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개혁신학
[논문] 통일과 구원: 한반도 통일에 대한 성경적-신학적 고찰 3
강웅산(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7/05/17 [09:47]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김순정
배너
▲     © 리폼드뉴스

이 글은 강웅산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한반도 통일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고찰을 한다. 통일과 구속사적 관점에서 역사적 고찰과 종말론적 관점의 통일론을 제시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구속사 속에서의 통일 방안에 대해 제시한다.

종말론적 구원 관점에서 통일

통일은 말 그대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구원의 핵심적인 개념이고 성경은 바로 이 하나 됨을 구속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영원히 세 분이시면서 한 분 되심을 말하고 있고,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으며, 남과 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을 하나가 되게 하셨고, 성육신을 통해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을 통해 연합되는 것을 보이셨고,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셨으며, 우리 안에 막힌 담을 허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게 하시었고, 우리를 영원한 하늘나라로 부르셔서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에 들어가게 하셨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하나로 완성되어 가고 하나가 됨으로써 축복을 누리는 역사의 현장을 통해 점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논문에서 우리가 제한된 지면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은 몇 개의 대표적 사건을 다루면서 성경은 하나 됨의 구원을 점진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우선은 우리의 논의를 하나님의 관점에서부터 시작하려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임을 성경에서 가장 잘 드러내는 본문이 요한복음 17장이다. 이 본문은 전통적으로 성부와 성자 사이에 영원한 구속언약(Covenant of Redemption)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중요하다. 구원은 영원한 성부와 성자의 연합의 교통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성부(Lover)는 영원히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Beloved)은 영원히 사랑 받는 관계이고 성부와 성자 사이의 영원한 교통이 성령(Love)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간절히 원하시는 구원은 바로 이 삼위 하나님이 나누시는 하나 됨의 교통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요 17:21).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보다 높거나 낮은 것이 아닌 완전한 연합이다. 삼위일체의 연합(union)과 교통(communion)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와 목표가 된다.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과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교통을 통한 연합을 추구하는 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이 삼위이시면서 한 분이신 사실 자체가 구원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드러났다.

인간이 최초로 이루었던 하나 됨은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다른 것들을 창조하시고는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담이 혼자인 것은 좋지 않다고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여기에서 하나의 의미는 혼자로서 하나가 아니라 둘이 하나 되는 연합이다. 하나님이 애초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그 둘이 연합하여 하나 되는 계획을 갖고 계셨다. 이 연합은 남녀의 연합이고, 부부의 연합이고, 가족적 연합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처음부터 연합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부부의 차원에서 한 몸 이루는 일은 이제 종말론적 차원에서 신랑 그리스도와 신부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을 통해 구체화된다(엡 5:22-33).

이것은 계시의 점진적 원리에 따라 창조를 통해 의도되었던 연합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에 그 궁극적 완성(consummation)을 두고 있다는 의미이다.

연합을 구현하고 구체화하는 역사가 바로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성경은 남과 북으로 갈라진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겔 37:16-17).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하게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37:22-23).

에스겔 37장은 구약의 역사 가운데 연합을 구현하는 가장 큰 차원의 사건이다. 솔로몬 시대 이후 분열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각각 멸망한 후, 다윗의 위가 영원하고(사 9:7) 한 왕이 다스리리라(사 32:1) 한 예언이 무색하게 된 시점에서 에스겔의 예언이 등장한다. 이 예언은 앞서 에스겔 37:1-14의 마른 뼈가 살아나 군대를 이루는 예언이 말하는 하나 됨의 의미를 한층 더한다. 이미 소망이 없고 멸절되었다고 생각하였던 그들에게 연합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의 주권이 부각되고 있다(13절). 연합을 통해서 완전하지 못했던 것을 완전하게 만드시는 일은 이미 아담이 혼자인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시고 남녀를 만들어 한 몸을 이루게 하신 일과 상통한다. 창세기 2장에서 가족적 차원의 연합이 에스겔 37장에서는 국가적 차원의 연합으로 승화됨으로써 계시의 역사적 점진성이 확인된다.

그리스도의 기독론적(Christological) 연합 즉 신성과 인성의 성육신적(Incarnational) 연합은 성도와 그리스도가 연합하는 구원론적(Soteriological) 연합 또는 성령이 연합을 이루신다는 의미에서 성령론적(Pneumatological) 연합을 가능케 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완성(historia salutis)에 근거를 두고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구원이 개개인에게 적용된다(ordo salutis). 개인적 차원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이루는 차원 안에 있다. 즉 기독론적 연합에 근거한 연합은 개인의 구원론적 연합을 넘어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교회론적(Ecclesiological) 연합으로 나아간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수직적 차원만이 아니라 성도와 성도의 횡적 차원에서도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 점진적 계시가 드러내고자 하는 구원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베소서 2장의 내용은 중요하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416).

이 말씀은 이제 건물 이미지(Imagery)를 통해 절정에 달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19-22절).

그리스도가 친히 머릿돌이 됨으로 각기 다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교회로 지어져 가는 것이 성경이 종말론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구원이다.

함께 교회로 지어져 가는 가능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람과 사람, 인종과 인종, 언어와 언어, 문화와 문화, 국가와 국가 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하나 되게 하는 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성취되었고 이제 성경은 우리에게 연합을 구현하라고 요구하신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롬 5:10) 화목하게 하신 그리스도 사건이 이제는 우리가 교회를 통해 화평의 한 몸을 이루는 일을 가능케 하신다. 이제 신약에서 교회는 한 몸 이루기의 모델이자 근거이다. 연합을 이루는 것이 교회가 추구할 목표이기 전에 교회는 연합을 통해 존재한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한 몸 이루기의 근거이자 목표가 된다. 한반도 통일의 근거와 동력과 목표도 마땅히 그리스도이시다. 신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한 새 사람으로 지어 지는 일이 완성되었음을 계시하였다. 가족적 차원의 연합에서 민족적국가적차원의 연합으로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적 연합이 제시되었다. 이제 연합(통일)을 구원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 원리가 완성되었다.

간략하나마 이제까지 구속계시를 통해 어떻게 연합이 점진적으로 구원의 중심을 형성하는지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필자의 해석과 주장이 역사적 개혁주의에 부합하는지 판단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개혁주의 구원론 전체에 대한 평가는 본 논문의 논지를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연합 개념이 역사적 개혁주의 구원론의 중심 개념임을 드러냄으로써 앞서 보았던 해석이 설득력이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의 특징은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이다. 이것은 칼빈의 구원론에서부터 비롯되는 중요한 특징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칭의와 성화를 설명하였다.

이 사상은 바로 청교도 신학의 특징으로 이어진다. 연합을 통한 교통(communion in union)이 청교도 구원론의 핵심 사상이다. 그리스도와 연합(union)될 때 그 안에서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구원의 모든 은총이 나에게 교통(communion) 된다는 의미이다. 칼빈을 비롯한 청교도 전통이 구원을 연합의 관점에서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언약 개념이 그들의 신학의 근간이었기 때문이다. 칼빈이 언약신학자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그의 신학을 움직이는 틀은 분명히 언약 신학이었다. 언약의 핵심 개념은 연합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레 26:12). 언약신학의 체계화는 17세기 개혁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가 물려준 귀한 업적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는 언약신학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고 그것이 연합 개념을 잘 드러난다. 영미 청교도와 장로교 전통에서 언약신학은 성경해석학적 원리를 지배하는 특징으로 자리매김 하였으며 그 특징은 구원론적 관점에서 연합 개념으로 집약되었다. 즉 구원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 있음이 역사적 개혁주의를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구원역사 속에서의 통일 방안

구속계시가 점진적으로 보여준 하나 됨(통일)을 어떻게 종말론적 삶을 통해 실천하고 구현하느냐의 문제가 이제 우리가 고민해야 할 주제이다. 하나됨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실천의 동력이 필요하고 다음에야 실천의 방안을 논하는 것이 가능하겠다.

하나 됨의 종말론적 실천은 한 마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마 22:37-40)으로 규명할 수 있다. 우리가 통일을 실천할 수 있는 동력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이 삼위 안에서 서로를 사랑한데서부터 그 동력을 찾는다(요 17장). 요한은 삼위하나님의 하나 되심 가운데 나누시는 교통을 단적으로 사랑이라고 하였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을 종말론적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실천 강령으로 주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성경은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사랑을 수반하는 것으로 말씀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됨을 확인하는 길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다(요 17:23, 요일 4:7). 통일을 실천할 수 있는 동력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랑에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가 되고, 하나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 동력(사랑)은 사실상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가능하다. 로마서 5:5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시는 분은 성령이라고 조직신학적인 답을 준다. 요한은 실천적 차원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써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심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한다(요일 3:23-24).

성령을 통해 분리, 갈등, 미움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랑이 통일을 실천할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정리하면 통일의 가능성은 삼위하나님의 사랑의 교통이 구원역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계시되었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하며, 통일의 동력은 사랑이고, 사랑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이제 어떻게 구원의 연장선상에서 통일을 실천해 나갈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안을 논해보자.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신약적 모델이 교회이다. 구원의 맥락에서 통일을 실천하는 첫 번째 과제가 그리스도의 몸을 구현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통일 자체에 통일의 명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통일은 구원을 실천하는 하나의 장이 되어야 한다. 한 몸 이루기를 구현하도록 그리스도가 세워주신 것이 교회이다. 통일이 구원을 위해 존재 한다면 통일은 교회가 하나 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다시 말해 일차적 통일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기독교의 문제 중에 하나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일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스도의 몸이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상징적인 수사(rhetoric)에 지나지 않는 말이 되어버렸다. 과연 우리는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얼마나 노력했는가?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라고 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를 이룬 교회는 있는가? 교회론적으로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다고 하는 말이 혹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야 할 지상과제를 합리화하고 타협하는 구실이 되는 것은 아닌가? 여전히 우리 교회는 경제적 형편에 의해, 사회적 지위에 의해, 학력의 차이에 의해, 지방색 때문에, 그리고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이유로 인해 갈라져 있지 않은가? 갈라져 있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우리는 그 나뉨의 상처를 싸매고 치유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통일을 원한다면, 통일을 실천해야 할 첫 번째 장소가 교회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막힌 담을 헐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지어져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엡2:16-22).

구원의 종말론적 성취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실천으로 집중되고 있으며 그 곳이 교회이다. 교회 안에서 통일에 실패한 한국교회가 교회 밖에서의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자격과 정당성은 상실된다. 현재까지 제시된 다양한 통일신학은 나름 하나 됨의 정당성을 제시하지만, 교회의 내적 문제에 대한 지적과 실천 강조에 대하여는 아쉽게도 한계를 드러낸다. 교회에서 먼저 통일을 구현하는 것은 이 땅에서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통일을 구원의 관점에서 이해 할 때, 통일은 교회에서부터 시작된다.

구원의 종말론적 구현으로서 두 번째로 제시하는 것이 탈북민 품기이다. 대한민국은 분단된 채로 70년을 살아왔다. 남과 북이 어느 날 만났을 때, 서로와의 차이로 인한 충격과 갈등은 생각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일 것이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 주변에 이미 그들이 와 있다는 점이다. 혹자는 탈북민들이 “먼저 온 미래”라고도 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구원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한국교회가 통일을 위해 쓰임을 받게 된다면 그 일은 이미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탈북민들을 우리 곁으로 보내셨다. 통일이 구원의 연장선상에서 구현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는 탈북민들을 더 이상 외인이나 나그네가 아니라 우리와 동일한 국민이요 한 교인이요 가족으로 품어야 한다. 탈북민이 남한의 성도들과 한 몸으로 세워져 가는 일에서부터 통일은 시작된다. 통일을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탈북민을 품는 일을 “통일 연습”이라고 부른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은 연습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구원이 연습하고 나서 실제 상황이 되면 연습한대로 다시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통일을 구원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통일 연습”이 아니라 “통일 실천”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그저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설 수 있도록 그들을 세워야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회는 이들을 너무 소홀히 여기고 있다. 탈북민들의 소리를 우리는 외면하고 있다. 통일이 오면 그들을 품으리라는 생각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관점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통일이 올 것을 믿는다면, 지금 탈북민을 남한에 보내주신 섭리도 믿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한국교회가 통일을 이루도록 이미 일을 시작하셨다고 믿어야 하지 않을까? 통일의 일은 이미 시작되었다. “통일준비”라는 말은 한없이 길어질 수 있고 막연해질 수 있다.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일을 “시작”하고 한 몸 이루기를 “실천”해야 한다. 탈북민은 지금 우리 곁에 와 있기 때문이다. 일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나가는 말

우리는 이제까지 통일을 구원의 관점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통일신학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은 통일을 궁극적 목적으로 여긴다든지 통일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할 것이고(롬 8:28) 결국 당신 스스로 영광을 거두실 것이다(사 26:15). “하나님! 당신의 뜻이 이 땅위에 펼쳐지게 하옵시고, 불쌍한 북한 동포들에게도 당신의 선하심이 임하게 하옵소서!”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위해 존재한다. 통일은 온다면 구원의 진작을 위한 한 방편이 될 것이다. 북녘 땅에도 비범한 규모의 구원의 일이 있을 것이다. 북한은 거룩한 역사와 무관하다거나 반드시 멸망 받아야 대상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통일이 오던 오지 않던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진행될 것이고 하나님은 영광 받으실 것이다. “하나님! 당신의 뜻이 이 땅위에 펼쳐지게 하옵시고, 불쌍한 북한 동포들에게도 당신의 선하심이 임하게 하옵소서!”

구원은 연합에 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삼위일체시며,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어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하셨고, 분단으로 소망이 없던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시 한 나라가 되게 하셨고,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인성과 신성의 연합을 이루셨고,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셨고, 막힌 담을 허시고 외인도 없고 나그네도 없는 “한 새 사람”으로 지어지도록 하셨고,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의 교통으로 연합 되게 하신다. “하나님! 당신의 뜻이 이 땅위에 펼쳐지게 하옵시고, 불쌍한 북한 동포들에게도 당신의 선하심이 임하게 하옵소서!”

통일신학은 통일이 꼭 명분이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구원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통일(연합)을 사는 삶이기에 통일을 신학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가능하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상과제를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통일이다. 우리 곁에 와 있는 탈북민들과 한 몸을 이루는 것이 통일이다. 한 몸 이루기는 한 몸을 이룰 때까지 이룬 것이 아니다. 통일은 통일을 이루기 전까지 통일이 아니다. 구원은 연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고 사는 것이다. 통일은 연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해야 한다. 교회를 통해 한 몸을 이루고, 탈북민들과 한 몸을 이루는 순종으로 통일은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 당신의 뜻이 이 땅위에 펼쳐지게 하옵시고, 불쌍한 북한 동포들에게도 당신의 선하심이 임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