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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환 박사의 목회와 선교이야기
[김의환 박사 연제1] 한국장로회 신학과 역사 '평양(장로회)신학교'
한국장로교 역사적 신학의 흐름
기사입력: 2017/05/14 [22:47]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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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의환 박사     © 리폼드뉴스
한국교회는 주로 외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처음 선교되었기 때문에 한국 신학을 논할 때 처음부터 미국 신학의 이식성
(移植性)을 벗어날 수 없다. 미국 신학의 영향이 초창기부터 오늘날까지 크게 한국교회 신학에 작용하여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교회 신학의 성격과 발전을 이해하려면 처음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과 역사적 배경을 먼저 살펴야 한다. 다음에 선교사들에 이어서 신학을 가르친 한국 교수들의 신학을 검토하고 장로교회 신학의 흐름을 역사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1. 평양(장로교)신학교

 

1901515일 개신교로서는 처음으로 평양에 장로교신학교가 설립됨으로 복음이 이 땅에 전파 된지 17년 만에 공식적으로 교역자 양성이 시작된 셈이다. 당시 평양신학교의 시작과 더불어 전임 및 시간강사로 참여한 교수들은 약 10여명 정도였다. 이들 선교사들은 신학적으로 보수적이었으며 청교도적 신앙을 견지하였다.

 

1920년대 미국 북장로교회의 해외 선교부 총무였던 A. J. Brown의 평가에 의하면 당시의 한국 선교사들은 신학과 성경비평학에 있어서 강한 보수주의자들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종말론에 있어서는 전천년설의 견해를 따랐다. 또한 고등비평학과 자유주의 신학을 아주 위험한 이단으로 생각한 이들이었다.

 

평양신학교는 4개의 선교부의 대표로 구성된 장로교위원회에 의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1907년에 마포삼열(Samuel A. Moffet)이 초대 교장으로 선출되어 1924년까지 봉직하면서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기초를 닦아 놓았다. 그러나 그는 신학자로서 무게 있는 저술을 남기지 못했다. 마포삼열 교장 이외에도 장로교 신학에 많은 영향을 미친 선교사들은 곽안련(C.A. Clark), 이눌서 (W.D. Reynolds), 어드만 (W.C. Eerdmans), 라부열 (S.L. Robert), 구레인(J.C. Crane), 소안론(W.L. Swallen), 함일돈(F.E. Hamilton) 선교사들이었다.

 

당시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성격을 블레어(H. E. Blair)역사적 칼빈주의의 배경을 지니고 웨스트민스터 표준을 수용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심치 않고 받아들이는지극히 보수적인 신학을 논평하였다. 이러한 논평의 정당성은 1920년에 채택된 평양신학교의 교리적 기초에서 잘 입증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며 따라서 모든 행위의 기본이 됨을 신실하게 받아들인다. 또한 성경을 진실로 신뢰하고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며, 성경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이 안에 있는 복음 구속을 완전하고 단순히 전파하려고 열정적으로 노력할 복음 사역자들을 훈련시키는 것이 이 신학교의 목적이다.”

 

이러한 신학적 입장을 따라 평양신학교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크게 공헌을 한 선교사는 이눌서(W.D. Raynolds)였다. 그는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양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서 직접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4년간 보수적 신학 교육에 헌신하였다. 그는 평양신학교가 설립되기 5년 전에 한국 목사 양성 지침서를 작성하여 목회자 교육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 원칙의 내용은 목회자의 영적 훈련의 중요성과 철저한 성경 교육과 목사의 교육 수준이 평신도들의 교육 수준에 맞게 가르칠 것 등이었다. 이렇게 하여 신학교육은 목회자 양성 위주로 하되 영성과 지성을 겸한 겸손한 신령한 목사를 배출시키는데 목적을 두었다. 조직신학 교재로 그는 구() 프린스턴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핫지(A.A. Hodge)가 쓴 신학개요(An Outline of Theology)와 중국인 교수 치아 유밍(Chia Yu Ming)이 쓴 기독교의 증거(Evidence of Christianity)를 번역하여 사용하였다.

 

그는 성경의 완전 영감과 권위를 강조하면서 자유주의적 현대주의 신학사상을 배격하였다.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현대주의 신학을 반 기독교적이며 배도적이라고 공격하였다. 고등비평과 진화론을 비판하며 정통기독교 신앙을 위협하는 위험한 반 기독교적 이단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는 종교와 성경이라는 논문에서 자신의 성경관을 이렇게 피력하였다. “나는 종교와 경전의 관계를 절대적이라고 본다. 이런 생각은 심히 보수적이요, 고집한 의견이라고 할 이가 많은 줄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모든 종교가 경전과 절대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내버릴 수가 없다. 기독교가 성경을 버리거나 성경을 믿지 아니하면 그때부터 기독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경전이 변한다면 종교가 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성경의 문자나 절구를 고친다든지 그 정신을 덮어놓든지 그 의미를 굽힌다든지 해서는 안 된다. 그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그 정신을 그대로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철저한 보수적인 성경관 위에서 그는 평양신학의 신학적 토대를 구축하는데 힘썼다. 이러한 보수신학 일변도(一邊倒)의 신학적 경향에 대하여 당시 선교사들의 신학훈련의 배경 때문이라고 보는 일반적 해석에 의견을 달리하는 소수의 학자들이 있기는 하나 당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신학은 보스턴 지역에서 온 소수의 감리교 선교사와 뉴욕 유니온 신학교 출신 소수의 장로교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극히 보수적 신학의 소유자였음은 놀라울 것이 없다. 선교사들의 신학 훈련의 배경을 살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미국에서 신학 수학을 할 때에 보수적 신학자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이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하였다.

 

1893년에서 1901년까지 내한한 40명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 중에 16명이 프린스턴(Princeton)신학교 출신이고, 11명이 시카고의 맥코믹(McCormick)신학교 출신이었다. 프린스턴 출신들은 찰스 핫지(C. Hodge) 부자(父子) 교수들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18511921) 등의 보수적인 신학자들에게서 신학 훈련을 받은바 그들의 신학이 평양신학의 신학이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위필드의 성경관은 철저한 성경무오설, 바로 그것이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예외 없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동시에 그 말씀이 사람의 말이기도 하다 성경 기자들은 성경을 기록할 때 특별하며 초자연적이며 비상한 성령의 감화를 통하여 기록하되 그들의 인간적인 요소가 제한받는 일이 없이 하나님의 전적인 주관(감동) 아래 기록하였으므로 기자들의 기록한 말은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오류가 있을 수 없다.”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은 1907년에 한국장로교회가 채택한 12신조에도 잘 나타난다. 1907917일에 장로교 독노회(獨老會)가 선교사들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그 독노회에서 신경 채택의 필요성을 느끼고 1905년 인도 자유장로교회가 채택한 신경을 채택하였다.

 

이 신경의 신학적 성격에 대하여 강한 칼빈주의적인 특색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종성은 해석하나 김영재는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주의적 영향 때문에 개혁주의적 내용이 다분히 희석화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그 이유로 12신조는 예정론은 말하나 이중예정(二重豫定)을 강조하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달리 신자의 선택에 관해서만 언급하고 유기 교리에 대하여는 침묵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영국의 영향권 아래 있는 인도 자유장로교회의 신조를 채택함에 있어 19세기말에 영국과 미국의 장로교회가 복음주의와 부흥운동의 영향을 입어 수정 칼빈주의적 경향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본다.

 

12신조만이 수정 칼빈주의적인 것으로 보여진 것은 아니다. 평양신학교도 철저한 칼빈주의적이기보다 복음주의적인 기독교를 가르친 보수주의 학교로 보는 견해도 있다.

 

평양신학교는 선명한 칼빈주의를 전하지 못했다. 이것은 주로 다음 두 가지의 원인 때문이었을 것이다. (1) 신학생들이 선명한 칼빈주의를 배울 만한 학문적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2) 교수진도 칼빈주의를 충실히 전할 수 있는 선명한 칼빈주의자들 만은 아니었다. 교수진 가운데 칼빈주의적인 학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지만 그 가르침이 선명한 칼빈주의였느냐에 대해선 의심이 간다.”

 

간하배는 이러한 의심을 더욱 강하게 다음 같이 피력한다. “전임 교수들이 개혁신앙에 투철했던가에 대한 회의에는 어느 정도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로서 간하배는 두 가지를 열거한다. 첫째는 1906년에 장로교 선교사들과 감리교 선교사들이 한국기독교회라는 이름으로 한국 민족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하고 이어서 준비단계로 재한 복음주의 선교 공의회를 결성하였다. 결국 하나의 교회는 성립되지 못했으나 장로교가 감리교와 합치려는 데서 순수한 칼빈주의는 퇴색되어 버렸다는 주장이다. 둘째로는 장로교 선교사들 가운데 세대주의(世代主義)를 수용한 선교사들이 적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세대주의가 한국교회에 잘 접목이 되는 이유는 세대주의적 해석 방법이 미래적 강조가 강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에 대한 철저한 칼빈주의적 순수성 여부에 대하여 회의적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평가가 평양신학교의 교수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 그 중에도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18781961)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는 마포삼열, 이눌서 목사와 더불어 한국장로교 신학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이룩한 신학자였다.

 

그는 맥코믹신학교를 1902년에 졸업하고 곧바로 선교지 한국으로 파송되었다. 그 후 다시 명문 시카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학구파 선교사였으며 평생에 많은 저술을 남겼다. 한국어로 50, 영어로 6권을 저술한 다작가(多作家)로 저술 범위는 한국교회의 필요에 따라 다방면으로 펼쳐졌다. 그가 쓴 說敎學’, ‘牧會學은 한국 신학교의 교재로서 고전적(古典的)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밖에 레위기, 민수기, 사무엘상, 에스라, 느헤미야, 욥기, 시편, 소선지서(6), 공관복음 등 주석들을 썼다.

 

당시 神學指南에 나오는 글 중에 그의 글은 거의 전체의 삼분의 일 수준이었다. 평양신학교는 이처럼 초창기부터 우수한 교수들의 참여로 알찬 신학 교육에 주력하였으나 좀더 수준 높은 신학 교육은 1927년 한국인으로서 처음 교수직을 맡게 된 남궁혁(南宮赫) 박사를 위시하여 1930년대에 교수가 된 박형룡(朴亨龍) 박사와 이성휘(李聖徽) 등의 교수 보강으로 더욱 촉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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