchinson)은 율법을 지키는 성화의 삶을 칭의의 증거로 삼는 것을 부정하였다. 뉴잉글랜드의 목회자들은 이러한 입장을 부정하며 성화를 칭의의 합당한 증거로 간주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고 헛친슨은 출교되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화가 없으면 칭의가 없는 것이라고 본 칼빈의 신학의 전통 위에 서서 성화를 칭의의 표지로 간주함으로써 율법폐기론을 피했다. 에드워즈는 칭의는 그 이후의 성령의 사역에 의존하는 측면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런 점에서 최종적 칭의 판결은 집행 유예된 측면이 있다고 언급한바 있다.

이처럼 개혁신학의 전통은 꾸준히 반율법주의를 비판하며 극복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율법주의는 한국 교회에서도 널리 퍼져 있는 관점이다. 김재성은 이러한 관점을 ‘값싼 복음주의 사상’이라고 명명하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율법을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상이다.”라고 정의하였다. 그에 의하면 20세기에 나온 “실존주의 윤리, 상황윤리, 도덕적 상대주의는 모두 다 반율법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것들이다.”

III. 개혁주의적 율법 구분과 이해

개혁신학은 반율법주의를 배격하며 구약 율법의 규범성을 받아들이면서도 구약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개혁신학은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율법과 그 정신을 적용할 수 있는 율법을 구분하지만, 모든 율법이 권위를 가지고 효력을 가진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관점은 율법의 정신의 영속성을 받아들이는 칼빈의 주장에서 잘 드러난다. “유대인들의 신앙이 율법의 교육 하에서 표현되었던 그 의식들과 외적 제사는 폐기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주님께서 유대인들과 우리가 공히 영원토록 가지기를 원하셨던 계명의 진리를 보유하고 있다.”

개혁신학의 전통은 율법을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으로 구분하고 시민법과 의식법의 경우에는 문자가 아니라 의도를 적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김정우는 이러한 전통적인 율법 구분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이러한 구분은 구약 자체가 명확하게 나누어 명명한 것은 아니며, 구약 본문에서 서로 섞여서 나타나므로 구분이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십계명에 들어 있는 안식일법의 경우 십계명에 들어 있으니 도덕법으로 구분해야 하는지 그 성격상 의식법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또한 시민법은 도덕법의 정신을 사회 속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으로서 도덕법적인 차원을 가지므로 도덕법과 구분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신학의 전통 속에서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의 구분은 유용하게 사용되어 왔다. 이 논문은 개혁주의 전통의 주석학적 발전은 이후 과제로 미루고 우선 이 전통을 연구하여 계승하는 것을 목표로 하므로 전통적 율법 구분에 따라 개혁주의 율법론의 특징을 다루도록 하겠다.

1. 예표(모형)로서의 기능을 하는 율법: 의식법

개혁신학 전통은 율법 중에서 제사와 관련된 법들을 의식법(lex ceremonials)이란 범주로 분류하였다. 칼빈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식법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며 안식일이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그림자라 하는 골로새서 2:16-17를 근거로 댄다. 안식일 계명의 의식법적 측면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폐지되었다는 칼빈의 입장은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부터 분명하다.

“이 계명은 그림자였으며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영적 예배를 보여주기 위해 의식기간 중에 부과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그림자의 빛이시오 형상의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그것이 모세 율법의 잔영처럼 폐기된 것은 바울이 밝히 증거하고 있는 바와 같다(갈 4:8-11; 골 2:16-17).”

칼빈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인도를 통하여 우리를 다스리심이 “진정한 안식일이며, 유대인의 안식일은 사실상 그것의 모형이요 그림자였다.”고 하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안식일의 실체이며 구약 성경이 말하는 안식일은 이것을 예표하는 모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 시대가 도래한 후에는 그 모형은 그 기능을 다하여 폐지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의식법의 사용이 폐지된 근거로 골로새서 2:13-14, 에베소서 2:14-15를 언급하면서 이 본문들이 도덕법을 다루고 있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칼빈은 의식법과는 달리 도덕법은 폐지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법에 관한 한 개혁신학의 율법 이해는 율법폐기론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개혁신학 전통은 의식법의 경우를 통해서도 율법폐기론을 반대한다. 칼빈은 의식법이 그 효과에 있어서는 폐지된 것이 아니며, 단지 사용에 있어서 폐지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의식법은 더 이상 신자들의 삶 속에 문자적으로 사용되지 않지만,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모형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므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효과가 폐지되지 않았다.

핑크도 칼빈의 경우처럼 의식법의 예표적 기능을 언급한다. “제사장직과 제사제도와 더불어” 주어진 “의식법은 다양한 형태의 예표들을 가지고 구세주를 제시하였다.” 박형룡은 의식법 속에 할례법, 제사법, 음식법, 정결법, 절기법 등을 포함시킨다.

바빙크는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율법 해석을 거부했지만, 의식법을 포함하여 “율법 전체를 견지했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의식법을 좀 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러한 가능성을 이상원은 현실화시킨다. 이상원은 의식법이 문자적으로 적용되지 않지만 신자의 삶과 관계하여 폐기된 것이 아니며 그 상징적인 의미를 개인과 교회에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실정법과 의식법도 폐기되지 않는다. 다만 해석과 적용이 달라질 뿐이다. 실정법은 오늘날 규정 그 자체가 자구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지만 실정법이 담고 있는 정신 또는 철학은 여전히 유효하며, 의식법도 자구적으로 적용되지 않지만 그 조항들이 상징하는 의미는 오늘날도 유효하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규범으로 삼는 개혁신학의 ‘성경 전체’(tota scriptura) 원리를 철저히 적용하며 기독교 윤리학을 전개하는 가운데 제시된 주장이다. 이 주장은 율법을 신자의 삶의 기준을 위한 제3의 용도로 사용함에 있어서 성경의 일부인 의식법도 예외가 아님을 지적함으로써 개혁주의 율법론을 계승 발전시킨다.

서철원도 도덕법뿐 아니라 의식법의 정신도 여전히 신자의 생활에 실천되어야 하다고 주장하며, 안식일법을 주일성수를 통해 지키고, 감사함으로 십일조를 바치는 것을 예로 든다. 그는 의식법도 신약시대에 신자의 삶을 위한 규범성을 가진다고 본다. “신약시대에도 율법의 법칙성과 규범성은 윤리법에만 해당할 뿐 아니라 일면 의식법과 시민법에도 미친다.” 그는 의식법이 폐지되었다고 보면서도, “그 의식법의 본질과 정신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와 경건 생활의 규범”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이상원의 관점과 동일하며 한국에서의 개혁주의 율법론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